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1.
그 말이 뭐 힘들다고
얼굴에 솜털이 보송보송 올라오던 때였어.
가슴은 콩닥거리는데
도무지 말을 붙일 수 없었어.
마음과 달리 시선은 다른 데로 향하고
엉뚱한 말만 하고 말았어.
"어쩜 이리도 빛깔이 고울까. 이쁘기도 해라!"
그 말을 하는데 괜히 얼굴이 붉어지데.
작품 2.
아버지는 아버지다
집 근처 노래방
누가 불러내든 그건 상관없는 일이다.
지갑을 여는 건 아버지였다.
세상 사람들은 말한다.
딸내미는 엄마를 닮고
아들은 아버지를 닮게 마련이라고.
술좌석이건 밥 자리 건
아버지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 자리 아무나 앉는 게 아닌가 보다.
세상 살만큼 살아 봐도
아버지는 아버지다.
*****
친구들과 저녁에 술 한잔하고 집에 오던 중이었어.
나는 어느 노래방 입구에서 멈춰 섰어.
거나하게 마셨으니 이참에 한잔 더 하려고?
노래방에 들러 놀다 갔냐고?
아니야. 노래방은커녕.
그냥 간판에 쓰인 글자가 내 눈을 사로잡았을 뿐이야.
이곳에서 10년 넘게 살았어. 지금도 살고 있어.
약속이 있으면 그 노래방을 지나 신호등을 건너.
그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서 필요한 것을 사고,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깎기도 해.
늘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지나다녔어.
그런데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그것도 하필이면 노래방 앞에서.
노래방 간판에 쓰인 글자가 훅! 하고 가슴을 치고 들어왔어.
발걸음이 얼어붙었어.
다산
다 산 ...
사고도 더 산
사시고도 더 사셨어야...
아버지는 후했어.
친구분들을 만나실 때에도.
가진 것 별로 없어도 후하게 쓰셨지.
봉사 활동과 지역 로터리클럽 회장직을 맡아하며
틈틈이 복숭아 농사를 지으시면서.
그렇게 나름 멋진 인생을 사셨건만,
당신의 몸에 들어박힌 암세포는 걷어내지 못한 채
그리움만 남겨 두고 떠나셨어.
자식으로서 해드린 것도 없고, 부족한 게 많았는데....
그래 그런가.
다산노래방 간판을 보자마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들었어.
가슴을 후벼 파대.
작품 3.
공생공존 (共生共存)
보은 속리산 조각 공원
나무와 버섯은 동체(同體)
한 몸 되어 살아간다.
인간사(人間事)건 미물(微物)이건
공생에 길이 있다.
버섯이 언제까지 머물지 몰라도
나무는그 시간을 염려치 않는 듯
몸을 내주고 있다.
몸짓은 달라도 묵언수행(默言修行),
한 몸 되어 꽃을 피운다.
*****
코로나19가 엄습하던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는 몇 해 전 여름 어느 날이었어.
그날도 땡볕이 온누리를 달구는데 견디기 만만치 않았어.
집안에만 있기 지루하여 어디든 나서고 싶은 마음뿐이었지.
세상과의 단절, 고립감에 슬픔이 꾸역꾸역 밀려들었어.
한바탕 울고 나면 속이 시원할까.
답답한 마음 달래려 아내와 무작정 차를 몰고 나왔어.
그리하여 도착한 곳은 보은 속리산.
때는 점심시간,
그곳에서 우리는 차를 식당 옆 근처 도로가에 바쳐놓고
칼국수를 먹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갔지.
오리숲을 지나 법주사까지 갈까 하다 세조길까지 걸었어.
중간중간 시원한 계곡에서 발 담그는 시간을 가지며.
그렇게 한참을 걷고 나니 속이 풀리는 것 같았어.
내려오는 길에 법주사에 들르고
속리산 조각공원에서 쉬던 참에 눈에 띈 풍경!
나무와 버섯이 한 몸 되어 엉겨 붙어 있대.
사이좋은 연인처럼!
나무와 버섯이 함께하는 그 모습에 희망이 보였어.
코로나19가 아무리 지독한 놈이라 해도 언젠가는 물러가지 않겠어.
사람 간에도 전염이 되니 붙어 다니지 말라고 해도
나무와 버섯은 저렇게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 걸 보고 나도 감동 먹었지.
붙어살고 있는 게 보기 좋대.
나무와 버섯도 저렇게 밀어를 나누며 꽃을 피우는데......
인간 세상도.....
우리가 사는 세상도 곧.......
작품 4.
고목(古木)
보은 속리산 세조길을 걸을 때, 오리숲
문드러져가는 몸뚱이
하루하루 버티기조차 힘든가.
나이 들수록 회한은 늘어나고
나아가지 못해 문드러진 가슴.
고통은 극복하는 게 아니라 견디는 거라고.
물이 흐르고 흘러 강을 이루고
바다를 채운 만큼의 시간을 견뎠건만.
이 몸뚱이 내려놓아야 하는가.
세월의 자락을 붙들어 매야 하는가.
작품 5.
옷의 기원
벨기에 브뤼셀 왕립 미술관(2018)
인류가 옷을 입은 건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선악과(善惡果)의 유혹을 견뎌내지 못한 데서
시작되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옷이 추위를 막아주고 피부를 자외선으로부터 보호하는 것 말고
자신의 못난 모습이나 행동을 숨기는 도구로 사용되어 온 것은 아닌지.
아담과 하와의 후세들은
속마음 드러내지 못할 상황이거나
불안에 떨 때마다
풀 뜯고 나뭇잎 엮어 몸에 걸쳤을 거다.
그것이 전설이 되어, 지금도
자신의 약점이나 열등감 내보이지 않으려고
천으로 몸 가리고 얼굴 화장하며 지내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