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친 글] 마른 논바닥 / 박복남
화요일 저녁 글쓰기 수업을 하고, 수요일 새벽에 서울로 갔다가 토요일 저녁에 집에 왔다. 그제야 이번 주에는 뭘 쓰나 하고 앉았다. 아홉 시가 다 되어 먼저 올리신 분 글 한 편 읽는데 눈이 슬슬 감겼다. 이래서야 틀렸다. 너무 일찍 자면 중간에 깨서 오히려 다음날 더 피곤해진다. 영화 보는 남편 옆에 앉았다. ‘역린’, 정조(현빈 분) 이야기다. 한 번 봤었다. 조금 보려고 앉았다가 일어서지 못했다. 거리의 아이들을 데려다 살수(殺手:죄인을 죽이는 사람, 망나니. 영화에서는 살인 청부업자)로 키우는 사람이 있다. 가장 뛰어난 두 아이 중 한 명에게 정조를 죽이는 임무를 맡겨 내시로 궁에 들여보낸다. 어릴 때부터 정조와 같이 큰 그(정재영 분)는 상책(조선시대에 내시부에서 책을 관리하는 종4품 벼슬)이 되어, 정조를 그림자처럼 지킨다. 성인이 된 다른 한 명(조정석 분)은 ‘임금의 목을 따라’는 명을 받았다. 왕의 암살을 둘러싸고 살고, 죽고, 살려야 하는 자의 엇갈린 운명의 장면이 펼쳐졌다. 앗! 숙제 실마리가 섬광처럼 스쳤다. 저 눈빛이 나오게 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었지.
매일 새벽에 일기를 쓰면서 내 마음을 풀어냈다. 머리에서는 스멀거리는데 글로 적히지는 않았다. 그러다 어쩔 땐 또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내 모습이 툭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 맛에 자판 앞에 계속 앉았다. ‘한 10년 하다 보면 되겠지.’ 느긋하게 잡았다. 5년이 넘어가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공부를 좀 해야겠다 하던 차에 목포대학의 ‘일상의 글쓰기’ 수업을 소개받았다. 한 주에 한 편 글을 써내고 교정을 받을 수 있다 했다. 딱 찾던 강좌였다. 주제를 받아서 글을 쓰니 생각을 다양하게 하게 되었다. 일기는 나오는 대로 쓰면 그만이지만 공개해야 하는 글은 그럴 수 없다. 초안을 마치고 나면 글이 계속 머리에 맴돈다. 전체 흐름을 새로 짜기도 하고, 부분을 고치기도 하고, 좀 더 짜임새 있도록 단어를 바꾸기도 했다. 어감에 맞도록 조사와 어미를 요리조리 매만졌다. 그러다가 막히면 덮어 두고 다른 일을 했다. 몸은 자리를 떠났지만, 머리는 그 생각을 계속해서 연결 부분을 찾아냈다. 처음 듣는 수업이니 교수님의 빨간색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어느 것이 맞을지 확신이 들지 않으면 너무 애쓰지 않고 그냥 올렸다. 틀린 것을 알아야 바로 잡지 모호한데 맞으면 내 것이 되지 않는다.
빨간색이야 그러려니 하는데 다른 분들의 글을 읽으니 기가 죽었다. 재미있는 글, 묘사가 뛰어난 글, 편안한 글, 솔직한 글. 부럽다고 다 따라 할 수는 없다. 글은 쓰는 사람을 나타내는데 나를 바꾸지 않고서야 바랄 수 없다. 내 글을 만들어야지. 이제 시작하는 나는 어떤 글이 맞을까 고민도 했다. 이런 글, 저런 글을 시도해 보았다. ‘빚’이 주제로 나왔던 주였다. 기본소득제를 제법 파고들어 찬반으로 토론한 적이 있었다. 맨땅에서 썼다면 어려웠을 텐데 공부했던 자료가 있었다. 짧은 분량에 논리에 어긋나지 않게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시사 부분은 공부해야만 할 수 있다. 하고 나면 뿌듯해 이쪽인가 싶다가, 내가 하려 했던 건 그게 아니었지, 하고 초보답게 갈지자걸음으로 길을 찾고 있다.
올해 계획한 일만 해도 좀 버거운데, 학기가 시작되고 어찌할 수 없는 큰 일이 하나 보태졌다. 가는 데까지 해 보자 했는데 끝이 왔다. 더 열심히 하지 못해 아쉽지만, 한 편 두 편 해 내는 사이 눈에 보이지 않게라도 살집이 붙었을 거다. 빨간색 세례를 받고 고친 글은 문장이 가벼워졌다. 함께하신 분들의 입김도 힘이 되었다. 댓글도 자신의 시각이 있어야 단다. 나는 눈으로 보기만 했다. 방학하면 책 좀 읽어야겠다. 입력은 없이 출력만 해 대어 머리와 가슴이 마른 논바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