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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8. 묵상글 들 ( 연중 3주 목요일-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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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8.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3주 목요일-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나?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
오늘 복음은 등불을 어디에 놓아야 하느냐는 비유적 복음입니다.
등불은 등경 위에 올려놓아 세상을 비추게 해야지
숨기거나 감춰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등불이란 무엇인지 여러 관점에서 볼 수 있는데
오늘 히브리서가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라고 당부하니
올해는 등불이 다름 아닌 선행이라는 관점에서 나눔을 하고자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선행을 얘기할 때 어둠을 밝히는 선행이라고 하고,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선행에 대한 얘기가 간혹 소개되고 있지요.
그것도 자신을 밝히지 않고 선행을 하는 사람 얘기입니다.
예를 들면 전주의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이 대표적인데
20년째 이 익명의 선행이 이어지자 따라 하는 선행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모방 범죄가 있는데 모방 선행도 발생하는 셈이고,
진실한 선행이 자극이 되어 선행을 하는 그러니까
선행에도 전파력이 있다는 뜻이고 표시입니다.
그런데 선행이 다른 사람에게 자극이 되고 전파력이 있기 위해서는
사랑과 선행이 드러나야지 자기가 드러나면 안 되고,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서 선행을 해서는 안 됩니다.
저의 등불 역사를 보면 숨김과 드러냄의 미묘한 관계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제 안에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늘 있었습니다.
옛날에 밖도 아니고 수도원 안에서 살 때도 기도를 한다든지 선행을 할 때
형제들이 그것을 알아주기를 바랐고 특히 원장님이 알아주기를 바랐습니다.
물론 순전히 인정 욕구 때문에만 기도하거나 선행을 하는 것은 아니고
나의 유익과 나의 성화를 위함이 기도와 선행의 더 큰 목적이었지만
인정도 또한 받고 싶었던 것이었지요.
이런 제가 너무도 싫고 어떨 때는 괴롭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인정 욕구가 있는 것 때문에 기도나 선행을 하지 않으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면 즉시 그것 때문에 기도나 선행을 그만두면 안 되지 하는 생각이
떠올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였는데 그것이 제게 너무 괴로웠던 겁니다.
이런 제가 인정 욕구가 여전히 있음에도 생각을 바꾸게 된 것은
달란트를 묻었다가 그대로 돌려줬다는 복음과 오늘 복음 말씀 덕분입니다.
나도 못된 종처럼 달란트를 받았음에도 두려움 때문에 그것을 불리지 않고
땅에 묻었다가 그대로 돌려드리는 우나 등불을 됫박으로 덮어두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사실 인정 욕구는 사랑하지 않는 것에 비하면 죄도 아니거나
죄라고 할지라도 사랑치 않는 것에 비하면 훨씬 작은 죄이지요.
우리는 실로 작은 두려움 때문에 큰 사랑을 종종 놓칩니다.
실수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죄나 잘못에 대한 두려움, 이런 것들 때문에 선행을 못하곤 하지요.
그런데 선행을 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선행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이요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이
제일 큰 실수요 실패요 잘못이요 죄임을 모르는 자의 소치인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더기 무서워 장 못담그는 사람,
실패가 두려워 아무 시도조차 못하는 사람,
죄가 두려워 사랑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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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8.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히브리서에는 “확고한 믿음”과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하는 것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음, 곧 신앙이 희망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우리 신앙의 내용인 하느님 없이 사는 것은 계속 어두운 세계 안에 머물고 우울한 미래를 마주하는 것과(「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2항 참조) 같다고 하십니다.
오늘 독서인 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진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간직하며 살아가고자 서로 도와주며 격려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당신의 백성이 될 것을 약속하시고 우리 또한 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구원으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가 우리에게 권고하듯이 서로 격려하고 염려해 주어야 합니다.
믿음과 희망을 온전히 간직하려면 우리는 사랑과 선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혹시 다른 이들을 위한 애덕의 실천 없이 신앙생활을 통한 개인적인 구원만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를 구원하시고자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며, 또한 교회 안에서 당신 백성의 한 사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서로 연결되고 일치를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만을 위한 구원을 생각하지 않으시듯이 우리 또한 나만을 위한 예수님으로 차지하려 하지 말고, 다른 이들과 함께 주님 구원의 초대에 응답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애덕을 올바르게 실천하며 이웃에게 다가간다면 마치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오늘 복음 말씀처럼 우리의 올바른 신앙과 희망은 다른 이들을 환히 비추는 등불과 같고, 우리는 주님의 은총을 더욱 풍요롭게 받아 기쁘게 살아갈 것입니다.
- 신우식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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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8.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연중 3주 목)
어제 <복음>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는 말씀이 ‘씨앗’에 비유되었다면, 오늘 <복음>인 ‘등불의 비유’에서는 말씀이 ‘등불’에 비유됩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마르 4,21)
여기에서, ‘등불’은 하느님 말씀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곧 ‘말씀’이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요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함지’는 영혼의 능력을, ‘침상’은 몸을, ‘등경’은 거룩한 교회를 표현한다고 해설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그것은 세상 만민을 비추고, 진리의 빛으로 집 안에 있는 이들을 밝히며,
모든 사람의 마음을 거룩한 지식으로 채우게 된다.”
말씀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아두지 말라는 말씀은 “함지”(루카; 그릇)인 우리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덮거나, “침상”인 우리의 몸으로 말씀을 가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곧 말씀을 자기의 능력이나 몸으로 가두지 말고, 오히려 드높이라는 말씀입니다.
‘산상설교’에서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의 사명을 ‘세상의 빛’과 ‘산위의 마을’(5,14)에 비유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세상의 빛’이 되고 ‘산 위의 마을’이 되어 비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마르 4,22)
물론, 빛 아래서는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되므로 거짓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빛이 되어 우리를 비추고 하늘나라의 신비는 드러날 것입니다. 세상을 환히 비추고, 빛과 진리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깊이 새겨듣도록 촉구하십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마르 4,23)
이 말씀은 중요한 말이니, 그 의미를 깊이 새겨들으라는 각성의 촉구와 경고입니다(마태 11,15;13,9;루카14,35). 또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 4,25)
사실, 우리는 그릇만큼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릇이 비워진 만큼 받게 됩니다. 사실은 나누는 만큼 비워지는 것이니, 결국은 나누는 만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나누어주면 나누는 것보다 더 보태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마르 4,25)
이는 나누는 것이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결국 베푸는 사람은 베풀수록 더 많이 받고 덤까지 받지만, 베풀지 않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잃게 될 것입니다(마태 13,12;25,29;루카 19,26). 그처럼, 말씀을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말씀의 등불은 거룩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진정, 말씀의 비추임을 받은 영혼은 더욱 더 많은 열매를 맺고, 더 밝게 빛날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마르 4,21)
주님!
말씀을 제 안에 가두어 두거나 제 발 아래에 두지 않게 하소서.
제 한량한 능력으로 당신 말씀의 권능을 덮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보다 아무 것도 낫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의 빛으로 살고, 빛에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제 삶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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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학자 기념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4,21-25: 등불은 등경 위에 둔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21절) 지혜의 등불은 감춰두지 않고, 사용하여 보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아무리 좋은 우물이라도 물을 퍼주어야 맑은 물이 솟아나지만, 아무도 물을 긷지 않으면 우물은 더러워진다. 쇠도 사용하면 빛이 나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녹이 슨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훈련을 통해 거룩한 옷을 입게 된다고 하겠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셨다. 그리고 산 위의 마을이라고 하셨다(마태 5,14 참조). 우리는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고, 구렁텅이에 빠진 이들을 위하여 우뚝 서도록 부름을 받았다. 등불을 함지 속에 숨겨 둔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 있게 되고 사람들이 와서 부딪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등불의 구실을 제대로 못 하게 된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선행이다. 선은 참되고 충만한 것으로 어둠을 사랑하지는 않는다(요한 3,21 참조). 선은 드러나는 것을 즐거워하고 눈에 띄는 것을 기뻐한다.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나서지 않는 것을 좋아하지만, 있는 그대로 드러나야 한다. 왜냐하면, 선은 그 자체로 확산성이 있기 때문이다. 선은 그냥 퍼져 나간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24절) 내가 하느님께 받은 만큼 청하는 이에게 자비를 되돌려 주는 것만큼 정당한 일은 없다. 가난한 형제에게 베풀어야 한다. 그 형제는 그리스도이시다. 형제에게 주는 것은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이며, 영원히 찬미 받으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는데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겠는가?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주신 것을 우리가 베풀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베푼다고 하는 것 가운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지닌 것 가운데 하느님께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인가를 줄 때, 그것이 우리의 것인가? 우리는 우리에게 주라고 명령하시는 분의 것을 주는 것이다. 우리는 착취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5절) 우리가 들은 말씀을 온갖 노력을 다하여 기억하고 연구하고 실천하도록 하여야 한다. 말씀을 사랑하고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지력이 주어지겠지만,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비록 타고난 재능이나 학문을 통하여 그 뜻을 이해하는 것 같이 보이더라도, 참된 지혜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가졌는지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빼앗겨도 무엇을 빼앗겼는지 알지를 못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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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기념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감추어진 것도 드러내는 등불
오늘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그는 서방 가톨릭 교회에서 아우구스티노에 버금가는 위대한 신학자입니다.
교회 역사 2천 년 동안 출현한 수많은 인물들과 인재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특히 지적인 분야에서
첫 번째 천년에는 아우구스티노가, 두 번째 천년에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손꼽힙니다.
아우구스티노가 쓴 책은 고백록과 더불어 「신국론」(神國論)인데, 이 두 권의 저술로써 그는 고대 교회의
치열한 이단 논쟁을 거쳐 확립한 그리스도교 교리를 새로이 세워져야 할 하느님의 문명에 대해 사색을 펼쳤고,
로마 제국이 무너진 자리에 게르만족을 통해 서양 그리스도교 문명의 입지를 닦았습니다.
그 뒤를 이어 토마스 아퀴나스가 쓴 「신학대전」은 불행했던 십자군 전쟁으로 유입된 앞선 이슬람 문명이
전해준 보물 창고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이용하여 근세와 현대를 준비하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담았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 때 활용한 방법론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준비하던 교부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는데,
이를 신토마스주의, 즉 Neo Thomism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요점은 귀납법적으로 사태에 접근하는 방식입니다.
귀납법은 먼저 전제를 만들어 이끌어내는 연역법과는 반대로 현실에서 문제를
찾아내고 질문과 응답으로 대화를 이어감으로써 진리에 이르는 방식입니다.
역대 교황들은 이 귀납법적 방식에다가 가르멜 수도자들이 발견해 낸 영성으로
현대 사회를 해석할 수 있는 문제의식으로 삼았습니다. 그 요체가 시대의 징표에 대해 묻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시대 상황을 통해
추론해 나가는 방식으로 공의회 문헌이 작성되었습니다.
그래서 현대의 무신론적 풍조를 반영하던 제반 학문들, 즉 과학은 물론 사회학까지도
모두 공의회 교부들에 의해 고스란히 현대 가톨릭 신학의 연구 대상 범주 안으로 얌전히 들어왔습니다.
이는 마치 아리우스 이단의 이분법적 개념들, 즉 성속이원론이나 영육이원론으로 빠져버릴 수도 있었던
빛과 어둠, 위와 아래, 육신과 영혼 등의 개념들을 신앙의 지혜로 조명하여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서를
써 낸 노력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그 결과가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표현으로 압축된 강생의 신비입니다.
이런 노력들은 피뢰침과도 같습니다.
하늘에는 엄청난 양의 전류와 전압을 띤 전기가 구름들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다가 양극 전기를 띤 구름과 음극 전기를 띤 구름이 만나면
초고압에다가 어마어마한 양의 전류를 담은 번개가 칩니다.
그런데 지상보다 높고 전기를 통과시킬 수 있는 재질로 만들어진 피뢰침만 있으면
안전하게 지중으로 그 에너지를 통과시켜 땅 속에 저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아우구스티노나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공의회의 교부들은 하느님의 예지로부터
각 시대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의 번개를 받아서 당대는 물론 후대의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준 피뢰침과도 같은 역할을 해 냈습니다. 오늘 미사의 입당송에서 노래하고 있는 대로,
“주님께서 지혜와 지식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신” 인물들이고,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는 ‘뛰어난 성덕과 거룩한 학문의 본보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메시아 백성으로서의 소명을 다하려면, 시대 현상에
숨겨지고 사람들의 풍조 속에 감추어진 징표들을 해석해 내어 하느님의 뜻을 알아내어야 합니다.
그래서 현 시대의 세상 사람들도 “예수님의 피 덕분에 성소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들의 눈높이로 사색을 해야 하고, 그들의 언어 습관으로 말해 주어야 하며,
그들이 희망을 간직할 수 있도록 좋은 표양으로 등불을 높이 쳐 들어야 합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권고하듯이,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합시다.”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
우리가 기울이는 노력이 하느님 앞에서는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지만,
세상 사람들이나 동료 그리스도인들 속에서는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정의보다 더 자비롭게 엄정하실 정도로
정의로우시기 때문이고, 세상 사람들은 물론 보통의 신자들도
세상살이에 정신 팔려서 하늘을 쳐다보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피뢰침은 클 필요가 없으며 넓으면 안 됩니다.
단 지상의 주변 사물들보다 반드시 높아야 하고 전도성이 높아야 합니다.
높아야 하늘의 전기를 받을 수 있고, 전도성이 높아야 땅에 전해줄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대의 현상과 사람들의 풍조 속에 감추어지고 숨겨진 하느님의 섭리를
드러내어 등불로 비추어주려면, 영적인 묵상과 사색의 높이가 주변 사람들보다 높아야 하고,
그 내용 또한 세속적 이해관계가 섞이지 않고 오로지 순수하게 하느님의 진리만을
통과시킬 수 있을 만큼 순수해야 합니다.
우리의 발은 땅에 든든히 딛고 서되, 눈은 하늘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복음을 담아야 하고,
생각은 그 복음이 현실의 문제들을 풀 수 있는 지혜를 자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매일 매일 주어지는 사건과 만남 속에서 그 안에 숨겨져 있고 감추어져 있는
하느님의 섭리를 알아낼 수가 있고, 필요한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숨겨져 있고 감추어진 하느님을 드러내어 비추어주는 등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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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1225-1274) 기념일.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날로 깊어지는 주님 향한 신망애信望愛의 삶
- 한결같은, 시종여일始終如一의 삶 -
한결같은 시종여일始終如一의 삶이면 좋겠습니다. 날로 깊어지는 맑고 향기로운 신망애의 삶은 누구나의 간절한 소망일 것입니다. 봄꽃도 아름답지만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은 격이 더 높습니다. 봄꽃의 향기도 좋지만 가을열매의 향기는 더 깊고 그윽합니다. 찬란하고 황홀한 일출日出의 사랑도 좋지만 고요하고 평화로운 일몰日沒은 더 마음 따뜻하게 합니다. 시종여일, 유종지미有終之美의 삶이, 초년보다는 노년의 삶이 정말 중요합니다. 강론 묵상중 문득 떠오른 ‘사랑’이란 시입니다.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지나면서 색깔은 바랜다지만
당신 향한 내사랑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지나면서 계속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깊어지면
당신이면 좋겠습니다.”-1997.3
무려 24년전 고백의 시이네요! 물론 당신이 지칭하는 바, 신망애의 주 예수님입니다. 오늘은 참으로 아름답고 깊었던 ‘천사박사Doctor Angelicus’라 칭하는 신망애의 성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 축일입니다. 서방4대교부에 한분을 추가한다면 단연코 성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가톨릭 교리서에 인용되는 횟수도 무려 61회로 성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최고입니다. 학문의 장엄함과 삶의 순수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만49세의 삶이 갈수록 깊고 아름답습니다. 성인의 감동적인 일화를 더 소개합니다.
1.스승 대 알벨토 성인과의 참되고 깊은 우정은 유명합니다. 벙어리 황소라는 별명으로 어눌했던 제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변호한 대 알벨토 성인입니다.
“너희들은 그를 ‘벙어리 황소The Dumb Ox’라고 불렀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 앞에서 선언한다. 그가 언젠가 교의(敎義in doctrine)를 크게 부르짖으면 온세상에 울릴 것이다!”
2.성인의 삶과 가르침을 요약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성인은 언젠가 경당에서 그가 썼던 믿음의 신비들에 대한 글들이 정확한지 걱정스럽게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물었을 때 주님의 답에 이어 성인은 그의 소원을 고백합니다.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말했구나. 너는 무슨 상급을 바라는가?”
토마스가 드린 답은 예수님의 친구들이자 제자들인 우리 모두의 소망을 대변한다.
“주님! 오직 당신뿐입니다(Nothing but youself, Lord!)”
3.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살아있는 믿음, 열렬한 경건의 깊이에서 하느님께 청원의 기도를 바칩니다.
“오 주 하느님! 청하오니 저에게 당신을 알 수 있는 정신mind을, 당신을 찾을수 있는 마음heart을, 당신을 발견할 수 있는 지혜wisdom를 주소서. 항구한 믿음으로 당신을 기다리면서, 끝까지 당신을 희망으로 포옹하면서 즐겁게 당신께 인도되게 하소서.”
4.전해지고 있는 성인의 1273년12월6일 신비체험후 마지막 유언같은 말씀도 감동적입니다.
“이런 비밀들이 밝혀지니 내가 썼던 모두가 이제 ‘많은 지푸라기so much straw’ 같구나!”
오늘 복음의 진리가 그대로 성인을 통해 입증됩니다. 등경위에 놓은 등불 예수님을 닮아 온세상을 밝힌 성인입니다. 비밀은 없습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신망애의 내면 역시 말 안해도 은은한 빛으로 투명히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주님의 말씀을 깨어 깊이 ‘귀기울여 듣고’ 주님을 ‘눈여겨 보면서’ 신망애의 내면을 충실히 하라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너희는 새겨 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
우리의 영적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진리입니다.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살면서 날로 깊어지고 새로워지는 향주삼덕 신망애의 삶을 살라는 주님의 촉구 말씀입니다. 오늘 히브리서 역시 위대한 대사제 예수님께 신망애의 삶으로 응답할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합시다. 약속해 주신 분은 성실하신 분입니다.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 어떤 이들이 습관적으로 그러듯이 우리 모임을 소홀히 하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격려합시다.”
여기서 주목할 바, 하느님의 집에 대한 주석입니다. 주석가들은 대부분 하느님의 집을 천상성소나 하늘로 보기보다는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을 이루는 하느님의 가족, 공동체로 봅니다. 그러니 내 몸담고 있는 믿음의 공동체가 하느님의 집이라는 말씀이니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히브리서 저자의 참 아름답고 깊은 신망애 삶의 촉구 말씀입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일맥상통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13,13).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 향해 날로 깊어지고 새로워지는 신망애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를 위한 바오로 사도가 전하는 최고의 평생 말씀 처방전 둘을 선물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2,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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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제가 들었던 강론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지난 1월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의 강론입니다. “한해를 시작하면서 성모님께 봉헌하고 싶은 분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코로나19의 현장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의료진들 봉헌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분들의 수고와 노력이 있기에 많은 분들이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신앙생활을 하는 교우들을 봉헌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체온을 재고, 마스크를 쓰고, 거리두기를 하면서도 영상으로 미사에 참례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주는 교우들이 있었습니다. 불편함을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코로나19의 희생자들을 봉헌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수고한 모든 이들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을 안아주셨던 것처럼 희생된 모든 분들을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해 주실 거라고 하였습니다. 강론을 마치면서 2020년에 돌아가신 교우들의 이름을 불러주었습니다.” 저도 작년에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하며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들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희망’입니다.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는 이유는 가을에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두운 밤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 것은 다음날 태양이 다시 떠오른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어딘가로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은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과 선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같은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원수까지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수난과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열정적으로 하는 사랑입니다. 세 번째는 ‘격려’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합니다. 매일 칭찬받는 꽃은 더 아름답게 핀다고 합니다. 매일 칭찬받는 소는 더 많은 우유를 만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다는 자캐오를 칭찬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망’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낮기를 원하느냐?, 믿느냐? 구하여라. 얻을 것이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찾아라. 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찾고 구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신앙은 결단이고, 신앙은 갈망을 통해서 성장합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하느님께로 나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넘치도록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 그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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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8. 연중 제3주간 목요일.<어둠을 탓하기보다 등불이 되어라>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야 제대로 비출 수 있습니다.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는 사실을 제대로 활용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삶이 빛나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이 깊을수록 우리의 소명은 더 커집니다. 그러나 어둠을 탓하며 절망하는 이도 있습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하나의 등불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말씀으로 준비하는 이가 참 신앙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4.16). 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면 그 기운이 이웃에게 전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기운이 감싸면 악한 기운은 서서히 떠나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히브10,22).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빛’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령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4,25)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말씀을 믿고 행하는 사람은 풍요로워지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믿음을 잃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간수 하지 않는 것은 곧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우울해하며 남을 비판하고 불평불만 하면서 아무런 생산적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움켜쥐면 빼앗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먼저 주면 빼앗길 것이 없습니다. “쌓아 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무엇이든 먼저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부유한 사람이고, 주지 않는 사람은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쌓아 놓았다 할지라도 이웃과 나누지 못하면 그것은 있으면서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부유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부자가 되어서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차고 넘치도록 받으시고 이웃과도 잘 나눌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남에게 도움이 되는 것 하나를 장만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을 남에게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통해 우리의 삶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추기경으로 서임 받을 때의 일입니다. 로마에서 있었던 서임식에 참석하여 축하하기 위해 로마로 가려고 한 지인에게 “비싼 돈 들여 나를 보러 오지 말고, 그 돈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부해 주세요.”하였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히브10,24). 마무리하겠습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4,24).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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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8. 연중 제3주간 목요일. <등불의 비유>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마르 4,21)”
이 말씀은, “자신의 신앙을 감추지 말고, 적극적으로 증언하고 고백하여라.”
라는 계명입니다.
신앙을 감추는 것은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는 것은 ‘배교’입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자신의 신앙을 말과 ‘삶’으로 증언하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증언하고 고백함으로써 더욱 단단해지고 깊어집니다.
그러나 감추면, 점점 희미해지다가 사라집니다.
결국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산상 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여기서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피난처’, 또는 ‘안식처’를 뜻합니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라는 말씀은,
교회는 세상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안식처)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그 피난처(안식처)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 피난처는 신자들만을 위한 곳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곳입니다.
여기서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으로 해석됩니다.
‘착한 행실’이라는 말은,
믿음, 희망,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신앙생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떤 고난과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희망,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주는 사랑.)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인도해 주는 신호등 같은,
또는 등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라는 계명입니다.
혹시라도, “그냥 나 혼자서 죄 안 짓고 조용히 신앙생활 하면 안 되나?”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답은 “안 된다.”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1코린 13,2).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사랑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1요한 4,8) 믿는 신앙에서 사랑이 빠지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이 아니면 대체 뭐냐?”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텐데,
그것은 그냥 머리로만 생각하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이고, 그 생각이 믿음인 것은 아닙니다.)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마르 4,22).”
이 말씀은 다음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됩니다.
1) “복음을 숨기지도 말고, 감추지도 마라. 적극적으로 선포하여라.”
마태오복음을 보면, 이 말씀 뒤에 다음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7).”
그리고 이 말씀은 다시,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복음 선포는 모든 신앙인의 기본 사명입니다.
2) “너희가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온 세상에 전해지는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복음 선포에 동참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자기 몫을 차지하겠지만,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은 차지할 몫이 없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진행되다가
언젠가는 완성될 것입니다.
그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다면, 지금 동참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28-29).”
이 말씀을, 현세에서 누리지 못한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는 약속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런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얻어 누리기를 바란다면,
적극적으로, 또 능동적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라는 말씀은,
“흘려듣지 말고 ‘온 삶으로’ 실천하여라.” 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 4,24).”
이 말씀은, “뿌린 대로 거둔다.” 라는 속담을 조금 바꿔서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공평하고(차별이 없고), 무한하고, 영원합니다.
그러나 능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만 그 은총을 자기 것으로 만듭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은총을 주시는데도 자기가 안 받아서 못 받게 됩니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증언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고,
사랑을 실천하고,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고,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인도하고,
...... 이런 일들은 주시는 은총을 잘 받아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방법입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 4,25).”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더욱 풍성하게 은총을 받겠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받은 은총도 잃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무슨 앙갚음을 하듯이 그렇게 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각자 자기 자신이 그런 결과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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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8. 새벽을 열며.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빠다킹 신부님.
지금은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는 장한나는 어린 시절부터 ‘첼로의 신동’으로 불렸었습니다. 특히 1994년 세계 3대 콩쿠르로 꼽히는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차지하여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의 나이가 12살. 어린 장한나에게 첼로의 거장 로스트로포비치가 이런 메모를 건넸다고 합니다.
“한 달에 네 번 이상 연주하지 말기. 음악 안 하는 친구들이랑 열심히 놀기. 학교 열심히 다니기.”
장한나는 거장의 말을 충실하게 따랐습니다. 사실 이해 안 되는 말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더 열심히 연주하고, 같은 공감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음악 안 하는 사람 만나는 것보다 더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놀 수 있겠습니까? 학교도 다니지 않으면서 연주 연습에 매진하는데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만약 이렇게 했다가는 그녀는 어느 순간 첼로에 흥미를 잃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일로 첼로를 만나서 늘 커다란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거장의 메모는 그녀를 계속해서 음악을 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첼로 거장의 말이 장한나를 더 성장시켰듯이, 우리를 성장시켜주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오히려 세상을 사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등경 위에 올려놓는 등불처럼, 감추어진 것을 환하게 드러나게 합니다. 그리고 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게 되면, 그냥 그 자리에 머물지 않게 됩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 4,24)
이 말씀처럼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른다면 더 많은 은총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입니다. 영원한 만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만족만을 찾고 있습니다. 세상에 밝게 드러내야 할 주님의 말씀을 함지나 침상 밑에 놓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성장시켜주는 말씀이며, 더 보태주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라야 합니다. 결코 손해 보지 않습니다. 주님 말씀에 기쁨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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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급히 굴지 마라. 행운이나 명성도 일순간에 생기고 일순간에 사라진다. 그대 앞에 놓은 장애물을 달게 받아라. 싸워 이겨 나가는 데서 기쁨을 느껴라(앙드레 모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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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하루에 5km 이상을 걷습니다. 묵주기도를 하며 걷는 시간인데 제게는 너무나 유익한 시간입니다. 분명히 누워있거나 의자에 앉아 있는 것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걷기이지만, 집에 돌아와 샤워하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최고의 휴식이 산책이라고 했나 봅니다. 또 어떤 이는 ‘앉은 곳을 벗어나는 것이 휴식이다.’라는 말도 했습니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휴식 같지만 사실 가만히 있으면 더 피곤함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움직여야 진정한 휴식 체험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의 문제도 그렇지 않을까요? 아무런 문제도 없고, 어떤 어려움도 없다면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더 힘들어질 것입니다. 오히려 행복함을 느끼는 사람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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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8.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원에 확신을 가지라고 우리를 격려합니다.
"주님 말씀은 제 발의 등불, 저의 길을 밝히는 빛이옵니다."(복음 환호송)
시편 119편의 한 구절이 복음 말씀을 듣는 우리 마음을 준비시켜 줍니다. 어두운 밤, 먼 길을 나선 우리는 오로지 손에 들고 있는 등불에 의지해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 순례길을 걷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말씀은 우리 발이 어느 지점을 디뎌야할지, 어느 길을 따라 걸어야할지 밝혀주는 등불입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겠느냐?"(마르 4,21)
어둠이 오면 집 주인은 등불을 켜서 집안을 두루 비추는 자리에 놓고 꺼지지 않게 마음을 씁니다. 등불은 어둠을 밝히기에 가장 효율적인 위치에 놓이게 마련이지요.
심지를 정돈하고 기름까지 채워서 불을 붙인 등불을 숨길 이유는 없습니다. 게다가 등불이 설령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여도 일렁이는 빛까지 막을 수는 없지요. 어둠이 짙을수록 빛의 존재감은 더 강렬해집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 4,24)
주님께서 주신 말씀은 자기 혼자만을 위해 간직하는 사유물이 아닙니다. 말씀을 자기 안에 가둬두는 것은 등불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는 것과 다를 바 없지요. 말씀에 머물러 기도하고 사유하는 이에게는 말씀의 빛이 새어나옵니다. 말씀의 속성이 등불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을 말하지 않으리라.' 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9)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저 묻어만 둘 수 없는 말씀의 속성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빛처럼, 향기처럼, 때로는 천둥처럼 세상을 향해 울리고 퍼져 나가야 합니다. 말씀 안에는 구원을 위한 생명력과 역동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가오신 말씀을 기도 안에 녹여내어 이웃과 나누고, 또 그 말씀을 실천으로 옮겨 사랑과 자선으로 나눕니다. 말씀이 우리를 통해 육화되어 자신과 타인에게 구원이 되는 원리입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마르 4,25)
이 또한 말씀에 머물러 사는 영적 삶의 속성입니다. 나에게서 자라 열매를 맺은 말씀은 누군가를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물이 되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족해도 말씀은 우리와 함께 자라납니다. 우리 존재 안에서, 관계 안에서 순환하고 성장시키고 완성시킵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 구원에 확신을 가지리고 격려합니다.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히브 10,20)
주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소에 들어가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 우리에게 열린 길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길이심을 선포하셨지요.(요한 14,6 참조)
그분은 당신의 몸과 피로 길이 되어 주시고, 길을 걷는 우리를 말씀의 등불로 비추어 주십니다. 그분은 구원의 길에 들어선 우리를 온통 감싸 안고 함께 가십니다.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히브 10,22)
말씀은 우리 존재의 구석구석을 비추는 빛이십니다. 그분 앞에 감추어진 것은 하나도 없지요. 우리 안의 가장 미소하고 나약한 부분까지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고 동행하시니 우리는 구원에 확신을 가져도 좋습니다. "약속해 주신 분은 성실하신 분"(히브 10,23)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말씀으로 초대 받아, 매일 말씀을 접하고, 말씀 안에 머물러, 말씀을 사랑하며, 말씀을 나누고 실천하는 우리 모두는 복됩니다. 막을 수 없는 세월 속에서 언젠가 건강도 재물도 관계도 사라질 터이지만, 말씀은 더 깊고 더 짙고 더 찬란히 우리 영혼에 남아 아름답게 빛날 것입니다. 우리가 간직한 말씀의 빛이 곧 주님의 빛이니, 구원은 이미 우리 안에 와 있습니다.
말씀과 함께 구원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말씀의 빛 속을 거니는 행복한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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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8.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마르4,21)
'등불의 비유!'
등불이 필요한 이유는 어둠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때문에 등불은 어둠을 가장 잘 밝힐 수 있는 등경 위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등불, 말씀의 등불이 되어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너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빛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의 구원과 영원한 구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우리가 함께 이제와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예수님 공생활 시작에서 마침까지,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끝까지 논쟁을 하셨는데,
예수님의 지적은 그들 만의 잔치, 너 만의 잔치가 아닌,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잔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집 나간 작은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셨고, 당신 사랑의 마음이 늘 죄인들을 향해 있었고, 보다 더 낮은 곳으로 향해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모든 복음 선포자들에게 전하는 첫 번째 권고문인 '복음의 기쁨'에서 지금의 우리 시대를 이렇게 진단하셨습니다.
"오늘날 세상의 가장 큰 위험은 온갖 극심한 소비주의와 더불어 개인주의적 불행입니다. 이는 안이하고 탐욕스러운 마음과 피상적인 쾌락에 대한 집착과 고립된 정신에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내적 생활이 자기 자신의 이해와 관심에만 갇혀 있을 때,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가 없어 가난한 이들이 들어오지 못합니다."(2항)
교황께서는 극심한 소비주의와 개인주의를 강하게 지적하셨고, 이것이 지금 우리가 함께 구원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큰 장애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나만을 위한 소비주의와 개인주의와 개인구원주의에서 벗어나, 모두의 구원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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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8.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3주간 목요일]
어느 공동체든 각자가 가진 진리의 한계가 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빛’은 구원의 진리입니다.
만약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네 명의 친구들이 구원의 진리가 없었다면 중풍 병자를 잘못된 곳으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진리는 분명 죄의 용서로 이끄는 이정표와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진리를 찾으려고만 하면 언제든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예수님은 당신 구원의 진리를 감추시지 않고 원하는 누구에게나 알려주십니다.
다만 ‘공동체’에 묶여 있는 것이 이 빛을 보지 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 공동체는 유리벽이 있어서 그 진리의 빛이 통과하는 양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신천지라는 공동체에 속해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이만희 총재가 그리스도의 진리를 하도 많이 가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아무리 똑똑해도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만약 이만희 씨가 강대상에서 똥을 싸고 내려와도 사람들은 그 엄청난 진리를 주제로 토론하고 무언가 깨우치려고 노력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혹은 개신교에 있다면 성체성사나 고해성사와 같은 진리를 깨우칠 수가 없습니다.
그 진리를 믿는 즉시 공동체를 바꿔야 하기 때문입니다.
각 공동체는 그 공동체를 유지하는 기둥이 있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와 멀수록 빛을 감소하게 만듭니다.
개신교 목사로서 33세에 최연소 광주지역 노회장(천주교로 치면 주교님과 비슷한 위치)이 되었다가 지금은 천주교로 개종한 김재중 요셉 형제가 있습니다.
그분이 노회장을 할 때는 죽었던 사람까지 되살아날 정도로 수많은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연봉이 박정희 대통령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그는 원래 천주교를 마리아 숭배교라 부르며 싫어했습니다.
성당에 성모상이 있는 것은 마치 성전에 바알 우상이 세워진 것처럼 끔찍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는 그러던 중 병이 들어 잠시 노회장 일을 쉬게 되었습니다.
이때 삼위일체 신비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었는데, 성모송을 듣고는 그만 까무러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렇게나 끔찍하게 여기던 성모님을 향한 천주교의 그 짧은 기도 안에 삼위일체 신비가 다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성경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성모송은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기도문입니다.
그래서 믿을 수 있습니다.
“은총이 가득 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삼위일체 신비를 공부하던 중이라 당연히 ‘은총’은 인간의 죄로 끊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님께 그 은총이 가득하다고 인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수백 번 읽었지만 성모님이 그래서 원죄가 없으시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으니 하느님과 함께 있을 수가 없는데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님께서 하느님과 함께 계신다고 말해줍니다.
이것은 성모님께서 원죄가 없으시다는 확실한 증거지만 개신교 공동체 안에서는 이 진리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아버지와 함께 계시면서도 성령으로 성자를 잉태하셨으니 자신이 그렇게 저주하고 돌을 던지던 성모님 안에 삼위일체 하느님이 다 존재하고 계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느님을 모신 성모님께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를 깨닫고 나니 뒤집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진리를 받아들이려면 개신교 공동체를 떠나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받고 있던 모든 명예와 재물과 편안한 삶까지 다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냈습니다.
그랬더니 교회에서 받는 모든 지원이 끊겼고 곧바로 실업자가 되었으며 이젠 개신교 신자들에게 미움과 질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가톨릭교회에서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며칠을 굶고 난 뒤 너무 허기가 져 남의 집 개밥을 훔쳐 먹다가 개에게 손을 물려
고생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개종에 성공하였고 파티마 성모의 푸른 군대 회장직을 맡을 정도로 충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습니다.
로마의 성 바오로 성당에 가면 유리가 얇은 대리석으로 되어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무리 대리석을 얇게 잘라서 창문을 했더라도 일반 유리보다는 빛이 들어오는 양이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당 안은 컴컴합니다.
공동체는 이런 벽들로 둘러쳐진 집과 같습니다.
어떤 공동체는 더 두꺼운 창문으로 둘러쳐져 있어서 진리의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 곳에서는 눈이 있어도 장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그런 공동체에서 노력하는 것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바꾸는 것이 우선입니다.
로버트 기요사키 씨는 아빠를 바꿔서 성공했습니다. 가족도 공동체입니다.
그의 책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서는 그의 두 아버지가 나옵니다.
친아버지는 공무원으로 열심히 일하는데 항상 가난했고,
친구의 아버지는 배운 것이 없는데도 돈의 원리를 알아 부자였습니다.
그는 친아버지가 공부 열심히 해야 잘 살 수 있다는 진리를 버리고 돈이 돈을 벌게 만들라는 친구 아버지의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랬더니 부자가 되었고 그래서 이런 책을 쓴 것입니다.
공동체마다 품고 있는 진리가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공동체에 속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깨닫게 되는 구원의 진리의 정도도 달라집니다.
좋은 공동체를 가지면 더 좋은 진리를 깨우칠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먼저 좋은 공동체를 갖기 위해 나 자신을 내어줄 수 있다면 더 많은 진리를 깨우치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이 말씀을 인용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공동체, 반드시 그 공동체에 속해야 더 많은 진리를 깨우치게 됩니다.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여러 작은 공동체들이 있고 그 공동체가 품고 있는 진리의 양이 각기 다릅니다.
내가 어느 공동체에 속해있는지 잘 살피고,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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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8.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주간 목요일]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생각나게 하는 사람
헨리 나우웬 신부님께서는 교회안의 봉사자인
‘사목자’들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결국 ‘산위의 등불’ 같은 사람이네요.
그를 보는 사람마다 쓰라렸던 마음이 순식간에 따뜻하게 풀리게 되는 그런 사람, 그를 바라보면 즉시 흐려졌던 마음이 맑아지게 되는 그런 사람이겠지요.
그로 인해 죄인들도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되는 그런 사람, 그로 인해 만물이 본연의 제 색깔을 찾게 되는, 그래서 세상이 좀 더 밝아지게 되는 그런 사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산위의 등불’처럼 살아가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이 어두운 세상,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는 활활 타오르는 등불로 살아갈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찾아든 경제 한파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갈 길을 잃고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의 삶을 보고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면 좋겠습니다.
돈이 다가 아니다,
없이 살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온 몸으로 보여주길 바랍니다.
나라의 근본인 가정이 급격히 흔들리고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따뜻한 보금자리여야 할 가정이 산산조각 나는가 하면 많은 가정이 말만 가정이지 여인숙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보고 다시금 새롭게 시작하길 바랍니다.
어려울수록 더욱 똘똘 뭉치고, 끝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용서하고 새 출발하는 정녕 복음적인 가정상을 보여주기 바랍니다.
수많은 단체, 기업, 조직, 공동체들이 기반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공동체들이 우리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새로운 모델로 설정하게 되길 바랍니다.
겸손의 리더십, 진지하고 인격적인 소통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장으로서의 우리 공동체를 통해 세상의 모든 공동체들이 다시금 활성화되길 바랍니다.
공동체가 동요되고, 공동체가 분열되고, 결국 공동체가 와해되는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공동체 구성원 각자인 우리들이 모든 것을 공동체에 내어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내어놓음’으로 인해 공동체는 급격히 약화됩니다.
생명력의 결핍이 뒤따릅니다.
‘내어놓음’이란 자양분 없이 절대로 공동체는 활짝 꽃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다운 공동체는 강점이나 약점, 성공이나 실패, 희망이나 좌절,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데서 비롯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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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마르 4, 21)
빛을 밝히는
등불이 있다.
등불은
등불의
길이 있다.
등불의 소명은
서로를 밝히는
사랑이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이 어둠을
빛으로
바꿀 수 없다.
사랑이
미치지 않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사랑 아닌 것이
없다.
사랑이
빛이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기까지
사랑이 필요했다.
하느님 사랑은
기다림의
빛이었다.
그 사랑을
믿지 않았다.
사랑의 등불은
사랑을 담을
믿음의 등경을
필요로한다.
하느님
사랑 안에
너와 내가
살고 있다.
사랑은
아프고
사랑은
기쁘다.
이걸 모르고
살았다.
환하게
밝히는
사랑 앞에서
회개의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우리가
잃어버리고
우리가
감춘 것이
희생하는
사랑이었음을
다시 깨닫는다.
이것이
우리의
길이다.
등불처럼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복음이다.
타오르는 삶이
십자가의 삶이다.
등불의 삶으로
사랑의 발자국을
남기신
예수님이시다.
뜨거운 사랑이
겨울과 봄을
이어주고
나와 너를
공동체로
살게한다.
참된 사랑은
어디에 있어도
사랑이 된다.
사랑이
오늘을 다시
환하게
밝히고 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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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8. 김 로마노 형제님.
2021년 1월 28일 목요일 [연중 제3주간 목요일] 등불은 등경 위에 (마르4,21-25) ![]() 제1독서<확고한 믿음으로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하고.>(히브10,19-25) 19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피 덕분에 성소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20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곧 당신의 몸을 통하여 그리해 주셨습니다. 21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사제가 계십니다. 22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겼습니다. 23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합시다. 약속해 주신 분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24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 25 어떤 이들이 습관적으로 그러듯이 우리의 모임을 소홀히 하지 말고, 서로 격려합시다. 여러분도 보다시피 그날이 가까이 오고 있으니 더욱더 그렇게 합시다. 화답송 시편 24(23),1-2.3-4ㄱㄴ.5-6(◎ 6 참조) ◎ 주님, 이들이 당신 얼굴을 찾는 세대이옵니다. ○ 주님의 것이라네, 온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온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그분이 물 위에 세우시고, 강 위에 굳히셨네. ◎ ○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 ◎ ○ 그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얻으리라. 이들이 야곱이라네. 그분을 찾는 세대, 그분 얼굴을 찾는 세대라네. ◎ 복음 <등불은 등경 위에 놓는다.>(마르4,21-25) 21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22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23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24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25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 덕분에 성소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곧 당신의 몸을 통하여 그리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사제가 계십니다." (19~21) 히브리서 저자는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면서 서두에 인과 접속사 '운'(un; therefore)을 사용한다. 이것은 지금부터 진술할 내용이 앞에서 언급된 내용의 결과이거나 거기서 추리된 것임을 보여준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단어를 통해서 자신이 지금까지 논의한 신학적 요지 곧 그리스도께서 당신 피로 한번에 영원한 제사를 바치신 것과 이로 인하여 믿는 자들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하느님과의 직접적 친교의 길이 열렸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확신을'로 번역된 '파르레시안'(parresian)은 히브리서 전체를 통해서 자주 나타나는 중요한 단어이다(히브10,35; 3,6; 4,16). '파르레시안'은 '모든'을 뜻하는 '파스'(pas)와 '연설'을 뜻하는 '레시스'(resis)의 합성어에서 유래했는데, 문자적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자유'를 나타낸다. 이것은 원래 정치의 영역에 속했던 단어로서 그리스 도시 국가의 완전한 시민이 누리는 발언의 권리를 뜻한다. 그들은 공적 집회에서 자신들의 견해를 자유롭게 터놓고 말할 수 있었지만 외국인들에게는 이러한 권리가 없었다. 이런 자유 시민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나타내는 '파르레시아'(parresia)라는 단어를 통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성도가 하느님 대전에 특권을 부여받은 존재임을 밝힌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에는 지상 성막의 지성소에 조차도 일반인들은 물론 사제들의 출입도 엄격히 통제되었으며, 대사제만이 일년에 한 번 속죄의 날에 피를 가지고서 들어갈 수가 있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인 지상 성막의 지성소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계신 참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음을 이 단어가 보여주는 것이다. 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무모한 도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이자 권리이며, 구원의 확신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임을 이 단어가 보여준다. '성소에 들어간다는' '성소에'로 번역된 '톤 하기온'(ton hagion)은 레위 계통의 대사제가 일년에 한 번씩 제물을 가지고 들어가던 지상 성막의 지성소와 비교되는 원형으로서 그리스도께서 계신 천상 하느님의 옥좌를 지칭한다. 히브리서 9장 11절과 12절에는 이것이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막'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약의 대사제들은 일년에 한 번 그것도 정해진 날에 제물을 가지고서야 지상 성막의 지성소에 겨우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언제든지 살아계신 하느님의 옥좌 앞에 나아가 그분과 대화할 수가 있다(에페3,12; 히브4,16). 구약의 대사제들조차도 꿈꿀 수 없었던 특권이 신약의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들은 실체가 아닌 모형에조차 자유로이 출입할 수가 없었으나, 우리는 모형이 아닌 실체에 언제든지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명실상부한 자녀의 권리를 누리게 된 것이다. 새 계약 아래에 있는 자녀들은 언제든지 직접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으며 일체의 필요한 것들을 구할 수 있다.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열어 주셨습니다'로 번역된 '에네카이니센'(enekainisen)은 '새롭게 하다', '신성하게 하다'를 뜻하는 '엥카이니조'(engkainizo)의 과거 시제이다. 본절인 히브리서 10장 20절 이외에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사용된 히브리서 9장 18절에서 '세우다','시작되다'라는 의미로 번역되었다. 이 길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믿는 성도들, 곧 우리를 위해서 새롭게 봉헌하신 길이다. 봉헌된 그 길을 통해 믿는 이들은 언제든지 아버지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구약 시대에는 아직 이 길이 열리지 않았으므로 아무도 하느님 옥좌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몸을 통하여 완전한 제사를 한 번에 바치신 이후에는 그를 믿는 누구라도 거룩하신 하느님의 옥좌로 나아갈 수 있다. '그 휘장을 관통하는' '휘장' 즉 '카타페타스마토스'(katapetasmatos)의 원형 '카타페타스마'(katapetasma)는 '펼쳐진 베일'(a veil spread out) 또는 '휘장'(a curtain)을 의미한다. 본문에서는 성막의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던 휘장을 지칭한다. 이것은 지성소의 모습을 철저히 가리는 것이었으며, 그 안으로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오직 대사제만 1년에 한 차례씩 속죄의 피를 가지고, 그 휘장을 열고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 철의 장막과도 같던 휘장이 마침내 위에서부터 아래로 두 갈래로 완전히 찢어졌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숨을 거둔 직후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마태27,50.51).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지성소를 굳게 가리고 있던 튼튼한 그 휘장을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찢어버리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두 가지 의미를 보여준다. 첫째, 히브리서 저자가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것은 그 휘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그림자였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즉 그의 몸이 실제로 찢기자 그림자였던 휘장 역시 찢어져 버렸던 것이다. 둘째, 찢어진 휘장이 지성소의 접근을 허용한다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육체적 죽음은 성도들이 하느님께 접근하는 길을 제공한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한편 본문에서 '관통하는'으로 번역된 단어 '디아'(dia)는 '~을 통하여' (through)라는 의미이며, 새롭고도 살아있는 길이 찢어진 휘장을 통하여 봉헌되어 열렸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연중 제3주간 목요일] 등불의 비유 (마르4,21-25) (마르 4,21-25) 21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 등불은 등경 위에 놓습니다. 등경은 교회를 뜻합니다.(묵시1,20) 등불을 비추어 모든 사람들이 보게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함지- 그릇(루가복음)이라 합니다. 그릇- 테무트느 여자, 곧 피조물을 뜻하고 침상은 잠(죽음)을 뜻합니다. 등불-그 빛이 피조물 밑에 덮어 버리면 영원한 어둠, 죽음입니다. 그 빛이 잠, 어둠, 죽음을 덮어야 사는 것입니다. 그 빛- 등불의 의미입니다. 올리브를 찧어서 짠 순수한 기름을 태운 것이 등불입니다.(레위24,2참조) 올리브는 하느님을 뜻하는 것으로 하느님을 찧어 태운 것이 등불- 빛입니다. 그것이 신의 죽음의 모형입니다. 신이 죽어 내는 빛, 등불입니다. 그리고 그 빛은 어둠을 위한 빛, 사랑의 빛입니다. (요한1, 3.4.9)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 = 등불은~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울의 생명, 빛이신 예수님 이십니다. 신의 죽음, 그 빛이 어둠 속에 사는 그 죄인들을 비추어 그 죄인들을 살려내기 위한 생명의 빛, 예수님 이십니다. 등경, 곧 교회에서 그 빛을 드러내어 사람들이 보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둠, 그 죄의 존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그 사랑의 빛이 우리의 생명(용서, 구원)의 빛임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구원의 참 사랑, 참 빛으로 선포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살게 해야 합니다. 피조물, 곧 인간들의 사랑으로 덮어버리면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 학교에서 배운 인간의 도리, 도덕과 윤리의 그 사랑을 다시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면 구원의 빛 그 하느님의 사랑이 덮쳐져 모두가 죽습니다.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빛, 말씀을 주어야, 가르쳐야 합니다. 22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 빛이 비추면 더러움, 흠, 티가 드러납니다. 말씀을 들으면 우리 안에 감추어진 모든 죄악이 드러나야 합니다. 왜? 모든 죄악, 그 어둠, 죄 속에서 다시 살려 내시려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빛으로,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니 빛으로, 말씀으로 내 속에 감추어진 죄악이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 안에 들어있는 죄 몫을 알려주십니다. (마르7, 20-22) 20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21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 이 모든 죄악을 드러내야 합니다. 사람에게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앞에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감추어진 그 죄악을~ 말씀 속에 숨겨진 예수님의 대속, 그 죽음이 구원의 진리로 드러나 죄의 용서, 구원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십자가, 그 피난처에서 쉬라고, 자유 하라고 이끄십니다. 23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24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인정하면)~ 우리 주님은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 그 의로움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1요한 1,9참조) 그러니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인정)하면 고백하는 만큼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죄를 되어서 드리는 만큼 용서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가진 자가 그리스도인 입니다. 25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 우리 모두는 구원의 약속을 받아 가진 자들 입니다. 그 하느님의 약속을 믿는 이는 그 약속의 용서가 실행될 것이고 그 약속을 믿지 못하면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그 약속이 모두 헛 것이 되어 이미 받은 용서를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너희는 새겨들어라.’하신 그 이유를 아시겠지요? 등불은 그리스도의 대속, 그 죽음, 그 사랑의 빛입니다. 인간의 사랑을 말하는 교회가 아닌 하느님의 사랑을 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들 끼리의 사랑은 인간의 도리이지 구원의 진리는 아니라는 말씀! 아시지요? 인간들 끼리의 사랑에 만족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고 인간들 끼리의 사랑으로 만족 해 한다면 , 하느님 사랑으로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건너갑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 그 사랑의 빛 속으로 들어가 참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 아멘 -*^ㅎ^*- 연중 제3주간 목요일 복음(마르4,21~25)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22) 마르코 복음 4장 22절은 선문답처럼 금방 이해가 안되는내용이다. 한글 새 성경이 원문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르'(gar; for)를 번역하지 않아 마르코 복음 4장 22절이 앞 절인 4장 21절과 별개의 문장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가르'(gar; for)를 '왜냐하면'으로 번역하면, 4장 22절은 4장 21절의 종속절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4장 22절의 본문 자체도 부정어 '우'(ou; nothing)와 '메'(me; not)를 두 번 사용하여 강한 긍정을 나타내기 때문에 자구적 의미를 살려 직역하면, '왜냐하면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위해서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숨겨진 것은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이다'라는 유대인의 속담을 나타내는 것으로 봐야 한다(루카8.17참조). 그래서 본문의 의미를 정리하면, 첫째로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사실이 비유로 설명되는 것은 언젠가 드러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 4장 21절에서 등불을 가져 오는 이유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놓아 빛을 밝히기 위한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사실이 비유로 선포되는 이유도 온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이므로, 지금은 미약해 보여도 이 복음은 머지 않아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라는 말이다(마르16,15). 두번째로 이것은 메시야 비밀 사상과도 관련되는데,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는(마르1,43.44) 이유 역시 메시야가 아니시기 때문이거나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때에 드러내시기 위해서 그 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마르15,2). 세번째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을 격려하는 의미가 있다. 일반 무리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천국은 감추어져 있는데 (마르4,10,13), 여기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이미 천국의 씨는 뿌려졌고(마르4,27), 그 씨가 아직은 미약한 단계이지만 곧 자라나(마르4,28) 크게 성장하면, 온 세상에 천국의 비밀은 공개될 것이라는 것이다(마르4,32; 사도1,8; 5,12~16).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이 구절은 마르코 복음 4장 22절 전반절의 '~아니기 때문이다'에 해당하는 '우 가르'(ou gar; for nothing)에 이어지는 후반절이다. '감추어진 것은 반드시 빛으로 드러난다'는 뜻으로서 전반절과 동의적 대구를 이루며, 앞의 내용과 같은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반복적 진술이다. 일반적으로 비밀의 강조와 유지는 그것을 영원히 덮어 두는 데에 있다. 하지만 정반대의 상황도 있는데, 그것이 드러날 때 나타날 폭발력과 감동, 충격과 사람들의 반응을 위해 잠정적인 기간동안 비밀을 덮어 두는 경우도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알리시고자 하는 모든 비밀은 당신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 사건 뒤로 미루어지고 있는 것이다(마르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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