우리나라 근·현대사 - 대한 제국의 성립과 광무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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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1.09. 05:17조회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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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현대사 - 대한 제국의 성립과 광무 개혁
1. 교과서 속 주개념
1) 대한 제국의 성립
아관 파천으로 국가의 위신이 추락하였고 독립 협회를 중심으로 한 환궁 운동이 전개되면서 결국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게 되었다. 그 후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통해 국가의 자주 독립을 확고히 하려 하였다. 이 때 러시아의 세력 독점을 견제하려는 국제적인 여론이 일어나고 러·일간의 세력 균형이 유지되면서 조선은 자주 국가의 면모를 보이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이후 고종은 원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국호를 대한 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라 부르며 왕의 명칭을 황제로 바꾸면서 대한제국의 성립을 선포하게 되었다.
2) 개혁의 추진(광무개혁)
개혁의 성격은 구본신참(舊本新參)1)의 원칙에 바탕을 둔 복고적, 점진적 개혁이었다. 개혁의 내용은 정치면에서 대한국 국제를 반포(1899, 최초 헌법)하고 자주 독립과 황제의 전제권 강화를 표방하였다. 경제면에서는 양전사업을 실시하여 지계를 발급하여 근대적 토지소유 관계를 확립하고자 하였으며, 황실을 중심으로 상공업 진흥책을 추진하며 근대적 공장과 회사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사회·문화 분야에서는 각종 학교를 설립하여 유학생을 파견하고 근대 시설을 확충하였다.
군사 부분은 원수부를 설치하여 황제가 군권을 장악하였고 무관 학교를 설립하여 장교를 양성하였다. 외교분야에서는 간도와 연해주에 있는 교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으로 간도 관리사를 파견하였다. 하지만 광무개혁은 전제 군주권의 확립을 통하여 근대 주권 국가를 지향하였으며 독립 협회의 민권 운동을 탄압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또한 집권층의 보수적인 성향과 일본 등 열강의 간섭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3) 간도와 독도
19C 후반 이후, 우리 민족의 본격적인 간도 개척으로 두 민족 간의 충돌이 발생하게 되면서 청이 간도 귀속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 후 백두산 정계비의 해석을 둘러싼 조·청 사이의 영토 분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대한제국에서는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로 파견(1902)하여 간도를 함경도 행정 구역에 편입하였다. 간도 협약으로 일본이 만주에서 안봉선 철도 부설권과 광산 채굴권 등을 얻는 조건으로 청의 간도 영유를 인정하였다. 백두산 정계비에는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삼는다."고 하였다. 우리 측은 토문강을 송화강의 지류라 하였으나, 청은 토문강을 두만강이라 주장하여 간도 귀속 문제가 발생하였다.
독도는 대한 제국 때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시켜 독도를 관할하였다. 하지만 러·일 전쟁 중 일본이 자국 영토로 강제 편입하였다.
2. 확장 개념
간도
간도는 원래 초기 국가였던 읍루와 옥저의 땅이었다가 후에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가 되었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초기에는 수렵과 유목에 종사하였던 여진족이 번호(藩胡)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조공을 바치며 거주하였다. 1677년 청나라는 압록강·두만강 이북의 창바이 산 지구를 포함한 500㎞까지를 청의 발상지로 삼고 봉금구로 정하여 기타 민족의 거주를 엄금한 봉금령(封禁令)을 200여 년간 지속하였다.
그러나 1864년을 전후한 철종 말에서 고종 초와 1869년 대흉년 때 세도 정치의 수탈과 학정에 견디지 못한 농민과 기민(飢民)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간도에 잠입하였다. 이때의 조선인은 평안도 북부와 함경도 북부의 농민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들은 주로 깊숙한 산간 마을에서 밭농사를 했다. 1883년 조선 서북 경략사 어윤준이 북선 6진을 시찰할 때 월강 봉금령이 폐지되어 조선인들은 압록강 중상류와 두만강 중하류에 합법적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논농사는 비로소 이 시기에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거주지는 점차 평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간도의 농경지는 대부분 조선인에 의해 개척되었으며, 당시의 농작물은 조, 보리, 밀, 콩, 수수, 옥수수, 감자 등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토지를 탈취당한 농민과 항일운동가 및 일제의 대륙침략과 만주건설을 위한 강제 이주자 등으로 간도 이주민들이 대폭 증가하였다.
1926년에는 간도 농토 약 52%를 한인이 차지하였고 가구수도 중국인 가구 수의 5배가 넘는 5만 2,881가구에 이르게 되어 1944년에는 이주민 수가 63만 1,000명이 되었다.
1945년에 간도는 중국군에 점령되었고 1952년 연변 조선 민족 자치구 임시정부가 성립되었다. 1955년에 연변 조선족 자치주, 1956년에 중공 연변 조선족 자치주 위원회, 1968년 연변 조선족 자치주 혁명 위원회, 1980년 연변 조선족 자치주 인민 정부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0년 현재 지린 성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옌지[延吉], 투먼[圖們]의 2개 시와 왕칭[汪淸], 훈춘[琿春], 룽징[龍井], 허룽[和龍], 안투[安圖], 둔화[敦化] 등의 6개 현(縣)을 관할하고 있으며, 이곳에 중국 거주 한인의 약 42%인 82만 1,459명이 살고 있다.
간도의 주요 공업은 제지·방직·기계·전기·화학 공업 등이며, 1988년 조사에 의한 공업 기업소는 1390개소에 종업원이 31만 9,000명, 공업 총 생산액이 30억 6,000만 원으로 생산된 제품 중 70여 종이 미국·캐나다·일본 등의 20여 개국에 수출되었다. 또한 자치주 내에는 창춘[長春] - 투먼, 무단장[牡丹江] - 투먼, 차오양촨[朝陽川] - 카이산툰[開山屯], 차오양촨 - 허룽, 투먼 - 훈춘 노선의 철도가 있다. 이밖에 삼림 철도가 있으며, 개혁과 개방 이후 관광업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옌지민 항이 개통되었다.
간도 거주 한인들은 2, 3세에 대한 교육열이 매우 높아 교육 사업의 급속한 발전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는 한인의 민족적 색채를 보존하고 문예활동을 활발히 전개해 나가고 있다. 1988년 조사에 의하면 유치원 1,445개소, 소학교 1,122개교, 중학교 215개교, 중등 전문 학교로 연변사범대학, 연변위생학교, 재정무역학교, 인민경찰학교, 임업학교, 체육운동학교 등이 설립되었고, 정규대학으로 연변대학교, 연변농학원, 연변의학원, 연변사범전과학교, 지린 예술학원 연변분원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 제국의 성립과 광무 개혁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2007. 12. 15., 한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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