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 : 행복한 가족관계를 소망한다면(창 2:20-25)
2023.3.19.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사순절(四旬節, 부활을 앞 둔 40일의 기간)이 계속되고 있다.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여러 가지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 중에도 뺄 수 없는 중요한 것이 회복(Recovery)이라는 말이다.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어그러진 모든 관계들이 회복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십자가는 회복의 복음이다. 그렇기에 남녀노소, 빈부귀천 그리고 신앙의 연륜에 상관없이 심지어 아직 믿고 있지 않은 불신자라 할지라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마음에 영접하면, 그 사람의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 어그러진 관계들이 회복될 수 있다. 또한 이미 믿고 있는 성도들은 천국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이처럼 회복된 관계들이 행복하게 잘 유지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 머물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부터 부활절을 지나 오순절 성령강림절 직후까지 몇 주 동안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회복되었고, 또 계속해서 회복되어 가야할 12가지 주제를 함께 나누려고 한다. 12동안 “1-2) 사람과의 관계회복(가정, 용서), 3-6)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신분, 예배, 기도, 묵상), 7) 건강회복(신유) 8-10) 사명회복(직분, 나눔과 섬김, 선교), 11) 오직 성령으로 권능으로(영적싸움), 12) 주님 만날 그날을 사모하며(천국과 재림)”이다.
물론 이 12가지 주제에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다 담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절과 오순절에 이르는 이 기간 동안, 회복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첫사랑과 믿음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가장 먼저 오늘 이 시간은 그 첫 시간으로 가정에서의 관계회복이다.
최지우 주연의 “올가미”라는 영화가 있다(1997년 개봉). 개봉한지 꾀 오래되었지만, 지금도 어머니의 아들 관계와 고부간의 심리를 가장 심도 있게 다룬 작품 중의 하나로 회자되고 있다. 이 영화에는 아들을 자기의 소유처럼 생각하면서 집착하는 시어머니(故 윤소정)는 며느리(최지우) 사이의 갈등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아들(박용우)이 등장한다.
이 영화에 보면, 시어머니는 아들이 없을 때만, 교묘한 방법으로 며느리를 괴롭힌다. 거짓말로 며느리를 음해하고 오히려 피해자인척 눈물 연기를 하는가 하면, 며느리를 층계에서 밀어 버리기도 하고, 심지어 머리끄덩이를 잡고, 머리를 욕조에 쳐 넣고 찍어 누르면서 물고문까지 한다. 그래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며느리는 집을 나가 버린다. 이 일로 아들과 다투다가 뒤엉켜 넘어지면서 아들이 죽고 만다. 이후에 거짓말로 며느리를 다시 집으로 유인해서 감금하고 끔찍한 고문을 한다. 비록 영화 속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가족 사이에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어디서부터 가족 사이에 관계들이 파괴되었고,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경적으로 볼 때, 창세기 3장의 아담과 하와 타락 이후에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부패한 죄성이 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욕심과 생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처럼 어그러진 생각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자녀를 내 것(소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며느리나 사위를 ‘내 아들(또는 딸)을 빼앗아간 나쁜 인간“ 쯤으로 생각하고, 자녀들은 내 말을 잘 들어야 착한 아들 또는 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가족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는가? 성경은 자녀를 비롯한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말씀한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의 주인이시면, 우리는 당연히 종들(청지기)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령과 뜻에 맞게 살아야 한다. 이것은 가정에서의 관계도 그렇고, 나의 생명과 시간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다 마찬가지이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인류 최초의 혼인예식이 나온다. 신랑은 아담이고, 신부는 하와이며, 주례는 하나님이셨다. 창세기 2장 2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해주셨던 주례사도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주례사를 말씀하셨을까? 다 같이 읽어 보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성경적인 매우 중요한 결혼생활의 원칙을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부모를 떠나는 것과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떠남의 원리). 여기서 말씀하신 ‘부모를 떠나라’는 말씀은 부모님과 관계를 끊고 남남으로 지내라는 말씀이 아니고, 정서적이고 경제적인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흔히 떠나지 않고, 떠나보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흔히 이런 종류의 말들을 한다.
(떠나지 않은 자녀) “우리 엄마(아빠)는 안 그런데 당신은 왜 그래?”
“당신은 우리 엄마 솜씨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어!”
(떠나보내지 않은 부모) “내가 너를 어떻게 길렀는데 감히 나에게…….”
그러나 떠나고 떠나보내야 한다. 이러한 떠남의 원리를 이해하기 쉽게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것이다. 부모는 자녀나 자녀들의 가정 곁에(Beside them) 있어야 하는 것이지, 그들 사이에(Between them)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많은 경우에 “곁에 있는 것”과 “사이에 있는 것”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데서 부터 갈등이 시작된다. 올가미라는 영화 속의 시어머니와 아들도 이 차이를 구분 못했다.
부부사이에는 예수님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끼어들면 안 된다. 끼어들려고 하지 말고, 끌어들이려고 해서도 안된다. 끼어들면 끼어들수록 일은 더 커질 뿐이다. 물론 자녀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부모가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도 있다(곁에 있는 것). 그러나 그것을 빌미로 자녀의 가정을 내 맘대로 콘트롤(조종, 통제) 하려고 하면 안 된다(사이에 끼어드는 것).
그러므로 행복한 가족관계를 소망한다면, 자녀를 비롯한 나의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자녀는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그리고 곁에 있는 것과 사이에 있는 것을 잘 구분해야 한다(떠남의 원리). 이것을 잘 구분하고, 처신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청지기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곁에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대답하기 전에 먼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해보기 바란다. 만약 아직 결혼하지 않은 자녀라면 물속에 빠진 사람처럼 필사적인 기도와 말씀으로 양육하려고 힘써야 한다. 이미 결혼한 자녀의 가정이라면, 그들 사이에 끼어들려고 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 눈물로 중보기도하고,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신앙적인 본을 보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목회를 해오면서 들었던 말들 중에서 놀랍게도 “내 엄마(또는 아빠) 때문에 교회 다니기 싫어요”라고 하는 사람들이 꾀나 많았다.
어떤 분은 “목사님, 그 정도의 기본적인 것은 저도 잘 알아요”라고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맞다! 지금 그 기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성품을 신뢰한다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마귀의 머리를 박살내셨음을 믿는다면,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하면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기본을 지켜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반드시 보게 될 것이다.
이처럼 선한 본을 보임으로 가장 좋은 가족관계를 이루었던 실례가 바로 구약성경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와 룻이다.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유대인이고, 며느리 룻은 모압 출신의 이방인이었다. 며느리 룻은 남편이 죽었지만, 끝까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서 이스라엘로 가고자 했다. 얼마 전에 갔던 성지순례 때 들렀던 요르단의 아르논 골짜기가 바로 이들이 신앙적인 결단을 내렸던 곳이다.
왜 이방 여인이었던 며느리 룻이 끝까지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따라가려고 했을까? 물론 룻의 믿음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신앙적인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곁에 있으면서 신앙의 본을 보여준 샘플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청지기(종)이다. 청지기는 주인의 뜻에 맞게, 위임받은 것들을 잘 관리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녀와 자녀들의 가정과의 관계에서 있어서, 사이에 있으려 하지 말고, 곁에 있기를 힘쓰자. 나오미처럼 그들 곁에서 기도하면서, 성숙한 믿음의 본을 보이기를 힘쓰자. 이것이 본래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주례하셨던 말씀이고,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성도들의 마땅한 모습이다. 이 시간 이렇게 살겠다는 결심을 기도로써 주님께 올려드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