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와 바위 조각과 미술품
황매산 가는길)
금세라도 비가 쏟아질 듯 하늘은 흐리고 바람은 시원하다 못해 세찼다. 온 산을 뒤덮었던 하얀 아카시아꽃이 지고, 앙증맞은 찔레꽃마저 그
향기를 지우고나자 뱀의 혀마냥 길쭉한 밤꽃이 피었다.
후두둑. 빗방울이 차창을 때렸다. 너른 합천호에 쏟아지는 빗방울이 줄을 그리며 퍼져나간다. 면적 25.95㎢, 저수용량 7억9천만t의
합천호는 1988년 합천댐을 완공하고 난 뒤 생긴 인공호수. 소양호·충주호·대청호 등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제법 큰 호수에 속한다. 합천댐은
덕유산에서 발원한 낙동강의 지류인 황강 상류를 막아 만들었다. 황강에 흙더미가 쌓여 강바닥이 높아지면서 장마철이면 농토가 침수돼 일제시대부터 댐
건설의 필요성이 제기됐으나 80년대 중반에야 공사가 시작됐다.
합천댐이 완공되면서 생긴 호수는 산마을 사람들에게 또 다른 삶의 터전이 되었다. 소백산맥 줄기에 속하는 황매산, 악견산, 금성산, 소룡산
등 곳곳에 우뚝 솟은 산줄기가 병풍처럼 합천호를 에워싼 풍광이 소문나면서 드라이브를 즐기려는 이들이 알음알음 찾기 시작했다. 산허리를 끼고
합천호를 따라 달리는 1089번 지방도는 해마다 봄이 되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상춘객을 모은다. 붕어와 잉어, 메기, 향어 등 다양한 어종이
서식하고 있어 강태공들의 발길도 잦아졌다.
합천호를 지나 밤꽃 향기 진동하는 황계재를 넘으면 용주면 황계마을. 마을 앞을 지나는 실개천을 거슬러 오솔길로 들어서면 어디선가 시원한
물소리가 들려온다. 높이 20m 규모의 황계폭포가 우렁차게 물줄기를 쏟아내리는 소리다. 2단으로 된 황계폭포는 마를 날이 없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소에는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옛 선비들은 폭포와 암벽이 어우러진 풍경을 중국의 여산폭포에 비유하기도 했다.
합천호 뒤로 우뚝 솟은 황매산(1,108m)은 정상의 세 봉우리가 노란 매화꽃처럼 보인다 해서 이름지어졌다. 합천과 산청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황매산은 합천댐이 있는 가회면에 이르러서야 노란 암봉을 드러낸다. 황매산은 철쭉산행지로도 유명하다. 정상에 올라서면 합천호와 함께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다보인다.
산자락에 자리한 영암사지는 신령스러운 기운이 솟는 곳이다. 무너진 절터에는 개망초가 가득 피었다. 한번이라도 영암사지에 가본 이들은 축대
위로 쌍사자석등과 절터 뒤편에 솟아오른 영암봉(767m)이 어우러진 풍경을 잊지 못한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운무가 피어올라 산등성이를 살짝
가린 모습이 한 폭의 수묵화나 다름없다.
85년과 99년에 발굴이 이뤄졌지만, 축대 아래에는 여전히 절집의 일부를 이루었을 화강암 석재가 나뒹군다. 살구빛이 도는 화강암을 네모나게
잘라 흐트러짐 없이 켜켜이 쌓아올린 석축, 통돌을 깎아 만든 돌계단, 앙증맞으면서도 역동감이 느껴지는 석등은 한눈에 보기에도 보통 솜씨가
아니다. 석등과 석탑의 양식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황매산 자락의 산비탈을 따라 만든 계단식 논 또한 여행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산지가 대부분인 합천은 농사를 지을 만한 땅이라고는
황강유역이 고작이다. 땅 한 뙈기가 아쉬운 사람들은 비가 내려 논에 물이 차면 서둘러 모내기를 하고, 심한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며 어렵게
농사를 지었다. 양수기의 등장으로 이제 물걱정은 하지 않게 됐지만 농민들은 여전히 일일이 손으로 모를 심고, 추수를 한다. 황매산 자락 반대편
산청땅 차황면 법평리와 상법리는 특히 민가와 계단식 논이 어우러진 풍경이 아름다워, 사진작가들이 이 첩첩산중까지 찾아온다.
법평리에서 황매산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몇 해전 개봉한 영화 ‘단적비연수’ 촬영장이 있다. 촬영장에 오르는 길은 경사가 꽤 급하지만, 평평한
산중턱에서 맞는 바람은 시원하기 그지없다. 이곳에서는 황매산 봉우리 사이에 자리한 평지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황매평전으로 불리는 평지는
봄이면 민들레가 군락을 지어 피고, 여름이면 젖소가 목초를 뜯는 풍경이 한가롭기 그지없다. 가을에는 억새가 등산객을 유혹한다.
장마를 앞두고 물을 뺀 합천호는 누런 황토바닥을 훤히 드러냈다. 곧 빗물이 차면 산자수명의 땅을 찾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다. 밤꽃이 잘
피면 풍년이 든다는데, 황매산 자락 골짜기를 드나드는 바람은 연노란 밤꽃의 비릿한 향기를 합천호 이곳저곳으로 퍼나른다.
▲여행길잡이
대전~진주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함양IC에서 88고속도로로 갈아탄다. 거창IC에서 빠져나와 바로 우회전해 1089번 지방도를 탄다.
합천호를 따라 1089번 지방도가 이어진다. 황계폭포는 양리 3거리에서 황계리 방향으로 틀어 1026번 지방도를 탄다. 영암사지는 1089번
지방도를 타고 가회면 둔내리 버스정류장에서 황매산으로 난 6번 군도를 따라 5.75㎞를 가면 황매휴게산장과 식당이 보이고 그 뒤로 영암사로 가는
마을길이 나온다. 계단식 논과 단적비연수 촬영장이 있는 산청군 차황면 상법리는 1089번 지방도를 타고,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에서 율현리로
방향을 틀어 1006번 지방도를 탄다. 또는 산청IC에서 빠져나와 59번 국도를 타고 신기리에서 법평리로 간다.
대중교통은 서울남부터미널에서 합천행 직행버스를 이용한다. 합천읍 시외버스터미널(055-931-0142)에서 황계폭포를 지나 합천호 관광지가
있는 대병면까지는 50분 간격으로 군내버스가 다닌다. 영암사지는 하루 5차례, 삼가면을 거쳐 가회면 덕촌리까지 다니는 버스를 이용한다.
합천호 주위를 따라 호수장(931-4824), 황매장(933-7063), 유전모텔(933-1279) 등이 들어서있고 민박을 할 수도 있다.
합천읍으로 나가면 프린스장(931-1996) 등 장급 여관이 많다. 황매산 영암사지 입구 황매휴게산장·식당(931-1367),
모산재식당(933-1101)에서 민박과 식사를 할 수 있다.
합천호가 바라다보이는 대병면 역평리에 자리한 은진송씨고가(933-7225)는 6대 종부가 찹쌀과 솔잎, 쑥누룩으로 빚은 가양주인 고가송주가
명물이다. 옛날 된장으로 끓인 채소와 푸성귀로 만든 신선한 찬을 올린 정식(5,000원), 고소한 제포두부, 묵채 등을 판다. 합천호 주위를
따라 매운탕을 파는 식당들이 들어서있다.
가야산 해인사도 잊지 말 것. 법보사찰인 해인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팔만대장경과 성철스님의 흔적이 남아 있는 백련암 등 볼거리가
많다. 해인사 입구 홍류동 계곡은 한여름에도 발이 시릴 정도로 차갑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