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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흥과 개혁 원문보기 글쓴이: 針墨
성령의 불꽃이 한국을 휩쓸었을 때 |
-죠나단, 고포트 선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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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이 나에게는 너무나 많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것에 관하여 쓰고자 한다. 한국의 신자들이 이루어 놓은 일과 그들의 희생을 생각할 때 나는 주께 얼마나 한 일이 없는가를 생각해 보고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중국의 신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그들이 통회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자주 보게 되었다. 당신이 ‘값으로 산’ 사람임을 인식한다면, 그리고 당신이 한국에서 일어난 복음의 승리에 대한 이 이야기를 공정하게 듣는다면 당신도 역시 틀림없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겸손해질 것이다.
내가 한국에 있는 여덟 곳의 선교부를 방문한 것은 대 부흥운동이 활발하던 1907년이다. 중국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목단에 있는 중국인 교인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했고 그들은 깊이 감동 받았던 것으로 보였다. 나는 배대호에서 그곳 선교사들에게 한국 교회가 주님으로 부터 받은 축복을 말해 주었다. 그들 중 몇몇은 눈물을 흘리며 맹세하기를, 중국에서도 똑 같은 축복이 있을 때까지 기도 하겠다고 했다. 그 후에 또 다른 휴양지인 지궁산에서 한국에 대하여 말하도록 초청 받았다.
나는 주일 저녁에 이 이야기를 하였다. 말을 마칠 때 나는 너무 오랫동안 이야기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곧 축도를 하고 끝을 맺었다.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죽음과 같은 고요가 뒤덮였다. 이것이 6,7분 계속되더니 억눌렸던 눈물이 교인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죄들이 고백 되었다. 급한 성격, 싸움과 같은 것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일이 벌어졌다. 모임이 끝났을 때는 너무 늦었지만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물로 깨끗이 하셨음을 모두가 체험했다. 그리고는 나흘 간의 집회와 기도회가 이어졌다. 그것은 내가 선교사들과 지내던 중에 가장 고귀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중국 교회가 부흥 할 때까지 매일 오후 4시에 기도하기로 결정했다. 그 해 가을에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들 사이에 나타나는 것을 보기 시작했으며 1908년부터 는 만주와 다른 지역에서 이 능력은 크게 증가되었다.
1. 한국인들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도록 담력을 준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시작된 부흥운동은 능력과 영적인 열매를 보이며 1906년까지 계속되기 시작했다. 1907년 6월 평양의 스왈덴 씨가 한국에서 더 큰 일을 보게 된 내용을 나에게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1906년 중반까지 우리가 보아온 것 이상의 축복을 한국에서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 한국에서 생긴 결과를 중국과 일본, 그리고 그 외 다른 지역에서의 것과 비교해 볼 때 여기서 전도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그래서 아마도 하나님은 우리가 이미 본 것 이상의 축복을 내리지 않으실 것 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러나 1906년 9월 뉴욕에서 서울에 온 하워드 에그뉴숀트톤 박사가 1905-1906년 사이게 있었던 인도 카시아 힐의 부흥 운동을 우리에게 말해 주었을 때 우리의 눈은 열려졌다. 그곳에서는 2년 동안에 8,200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했다. 우리 선교사들은 겸손해져서 평양에 돌아왔다. 평양에는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부에 속한 20명 이상의 선교사가 있었다. 우리의 토론은, 하나님은 인간 차별을 하지 않는 분이기 때문에 그는 평양보다는 카시아 힐에 더 많이 축복하시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에 더 큰 축복이 임할 때까지 정오에 기도하기로 작정했다.
한 달을 기도한 후에 한 형제가 기도회를 중단하자고 했다. 그의 말은 ‘우리가 이미 한 달을 기도했다. 특별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 있다. 우리가 정당하다고는 생각 할 수 없다. 보통 때와 같이 우리의 일을 계속하자, 각자 집에서 편리한 시간에 기도하자.’ 이 제안은 칭찬할 만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다수는 이기도회를 계속할 것을 결정했다. 주님께는 카시아에서 허락한 것을 평양에서 부인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그들은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기도하기로 작정했다. 이러한 의견을 따라서 그들은 정오에서 오후 4시까지 기도하기로 했으며 저녁 식사 시간까지 원하는 사람은 자유롭게 기도하도록 했다. 기도 외에는 별로 하는 일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격려가 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기도회 중에 서로 나누었다. 그들은 4 개월을 계속하여 기도했고 그 결과는 감리교 장로교를 모두 잊어 버리게 되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임을 인식했을 뿐이다. 그것은 참된 교회 연합이었다. 그것은 무릎으로 되어 진 것이었다. 그것은 가장 높으신 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다.
그 때 이후에 스왈렌씨는 블레어씨와 함께 시골 지교회에 갔었다. 보통 때와 같이 예배를 인도하는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울며 그들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스왈렌 씨는 이렇게 이상한 일은 경험해 보지 못했으므로 이 교인들의 감정의 물결을 돌리기 위하여 찬송을 인도하고자 했다. 몇 번 시도를 했으나 실패를 하고는 경외하는 마음 가운데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모임을 인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가능한 한 국외자로 머물고자 했다. 다음날 아침 그와 블레어 씨는 즐거움으로 도시에 돌아와서 하나님이 지교회에 역사하신 것으로 보고했다. 모두가 하나님을 찬양했으며 평양이 은혜 받을 때가 가까웠음을 믿었다.
1907년 정월이 되었다. 하나님은 온 교회가 기도하는 주간에 두드러지게 축복하실 것을 모두가 기대했다. 그러나 마지막 날, 8일째 되는 날이 되었는데도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어떤 특별한 나타남이 없었다. 그 안식일 날 저녁에 중앙 장로교회에서는 1,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 위에 걸려 있는 하늘은 놋쇠와 같았다. 성령의 임재에 대한 그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외면하실 수 있겠는가?
그때 교회의 지도자인 길장로가 일어서서
“내가 아간입니다. 하나님은 나 때문에 축복하실 수 없습니다. 1년 전에 내 친구가 임종하면서 나를 자기 집에 불러서 말했습니다. ‘장로님, 나는 이제 하늘 나라에 갑니다. 당신이 나의 일을 맡아주시기 바랍니다. 내 아내는 능력이 없습니다.’ 나는 대답했습니다. ‘안심하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그 과부의 경지를 관리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소유인 100불을 가로챘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가로막았습니다. 내일 아침에 그 100불을 과부에게 돌려줄 것입니다.”
곧 장애물이 제거되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내려오셨음이 인식되었다. 죄의 자각이 신자들을 휩쓸었다. 예배는 주일 저녁 7시에 시작되었으나 월요일 새벽2시가 되어도 끝이 나지 않았다. 아직도 수십명이 울면서 그들의 고백할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제 매일 사람들이 모였고 깨끗케 하시는 분은 항상 그의 전에 계신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이 무어라고 말하든지 간에 이러한 고백은 인간 노력이 아닌 권능으로 이루어졌다.
악령이 교회의 주동 인물에게 그러한 죄를 고백하도록 할 것이라고는 잠깐 동안이라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가려져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막았다. 그러나 그것이 벗겨지자마자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 그리하여 그 해에 한국에서 회개라는 드물게 보는 역사가 있었다. 한 의사는 한국에서 제일 정직한 요리사를 가졌다고 자랑해 왔다(동양에서는 요리사가 시장도 본다), 그러나 이 요리사가 죄를 깨달았을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항상 의사를 속여 왔다. 나의 집과 재산은 의사를 속이고 얻은 것이다.” 그 요리사는 집을 팔았고 모든 것을 의사에게 갚았다.
교부를 위한 땅을 사도록 어떤 교사가 부탁을 받았다. 그는 그것을 샀고 그 가격은 500불이라고 했다. 선교사는 가격이 엄청난 것에 대하여 반대는 했지만 그 값을 지불했다. 부흥회 때 그 교사는 80불을 주고 그 땅을 샀다고 고백했다. 이제 그는 그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가 속여 취했던 420불을 갚았다.
종군 기자인 맥켄지 씨는 한 소년에게 속아서 4불도 못 되는 돈이지만 못 받은 줄 모르고 지냈다. 그 소년이 죄를 깨닫고는 80마일을 걸어서 선교사를 통하여 그 돈을 맥켄지 씨에게 전달하도록 보내었다. 맥켄지 씨가 한국에 있는 신자와 같은 강한 신자가 된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의주에서 아내와 아들이 있는 한 사내가 다른 도시에 가서 부자가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으며 그 여자에게서 두 딸을 얻었다. 그의 영혼이 소생되었을 때 그는 이 여인과 두 딸을 위하여 생활 대책을 세워 주고는 의주로 돌아가서 그의 합법적인 아내와 화해했다. 이러한 한국식의 부흥이 어떤 이혼이 성행하는 기독교국에 일어난다면 사회적인 대소동이 벌어질 것이다.
거의 완전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존경을 받던 한 집사가 부흥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안절부절하다가 드디어 교회 구제 기금을 훔친 것을 자백했다. 모든 사람들이 놀랐으나 그가 평안을 되찾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더 큰 불안에 떨었고 그리고는 제 8계명을 범한 것을 고백했다.
한 여인은 며칠 간을 지옥의 고뇌를 통과하는 것 같았다가 어느 저녁 군중이 모인 자리에서 간음의 죄를 고백했다. 그 모임을 인도하던 선교사는 너무나 당황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남편이 거기에 있었으며 그녀를 한국의 법대로 죽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 남편은 눈물을 흘리며 걸어 나와서 범죄한 그의 아내 옆에서 무릎을 꿇고 그녀를 용서했다.
이러한 놀라운 사건들은 사람들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으며 교회는 많은 사람들로 들끓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조롱하기 위하여 왔으나 두려움 중에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도둑의 두목이 호기심을 가지고 왔다가 죄를 깨닫고 개종하여 경찰서에 찾아가서 자신의 범죄를 설명했다. 깜짝 놀란 경찰관은 말했다. “당신에게는 고소하는 사람이 없다. 당신 자신이 당신에게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당신을 취급할 법이 없다.” 그래서 풀려났다.
이 부흥의 때에 평양을 맡고 있던 일본 관헌이 있었다. 그는 서구의 불가지론에 물들어 있어서 영적인 일들은 경멸하고 있었다. 그런데 많은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이 이상한 변화에 어리둥절하여 그 자신이 조사를 위하여 그 모임에 참석했다. 그도 결국 모든 불신을 벗어 버리고 주 예수를 따르는 무리가 되었다.
3. 하나님이 신속히 역사하실 때
1903년에 시작된 부흥 운동은 확대되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방대한 양으로 흘러서 평양에서 출발하여 온 한국에 넘쳤다. 1907년의 중반에는 3만의 개종자가 평양을 중심으로 생겼다. 이 도시에는 4~5 개의 교회가 있었다. 중앙장로교회에는 좁혀서 앉으면 2,000명을 수용 할 수 있었다. 한국 교회는 걸상이 없다. 사람들은 마루에 깔아 놓은 방석 위에 앉는다. 중앙교회에서 2,000 명이 앉으면 너무나 밀착해 있기 때문에 다리가 아프다고 잠깐 일어서면 다시 앉을 수가 없을 만큼 그 빈 공간이 꽉 차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밀어 넣어도 중앙교회는 교인들을 다 수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교인이 3,000 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여자들이 들어와서 예배를 드리고 그 뒤에 남자들이 들어와서 예배를 드렸다.
1910년까지도 부흥이 줄어들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 해 10월에 4,000명이 한 주일에 세례를 받았고 그 외에 수 천명이 신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등록했기 때문이다. 평양 남쪽 한국의 고도인 송도를 지나갔다. 1907년 부흥 운동 때 교회는 500명을 얻었으며 1910년의 특별 집회에서는 2,500 명이 들어왔다. 1907년 서울을 방문해 보니 교회마다 만원이었다. 한 선교사는 말하기를 6주간 시찰에서 500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700명의 학습 교인을 가졌으며 그의 5개처 개척 집회소는 25군데로 늘어났다. 1910년에는 서울에서 13,000명이 결신했으며 그 해 9월에 서울의 감리교회들은 3,000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수도의 서쪽 제물포항에서는 1907년에 800명을 가진 교회를 얻었다. 이 항구 반대편에 있는 섬에는 17,000명의 주민이 있다. 이 섬에 있는 교회들은 4,247명의 세례 교인이 있었는데 그 중 반 이상이 그 해에 돌아왔다. 곧 그 섬 전체가 주의 것이 되도록 신자들은 기도하고 있다.
남쪽 지방의 주요 도시인 대구에서는 부흥을 위한 열흘 간의 기도회 중 칠일째에 성령이 홍수처럼 그들에게 와서 그들을 부흥시켰다고 아담스 씨가 말했다. 그 결과 대구 교회는 너무 작았으며 시골에도 많은 교회가 생기게 된 것이다. 1905년에 1,976명의 개종자가 생겼고 1906년에는 3,867명, 1907년에는 6,144 명이 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지금은 시골에 본 적이 없는 교회들이 생겼고 전도자가 방문한 적이 없는 곳에도 교회가 생겼다.” 라고 하였다.
선교사나 전도자가 없이 어떻게 교회가 생겼는가를 그가 말했다. 그 지역에서 온 어떤 사람이 도시에서 복음을 듣고는 집에 성경을 가지고 돌아갔다. 그는 그것을 이웃에게 계속하여 읽어주어서 50명이 넘는 사람이 믿게 되었다. 그때 그들은 교회를 이루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들은 신약성경에서 교회의 입문이 세례의 물에 의해 되어지는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적용해야 될지를 몰랐다. 그래서 서로 의논을 한 후에 각자 집으로 가서 목욕을 하고는 교회를 만들기로 결정을 했다. 하나님이 틀림없이 기뻐하셨을 것이라고 믿는다.
1907년 방문했던 또 다른 곳은 평양의 북쪽 철로 연변에 있는 선천이 있었다. 새로운 선교부로서는 그곳에서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선교사들이 8년 전에 선교부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에 갔을 때 도회지와 시골에 15,348명 의 신자들이 있었다. 교회에 출석하고 헌금하는 사람만 그렇게 되었다. 그들은 1.500명의 자리를 가진 교회를 방금 채웠다. 일 년 전에는 그들의 교회는 800명 자리에 교인이 870명이어서 그들은 건축을 해야만 했다. 그 해에 중앙교회는 5개 처의 시골에 교인을 나누어 교회를 세웠다.
이 사업을 마쳤을 때 교인은 1,445명이 불어났다. 교회로부터 뻗어가는 어느 거리에도 믿지 않는 가정이 없었다. 모두가 신자가 되었다. 우리 기독교국에서는 “교회에 가까울수록 은혜에서 멀다.” 는 말이 있는데 한국 교회의 근처에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없다는 사실을 당신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이 성령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고 그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죄와 의와 심판을 확신하고 살만큼 강력한 형태의 기독교인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1916년 나는 한국의 동해안에서 온 선교사 푸트 씨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그는 최근에 한 주일을 그 지역의 중심 지방에서 지냈다. 그날 저녁 그는 제일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 교회는 2,500명이 비좁게 앉았으며 그날 저녁 다른 교회는 500명이 모였다고 한다. 그 마을은 인구가 3,000명 밖에 되지 않으므로 모든 사람이 교회에 출석한 셈이다. 은혜를 많이 받고있는 우리 기독교국에서도 그렇게 많이 출석을 하지 않고 있다. 언젠가 주께서 이 문제에 대하여 엄하게 말씀할 것이다.
그 중심지에서 그 일이 어떻게 퍼져 나갔는가를 알기 위하여 나는 블레어 씨에게 그의 군의 지도를 그려 달라고 했다. 기차가 떠나기 전 몇 분밖에 여유가 없었다. 그가 그린 것은 녹진군의 그림이다. 그것은 압록강의 동쪽에 있는 바다에 접해 있다. 그 지도의 중심 근처에 350명의 신자가 있는 교회를 표시했다. 북쪽으로 1마일도 되지 않는 곳에 250명의 교회가 있었고, 동쪽2마일 이내에 250명의 교회 등 그 군내에 40개의 자립교회가 있었다. 내 옆에 서 있던 휠모어씨가 말했다. “이 군은 내가 일하던 북쪽 지역 보다 못합니다. 그 곳에는 군내에 5,000명이 넘는 신자가 있으며 35개의 자립 교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는 한 해에 400명에서 3,000명으로 증가된 곳에 대해 들었다. 1884년 전도 사업이 시작된 이래로 밤낮45분마다 개종자가 하나씩 불어난 셈이다. 모든 마을이 기독교를 알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주께서도 다수를 중요시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그 말이 사실이다. 좋은 점을 지적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표준을 적용할 것인가? 사도행전의 처음 부분을 보자. 우리가 그 표준을 그대로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싶지 않으면서도 그 표준을 한국교회에 적용하는 데는 이의가 없을 줄로 안다.
초대 교회는 모든 것을 드리고 또 성령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하여 열흘을 기도로 지내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선교사들이 마음으로 성령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몇 달을 계속하여 하루에 몇 시간씩 매일 기도한 일에 관하여 이미 말했다. 이 선교사들은 하워드 에그뉴 존스톤 박사로부터 인도의 카시아 지방에 내렸던 성령에 대하여 들었다. 바로 그 시간 그 장소에서 강계에서 온 한 사람이 존스톤 박사의 말을 들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서 250명이 모이는 강계교회에서 성령만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하신 사역을 효과 있게 만들 수 있으며, 그 성령이 하나님의 다른 은사처럼 값 없이 주어진 것이 약속되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1906에서 1907년에 이르는 가을부터 겨울까지 매일 아침 5시에 교회에 모여서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그 은사를 감사했다. 그들은 6개월의 기도로 성령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고, 그 후에 성령이 홍수와 같이 임했다. 그들의 숫자는 여러 배로 불어났다. 우리는 정말로 성령 하나님을 믿는가? 우리 한번 정직해지자. 그를 찾기 위하여 6개월 동안은 추운 날씨에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는 정도까지도 되지 못한다고 해도!
구주의 공로를 알려고 하는 불타는 열망이 오순절 교회의 특징이었다. 한국 교회도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이방인들은 신자들의 성화를 견딜 수 없었다고 불평했다는 것이다. 그들도 구주의 좋은 점을 말했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쉬기 위하여 집을 팔고 그리스도인들이 없는 지역으로 가고자 했다
그날 아침 9시를 치기 전에 평양고등학교에서 주의 영이 학생들을 쳐서 죄를 깨닫게 했다. 아랫층 윗층에서 고민하는 외침이 들렸다. 곧 교장실은 죄 때문에 고통받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그날도 그 다음 날도 학교는 개학하지 못했고 금요일도 마찬가지였다. 금요일 저녁까지 장로교 학생들은 승리를 맛보았으나 감리교 학생들에게는 풀리지 않은 어떤 것이 있었다.
이 문제는 그날 밤에 해결되었다. 그 주간 학생들의 입으로부터 쏟아져 나온 고백을 듣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고 한 선교사가 말했다. 그것은 마치 지옥의 뚜껑을 열어 놓은 것 같았으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죄가 쏟아졌다. 월요일 아침까지 학생들은 하나님 앞에, 그리고 선생님들과의 사이에, 서로서로 막힌 담을 허물었으며 학교는 성령의 주장 아래 시작 되었다.
바로 그 때에 백 명에 이르는 감리교 선교부의 목사들과 권사들이 한 달 동안 공부하기 위하여 그 도시에 도달했다. 연합 기도회를 하는 선교사들은 이 중요한 학급을 성령의 주장에 맡겼다. 이것이 힘으로도 능으로도 된 것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영으로 되었다는 것을 그들은 깨달았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하나님은 그 첫번 모임에서 그의 임재와 능력을 보이심으로 그들에게 상 주셨다. 며칠 사이에 꾸부러진 것들을 바로 심었다. 거룩한 분이 주장하셨다. 그들은 효과있는 공부를 했으며 그들 마지막 날 그들은 개척하기 위하여 돌아갔다.
며칠 후에 시골의 장로교회에서 뽑혀 온 550명의 여성들이 12일 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하여 그 도시에 모였다. 우리나라에서 500명의 자매들이 12일 간 성경공부를 위하여 모였다면 우리는 강한 부흥을 기대할 것이다. 전쟁 전에 많은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은 하나님의 책을 연구하기보다는 카드 모임에 열중했다.
한국의 자매들은 우상, 무당 마귀의 일들을 버리면서 카드(화투)도 버렸다. 이들 550명은 모든 비용을 충당하기 그들의 돈을 가지고 왔다. 그들중 둘은 이 공부에 참석하기 위하여 5일을 걸었다. 한 어머니는 도착하기 위하여 5일 동안 아기를 데리고 왔다. 평양에서 선교사들이나 부흥 운동 지도자들은 영적인 능력이 없으면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도 비난하는 것을 알았다. 성령은 항상 인간이라는 도구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들을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첫 날 저녁 주의 주장하심을 구했으며 그의 약속과 같이 그는 임하셔서 죄와 의와 심판을 확신케 했다.
4. 시어머니들이 달라질 때
이 여인들이 집에 도달했을 즈음에 75명의 장로교 신학생 들이 3개월 간의 공부를 위하여 왔다. 그들은 해마다 3개월씩 공부하여 5년 동안의 과정에 있었다. 평양신학교는 200명이 넘는 학생을 가졌으며 그것은 세계에서 제일 큰 신학교였다. 교과 과정을 짜면서 교수들은 매일 저녁에 기도회와 성경 공부 시간을 두었다. 그것은 3개월 마지막에 성령께서 이 젊은이들에게 충만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최근에 그들 중에 놀라운 일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잘못 눈을 뜨고는 성령께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학기동안에는 최선을 다하자. 그리고 마지막에 성령이 오셔서 부족한 점을 채워달라고 하자.” 그들은 이 죄를 고백했고 첫날 저녁에 그 젊은이들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했으며 그들의 믿음은 보상을 받았다. 성령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이끌 수 있는 바로 그분이 그 학기를 가르쳤으며 그 해에 5만 명의 신자가 교회에 증가되었을 때 주 그리스도는 온 한국을 통하여 영광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들은 한국 교회가 약속된 성령을 구하고 그 성령께 복종하는 면에서 초대 교회처럼 진실했으며 그 결과로 한국 교회는 주께 영광을 돌렸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서 선교사를 보낸 교회는 어떤 병명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기도의 시험을 한국 교회에 적용해 보자. 사도행전에서 기도는 교회의 현저한 특징들이었다. 한국 교회는 기도에 크게 의존해 있다. 감리교 학생들이 고등학교에서 성령께 저항하던 그 주간에 장로교 학생들은 기도의 부담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외모가 변할 정도였으며 승리가 있기까지 금식과 기도를 계속했다. 그 당시 각급 학교에서는 기도의 정신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학교들이 당분간 닫혀 있었다. 학생들이 책을 볼 때에 어린이들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선교사들도 한국 교인들이 기도에서는 그들을 능가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밤의 절반을 기도로 보내는 것은 그들에게는 보통 있는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새벽 훨씬 전에 그들은 기도를 위하여 일어난다. 스왈렌 씨의 말에 의하면 한번은 지방교회에 갔을 때 모두 다음날 아침 다섯 시에 기도회로 모일 것을 정하여 광고했다. 다음날 아침 다섯시에 스왈렌 씨가 왔을 때 세 사람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무릎을 꿇었다. 얼마 동안 기도 했을 때 거기 있던 사람중의 하나가 그가 너무 늦게 도착했다고 말했다. 기도회는 그가 오기 전에 끝났던 것이다. 몇몇 사람은 출석하기 위하여 산을 넘었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두 시에 400명의 신자가 밖에서 기도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4:30분에는 600명이 왔다. 일 주일 후에는 700명이 매일 모였으며 그때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의 마음을 채웠다. 이렇게 분명한 영안을 가진 목자를 모신 교인들은 얼마나 복된가! 우리는 얼마나 타락해 있는가! 두 세 사람일지라도 그의 이름으로 모이는 그 곳에 주께서 계신다. 영광의 주를 만나기 위하여 아침 4:30분에 우리가 일어나는 것을 상상해 보라.
세계에서 가장 큰 기도회는 한국 서울에서였다. 일 년 동안 주간 평균 출석자는 1,100명이다. 어느 수요일 저녁 나는 토론토에 있는 활기 있는 장로교회의 기도회에 갔다. 한동안 나는 혼자 앉아 있었고 좀 지나서 잘 생기신 노 신사 한 분이 내 옆에 앉았다. 집회는 시작되었고 별로 크지 않는 방에는 빈 의자가 여전히 보였다. 노인이 주위를 둘러 보며 말했다. “사람들이 왜 기도회에 출석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때 내가 대답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도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나를 몰랐기 때문에 내 말에 어떻게 대답할지 몰랐다. 그래서 내가 덧붙였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 ‘두 세 사람일지라도 내 이름으로 모이는 그 곳에 내가 그들 중에 있느니라’를 참으로 믿는다면 그들이 참석하지 않겠습니까?” 주께서는 우리의 기도의 상태를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는 가정 기도회를 충실히 지킨다. 가정 예배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한국에서는 교회에서 출교 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된다. 캐나다에서는 어떤 기독교 가정이 세상 일에 너무나 바빠서 식사 전에 기도할 시간도 얻지 못했다. 푸트 씨는 한국에서 여행 중에 있을 때 낭에서 만난 사람들이 계곡 건너에 있는 마을의 신자들을 방문해 줄 것을 요구 받는 일에 대하여 말했다. “왜 내가 가야 합니까? 나는 그곳에 신자가 있는지도 모릅니다.”고 말했지만 그가 그 마을에 갔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을 준비가 되었으며 학습 교인으로 기록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질문 했다. “가정 예배를 드립니까?” “예, 하루에 두 번씩 드립니다.” 그들은 대답했다. “그런 가정이 얼마나 있습니까?” “스물 네 가정입니다. 마을 사람 전부입니다.” 그들의 대답이었다. 이 말을 들어보라! 마을마다 가정 제단을 쌓고 있었다.
한 모자 장수는 우리가 동해안에 있을 때에 부흥회에서 개종하고는 그 후 일년 동안에 열 두 곳에서 기독교인들의 모임을 만들어 놓았다. 그 중 한곳에서는 17명의 개종자들이 있었다. 한 학생은 한달 휴가 동안에 복음이 전달되지 않는 곳을 전도하여 100명의 영혼을 얻었다. 다른 학생은 매일 적어도 6명에게 그들의 영혼 구원에 관하여 말해 주기로 작정했다. 9개월이 끝날 무렵에는 그는 3,000명에게 전도했다. 우리 고국의 신자들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말해 주려면 평생이 걸릴 것이다.
어느 해 남감리교에서는 너무나 자금이 부족해서 공부하기를 열망하는 150명의 젊은이들이 있는 데도 송도에서 학교 건물을 세울 수가 없었다. 전 문교부 장관이었던 윤치호가 그들을 가르치기로 자원했다. 그의 지도를 따라 소년들이 대략적인 건물 뼈대를 세우고 짚으로 덮어서 학교 건물을 만들었다. 길목사가 새벽 기도회를 통하여 교인들을 부흥시킨 일은 이미 언급했다.
그 당시 길목사의 편지를 보면 8,9세 되는 국민학교 어린이들도 학교를 파하면 곧 거리에 나와서 지나가는 행인의 옷 소매를 잡고는 구주 예수께 순종하도록 눈물로 간청했다고 한다. 그는 말하기를 “지난 3,4일 동안에 400명이나 와서 그리스도를 고백했다.”고 했다. 그들의 마음을 찌른 것은 소년들의 간절한 호소였던 것이다. 한국의 도서 지방까지 전도한 후에 그들은 국외를 바라보았다. 몇 년 전 서울에서 개최된 장로교 총회에서 중국 산동에 선교사를 보내도록 결정되었다.
지원자를 찾았을 때 온 회중이 일어났으며 네 사람이 선정되었다. 모두가 선정된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조국 교회의 총회에서는 이런 모습은 결코 볼 수 없었다. 그들이 값없이 받은 은혜가 한국 교회에서는 뜨거운 감사로 받아들여졌으며 그들은 값없이 주고 또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중단되지 않는다.1917년에 길목사는 동해안에서 성경 강해를 끝냈으며 그 동안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들이 녹아져서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애통한 일은 이것이다. 즉 성령께서는 캐나다와 미국에서도 한국에서처럼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신의 영혼의 고통을 보도록 하지만 주께서는 순종하는 통로를 갖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교회가 너무 작기 때문에 1,500명을 수용 할 수 있는 새로운 건물을 세울 것을 계획하기 위해 모였다. 참석한 사람들은 그들이 가졌던 모든 돈을 바쳤다. 남자들은 시계를 끌렀고 부인들은 패물을 내놓았다. 다른 이들은 땅문서를 바쳤다. 그들은 가진 모든 것을 내놓았고 더 바칠 것이 없어서 울었다. 그들은 빚 없이 그들의 교회를 건축했다.”
한 선교사는 한때 보잘 것 없는 지역에 본부를 두고 있을 때 지도자들이 가정집에서 예배 드리는 것이 너무나 불편하다고 그에게 말했다. 30불이면 살수 있는 좋은 장소가 나타났다. “중심지다. 서둘러서 사자” 하고 그 선교사가 말했다. “그러나 목사님, 우리는 극빈자들입니다. 당신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돈은 시간을 두고 모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고 말했다. 선교사의 대답은 “아닙니다. 당신들은 교회의 대지를 사야만 합니다. 당신들에게는 너무나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였다. 그러나 그들은 가난을 호소했다.
그때 자매들이 말했다. “만일 남자들에게 계획이 없으면 우리가 그것을 살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모든 패물을 내놓았다. 그러나 10불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실망하지 않았다. 한 여성은 놋주전자를, 그리고 또 놋그릇을, 또 다른 이는 놋수저 몇 벌을 팔았다. 이들의 식탁용 식기는 놋으로 되어 있었다. 모두 팔고 보니 20불이 되었다. 이제 30불을 손에 쥐고 이 여성들은 교회 대지를 확보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고 한 것처럼 여성들은 더 큰 꿈을 갖게 되었다.
주위의 수많은 마을에서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이 살아가는 인근 주민들의 형편을 생각하고 그들의 마음에 불이 붙었다. 그래서 매달 몇 불을 모아서 여자 전도사를 보내기로 했다. 다른 곳에서의 새로운 교회 헌당식에 그 선교사가 참석했다. 그 교회는 아직 50불의 부채를 안고 있었다. 한 사람이 일어나서 말했다. “목사님 제가 다음 주일 빚을 갚을 수 있도록 50불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 선교사는 그가 매우 가난한 줄 알기 때문에 말했다. “당신이 그 일을 할 생각을 마십시오. 우리 모두 힘을 합하면 곧 그것을 갚게 될 것입니다.” 다음 주일이 되었다. 이 가난한 교인은 50불을 갖고 왔다. 깜짝 놀란 선교사가 물었다. “어디서 이 돈을 가지고 왔는가?” 그 신자가 대답했다. “목사님 염려 마십시오. 이것은 깨끗한 돈입니다.” 몇 주간 후에 그 선교사는 그 지역을 시찰하는 중에 그 집에 이르렀다. 부인에게 남편이 어디 있는지를 물어보자 그녀는 “밭을 갈고 있습니다.”고 대답했다. 선교사가 밭에 가보니 노인은 쟁기를 잡고 아들은 쟁기를 끌고 있었다. 이 선교사는 놀라서 물었다. “왜 이렇게 하십니까? 짐승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신자가 말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불신자에게 50불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청산하기 위하여 소를 팔았습니다.”
초대 교회를 인도하던 바로 그 성령의 인도를 한국 교회가 받고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위한 그들의 열심이다. 부흥이 일어나던 때는 그들은 인쇄된 성경을 신속히 가질 수가 없었다. 한 해에 평양에서 6,000권의 성경이 팔렸다. 누구나 그것을 배웠다. 사업을 따라 여행하는 신자도 그것을 들고 다녔다. 거리에서나 숙소에서 그들은 그것을 펼쳐서 읽었다. 많은 사람들이 감화를 받고 구원을 받았다. 우리의 이 대륙의 신자들은 성경을 그렇게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한번은 기차 여행 중 내가 성경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분명히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드디어 그는 더 참지 못하고 내게로 와서 말했다. “실례합니다. 나는 한번도 기차 안에서 성경책이나 기도문을 읽는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플리마우쓰 형제단이나 로마교회의 신부들은 예외입니다만 당신은 이둘 중 어느 쪽입니까?” “양쪽 다 아닙니다.” 내가 대답했다. “그러면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나는 중국에 있다가 온 선교사일 뿐입니다.” 지금 왜 기차 안에서 제일 중요한 책을 읽는다는 것이 이상스럽게 생각되어야 하는가? 기차나 기선을 타고 있는 시간에 카드놀이를 하는 목사, 장로, 집사를 나는 알고 있다.
한국에서는 연장자가 나이 적은 사람에게 비판할 권리가 있으며 그들이 훈계를 마치고 나서 아랫사람이 할 말이 있으면 윗사람에게 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국에서 이 일이 그대로 되지 않는다. 우리 시대에는 비판할 권리는 젊은이가 독점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가장 권위 있는 비판은 성경에 있다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먼저 성경이 그들을 판단하게 한다. 나는 이런 성경 사용을 좋아한다. 이것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정신과 같이 성경에 겸손히 접근한다면 바울이 에베소에서 설교할 때 그 거리에서 불태워졌던 것보다 더 많은 책이 어떤 신학교 근처에서도 태워질 것이다. 한국의 목사, 전도사, 집사들이 일본 사람들에 의하여 잘못 감옥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불평으로 세월을 보내지 않고 성경 공부를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감옥에서 성경을 일곱 번 통독했다고 한다.그리고는 외쳤다. “내 구주가 그렇게도 놀라우신 분 인줄 미처 몰랐다.”
어떤 사람은 일본인들이 성경을 가지고 가서 없앨 것을 생각하고 로마서를 외웠다. 그리고 자유를 얻었을 때에는 요한복음을 열심히 공부했다. 기독교국들에 정말 박해가 일어나면 성경이 지금보다는 더 고맙게 느껴질 것이다.
푸트 씨가 예상외로 모든 가정들이 신자라고 하는 어떤 마을에서 그날 25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는 첫 번 지원자에게 성경 구절을 암송할 수 있는가 물었다. ‘네’ 하고는 그가 시작했다. 그가 100절을 외웠을 때 푸트 씨는 중단시켰다. 그리고는 사람마다 성경을 전부 외우게 한다면 그가 시험에 통과되지 못할까 두려워서 다음 절을 곧 다시 시작했다. 그는 세례 문답을 위하여 온 25명이 모두 100절 이상은 암기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한국의 교회가 그렇게 강하고 효과적이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성경공부에 있다. 한 해에 1,400회의 사경회가 열리며 90,000명의 학생이 참여한다. 한 곳에 1,800명까지 공부하러 모인다. 어떤 곳에서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와서 신자들의 집은 더 이상 수용 할 수가 없어서 불신자의 집도 구했다. 이 학생들이 있었던 집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주일예배와 사경회는 아무리 나이 많아도 상관이 없었다. 우리가 평양에 있던 주일은 비오는 날이었다. 우리는 이 신자들이 좋은 날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인가를 알아보려고 교회 시간 전에 몇 곳의 사경회를 방문했다. 어떤 곳에는 발 붙일 틈도 없었다.
초대 교회 때 성도들은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사람으로 취급되는 것을 즐거워했다. 꼭 같은 정신이 한국 교회의 특징이다. 질투의 악마가 일본인들을 자극하여 한국 교회를 괴롭히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선천 지방의 신자들이 데라우찌 총독을 살해하고자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신자를 감옥에 넣는 구실이 되었다. 일본인들이 원하는 말을 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경찰 감방에서 그들을 얼마나 잔인하게 고문하였는가 하는 것은 악명이 나있다. 그들은 엄지손가락 만으로 매달렸다. 뜨거운 다리미로 태웠다.
어떤 사람은 일곱 번이나 졸도했으나 그들은 믿음을 지켰고 법정에서는 무죄라고 내보낼 수 밖에 없었다. 고향에서 그의 신앙을 고백하다가 친족들에게 집과 가정을 빼앗긴 사람이 있다. 그는 법에 호소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조용히 있었다. 그는 온유하게 모욕과 잘못을 참았으며 모든 혈족이 회개하고 그의 소유를 회복할 때까지 살아서 그리스도를 전했다.
우리가 그 도시를 방문했을 동안에 예수 믿고 세례를 받은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는 그는 놀라운 이야기를 전하러 갔다. 그의 친척들은 노했고 곧 그에게 몰려와서 그를 거의 죽도록 때렸다. 병원에 옮겨졌을 때 실날같은 목숨이 있을 뿐이었다. 몇 주일이 지난 후 의사는 퇴원 시키면서 그의 생명이 출혈 때문에 언제 끝날지 모르는 형편이라고 했다. 그 신자는 많은 책을 사서 집으로 가지고 갔다. 삼년 동안 그의 지역을 다니면서 책을 나누어 조고 구주에 대하여 말했다.
그리고는 어느 날 출혈이 있었고 그의 영혼은 하나님께로 갔다. 그러나 그를 죽이려고 했던 그 불신 지역이 11개의 교회가 있는 곳이 되었다. 성령은 1세기에 팔레스타인에서 했던 것과 똑같이 한국에서도 우리의 승천하신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있었다. 이 동양의 하나님의 자녀들이 행했던 일은 안일한 우리 기독교회에 도전이 된다.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 사이에 나타나는 것은 힘으로도 능력으로도 되지 않는 다른 풍부한 증거를 그들은 주었다.
모든 겸손으로 그들은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 드렸고 하나님의 충만은 바로그들을 통하여 넘쳐흘렀다. 하나님은 똑 같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찾아오고자 기다리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 댓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사실은 그 큰 구원을 주시는 분을 멸시하는 사람들이 받을 저주 아래 있게 될 것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