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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손가락의 詩/진은영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
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
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 못하고 나
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
의 잎들이 피어난다
물속에서 /진은영
가만히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내가 모르는 일이 흘러와서 내가 아는 일들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떨고 있는 일
나는 잠시 떨고 있을 뿐
물살의 흐름은 바뀌지 않는 일
물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푸르던 것이 흘러와서 다시 푸르른 것으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투명해져 나를 비출 뿐
물의 색은 바뀌지 않는 일
(그런 일이 너무 춥고 지루할 때
내 몸에 구멍이 났다고 상상해볼까?)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조금씩 젖어드는 일
내 안의 딱딱한 활자들이 젖어가며 점점 부드러워지게
점점 부풀어오르게
잠이 잠처럼 풀리고
집이 집만큼 커지고 바다가 바다처럼 깊어지는 일
내가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내 안의 붉은 물감 풀어놓고 흘러가는 일
그 물빛에 나도 잠시 따스해지는
그런 상상 속에서 물 속에 있는 걸 잠시 잊어버리는 일
연애의 법칙 / 진은영
너는 나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어제 백리향의 작은 잎들을 문지르던 손가락으로.
나는 너의 잠을 지킨다
부드러운 모래로 갓 지어진 우리의 무덤을
낯선 동물이 파헤치지 못하도록.
해변의 따스한 자갈, 해초들
입 벌린 조가비의 분홍빛 혀 속에 깊숙이 집어넣었던
하얀 발가락으로
우리는 세계의 배꼽 위를 걷는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포옹한다
수요일의 텅 빈 체육관, 홀로, 되돌아오는 샌드백을 껴안고
노오란 땀을 흘리며 주저앉는 권투선수처럼
소멸 / 진은영
빨간 자동차를 타고
동물원에 가는 일요일처럼
차의 경적 위에 앉은 새처럼
하늘은 푸른색 칸막이다
좀더 위쪽의 신비를 가려놓은
노래는 곧 날아갈 것이다
민첩한 사람들과
점점 느려져가는 사람들이
사라진 막다른 골목길
풍경의 흐릿한 날개를 달고서
녹색 종양이 자라는 팔월의 나무
뱀처럼 길다란 죽음이 나를 감아 오르고 있다
길 건너
다리 부러진 피아노처럼
세계가 기울어진다
어둠
유리창 불빛이 레몬처럼 흔들린다
나는 한 번도 진실을 말한 적이 없다
그리고 흰 공책 가득 그것들이 씌여지는 밤이 왔다
우리는 매일매일 / 진은영
흰 셔츠 윗주머니에
버찌를 가득 넣고
우리는 매일 넘어졌지
높이 던진 푸른 토마토
오후 다섯 시의 공중에서 붉게 익어
흘러내린다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
틀린 것을 말하기 위해
열쇠 잃은 흑단상자 속 어둠을 흔든다
우리의 사계절
시큼하게 잘린 네 조각 오렌지
터지는 향기의 파이프 길게 빨며 우리는 매일매일
미친 사랑의 노래 /진은영
여름
낡은 장미무늬 카펫 위로 걸어가
하얀 먼지를 털면서
방망이로 비의 투명한 심장 두드리며
돌멩이는
녹색으로
죽음은
막대사탕으로
노래는
치즈에 뚫린 구멍들로
(묘사하면서)
너의 늘어나는 다리를 부드러운 달의 접시에
꽂아라
새로운 기호의 쥐들이 달려오도록
아름답다 / 진은영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
죽은 여자 자라나는 머리카락 속에서 반짝이는 핀과 같고
눈먼 사람의 눈빛을 잡아끄는 그림 같고
앵두향기에 취해 안개 속을 떠들며 지나가는
모슬린 잠옷의 아이들 같고
우기의 사바나에 사는 소금기린 긴 목의 짠맛 같고
조금씩 녹아들며 붉은 천 넓게 적시다가
말라붙은 하얀 알갱이로
아가미의 모래 위에 뿌려진다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
매립지를 떠도는 녹색 안개
그 위로 솟아나는 해초냄새에 텅 빈 굴뚝같이
눈의 여왕 / 진은영
그녀에게서 훔쳐 온 것은
모두에게 어울린다
사물들은 하얀 곰 가죽을 덮어 쓴다
부푼 보리씨가 자라고
청소용 트럭, 빨간 우체통 그리고 떠다니는 집들
자동차는 멈춰 있고
폐타이어들이 굴러다닌다, 내 애인의
유두처럼 까맣다
그런 아침 사람들은
칼날처럼 일어나
피 묻은 자줏빛 살덩이의 살해자를
찾으러 다닌다
바람에 묶인 흰 털들이 공중으로 도망친다
네가 소년이었을 때 / 진은영
잡혀간 소녀와 작은 창문과 마술팽이를 좋아했다
여러 색의 가짜 이름, 사과식초와
조금 슬픈 노래에도 부서지는 뗏목들을 좋아했다
눈감고 나무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것
삐걱이는 소리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대마왕과 석유전쟁을, 변명을 싫어했다
얼음별이 노란 양털담요 위에 떨고 있었다
너의 낡은 동전들이 물방울 소리를 내며
고장난 분수대로 쏟아졌다
네가 소년이었을 때
네가 따준 자두가 먹고 싶었을 때
검은 물방울무늬 원피스 아래 돌처럼 무거운 가슴이 없었을 때
소녀가 소녀를 사랑했을 때
소년이 소년을 사랑했을 때
엄지와 검지 사이
이상한 불꽃을 쥐고 있었을 때
누런 시험지의 커다란 괄호들을 다 태워버렸을 때
붉은 집의 페인트공이 되고 싶었을 때
전쟁과 지나가는 여름의 차가운 피부에
불붙은 속옷을 껴입었을 때
메피스토 왈츠 / 진은영
뚜껑과 시신을 잃어버린 관 속에서
붉은 샐비어꽃들이 피어날 때
밤이 깜짝 놀란 두 눈썹을 치켜뜨고
묘석처럼 자라나는 담쟁이 잎을 응시할 때
불안이
부서진 어깨뼈의 십자가에서 포도송이처럼 열릴 때
사물 하나를 물고 와 심장의 텅 빈 수조
어두운 피의 찰랑거리는 기억 속에서 헤엄치게 할 수 있다면
다시 낯선 비밀들이
몸속으로 뛰어들게 할 수 있다면
페르시아 도기의 깨지기 쉬운 색깔에 포박되어
미친 양탄자의 춤 위에 올라탈 수 있다면
모든 구멍을 틀어막는 슬픔의 막대기여
무취의 거리를 짓이기며 달려가는 라벤더 꽃잎의 타이어
고대 화폐처럼 닳아버린 달의 입술이여, 사라진 역병이여
어둠의 찢어진 자루에서
썩은 양파들이 굴러 떨어지는 밤
네가 마시는 알코올 속 얼음으로 녹아들기 전에
바이올린 화염으로 흰 자작나무 숲을 다 태우기 전에
그가 왔다
나의 죽은 귓속에서 푸른 귀뚜라미가 울고 있었다
70년대산(産) / 진은영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쓴다지만
우리에게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다
그것이 비극이다
세상을 허리 위 분홍 훌라후프처럼 돌리면서
밥 먹고
술 마시고
내내 기다리다
결국
서로 쏘았다
팔레스타인 소녀 / 진은영
슬픈 잠들이 떠도는 따듯한 물이 있고
음악에 잠겨 떠도는 너의 머리카락이 있고
가는 허리에 무상함으로 찰랑거리는 푸른 호리병을 두르고
너는 죽음의 바벨을 고요한 입술 위로 들어 올린다
우유처럼 부드러운 쇄골에는
함께 시시덕거리던 소년의 피가 고였다
너는 흰 라일락 같은 살결의 두 다리를 벌리고 서서
불타는 장례행렬의 부케를 선사받았다
안개 속을 떠다니던 비명의 굽은 손가락이
초승달과 언니의 면사포를 잡아 뜯는다
고요한 뒤뜰로 나있던 창틀 위에 박힌 못은
네가 노란 커튼을 달기 위해 박아 놓았던 것
창틀에 박힌 채로 못이 날아가며
검은 뒤뜰에 누운 네 언니의 얼굴에 날카로운 눈썹을 그려준다
술을 따라보아라, 소년이여
햇빛에 걸려 하얗게 말라가는 홑이불 냄새 맡으며
둘이 얼굴을 숨기고 놀던 시간의 투명한 유리잔 속으로
감자의 싹을 자르며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듯
소녀가 조용히 안전핀으로 이어진 푸른 강철 고리를
자른다
러브 어페어 / 진은영
그런 남자랑 사귀고 싶다.
아메리카 국경을 넘다
사막에 쓰러진 흰 셔츠 멕시코 청년
너와
결혼하고 싶다.
바그다드로 가서
푸른 장미
꽃봉오리 터지는 소리가
폭탄처럼 크게 들리는 고요한 시간에
당신과 입맞춤하고 싶다,
학살당한 손들이 치는
다정한 박수를 받으면서.
크고 투명한 물방울 속에
우리는 함께 누워 물을 것입니다
지나가는 은빛 물고기에게,
학살자의 나라에서도
시가 씌어지는 아름답고도 이상한 이유를.
영화처럼/진은영
너와 나 사이
무사영화에 나오는 長劍처럼
길고 빛나는
연애담은 없었다, 단 한 번도
로맨스영화에서
여주인공이 살구나무숲에 무심코 떨어뜨린
에메랄드 반지처럼
어떤 이웃 청년도 우리가 분실한 손가락을 찾아주지 않았다
음악영화처럼
어린 너의 재능을 알아볼 가정교사는
빈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지 않았다
(너는 기다리다 지쳐 그만 늙어가려 하는데)
아름다운 선율들은
우리들의 부드러운 녹색 목에 걸리기도 전에
모든 시도들은
끊어진 진주 목걸이 처럼
희미한 바닥으로
쏟아졌다
탐정영화처럼
범인인 우리가 어디로 도망치든
찾아내는 죽음이 있을 뿐
자막이 올라가고 어둠 속에서
공허가 커다랗고 흰 입술로 아우성쳤다
무성영화 여배우의 과장된 표정으로
악당들, 악당들, 악당들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진은영
1
여자가 이사오던 날 밤
어둠은 검은 글라이올러스처럼 피어났다
여자는 방에서 나와
마당 끝에 있는 창고로 걸어 들어갔다
둔중하게 철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여자가 없을 때
몰려와 창고 문을 두드려보았다
이웃집 K가 말했다
- 그녀는 귀중한 걸 넣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인지 보지 못했습니다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군거렸고
용감한 X와 Y가 열쇠를 훔쳐왔다
여자의 열쇠가 말했다
- 무언가 대단한 걸 넣어두었습니다
그러나 알 수 없습니다
문밖 구멍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2
모두의 이마 위에
번쩍이던 철문 위에
시간의 부드러운 염산 방울이
똑, 똑, 떨어져내렸다
붉게 썩어가는 창고 앞에서
다시 회의가 소집되었다
- 무엇이 들었습니까
여자가 대답했다
- 무언가 귀중한 걸 넣어두었습니다
그러나 알 수 없습니다
그땐 너무 젊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궁금했고 그녀도 그랬다
모두들 문을 열어보기로 했고
넣어둔 것을 기증하기로 했다
어둠 속에서 여자가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돌렸다
창고 속으로 별빛이 쏟아지며
텅 빈 안이 환하게 드러났다
여자와 사람들은 밤하늘을 향해 외쳤다
- 우리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굉장한 것이 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잠가두었기 때문에
가족/진은영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이번 詩들과 이번 詩사이의 고요한 거리/진은영
이 시에는 아무것도 없다
네가 좋아하는
예쁜 여자, 통일성, 넓은 길이나 거짓말과 같은 것들이
다만
문을 열자 쏟아지는 창고의 먼지, 심한 기침 소리
네게 주려 했는데
실수로 꽝꽝 얼린 한 컵의 물
물 밑의 징검다리, 쓰임을 알 수 없는
약들이 있다
쉽게 말할 수 있는 미래와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지금 여기"
더듬거리는 혀들이 있고
동물원에 가서 검은 정글원숭이들과 싸우고 싶었는데
팬지 화분을 선물 받은
어린 시절에 대해서라든가,
영원한 태양보다는
그늘에 자라는 붉은 잎의 사실성을 믿는 그런 사람에 대한 부러움
혹은 몇몇 시인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다
그것이 만들어낸
이전 시들과
이번 시 사이의 고요한 거리
그 위로
시간이 눈처럼 자꾸 내렸다
아무것도 하얗게 덮지 않고 흩어져버렸다
새벽 세시/진은영
하늘에 모자들이 가득 떠다닌다
나무의 빛나는 눈을 덮는다
골목 담장에 따닥따닥 붙어 있는 검은 조개들
입을 벌리고 시간을 삼킨다
불면증 환자는 지금 커다란 장롱 속에서 도망 중이다
무한히 늘어나는 밤의 팔로부터
잠들어 있는 새들을
꿈의 얼룩고양이가 덮친다
늙은 세일즈맨은 잠옷차림에 서류를 들고
축축하고 거대한 버섯들 사이로 갈팡질팡 걸어다닌다
노란 기린이 지하도 밑으로 내려간다
부랑자의 잠든 그림자를 한 입 뜯어먹으러
시계의 분침과 시침 사이에는
침묵의 알이 끼어 있다
네시의 기차가 오기 전에
쓰레기들이 은빛 레일 밖으로 치워진다
야간 노동자/진은영
한때 아침은 단단한 울타리.
별들의 목장에 쳐놓았다
한때 별들은 얌전한 짐승, 울타리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나는 아침으로 쉬러 갔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고요한 짐승, 별떼
스물아롭 살의 아침이었다 우지끈 부서지는
소리, 잠이 오지 않았다 충혈된 입에서 벌어진 눈에서
시간이 질질 흘렀다
세워놓은 아침이 나무토박처럼 쓰러지는 풍경
난폭해진 짐승들 달아난다 아침을 밟고 간다
목장 너머
달아난 짐승들 떠돈다
점점 멀리......
나는 오래 기다려야 한다
밤이
해고하러 올 때까지
청춘 1/진은영
소금 그릇에서 나왔으나 짠맛을 알지 못했다
절여진 생선도 조려놓은 과일도 아니었다
누구의 입맛에도 맞지 않았고
서성거렸다, 꽃이 지는 시간을
빗방울과 빗방울 사이를
가랑비에 젖은 자들은 옷을 벗어두고 떠났다
사이만을 돌아다녔으므로
나는 젖지 않았다 서성거리며
언제나 가뭄이었다
물속에서 젖지 않고
불속에서도 타오르지 않는 자
짙은 어둠에 잠겨 누우면
온몸은 하나의 커다란 귓바퀴가 되었다
쓰다 버린 종이들이
바람에 펄럭이며 날아다니는 소리를
밤새 들었다
달팽이/진은영
집에 들을 이고 사는 것들은
모두 달로 가야 한다
나뭇잎 위에 앉아 있는 달팽이를 본 적이 있는가
배경으로 언제나 달이 뜬다
집이 아니야 짐이야
그 짐 속에는 아버지가 주무시고
어머니가 손톱을 깎으신다
동생은 수학 문제를 풀고
아버지 돌아가셨으면 좋겠어요
아머니 외출하셨으면 좋겠어요
꿈속에서 나는 자주 아버지를 총으로 쏴 죽였다
제발 나타나지 마세요 아버지 자꾸 죽어요
내 집이 피로 붉어요
얘야 노을이 져야 달로 간다
나는 너에게 가르쳐주고 싶다
달이 창백한 건 일찍 나왔기 때문이 아니야
달은 출혈의 산물이야
내가 얼마나 피 흘리고서야 잔잔히 떠오르겠습니까
별은 물고기/진은영
해왕성 건너 명왕성 건너
밤
하늘에 사는 물고기
아가미 열릴 때마다
별 떨어집니다, 떨어지는 것은
날카롭습니다
한 여자 맞습니다
흰 목덜미가 길고 붉게
잘렸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메고 가서 바다로 던집니다
목을 베인 그 여자, 아가미 얻었습니다
부레 가득히 공기를 채워
밤하늘 위로 떠오릅니다
헤엄치다 건드립니다
또 한 사람 맞습니다
별에 맞아 죽습니다
고요한 저녁의 시/진은영
자 그러니 말해봐 너에게 저녁은 어떻게 오지
길가, 활짝 핀 빨간 꽃들이 자동차 엔진처럼 붕붕거리고
여자애들의 하얀 스커트가 휘날릴 때
이 거리에서 저 거리로
눈부신 바람이 소란스럽다
너는 눈이 아프다
꽃들도 빨리 시들고
구름 뒤로 숨는 달과 별처럼
나무들도 어둠의 커튼으로 제 몸을 가려야 한다
오늘 밤은 푹 자야 한다
집들도 창문도 열리지 않고
돌아오다 문 앞에 선 너도
네 집의 문을 두드리지 말고
그 앞에 누워라
달력도 덮고
시계도 맞추지 말고.
끝없이 뒤풀이될 소란함과 분쟁을 만드시느라
일찍 잠자리에 든
신의 곤한 호흡 속에서 이 거대한 정적
창세기의 첫 일요일 저녁처럼
침묵에서 나온 것들은 모두 침묵으로 돌아간다
달팽이 대장/진은영
나는 달팽이의 대장
비 오는 날엔 목을 길게 빼고
쏟아지는 빗물 받아 마셨다
축축한 담장 밑에 모여
우리들은 벽을 오르고 싶다
벽은 멀어도
꼭대기에 오를 때까지
비는 내릴 거야
중간쯤 올랐을 때
벽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몽글몽글 햇빛에 구워진 빵처럼
말라갔다
더러는 조금 위에서
더러는 조금 밑에서
거대한 벽의 사막에서
점점이 수직으로 붙어서
바다를 증명하려는 조개의 화석처럼
그 애들이 굳어가는 걸
보았다 나는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천천히
굳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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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1970년 대전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 졸업.
2000년 《문학과사회》봄호로 등단
시집으로『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그 밖에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니체, 영원회귀로와 차이의 철학』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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