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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서부지역 전투 (연천-동두천-의정부 전투)관련 내용 계속
9. 전곡으로 달려 동두천, 백의리, 창수면 일대 제1연대의 초전모습을 되돌아 보려한다.
당일 15:00시경 제107전차 연대를 앞세운 적 제4사단의 공세에 밀려 마차산-소요산을 연하는 주저항선이 무너지면서 해질무렵에 동두천 시내로 적이 돌입하게 된다.
결국 제1연대는 다음 방어를 위해 덕정으로 철수하게 되고 마차산에 고립된 제1대대는 유무선 통신의 두절로 명령이 전달 되지 못했다.
결국 제7사단은 동두천-포천 및 송우리까지 피탈되어 의정부방어가 위태롭게 된다.
여기서 주요 고지군인 서쪽의 감악산(675m)능선과 마차산(565m)능선 그리고 소요산(586m) 및 종현산(588m)능선을 우리는최소 4회이상 탐사하였다.
특히 고릉리와 양원리의 38도선 접경지역은 고지가 높지도 않으면서 산악도로가 발달하여 쉽게 접근이 가능했다.
이곳은 간파천과 임진강 그리고 한탄강과 신천이 발달하고 도로는 3번국도와 경원선이 다리고 있고 364번, 56번, 371번도로등 기동로도 양호하게 발달 되어 잇었다.
하지만 이렇게 양호한 지리적 조건의 제1연대 지역에서의 유해발굴 실적은 전무다.
열심히 전투를 했으면 피해가 당연히 발생하기 마련이다.
물론 완벽한 승리를 하였다면 피해는 없겠지만 일사천리로 밀려내려가 동두천 덕정이 피탈되고 의정부로 치닫는 마당에 왜 이런 비극의 현장이 없을까하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마차산 일대의 15km구간의 산악능선은 호는 있으나 그렇게 많은 호는 아니였고 특히 고립되었다는 마차산 정상부근은 호가 그리 많지도 않았다.
감악산 구간은 사실 경사가 심하고 돌바위가 많아 제대로 전투를 할 만한 곳이 없다.
감악산 정상에서 북쪽 방향에 일부 호가 있을 뿐이다.
소요산과 종현산은 많은 개인호가 굴토되어 있었다.
종현산은 횡격실 능선으로 전 구간에 호가 있고 특히 꼭대기에 많이 있는데 이곳 사람들 이야기가 1.4후퇴 이후에 굴토된 호가 대부분이라 한다.
소요산은 공주봉에서 의상봉구간이 가장 많고 산정상에서 국사봉과 왕방산 구간에 많은 호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중공군이 미군과의 전재을 위해 대부분 굴토했지 아군이 점령하여 굴토한 것은 아니다.
동두천 시내를 중심으로 과거 미 제2사단이 점령하고 있었던 지역을 우리는 샅샅이 탐사를 하였다.
이유는 최초전투는 아니더라도 1.4후퇴시 국군 제6사단이 이곳으로 철수하며 많은 피해를 보았기 대문이다. 그러나 동두천 동남방 칠봉산과 해룡산, 의정부 바로 뒷산인 천보산을 제외하면 호는 그리많이 있지 않앗다.
소래산(228m)도 전사에는 미군과 중공군이 전투를 하고 지역주민들이 중공군 임시 지휘소와 포로 수용소가 산속에 굴을 파고 있었다고 하여 집중 조사했으나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칠봉산 밑의 봉양동에서도 식당 바로 옆에 조그만 저수지가 있고 칠봉산에서 많은 유해를 끌어내려 수장시켰다는 장본인을 만나 직접 확인하고 나중에 굴토까지 했으나 찾지 못했다.은현의 남쪽 도락산, 불곡산 그리고 백석읍의 한강봉, 칠봉, 꾀꼬리봉 등 주변 산은 다 올라보았으나 일단 개인호가 미미하고 전투흔적이 별로 탐지되지 않았다.
해룡산, 칠봉,산 천보산은 개인호가 무수히 산재해 있고 탄피, 실탄, 파편, 탄창등 수없이 전투 유품이 많아 소요산-국사봉-왕방산에 이어 모두 발굴을 해 보았다.
수도서울의 관문으로 적의 주공이 밀어 닥치는 곳인데 전투 피해가 별로 없이 바로 의정부 방어작전에 돌입하게 되는게 나로서는 정말 이상한 징후였다.
가. 제보내용이다.
그럼 이 제1연대의 동두천 전투와 의정부 전투에 대한 증언 및 제보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관련 제보 내용이다.
제9연대소속 이종록 중위(예,중령. 고인이 됨)는 포천축선에서 전투를 하다 밀리면서 천보산에 올랐다. 지금 넓적 바위가 있는 그 밑에 중대장하고 은거하다 탈출하게 되는데 그 바위 밑에 동료 3명을 매장하였다고 한다.
이미 건재가 무너져 인원을 조합하여 몇 명 단위로 이동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천보산에 오르니 적이 탱크를 앞장세우고 양주에서 의정부로 들어오는 모습이 훤하게 다 보였다고 한다.
의정부 축석령부근에서 방어를 한다고 하였으나 이미 후방으로 적이 내려가 있어 모두 공포심에 떨고 있는데 채총장이 와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진격하라고 윽박지르는데 그래서 덕정방향으로 간 부대가 있는데 바로 무너져서 흩어지고 말았다 한다.
양주역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마전동에 목골이란 동네가 있다.
이곳에서 지금가지 한자루 밖에 발견이 않된 45구경 권총을 내가 직접 탐문하여 찾아내고 유해도 1구발굴한 곳이 있다.
이종록 어른과 동행탐사를 하는가운데 2000년에 바로 마을 입구에서 한 어른을 만났는데 본인이 직접 아버지와 국군 제7사단 장교를 묻었다고 한다.
이야기인즉슨 전쟁이 났는데 일어나 보니 벌써 적은 의정부로 내려가고 있었단다.
본인은 전쟁이 뭔지 국군이 어떻게 생겼는지 11살이라 잘 알지도 못했는데 아니 집에는 북한군 들어와 안방을 차지하고 있었단다.
할아버지도 살아계시고 피난도 못갔으니 대 식구가 한방에 자야해서 멋모르고 짜증도 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북한군이 씨익 웃으면서 먹을 것을 주어서 한편으로는 잘 먹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는 비가 게속 내리는데 갑짝스레 북한군이 서울로 간다고 떠나버려 동네는 이제 완장을 차고 다니는 사람이 총 한자루를 질질 끌면서 큰소리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아버지가 논에 갔다오더니 밤이되었는데 따라오라해서 할아버지랑 같이 가보니 논에 벼가 자라고 있는데 군인이 한명 죽어 있었다.
이걸 끌어내서 질질 나오는데 비린내가 엄청났다고 한다.
밤이고 비는 내리는데 논 위에 산으로 바로 끌고 들어가 일단 가매장을 하고선 집으로 내려왔는데 그 다음날 부터 동네 개들이 난리가 났다.
"허벅지를 물고 나타난 우리집 개를 아버지가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그 당시 사회상이 아차하면 반동분자로 몰리어 하순간에 저승가는 시절인데 제대로 묻을리도 없었을 것이고 그러니 그 더운 여름에 비는 내리는데 얼마나 냄새가 심했겠는가.
사람몸이 부패하는 냄새는 10리를 간다고 한다. 그럼 개들은 사람보다 후각이 거의 50배나 된다고 하니 참을 수 없는 상태로 달려들게 되어 있다.
온갖 동네 개들이 다 야산에 달려들어 물어 뜯고 힘센 녀석이 일정부분을 독차지하여 욕심을 채우게 되는 모습에 질색하게 된다.
입이 벌겋게 되어 완전 소문에 들었던 미친개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그 원인을 제공하는 아버지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서지는 심정일 것이다. 허니 가장 사랑하는 집을 지키는 쫑쫑이를 몽둥이로 때려 죽여야 하고 우시면서 산에 묻었다 한다.
그 해에 그 논은 벼가 자라다 죽어 그 용사님이 쓰러진 곳은 밖에서 보더라도 표시가 들어나 보였다.그 한이 남아서 모두에게 기억하라는 울분이 서려 있었다.
나는 용사님을 찾아야 했다.
이종록 용사님이 하는 이야기가 그 당시에 인접 중대장이 전사했다며 이름이 김광수인지 하는데 권총을 차고 있었다는 것은 소대장은 말이 안되고 중대장일거라 한다.
나는 본부에 연락하여 신원을 확인하려 했으나 직책으로는 식별이 곤란했다.
참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현재 우리의 시스템은 군번이나 이름이 있어야 전사자 명부에서 신원조회가 가능하다.
제7사단 참전전우회에도 나가서 사실관계를 이야기하고 알아보아도 알 수 없었다.
물론 가정상황으로 찾지 못한 유해를 찾았다고 화장한 재를 유골함에 봉안하여 유가족에게 보내지고 그것이 현충원에 안장되었을 경우에는 찾을 길이 없다.
유가족이 나서서 진실을 규명해 달라고 소리치기 전에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분명 개연성은 있다.
정말 역사앞에 죄송스럽고 개탄스런 이야기지만 그때는 그렇게 밖에 못했던, 유해가 아님에도 몇명의 유해를 화장하여 숫자로 분활하여 보내진 사실이 많은 증언을 통해서 알려지고 있다.
또한 내가 발굴한 경기도 여주 처리의 자가봉송된 유해(화장처리됨) 5구도 결국 화순 이십곡리에 매장되어 완벽한 유해로 발굴되었다.
매화장 보고서에도 나와 있는데 유해는 어떻게 화장되어 집으로 봉송되었는지......
이것이 전시에 있는 불가항력적인 업무처리, 왜냐하면 유가족들의 원성이 너무 크고 사회적 문제가 되니 일시적으로 완화하려는 노력이라 생각된다.
이문제는 '전라남도 지역' 기술시 상세히 밝혀드리겠다.
이 지역부대와 협조하여 병력과 장비를 지원받아 야산을 샅샅이 탐색하였으나 1주일이 걸려도 찾지를 못했다. 그 어른집이 산 밑에 바로 있고 밤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는데 누구도 발굴해간 적이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이런 유해를 찾아서 돈을 주고 사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어르신을 대동하고 나섰다.
산은 지금 마을 사람들의 등산로가 개설되어 사용중인데 번질번질하게 길이 나 있었다.
분명 묻었다고 한다면 깊게도 묻지 못했다는 제보에 따라 땅이 약간 꺼져 있는 곳은 다 탐지를 해야했다. 그런데 불현듯 떠 오르는 것이 우리가 안양 수리산 자락에서 발굴 작전시 바람고개 정상 등산로 정 중앙에서 3구의 유해를 발굴한 사례가 떠 올랐다.
"이거다. 나는 등산로를 면밀히 관찰하다가 한 부분이 물이 흘러나가는데 잠깐 고엿던 흔적이 보이는곳에 주목을 했다. 물이 흘러들어간다?"
지탐기를 이용하여 탐지하니 윙윙 소리가 난다.
공병삽을 들고 한삽을 들어내니 전투화가 보인다. "찾았다?"
내가 직접 발굴한 100여구의 유해중 영원히 기억되는 순간이다. 권총이 나오고 유해였다.
동두천에서 김기수씨란 분의 제보가 들어왔다.
"음현리에 장인어른 밭이 있는데 전쟁중 국군 낙오병이 마을에 숨어 있다 민간복장으로 환복하고 탈출을 기도하다 전사하여 할머니께서 매장하라하여 장인인 박윤흥씨가 직접 야산에 매장 했다"
음현리는 전사에 나오는 초기전투 장소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우린 현장조사결과 가능성이 충분한데 강우로 유해가 유실될 수도 있는 지형이었다.
바로 발굴팀을 투입하여 굴토를 한 결과 2구의 유해를 수습하는 성과를 가져왔다.
봉양동에서 정봉진씨가 제보를 했다.
"칠봉산에 마을사람들이 칡순으로 시신의 목을 걸어 끌어내려서 지금 절 뒤에 둠벙에 묻었다."
칠봉산은 동두천과 양주 그리고 포천의 경계를 함께하는 산으로 동쪽이 해룡산이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의정부 뒤산 천보산이 나온다.
봉양동에 들려 한 여름날 동네 가게 차양막 속에서 시원하 사이다를 한병 사들고 마셨다.
옆에서 마을 사람들이 대낮에 소주를 마시는데 안주도 없이 김치만 놓고 마시고 있다.
군인이 그것도 중령이 왠 나이드신 어른과 함께 하고 있으니 이상한 생각이 드는지 말을 걸어 왔다.
"어쩐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네, 어느 분이 제보를 해 주셨는데 6.25전쟁 때 저기 칠봉산에 군인이 전사하여 있었다고 해서 그걸 확인하러 왔습니다. 그 어른을 지금 기다리는 중입니다."
"글쎄 누군지는 모르지만 내가 직접 산에 올라가 마을 사람들과 시신을 끌고 내려온 장본인이요. 우리 집에 대검도 있고 철모도 있소."
"그렇습니까. 그러면 당시 이야기좀 해 주시겠습니까?"
"아마 내가 14살인가 될텐데 전쟁이 났다는데 아무런 군인들이 보이지도 않아요. 그런데 점심나절인지 오후인지 군인들이 한 100여명이 나타나 저 산이 칠봉산이라 하는데 막 올라가는 겁니다. 그러더니 얼마 있어 쾅쾅 거리고 탱크가 나타나 포를 쏘아대는데 올라간 군인들이 순식간에 다 도망쳐 내려 갔어요."
"누구는 유엔군도 있었다고 하는데 유엔군은 못보았습니까?"
"유엔군이 올라갈 때는 처음 전투가 아니고 이듬해 6월인가 되고 처음에는 유엔군이 없었어요."
"그러시군요, 그럼 올라가셨을 때는 언제인가요?"
"아니 완장찬 형들이 자건거 타고 나타나 동네사람들을 불러 내는데 형들은 다 어디로 도망가고 없고 할아버지들과 아버지들이 나오는데 산에 올라가 시체를 치우라는 겁니다."
[귀신이 나타나는 집]
"그러니까 북한군 통제로 사실 유해를 보기싫고 냄새나니 치우라는 것이였네요."
"말하자면 그렇지요. 할아버지를 따라서 올라가니 여기저기 죽었는데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머리가 터진 사람, 배가 터져 창자가 나온 사람, 목이 아예 없고 팔다리도 없는 사람 등 한 10여 명은 되는데 그걸 칡순으로 목에 걸리도 하고 몸을 똘똘 말기도 하고 끌고 내려와 웅덩이에 묻었지."
"그 웅덩이가 절 뒤에 길건너 식당이 있는 우측인가요?"
"아니 어떻게 그리 잘 아셔. 얼마전까지는 그 식당이 바로 매장장소에 있었어요."
"네? 매장 장소에 있다면 웅덩이가......"
"소문이 무성하니 전쟁이 끝나고 땅 주인이 흙을 실어다 매꿔 버리고 땅을 팔아 먹었어요.
그러니 그걸 사서 식당을 지으니 매일 귀신이 나타나 식당 주인이 잠을 못 이룬다는거요.
그래서 그 집을 허물고 다시 우측으로 옮겨 식당을 다시 지었는데 글쎄 여기 사람들은 가려면 어쩐지......"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구요, 제보한 사람이?"
"정봉진씨라고......?"
"아 알아요, 나보다는 몇살 아래지. 절 그 근방에 가서 물어보면 알려줄거요."
이렇게 해서 우리는 귀신 나오는 유해 매장지를 식별하여 포크레인까지 동원하여 시굴을 해보았으나 찾지를 못하고 그 어른으로부터 대검과 철모를 받아 돌아왔다.
칠봉산에서 해룡산으로 그리고 천보산에 이르는 구간은 개인호가 가득하다.
하지만 이 개인호들은 초기전투가 아니고 중공군이 내려온 후에 '51년 3월말부터 5월말 사이에 굴토된 사실을 지역주민들로부터 들어서 확인했다.
정용범씨의 제보다.('09년, 62세)
"'72년도에 조부님게서 사망하여 부친께서 묘자리를 쓰기 위해 동두천 안흥리 독도골 지역을 굴토중에 두개골, 팔 다리뼈 등의 유골과 탄티부분, M1탄, 칼빈탄 등이 나와 산소에서 5M 떨어진에 매장"
독도골은 내가 연대장 시절에 우리 포병의 진지가 있는 곳이다.
바로 앞에 3번국도와 경원선이 지나고 하천도 신천이 흐르는 곳으로 뒷산이 바로 마차산이다.
마차산은 초기 전투시 1개 대대가 고립된 곳이라고 유명해진 곳인데 그곳에 오르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리 호가 많지않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초기 전투시 아무런 준비도 없고 병력도 1/3식 휴가 외출 외박을 보내다 보니 뭘로 대응하겠는가.
그렇다고 대전차 무기가 있어봐야 탱크는 끄덕도 없이 굴러오지 황당한 상황에서 그래도 우리의 선배님들은 육전대 비슷하게 싸워야 했다.
그러다 보니 주로 길가에서 싸우다 철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도 그런 곳으로 판단이 되었으며 우리가 재탐사를 하였을 때는 그 앞으로 길이 나면서 훼손되어 찾을 수가 없었다.
독도골 안으로 들어가 지맥을 올라서면 마차산에 쉽게 오르는데 이 지맥에 그래도 다수의 개인호가 구축되어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지만 전투 흔적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아들 양기홍씨가 아버지를 찾는 제보가 들어왔다.
아버지가 6.25전쟁 당시에 동두천 위쪽 청산에서 전사했다며 유골이라도 찾게 해달라는 애닯은 사연이 전해졌다.
이곳 청산은 바로 38도선이 지나는 곳으로 초성리 지역이 해당이 되는데 좌측은 고릉리 우측은 대전리로 그리 험한 곳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주로 개활지에서 전투가 진행이 되어 유해가 남아 있지않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산악지역에서는 적의 진출 속도가 느리니 그래도 개인호에다 가매장이라도 하고 후퇴가 되지만 낮은 지역에서는 적의 진출 속도가 빠르니 그럴겨를이 없을 뿐만아니라 남아 있는 유해가 심한 부패등으로 심한 냄새를 풍겨 당시에 부역자들을 불러 다 거둬서 한곳으로 치워버렸다.
그러다 보니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고 있다해도 개울가나 낮은 곳에 매장하여 수해등으로 모두 유실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 제보도 가슴 아프지만 우리가 주변 탐문 이상 다른 방도가 없었다.
양주시 만송동에서 박경수씨가 본인 뒷동산 유해가 있다고 제보하여 왔다.
"여보시요, 거기 이과장이 누구요?"
"네 제가 이과장입니다. 어언 일로 전화하셨습니까?"
"해골파는 이과장 맞지요?"
"네 해골이 아니고 6.25전쟁 전사자 유해를 찾는 이과장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 내용을 들어본 결과 전쟁 초기에 아군이 인민군에게 포로가 되어 잡혀가는데 1명은 도중에 전사하여 마을 어른들이 뒷동산에 매장했다는 것이다.
현장에 가서 확인하여 시굴도 해보았으나 유해가 없다.
없는 이유는 잘 모르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어느 누군가 민간요법으로 약을 하러 밤에 몰래 발굴해 간 것이 대부분이다.
문등병 환자들이나 매독등 성병 그리고 애를 못낳는 여인들이 주로 사람유해, 그것도 두개골을 먹었다고 하며 일부 대학에서는 돈을 주고 완전유해를 사들이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극히 일부분의 이야기다. 우린 지역 탐문을 다니면서 정말 중요한 제보를 받기도 했다.
의정부 전투의 하일라이트는,
축석령에서 포병학교 교도대대 김풍익 중령이 지휘하는 105mm 포병이 직접조준사격으로 적전차를 격파하였던 사실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 사격에 가담한 모두가 그 다음 전차에 직격탄을 맞고 모두 산화하여 그 유해를 찾지 못하고 말았다.
당연히 북한군 입장에서 본인들의 전차를 격파한 인원의 시신을 수습하라고 그대로 놓아둘리 없다.
상징적인 인원의 특히 내가 포병장교로써 화신과도 같은 이 분을 찾으려 축석령 일대를 수시로 탐문했다. 어느날 바로 축석령에서 43번 구도로를 따라 내려오다 보면 자일동과 만나는 지점이 바로 전차를 격파한 곳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곳이 보이는 곳에서 방열하여 사격을 햇을 것이라 판단하고 약 1km 내려가 부용천이 흐르는데 그 산쪽으로 음식점이 있어 들어가 물었더니 바로 그 앞 공터같은 곳이 사격장소였다고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알려주었다. 우연한 기회에 포가 방열한 곳을 알았다.
그리고 계속 주변 탐문중 누군가가 당시에 적 전차포를 맞아서 유해가 모두 부서져버려 누가 누군지 모르는데 흩어진 뼈와 살짐을 수습하여 산밑으로 매장하였다는 것까지 확인이 되었으나 아니 무려 도로가 거의 8차선 비슷하게 확장되어 버렸으니 그 흔적을 찾기란 너무 어려웠다.
그런데 '08년도에 춘천에 계시는 김차섭이라는 분으로부터 뜻박의 제보를 받았다.
"'67년도에 고 김풍익중령의 전투장면을 그림으로 그리라는 당시 김종필씨 지시로 현장을 생동감 있게 재현하려고 이곳에 와서 탐문중 마을이장으로부터 매장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내용으로 우리가 그당시의 이장을 추적하였으나 다른 곳으로 이사하여 없었고 함께 있었다는 지역주민의 이야기를 들었으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장소였고 본인들이 묻은 것이 아니고 이야기로 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아픈 탐문을 종결하게 되었다.
"의정부 중앙초등학교 야전병원 자리에 수많은 국군이 죽어 매장 되었다."
'07년도에 서을 청량리에 사시는 강상관이란 분이 제보 전화가 왔다. 본인이 11살에 전쟁이 나고 후퇴하는 국군의 부상병을 치료하는 야전병원이 당시 양주초등학교에 설치 되었는데 북한군 탱크가 밀어붙여 치료받던 모든 부상병을 사살하여 학겨 연못에 매장했다는 이야기를 부모로부터 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그 연못은 없어지고 없다. 위치는 3번국도상 의정부동 에 경찰서 맞은편에 위치하는데 학교도 몇번의 내부수리와 건물 신축등이 이루어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분은 없었고 어린 학생들이 있는 곳을 만약에 발굴하다가 나오면 그래도 좀 괜찮지만 발굴도지 않을시 많은 문제점이 있을 것이라 판단 되어 불명확한 발굴은 하지않기로 했다.
나. 현충원이 안고 있는 숙제
이번에는 이근혁이란 분이 형님이 동두천 생연동 산 49번지에 매장되어 있다고 발굴하여 현충원에 안장해 달라는 민원이 들어왔다.
사연을 들어보니 초기전투시 이곳에서 전사한 유해가 아니라 화천 사내면 후덕리에서 형님 이근환이란 분이 이등중사였는데 전사하여 화장된 유해가 본가봉송으로 와서 동네에 다른 분들도 그 당시에 함께온 유해를 면단위로 합동 위령제를 드리고 9~11기 정도가 한곳에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참 이런 경우는 우리가 접근이 어렵다. 이유는 본가봉송된 유해는 발굴이 아니라 이장이라는 용어를 쓰고 우리의 업무 소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분명히 누군가가 집고 넘어가 검토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현충원으로 받아들여야 할 문제다.
당시에 자가봉송된 유해는 일부는 문중산이나 집안에서 잘 관리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극소소이고 사실 대부분의 유해는 아예 누군가가 관리도 안해 흔적조차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부모나 형제가 모두 타계한 집안이 누가 그 유해를 관리하겠는가.
더구나 국군묘지를 '54년도에 공사를 시작하여 만 3년만에 완공하여 지방에 흩어져 있던 유해를 받아들일 때에 제대로 홍보가 될리도 없고 아니 먹고 살기도 힘든데 그런 사실에 관심을 갖고 있던 집이 얼마나 되겠는가.
내가 통영에 내려가 원문고개의 해병대 전투현장을 탐사하는 과정에 산양면에 들어갔는데 이유는 개인택시 운전사 분이 자기 동네에 참전용사 묘가 있고 그 동생분이 살아 있는데 묘를 방치하여 아주 못된 놈이라고 탄식을 하며 현충원으로 옮겨달라고 해서 찾아가게 되었다.
가보니 이야기대로 산 계곡에 있다는데 흔적조차 없었다. 이게 현실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보훈처에서 나서서 이러한 지방에 흩어져 있는 자가 봉송 유해를 유가족들의 요청에 의해 다시 현충원으로 모시는 사업을 해야만 한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병무청의 전신으로 병무행정을 수행했던 병사구사령부는 서울등 제주까지 8개도에 있었으며 이곳에서 관리하던 유해를 '57년도에 국군묘지로 봉송, 안장하는 과정에 총 14,992위중 9,378위만 안장되고 5,614위가 반환하게 된다.
봉송된 유해중 현충원에 돌아오지 않은 유해가 무려 37%에 달하는 숫자인데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안장될 요건을 서류 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그 원인의 제공은 우리가 유해발굴을 하면서 여러가지 정황을 분석한 결과 근본은 당시 전쟁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유해처리를 하지않은 군의 책임이 전부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이제는 말 할 수 있습니다'라는 사회 고발 뉴스처럼 전사자 유해를 처리하는 과정에 각 개인별로 화장을 한 것이 아니고 동시에 수습된 유해를 한 곳에 모아놓고 화장하여 전사한 숫자만큼 화장재를 나누어 목재로된 유골함에 넣고 자가 봉송이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가 봉송과정에 주소가 잘못 되었다던가, 해당 동네에서 가짜로 유해를 가져왔다고 들고 일어나 몽둥이를 들고 유족들이 쫒아오면 동구밖에 놓고 떠나버린 사례로 많았다.
이미 그당시에도 엉터리로 화장하여 보낸다는 소문은 다 퍼져 있었다.
그래서 이런 유해들이 인근 사찰에 관리된다든지 아니면 지역 공동묘지로 옮겨져 매장되기도 했다.
우리의 유해봉안소는 어쩔수 없었다고 하지만 미안스럽게도 처음에는 없었다.
여순사건이나 제주도 4.3사건 그리고 송악산전투, 강.표부대 월북사건등 전사자들이 발생은 했지만 그때는 임시방편으로 처리하고 지금 서울 장충동의 장충사(1895년 을미사변과 1882년 임오군란시 목숨을 잃은 군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재단으로 장충단이라 함, 그러나 일제가 들어와 헐어버리고 이토오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박문사를 지었으나 해방후에 장충사로 개칭되었다.)에 안치해 관리했다.
전쟁중에 우리는 아무런 준비가 없는 가운데 영현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묘지등록대'가 창설 된 것은 '50년 9월 5일 낙동강전투가 한참 진행된던 때에 창설 되었고 사단단위로 전사자 유해를 화장하기 위한 화장 트레일러가 도입되고 병참대에서 화장장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이전의 내용에 대해서는 기록이 미비하며 묘지등록대가 창설되면서 화장된 유해를 본가에 봉송하거나 그 중 일부를 부산 동래의 범어사 또는 금정사에 안치하게 되는데 이전 기록은 없다.
따라서 당시 휴전시까지 봉합된 유해는 31,057위였으며 차후 대구 달성공원에 설치된 중앙봉안소를 거쳐 국립묘지에 안장된 유해는 2만9천여 위에 불과하다.
다. 전사자를 찾기위한 노력
그렇다면 우리는 전사자 유해를 어떻게 관리해 왔는가의 의문이 생긴다.
솔직히 말해 '50년 9월초까지는 기록이 없다.
그러니 수도사단의 이종록 소대장은 충북 미원지구전투와 오근장 전투에서 숨진 대대장과 군인을 미원 한 야산에 묻고 전쟁을 치르게 되고 종료후에 발굴하여 (그것도 대대장만)국군묘지에 안장을 추진하게 된다.
그후 2000년도에 그 용사님이 매장된 곳에 가서 우리는 유해를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죽어간 사람이 날씨는 덥지 비는 내리지 적군은 달려오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울며불며 죽어간 유해를 그 장소에 개인호가 있으면 그곳에 밀어넣고 떠나면 다행이었다.
물론 시간이 허락하여 자그마한 봉분을 만들어 놓고 떠난 군대도 있다.
최초 전투부터 9월초 낙동강 전투시까지 전사한 인원이 기록이 없어 확인이 불가하다.
하지만 한 예로 다부동전투에서 전사한 인원이 하루에 500명씩 신병으로 교대해 들어갔다고 백선엽장군이 증언하였다. 이렇게 보면 그 반만 전사했고 그밖의 분은 부상이라고할 때에 적어도 5~6천여 명이 된다. 1개 사단만의 숫자다.
여기에 영천의 제8사단, 안강.기계. 포항의 제3사단과 수도사단, 신령지구의 제6사단등을 고려하면 무지막지한 인원이 된다.
그럼 북한군은 또 얼마가 되겠는가?
온 국토가 죽은자의 무덤지역이었다.
들이며 산에는 죽은자의 시신이 그대로 널려 있고 특히 북한군은 아군의 옷을 베껴 가버려 발가벗고 내가, 아니 내 전우가 대로에서 시궁창에서 중요한 곳조차 가리지 못한채 죽어가고 파리가 날고 쉬파리가 비행기 편대를 편성하여 윙잉 거리며 날고 있는 그 모습을 그려보라!
죽은자는 말이 없이 썩어만 가고 코에서 귀에서 눈에서 기어나오는 사람벌레를 상상해 봐라! 배고프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그 시신이 뭐가 무섭냐며 손에 차고 있는 시계를 갈취(?)하고 호주머니의 돈을 가져가는 애처로운 모습을 우리는 모른다.
철로길에도 그냥 죽어있어 기차가 지나면서 두개골이 터지며 품어나오는 골수를 보라.
마을 우물에 몇구인지도 모르는데 거꾸로 쳐박혀 숨져가고 피를 쏫아 그 우물물이 핏물이라던 증언!
얼마나 죽었는지 동네 냇가를 시신으로 매웠다는 이야기.
하나밖에 없는 4대독자가 군에 들어가 수창봉에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할아버지 할머니 산에서 1달 이상을 묵으며 산산이 조각난 유해를 들춰보던 그 통곡의 현장을 올라가 봐라.
화물열차에 올라타고 동료들을 찾으려 대구로 가다 그만 신탄진 터널에서 목이 터널벽에 걸려 떨어져 나가 죽는 , 그 목에서 솟는 붉은 피의 한맺힘을 들어라.
원한에 사무쳐 그러면 안되는줄 알면서도 적군을 잡아 눈알을 빼버리고 살아보라 하는 그 쓰라림!
사람위에 사람이 없다는데 사람의 가죽을 배껴 탱자나무 울타리에 펼쳐논 홍성의 빨갱이 부대놈들!
화신 백화점 앞에서 유력인사를 차량 뒤에 매달고 달리면서 김일성 장군가를 부르는 그들의 만행.
우린 이런 모습을 지난 48년도 10월에 여순반란사건에서 보았다.
같은 민족이라며 가슴팍에 비수를 꽂고 총알이 아깝다며 대창으로 찔러죽이던 그들이다.
우리 냉정히 한번 어덯게 유해처리가 되었는지 생각해 보라. 기막힌 사연이다.
창피해서 어디다 말도 못한다.
살은 자들이 미안하고 죄인이 되는 것이 바로 전사자에 대한 처리가 안되었기 때문이다.
어디서는 동료를 불태워서 뼈만 항아리에 담아서 이동하다 항아리가 깨져버려 그만 전우의 영혼을 자연으로 돌려보내야만 했다는 전우도 있다.
전쟁중 휴가를 나와 전쟁터에 올라가니 동네에서 함께 군대간 친구가 죽어서 명찰이 그대로 붙어있는데 차마 그 집에 말 하지 못했다는 용사님도 있다.
들이며 산에 버려지고 늑대며 여우며 개들이 오소리가 달겨들어 그 아픈 상처를 갈가먹는 현장, 이것이 전쟁초기 대한민국 군대의 모습이었다.
휴전이 되고 육군은 '59년부터 주로 영천지역에 너무 많은 유해가 죽어있고 처리도 안해 민원이 폭죽하니 3차에 걸쳐 1,000여 구를 수습한다.
그리고 의정부 호원리에서도 '60년도에 합동으로 매장되어 있던 59구를 발굴하여 현충원에 안치하고 '65년도에는 음성,여주,이리 등에서 47구의 유해를 수습하게 되고 '67년도에는 포항.영일 ㅇ리대에서 15구를 수습하여 안치하였다.
이때의 유해수습은 어떤 계획된 유해발굴이 아니고 지역주민의 진정이나 유가족등의 요구로 발굴해 명찰이나 명확한 신원 확인이 되면 안장하고 그렇지 않으면 화장하여 현충원 지하 납골당에 화장재를 합봉하게 되었다.
합봉된 항아리의 크기가 무려 어느 것은 몇십 명이 동시에 들어가 죽어서도 한몸인양 그 어두운 지하에 남겨진 것이 우리의 용사였다.
미국은 하와이에 있는 펀치볼 국립묘지의 한국전 전사자의 유해는 화장하지 않은 체로 안장되어 있다가 유전자 감식법이 발달한 지금 다시 묘를 개봉하여 유가족과 DNA비교로 신원확인을 진행하여 많은 성과를 가져오고 있다.
우리도 그것을 벤치마킹하여 늦었지만 그렇게 했다면 지금 더 많은 신원이 확인되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지금까지의 지형분석과 증언 및 제보내용의 실사를 통해 얻은 것은 동두천-의정부축선에 전투는 주로 도로변에서 이루어졌다고 파악이 되었다.
주변의 감악산이나 소요산, 마차산 ,종현산, 한강봉, 불곡산, 왕방산, 해룡산, 칠봉산, 천보산에서 전투를 했다는 내용을 접하지 못했다.
물론 초전에 적이 전차를 대동하여 주요 도로축선을 따라 밀어 붙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우리의 대비가 안되어 있었다고 봐야 한다.
10. 그럼 지금부터는 그 당시의 참전용사의 증언을 한번 들어보고자 한다.
수도경비사령부 제3연대 제1대대장 소령 임백진('68.9.19)의 증언이다.
"그날 외출을 많이 했는데 출동할 때 병력이 다 와서 갔습니까? 잔류병력만 나갔습니까?"
"다 들어와서 나갔어요.
"외출병력이 들어 오는 상황이니 혼합편성해서 나갔습니까?"
"건제를 유지해 가지고 12시쯤 되어서 출동을 했습니다."
"몇시쯤 들어갔습니까?"
"오후 3시쯤 될 겁니다."
"어디서 만났습니까?"
"내가 의정부역 로터리에 5시쯤 도착하니까 제7사단장 유재흥 장군이 참모하고 나와 있었습니다."
"어디서 교전을 했습니까?"
"한 30분 걸려 본대와 합류해서 송우리에서 했나? 아니야 가니까 배치도 않고 집결해 있었어요. 좌측에 제2대대 중앙에 우리 1대대, 우측에 제3대대로 편성 되었습니다. 그때 지휘관들이 상황판단이 부족했고 후방에서 올라와 뒤죽박죽이라 우선 적을 보아야겠다고 차를 타고 송우리 전방 5리쯤 가니 적 전차가 출현해요.
그러다 축석령에 그대로 내려와 방어를 하다 제7연대가지 들어와 혼잡스러운데 철수 명령이 나서
금오리로 내려왔는데 10시경 연대장(이상근 대령)이 없어졌어요. 그래보니까 2,3대대는 철수 하고 없는데 유재흥 장군이 고문관과 권총을 빼들고 독전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1대대가 단독으로 거기를 버티고 있는 거지요. 26일 오후 18시경까지 버텼지요."
"금오리에서 철수시에 1개 대대 병력을 다 데리고 갔습니까?'
"의정부도 떨어져 나가고 인접 부대들도 없고 마침 제1연대가 철수한다고 해서 그쪽으로 움직였는데 북한군 1연대야. 그래서 다시 돌아서 광릉으로 해서 마석으로 해서 북한강을 건너 양수리로 그리고 광주, 수원."
"그때 병력은?"
"제1연대의 낙오병, 제7연대 병력으로 해서 한 3,000여 명."
"무엇으로 도강을 했습니까?"
"27일 오후 3시경 도착했는데 교량이 끊어져 있고 배로 했는데 북한군이 먼저 와 관리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우리 병력이 많이 있으니 이놈들이 꼼작 못하는 거지요. 그래서 배를 빼앗아서 도강을 했습니다. 배 두척하고 조그만 배를 이용하는데 한척에 1개소대 정도 타고 건너고 그랬어요."
"그러다 수원가서 재편성 되어 말죽거리로 올라왓는데 이때가 28일 오후 6시경인데 유격대가 나오더군요."
수도경비사령부 제3연대 제1대대 정보장교 중위 박자진의 증언이다.('67.6.13)
"몇 대대 정보관을 했습니까?"
"제1대대 정보관을 하고 있는데 전쟁이 일어났는가 보다 했는데 9시반쯤 되니까 경비사에서 동원한 트럭이 백여대 들어왔어요.
차가 들어오기 전에 수경사에서 탄약보충을 해준다고 하면서 이상근 중령이 그때 부대를 다시 복귀시켜서 탄약을 분배하고 무기를 점검하고 자동차를 타고서 제1대대가 선두에서 서울시청 앞으로 해서 미아리 고개로 빠졌어요. 첫날은 제6군단 CP가 있는 곳까지 갔다가 적 전차를 만나 다시 제6군단 못미처 무슨 고개에 아마 11시쯤 도착 했을 겁니다.대대장이 늦게 왔어요.
야간에 제7사단 수색 1개 중대가 인민군 복장을 해 가지고 야습을 한다고 나갔어요. 한 20시경 되는데 그 후에는 소식이 없어요.
수도경비사령부 제3연대 제2대대 인사장교 유범상의 증언이다.('65.8.10)
"출동할 때에 1개 대대가 혼성되어 나갔지요?"
"혼성된 것이 아니고 제1대대장을 임백진, 제2대대장을 김봉상 소령이 했고 제3대대장은 그날인가 월북했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처음 어디에서 교전을 했습니까?"
"포천 채 못가서 송우리 옆에 고지에 배치되었는데 6.25 당일 날 오후 3시반부터 4시까지 사이로 생각되는데 처음 적 탱크를 보았습니다. 후퇴를 하기 시작해 의정부 북쪽 3km 지점에 부대가 집결 하는데 연대장도 행방불명되어 버리고 명령을 받아야 하는데 아무도 없는데 제7사단장 유재흥 장군이 있는데 제1연대가 후퇴한다고 엄호하라해서 하는데 26일날 오후에 의정부에 소리가 나서 보니 사령부가 공격 당하고 있어요.
그래서 철수를 27일날 새벽에 해서 중앙청 앞에 빠져나와 안국동쪽 풍문여중에서 28일 새벽에 잠을 좀 자고 3일동안 아무것도 못먹어 기진맥진해 있는데 시청 앞에서 기습을 받아 대대장등 22명이 그 당시에 대대장 가족이 이태원에 살았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볼겸 덕수궁-남대문 시장으로 빠져 한강다리가 끊어진 것도 모르고 가다 길을 잘못들어 동화백화점 뒤가 나와 부대로 가서 한강을 건너 수원으로 갔더니 제3연대는 청주로 집결해라 해서 갔더니 여기서 제18연대가 편성이 된 겁니다.
제연대의 잔류병력이 제2대대가 되고 옹진에서 흡수한 것이 제1대대가 되어 백골부대가 편성 된 겁니다. 전투를 계속하며 후퇴하면서 경주까지 내려 갔는데 경주에서 수도사단 제18연대가 된 겁니다.그런데 그곳에 가니 이상근이 참모장으로 있었습니다. 말들이 많았습니다.
수도 경비사령부 제3연대 제6중대장 대위 주남경의 증언이다.
"우선 제3연대가 6.25 나기전에 먼저 한 것을 말씀해 주세요?"
"우리가 임관하여 3달 후에 여.순 사건이 나서 군산에 있다 1개 대대가 나갔습니다. 그때 동기생 김창순이 순천에서 죽었습니다. 전사가 아니고 그 사람이 술을 좋아해서 술 먹고 어떻게 하다 헌병한테 맞아 죽었습니다."
"토벌하는 것을 설명해 주세요?"
"그 당시에 여수에 들어갔는데 전부 녹아 버렸습니다. 그 당시에 여수에 들어가 보면 적을 구분하기가 곤란했습니다. 1개소대를 끌고 동쪽으로 들어가갔는데 45명이 한자리에서 7명이 줄었어요. 여자들이 와서 가자고 해서 따라가면 또 죽고 해서 몇 명 손실을 본 적이 있는데 한 20명 죽었습니다."
"6.25전쟁에 대해 첫날 어떻게 하셨는지요?"
"서빙고에서 교육을 받고 다시 보병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고 6중대장을 했습니다. 그때 강화도에 1개 중대를 모집해 온 것을 내가 직접 대대훈련까지 시켰는데 전쟁이 나서 6.25일날 동두천 쪽으로 갔어요. 연대가 함께 있었으면 괜찮았는데 대대별로 분산해서 1대대는 의정부에서 가평쪽으로 빠지고 제2대대는 이 쪽에서 동두천쪽으로 빠지는데 그 다음날 저녁에 소위 진격이다해서 1개 대대가 암 38선을 넘었을 겁니다."
"얼마나 진격을 했습니까?"
"동두천 못미쳐서 그 날 저녁에 올라갔으니까 얼마나 될지 몰라요."
"그때 누가 지휘했습니까?"
"3기생이 지휘했고 나중에 대령이 되어 죽었습니다.""어디에서 수습이 되었습니까?"
"의정부를 그날 저녁에 빠져 나오지 못하고 의정부 뒤산에서 갇혔는데 결국은 낙오가 된거예요. 우리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2개연대가 그 지경을 당하는데 3분의 1정도는 갇혔습니다. 그래서 계급장도 떼어버리고 총도 다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서 의정부를 나오는데 20여 일이 걸렸습니다. 처음에는 밥도 얻어먹고 했는데 그것도 어렵게 되어 마침 감자가 나와 그걸 먹고 산에서 연명하는데 이상한걸 캐먹고 버티다보니 9.28때가 되었는데 그 높은 산이 천마산이라 그래요."
"단신이 그렇게 했습니까?"
"세사람이 같이 있었어요. 망우리쪽으로 나왔는데 '이 새끼 어ㅐ 빠져 나오지 못하고 말이야......' 그래서 아는 분은 찾아가 자초지저을 이야기하고 군복을 입고 이발을 하고 김화까지 함께 갔는데 서울로 내려가라 해서 내려왔더니 수용소에 집어 넣어 한 10일간 있다가 나가라 해서 나와 보직을 인천 청소년 형무소자리에 있던 포로 수용소 경비대장으로 갔습니다. 훈장은 금성충무탔습니다."
수도경비사령부 제3연대 제8중대 박격포 사수 이등중사 진삼섭 증언이다.('66.4.13)
"몇 연대 출신입니까?"
"제3연대로 '48.9월에 전주 제3연대 제3대대에 입대했습니다. 그때 연대장이 함준호 중령인데 여.순사건이 일어나 제3연대가 지리산으로 출동을 했고 사령부는 남원에 있었어요.
그때 우리 3연대를 지리산 호랑이라 불렀습니다. 거기서 그 두목들 김지회 홍순석이를 잡아 살해한 시체를 전시한 일이 있는데 누가 잡았는지는 모릅니다. '50년 정월에 임무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놔 서빙고 여군 훈련소자리로 우리 3연대가 이동을 했습니다. 여기서 훈련을 받다 6.24일 외출을 나갔는데 아침에 비상이다 해서 부대에 들어와 실탄등을 챙겨 동원된 차량을 이용하여 이태원쪽으로 나오니가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흔들면서 성공하고 오라하는데 전쟁이 난지는 몰랐어요.
미아리로 해서 의정부로 들어가니 정차장이 피투성인데 우리는 동두천으로 올라가 못미쳐 점령했는데 적의 유탄포가 날아와 분산되고 말았습니다. 81mm부사수로 이등중사였어요.
27일 중앙청 뒷산에서 보니 왕십리에 포탄이 떨어지고 전차가 들어오고 있더군요. 그날밤 그 어느 학교에서 자다가 새벽 2시에 비상이 걸렸는데 시내에 적이 들어와 부대가 다 분산되는 겁니다.
그래서 한강인도교로 가니 민간이들을 만나니 다리가 귾어졌다고 해서 서빙고에서 건넜습니다.
수도경비사령부 제18연대 제2대대장 장춘권의 증언이다.('64.6.22)
"6.25전쟁 참전하신 것을 기억을 더듬어 말슴하여 주십시오."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6월25일 19시가지는 현재 미8군이 있는 병영에 주둔해 있었다. 연대장은 임충식 대령이다. 19시에 출동 명령이 나고 제7사단에 배속되어 나는 2대대장으로 서울에서 징발한 버스를 타고 출동했고 이대 제1대대만 휴가중에 있었다. 제3대대는 신병들이 많았다.
26일 사단장이 제1연대 좌측을 공격하라하여 의정부와 동두천 중간 고랑포가는 길에서 적 차량화부대와 조우했다. 무려 1시간이 되는 행군장경이었다. 이들이 지나고 인근에 진지를 점령했는데 이때 말 2필이 끄는 치중마차 12대가 남하하여 이들을 기습으로 12명의 포로를 잡았는데 보급품이 대전차포탄이었다. 포탄은 논에다 버리고 포로중 최고 계급이 총위인데 지도를 빼앗아보니 영등포까지 선이 그어져 있었다. 날짜는 6월26일 오후인데 아마 전쟁중 최초로 잡은 포로일거다. 하지만 연대와 사단간 보급로가 차단되어 후송도중 사살해 버렸을 것이다.
적의 포탄이 의정부 방면에 투하되어 파주로 빠지는 방면으로 철수하려고 장비를 다 버리고 ㅐ인화기와 실탄만 가지고 가는데 27일 아침이었다.
파주에 갔는데 북쪽에도 군대가 있고 남쪽에도 군대가 있는데 나중에 남쪽의 제13연대 장교가 내려와 아군 제13연대를 알았고 27일 7시경 제13연대 CP에 집결했다. 제18연대는 어딘지 몰랐다.
민가를 털어서 주먹밥 하나식 먹고 밤 12경인데 13연대에서 연대 일부를 맡아달라고 해 거부하였는데 28일 새벽 1시부터 진지가 무너졌다.
"제13연대에서 적전차를 파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까?"
"28일 오전1시 제13연대 대전차포를 중대장이 가지고 적 전차와 대결하여 파괴하고 전사했다는 이야기를 그의 부대원에게 들었다. 제13연대 진지가무너지자 철수를 하는데 문산가자면 파주로 가는 분기점에서 비로소 연대장을 만났다.
이곳에 집결한 부대는 제11연대, 제13연대, 제25연대, 제18연대, 제12연대(?)의 5개연대가 모였는데 제18연대만 2,3대대가 그대로 있었고 다른 연대는 병력이 별로 없었다
여기서 28일 정오경에 행주로해서 김포로 도화하자고 해서 행주로 갓는데 배가 약30척이 있었다.(큰배는 15명, 작은 배는 4명정도) 그러나 나머지 부대는 이곳에서 완전히 분산되어 무질서한 상태가 된다. 29일 아침까지도 3대대 12중대는 도하를 못하고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김포비행장을 공격하게 되는데 B29의 폭격도 있고 우리 5중대가 공격으로, 행주에서 분산하여 도착한 다음 적에게 포로가 되어 있던 2,500여 명의 포로가 비행장에 수용해 있다가 모두 구출된다.
29일 14시경에 비행장을 돌파하여 소사로 진출하는데 김포지구 사령부가 이곳에 있고 그 사령관인 우중령을 만났는데 김포와 소사 중간을 방어해 달라고 하였다.
이때 나는 연대장과 함께 있었는데 우중령이 경비책임자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에 20m 거리에서 권총으로 자결하고 말았다.
여기서 적의 오류동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전투를 하게 되며 김포지구경비부장 김중령과 탄약보급 때문에 언쟁을 하였는데 부평에는 배터리없는 자동차가 수백대 있었고 또 박격포탄이 수만발이 있어 나는 81mm 포탄을 하루에 2,500발이나 사용하였다.
제2사단 제5연대 제2대대장 소령 차갑준의 증언이다.('66.12.19)
"전투에 참가하신 것을 말슴해 주십시오."
"내가 소령이고 대대장인데 6월25일 전쟁이 났을 대는 대전에 있었고 아침에 사단명령을 받고 내가 2대대를 인솔하여 기차를 타고 오후 2시에 출발했으니 용산역에 오후 4~5시쯤 도착 되었을 겁니다.
육본에 가서 명령으 달라고 하니 보병학교장의 명령을 받아라해서 병력은 그대로 기차에 기다리고 있었는데 뭐 개성이 적의 수중에 넘어가니 어디에 배치를 해야하는지 고심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 의정부에 투입 되었을 때는 아마 8시가 넘었을 겁니다. 용산역에서 주먹밥을 먹었으니까."
"기차로 올라갔습니까?"
"의정부에 들어가니 제7사단 작전참모가 의정부에 배치하라하는데 배속된 일이 없기에 곤란하다 하고 있는데 사단장이 제9연대로 배치하라 하여 9연대 자리로 투입하니 사단장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1개 대대병력도 안되는데 병력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다고 하고 있는데 밤 1시쯤인가 참모총장이 왔어요. 오라해서 가보니 대한민국의 운명은 이 의정부에 달렸다며 축석령고개에서 적 전차 30여대를 특공대를 조직하여 격멸시키라는 겁니다."
"사단장도 옆에 있었습니까?""있었지요. 그것을 성공하면 육군 중령이다. 그런데 나는 사단장에게 지금 병력은 와서 있지만 탄약이 있습니까? 장비가 있습니까? 도저히 출동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참모총장이 그래도 출동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빈총들고 걸어서 고개로 도보행진을 해서 올라갔습니다."
"사단장이 총장에게 못 하겠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랬어요. 사단장 복안은 내 부하가 다 와야 한다는 ....... 그래서 보직 해임된 것 아닙니까?"
"그게 아니고 그 이튼날 우리가 실패를 해서 사단장이 해임이 된 것입니다. 나는 그때 해임된 원인을 모릅니다."
"그때 사단장이 정복을 입고 나오지않았습니까?'
"그건 기억에 없습니다. 우리가 올라가니 앞에 제3연대인지 1개 연대가 있어요. 그래서 올라가 이상하다했더니 바로 일제히 사격을 가해 오고 적 전차들이 쌔까맣게 올라오는 겁니다. 나중에 날이 밝아 내려와 보니 어이없게도 뒤에 탄약을 가지고 올라오다가 총소리가 나니 그냥 차까지 버리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누가 지휘했습니까?"
"이영도 소령 7기입니다. 적의 포격에 거짓말이 아니고 사람이 붕붕 떴습니다. 그러니까 2대대는 공격도 못해보고 지리멸렬해 버렷어요. 후퇴를 거듭하여 사관학교에 들어가니 신성한 사관학교에 패잔병이 들어온다고 욕을 하는 겁니다. 거기서 밥을 얻어먹고 서울로 들어가니 서울이 함락 되었다 하여 광나루로 가니 오후 5시는 되었을 겁니다. 대대장은 행방불명이지 , 배를 묶어서 파괴시키고 밤새 걸어서 연대대장과 참모 몇사람이 앉아서 막걸리를 먹으면서 자고 아침에 수원으로 빠져 내려가니 육군본부가 있는 겁니다.
그곳에서 병력을 장악해 보니 중대장 한명이 없는데 배두용 대위입니다. 그런데 얼마 있다 연대장이 불러 가보니 배대위가 살아 왔는데 포로가 되어 총살형을 받았는데 작업복의 쇠단추에 총알이 맞고 쓰러지고 다음에 칼로 찔렀는데 그것이 옆으로 빗나가 3시간을 죽은 척 하고 있다 나왔다는 겁니다.
제2사단 제5연대 제4중대 소대장 소위 구여회증언이다.('66.817)
"전쟁중에 제일 먼저 적과 조우한 곳은 어디입니까?"
"25일 출동해서 26일 아침 동두천 뒷산에 배치 되었어요. 의정부 가는 도로에 배치되었는데 아침 10시경에 북한군 전차가 나와 사격을 했는데 전차는 의정부 시내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때 보니까 미군 하사관이 57mm전차포로 쏘았는데 끄덕도 않고 시내로 들어가고 아침도 못먹고 있는데 뺑 들러사요. 그래서 포위가 되고 그래서 빠져나와 미아리로 와서 다시 학생들이 주는 물을 먹고 다시 연대로 들어가 연대의 병기를 실은 차를 타고 27일 날 밤에 부상당한 곳을 붕대를 감은체로 한강을 넘었습니다.
제2사단 제5연대 제5중대 소대 선임하사관 이등상사 정대선의 증언이다.('64.5.27)
"전쟁이야기좀 해 주십시오."
"당시 제5연대 일원으로 출동하여 포천으로 약 30리 들어가서 제9연대가 배치된 능선에 배치되었다가 26일 적과 처음으로 교전하게 되는데 적의 전차가 200m 앞까지 진출하여 후퇴하면서 9연대 본부로 오니 벌써 후퇴를 하고 없었다.
26일 밤을 창동에서 보내고 27일 보니까 태릉까지 왔는데 완전 점령당했다.
다시 후퇴하여 미아리고개로 왔는데(연대장이 원래 박병권 대령인데 일본에 유학중이었고 박기성중령이 지휘) 채병덕 총장이 나타나 탑차를 타고 나타나 전차는 약하다며 후퇴하지 말고 공격전진하라고 격려를 했다. 한 300m를 진출했는데 적의 저항으로 삼각지 방향으로 후퇴하게 되고 27일 밤이 되었다. 새벽에 한강쪽에서 폭발음이 나고 한강교가 끊어져 많은 피난민들이 다시 시내로 밀려들고 사람이 너무 많아 배로 도하를 못하고 마포 어느집 항아리에 들어가 은거하다 30일 저녁에 마포대안 여의도로해서 수원으로 내려갔다.
제2사단 제16연대장 대령 문용채의 증언이다.('64.12.9)
"6.25전쟁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연대장으로 부임해서 청주에서 며칠 안됐는데 사단 작전참모가 출동하라 해서 전부 외출중이라고 하니 농담이 아니라고 하여 그날 저녁에야 병력이 모여 새벽 열차로 서울을 지나 의정부 전선에 오니 사단장이 여기에 있더군요. 병력이 없는데 혼합편성하여 배치하라 해서 올라오는대로 투입해 달라하고 막 도착한 1개대대를 포함하여 2개 대대로 점령을 하는데 벌써 적이 의정부에 들어가고 인접부대들이 철수를 하여 병들의 사기가 떨어졌어요. 그래서 의정부 어느 고지에서 다음은 창동으로 미아리로 한강을 넘어 시흥전선에서 다른 연대는 다 전멸되고 내 연대만 살았습니다."
제2사단 제16연대 제1대대장 중령 유의준 증언이다.('64.11.19)
"6.25전쟁이 난 당시에 어느 연대에 있었습니까?"
"6.25전쟁이 나기 전에 제8사단 제16연대에 있었는데 한 1년 근무했습니다. 공비토벌을 하고 그해 5월에 돌아왔는데 1개월쯤 있다가 6.25전쟁이 발발 했습니다. 그때 충주에 있었고 연대본부는 청주에 있었고 나는 충주에서 의정부로 투입되었습니다."
"동해안지구에도 제16연대, 제1연대가배치되었지요. 그리고 8사단 소속이 아니지 않습니까?"
"태백산지구 공비토벌작전에는 제8사단이 없었고 토벌할 때는 제2사단 소속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비토벌이 거의 긑날 무렵 제8사단은 강릉에 있었습니다. 이형근 장군이 제2사단에 있을 때 제16연대가 제2사단으로 편입 되었습니다."
"의정부로 투입하고 나서 수행한 전투를 요점만 말씀해 주세요."
"충주에서 창동으로 해서 의정부로 들어갔는데 나는 제1대대였고 문용채 장군이 연대장이었습니다. 창동에서 방어하다가 적의 전차가 출현하여 방어를 한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전차를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사관학교쪽으로 빠져 나가는데 질서가 없어서 통솔할 사람이 없어요. 철로변으로 빠지다 기습을 받고 분산하여 남은 병력을 데리고 광나루에서 배로 광주로 이동했습니다."
제2사단 제16연대 제1대대 부대대장 소령 김진동의 증언이다.('80.8.28)
""6.25전쟁 당시 소속과 부대 위치는?"
"제2사단과 제5연대는 대전, 제16연대는 청주, 제25연대는 온양에 위치하였으며 16연대 예하 제1대대는 충주, 2,3대대는 청주에 있었고 제1대대는 당일 07시경에 출동 명령을 받고 충주를 추ㅜㄹ발 20:00시경에 청주에서 합류해서 의정부로 출발했다. 연대 전체가 청주에서 6.25일 20시경에 청주를 기차로 더나 다음 날 06시경에 의정부에 도착했다."
"축석령에 점령했는지 금오리에 점령했는지 어디입니까?"
"제16연대가 고지를 점령한 지점은 축석령이 아니고 금오리지역이었다."
"전투상황을 말해주시오."
"충주에서 가져온 탄약밖에 없어서 보충을 요구했으나 해결되지 않고 아군은 사기가 저하되어갔고 속수무책이었다. 어느 부대소속인지 모르지만 특공대원들이 수류탄으로 공격을 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연대본부와 2,3대대는 먼저 철수하고 제1대대가 계속 진지를 고수하다. 그러다 수락산 불암산 서측 산록을 거쳐 26일 19:30분에 출발 27일 19:30분경에 태릉에 도착하여 배가 고파 450명인데 900명이라 하여 주먹밥을 2개씩 얻어 먹었다. 28일 02시경에 92고지에서 급편 방어를 하다 공덕동에서 적의 소총탄에 하복부에 관통되어 낙오되었다. 철도원으로 속여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75일간의 은둔에서 연합군의 진출과 함께 원대복귀 하게 되었다.
청량리 위생병원은 미국인이 운영하는 예수병원인데 113호실에 인민군 소령 1명, 인민군 대위 1명이 입원했는데 매일 그들은 전술공부를 하며 토의도 하였다."
제2사단 제16연대 제3대대장 중령 강태봉의 증언이다.('80.12.6)
"6.25전쟁 발발시 위치는?"
"태백산지구 공비토벌을 마치고돌아와 4일만에 전쟁이 터졌다. 이대 모두 10~15일간의 휴가를 보내어 각자 고향에 가 있었다. 나도 서울에서 방송을 듣고 26일 복귀했다. 들어오니 누구도 명령을 하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나머지 병력을 실고 열차로 북상하는데 역마다 3대대가 올라오면 우리가 올라가는 역으로 보내주라고 부탁했는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데 열차가 알아서 성북역을 거쳐 의정부로 달렸다.
"의정부역까지 갈 수 있었는지요?"
"아니다. 26일 14:00경인데 의정부 역에서 기차가 대기상태인데 차장의 말이 아군이 철로에 지뢰를 매설한다고 한다.약 1시간 경과하니 포성이 들리고 이때까지도 학생들은 태극기들고 야단이었다. 또 얼마 있으니까 아군 패잔병(낙오병)이 철모도 안쓰고 총을 거꾸로 메고 내려오기 시작하는데 이런 참혹한 꼴은 한번도 본적이 없다."
"연대본부는 어떻게 찾았는지요?"
"도무지 연락이 없어 S-2를 짚차로 보내 찾아보도록 했더니 돌아와 제2대대는 26일 전투에서 분산했고 1대대는 찾지도 못했고 사단사령부를 창동부근 나무그늘 밑에서 이형근 준장과 참모 몇이 있어 신고하였더니 수고했다고만 하고 다른 참모가 열차에 대기하라 하여 하차하여 식사를 시켰다.
26일 밤 22:00시경에 사단 참모가 와서 전투사령부의 지시를 받아라 해서 민가에 자리잡은 유재흥 장군을 찾았더니 창동북방 주도로 좌우측에 배치하라하여 진지를 구축하라 하였다.
이대 우에는 제5연대, 좌에는 제25연대가 있었고 이 시간 이후에 유장군은 본적이 없다.
"27일 상황은 ?"
"이때까지 큰 전투는 없었는데 제5연대는 병력이 형편없고 제25연대는 혼란상태고 헌병이 우리 뒤에서 낙오자를 수습하고 포병도 있었다. 07:00시경에 채총장이 나타나 수고한다는 말과 단순히 전방을 보고 갔다. 08:00시부터 포가 떨어지고 적기가 날아와 기총소사하고 여기서 부상을 당해 후송을 대전에 갔다가 다시 과천으로 올라와 제16연대 낙오병을 합쳐 제10연대라 하고 나는 대대장으로 한강이 보이는 곳으로 갔다가 다시 포위되어 탈출하다 낭떠러지로 떨어져 낙오병이 구출하여 대전병원으로 다시 갔다가 야전을 떠나 병참으로 전과하였다.
"초창기-전쟁간 병참지원체계는?"
"건빵정도를 만들 수 있을까 솔직히 아무것도 못했다. 다 원조며 일본제 야전식량이 들어오고 우리는 주식만 조달하는......"
제2사단 제25연대장 김병희의 증언이다.('77.5.4)
"우리 연대는 6월15일부로 제7사단에 편입토록 예속명령을 받았는데 주둔지 징발문제와 식소 및 막사문제로 이동준비가 되지 않아 7월15일로 연기한 상태에서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그래서 제2사단 연대로 26일 11:00시에 열차로 창동에 도착하여 내가 먼저 금오리로 올라가 도착신고를 하였는데 포탄이 지휘소 부근에 떨어져 이형근 준장과 함께 창동으로 내려와 총장으로부터 백석천을 막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백석교근교에서 적 전차 한대를 돈좌시켜 이날 밤 적의 침공을 막았다. 밤에는 편의대들이 우리의 주위를 맴돌며 날뛰는데 그 다음날 적의 대부대가 들어와 후퇴하게 되는데 혼란이 야기되어 제2대대는 행주쪽으로 빠지게 되었다.
제2사단 제25연대 제11중대장 중위 문일수의 증언이다.('85.10.25)
"출동은?"
"6월25일 당일 오전에 비상이 발령되어 밤 열차편으로 서울로 이동, 다음날 새벽에 용산에 도착여 창동역에서 하차하였다. 이때 채총장이 나와 있었다.
"백석천 전투는?"
"26일 저녁 무렵 우리 3대대는 백석교 제방 동쪽에 배치 되었는데 해질 무렵부터 공격이 개시 되었으나 백석천에는 포탄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얼마후에 전차 5대가 백석교를 통과하여 제11중대가 배치된 후방 500~600m지점에 정지하였다.
날이 저물어 어두운데 특공대로 파괴하기 위해 공비토벌에 잔뼈가 굵어진 중대원 8명이 동참하여 2.36" 로켓포로 50m까지 접근, 무한괘도를 공격하여 나중에 아침에 보니 5대중 3대만 움직였다.
"철수는?"
"27일 새벽부터 통신이 두절되고 적이 의정부를 넘어 대규모로 밀려내려오자 04:30분경 수락산 기슭을 따라 태릉사관학교에 도착하니 대대는 어디로 가버렸고 우리 중대만 9명의 손실만 있고 그대로 다 있었다."
'태릉에서 철수는?"
"사관학교 생도대대장(조암)이 함께 싸우자고 하여 F고지 우단에 점령했는데 28일 아침에 보니 철수해 버리고 아무도 없어 미아리로 가려 고려대 앞까지 갔으나 낙오병들이 적이 이미 점령하였다 하여 광나루에서 배를 이용하여 수원비행장으로 와서 연대장도 만나고 재편성 하였다."
"금곡리 전투는?"
"우리 연대는 재편성 후에 풍덕천 위 금곡리로 이동하여 6월30일 148고지에 점령하였으며 적이 우측에 배치된 육사생도대를 공격하는데 측방 지원사격을 하였다. 급기야 그 고지가 피탈되고 대대장이 전사하였으며 연대는 분산 되었다. 이대 11중대는 20여명이 전사하였으나 12중대만은 흩어지지않고 오산을 경유하여 대전으로 철수하였다.
여기서 부연대장에게 병력을 인계하고 나는 전주로 가서 제9연대 창설 요원이 되어 학도병을 주축으로한 임시 제9연대 제9중대장이 되었다.
여기서 군복도 지급받지 못한 학도병을 이끌고 순천-진주-진영-구포를 경유 대구에 도착하여 구복과 무기를 받고 제25연대로 재편성되어 포항전선에 투입 되었다."
# 이 금곡리 전투에 대해 신 전사책에는 국군 제1사단과 12연대(-), 육사생도대대만 나오고 25연대관련 전사는 없다?
제7사단장 유재흥장군의 증언이다.('67.10.2)
"6.25전쟁 당시에 제 7사단장을 지휘하지 않았습니까? 북한군이 남침한다는 남침설이 돌았는데"
"갑자기 일선으로 사단장을 이동해 버렸어요. 그 이유는 채총장이 일선이 위험하니 제1사단이 내 아버지인 유승열이고 제7사단이 이준식인데 경험이많은 사람이 해야 된다고 해서 나는 그때 제2사단으로 대전에 있었는데 공비토벌도 끝나고 해서 가라고 해서 바로 직전에 갔지. 한 2주일전이 될거요."
"6월 10일 날이었습니까?"
"2주 정도 되는데 부랴부랴 가서보니 아무런 준비가 안돼 있어요. 육본의 정보국이나 작전국에서는 전방이 심상치않다고 했지만 제대로 준비된 것이 없고 준비하겠다고 무기도 달라고 하니 KMAG에서 웃어요. 절대 침입 못한다고......'
"24일날 장교 구락부에 참석은 하셨지요?"
"그랬지. 장도영이고 하고도 이상하다고 이야기하니 세계대전 난다며 안일어난다고 하는데 전쟁이 나고 나는 25일 새벽에 신당동 집에서 보고를 받았다.
미 고문관들이 직접 바주카포를 가지고 적 탱크에 쏴 보았는데 반응이 없고 의정부로 철수한 것이 26일 저녁일 것이에요. CP는 창동에 두었어요.
제7사단 제1연대 작전주임 소령 송성삼의 증언이다.('77.11.5)
"제4대 연대장인 함준호 대령은 4월 하순에 부임하고 전연대장 김종오 대령은 제6사단장으로 갔다.
6월24일 11:00에 외출하려는데 연대장이 간사로 호출하여 가니 예감이 이상하다고 나기지 말고 총주번사령을 하라 했다. 아니 주번사령이 있는데 총 주번사령이라니 약간의 기분이 나빴지만 명령이라 거절할 수 없어서 정복을 입은 체로 연대본부에 있는데 15:00시경에 초성리 초소에서 병력이동이 활발하다고 , 그리고 30분 뒤에는 전차 장갑차 포가 움직인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연대장에게 보고하자 연대장은 "천지가 변할거야. 각 초소에 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22:40분부터 초성리에서는 보고가 계속 되고 육본 직통전화로 육본주번사령 김대령에게 보고하니 "무슨 잠꼬대 하나, 빨갱이가 아니냐, 관등성명대라"고 하며 정신차려 근무하란다.
그래서 초성리 초소에 확인하자 적이 38도선을 넘어섰다고 하며 초성리는 적이 우굴우굴 하다고 하였다. 다른 초소는 이때도 조용한 상태였다.
25일 00:30분 이사실을 연대장에게 보고하자 "보라 전부대에 전투태세를 취하게 하라"고 하고 03:00시에 전투복 차림으로 연대본부에 나왔다.
연대장은 상황을 보고 받고서 전화기로 육본에 보고를 하고 그로부터 얼마 안되어 포성이 울리는데 03:30분경이다.
04:30분에 연대를 출발 연대 OP로 가는데 덕정에 오니 포탄이 길위에 떨어져 차에서 내려 도보로 갔다. 06:00시경에 OP에 도착했는데(장수봉) 적이 벌써 여기까지 침투하였고 09:00경에 오피가 피탈되고 철수하여 14:00경에 덕정에 도착했다.
26일 아침 복귀한 한태원 소령을 1대대장에 임명하고 동두천을 탈환토록 명령하고 하사관 교육대장 (이대위)으로 하여금 제2대대의 우측방을 엄호토록 하였으나 그길로 북으로 올라가 버렸고 11:00시경에 한태원 소령으로부터 동두천 탈환 소식이 전해졌다.
이무렵 적은 주력이 포천방향에 집중 되었는데 그 이유는 25일 04:30분에 초성리에서 적 전차 3대가 아군 2.36"포에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28일까지 서울에 적 침입을 지연 시키게 된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전과는 당시에 고문관인 미군 Ford대위가 적전차 측방 사격을 가르쳐준 결과였다.
얼마뒤에 포천에서 덕정에 이르는 비상도로에 전차가 나타났는데 처음에는 미군 전차인줄 알았는데 미 포드 대위가 적전차라 하여 퇴로차단을 우려하여 덕정-우이동선으로 철수해 내려갔다.
27일 연대장이 병력 배치선을 확인 하고 수유리부근에 이르렀을 때에 적 정찰대로 보이는 편의대로부터 사격을 받아 헌병과 연대장이 전사하였다.
제7사단 제1연대 제1대대장 중령 한태원의 증언이다.('65.12.7)
"그 당시에 진지공사는 얼마나되었습니까?"
"그때 진지공사가 콘크리트로 다 했어요. 접근로에 토치카도 만들었지요. 그 토치카가 남아 있어요."
"6.25나고 나서 애기를 해주세요."
"6.25일 04:00경 될 겁니다. 우리 대대의 1개 중대가 초성리에서 38선 경계임무를 하고 있는 전초중대인데 맨 처음 공격을 받고 중대장 이하 한사람도 못 살았어요."
"중대장이 기억이 납니까?"
"기억이 안나는데요. 이모 대위입니다. 그리고 동두천이 주저항선인데 앞산에 제2대대가 있고 이쪽 제9연대가 있었고 마차산에 1대대가 올라가 대대장 이하 하나도 못내려왔어요.
대대장이 5기생 김봉영인데 행방불명이고 제2대대장이 이명 소령인데 수색에서 전사했어요.
그날 비가 오고 밤 10시에 주저항선을 포기하고, 적이 좌우 측방으로 들어와서 어쩔수 없이 철수하게 되는데 우리 포병이 정말 잘 싸웠어요. 적이 집결된 곳에 퍼부어 1개연대가 완전히 녹았어요.
덕정으로 내려와 덕정국민학교에 집결시켜 이때 올라온 제3연대 1개 대대를 받아 편성해서 1개 대대는 적성으로 내보내고 2개 대대로 동두천 앞으로 전면 공격을 하여 점령하는데 그때 뭐냐하면 제1연대가 서북출신들이 많았는데 죽어도 후퇴하지 않는다 이것입니다.38도선을 넘자, 안된다. 탄약도 떨어지고 안된다고 억지로 끌고 나왔는데 벌써 덕정에 인민군이 들어와 있어요. 적성으로부터 뚫린 겁니다. 그쪽으로 나갔던 1개 대대가 녹은 것입니다.
여기서 포위되어 가지고 의정부까지 나왔는데 여기도 적이 들어와 있어요. 이 적은 제9연대가 싸우지않은 겁니다.
26일 밤에 대대를 이동시켜 우이동 뒷산에 가서 자고 27일 아침에 우이동에 나오니까 연대본부가 있어요. 병력이 2개 중대 밖에 안되는데 우이동 골짜기에 채병덕 총장이 나와 있어요.
창동 방어선이 엉망입니다. 제2사단, 제5사단, 제7사단, 수도사단 등 막대한 병력이 있었어요.
그때 실수가 뭐냐하면 지휘가...... 지휘체계가 확립되지 않았어요. 서로 왔다갔다 하고 27일날 창동 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전차 2대보고 다 흩트러진 것입니다.
(한태원 중령은 함준호 연대장 전사가 적 전차포에 맞아서 전사했다고 증언함)
(마차산에 올라간 부대도 다 녹았다고 증언함. 윤흥정 당시 1연대작전보좌관도 아무도 못나왔다고 함)
이상의 제1연대 지원부대 및 1연대 참전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몇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부대에 너무 많은 세포들이 있어 전투력 발휘가 곤란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뭔지는 모르지만 분명 군 내부에 파벌이 있어 서로를 불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부대간에 전혀 통신수단이 없고 그러니 측방이 뚫려도 그냥 내버려 두어 인접 부대가 전투력을 발휘도 못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네째는 병력을 축차투입하고 건재를 무시해 버렸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전혀 준비되지않은 예비대가 들어와 실질적인 전투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여섯째는 이런 와중에도 일부 부대장이나 실무진의 노력으로 그래도 의정부 축선이 하루라도 지탱한 결과를 가져 왔다는 것이다.(제1연대의 적전차 격파)
일곱째는 전사에 주목받지 못한 내용이 일부 있다. 적성으로 간 부대와 초성리의 전초중대 금곡리의 제25연대 일부 인원등 전사한 곳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6절 민간인 피해현황 : 차후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