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어야 보이는 샘물(창21:14-19)
2023.6.4 김상수목사(안흥교회)
18세기를 영국을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전도자 한 사람을 꼽는다면, 단연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John Wesley,1703-1791)일 것이다. 그는 1753년 11월에 폐병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회복되었다. 그때 그는 훗날 자신의 묘비에 새길 비문을 미리 작성했는데, 그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여기에 불에서 꺼낸 그을린 나무, 요한 웨슬레의 육신이 누어있다”
“불에서 꺼낸 그을린 나무”라는 표현은 구약 스가랴 3장 2절에 나온다. 마귀 사탄이 하나님이 택하신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대적하고 비난할 때, 하나님께서 사탄을 책망하시면서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라고 하셨다. 그리고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입은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그 머리에 정결한 관을 씌워 주셨다. 웨슬레가 이런 표현을 자신의 묘비의 첫 문장에 쓴 것은, 그가 6살 때 화재 속에서 구출되었던 경험도 있지만, 그보다 “불에서 꺼낸 그을린 나무” 부지깽이 같은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평생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의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감사의 고백이 어찌 웨슬레의 마음뿐 이겠는가? 이 시간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의 신앙고백이고 확신한다. 우리들 모두는 본래 지옥의 아궁이 속에서 점점 타들어가던 존재들이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랑의 손을 내밀어서 그 속에서 우리(나)를 꺼내주셨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다른 나무를 집어 넣으셨다. 그 나무가 바로 십자가이다.
하나님은 불 속에서 꺼낸 그을린 나무처럼 흠 많고 부족한 우리들을 독생자의 피로 정결하게 씻어 주셨다. 그렇기에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에 감격해야 한다. 더 나아가 주님을 대신해서 아직도 죽음의 구덩이에서 불타고 있는 또 다른 그을린 나무들을 꺼내줘야 한다. 이를 위해서 날마다 십자가 밑에서 울어야 한다. 부모가 자녀의 눈물에 약하듯이 하나님도 울음에 약하시다. 특히 아이들의 울음에는 더욱 그렇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라의 몸종이었던 하갈과 그녀의 어린 아들 이스마엘이 광야를 방황하면서 울었다. 이스라엘 남부의 광야지역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그곳에는 물이 거의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하갈의 눈을 밝혀서 샘물을 보게 하셨다(창21:17-19)
“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창 21:17-19)
여기서 쓰인 “샘물(베에르, ראֵ֣בְּ)”는 땅 속에 묻혀서 입구가 안 보이는 작은 샘을 말한다. 구약 시대유목민들은 광야에서 작은 샘을 발견하면, 그 입구를 돌멩이 등으로 살짝 덮고 자신들만 알 수 있는 표시해 둔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쉽게 알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갈과 어린 이스마엘의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그녀의 눈을 열어서 샘물이 보이게 하셨다. 가만 생각해 보면,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하시기 위해서 숨겨진 샘물 쪽으로 발걸음을 인도하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들에게도 울어야 보이는 은혜의 샘물(베에르)이 있다. 우리(나)의 눈을 가리고 있는 세상의 염려, 근심, 의심과 욕심의 때가 기도의 눈물로 씻길 때, 비로소 보이는 여호와 이레의 샘물이 있다. 타는 목마름과 모진 바람이 쉼 없이 불어오는 광야 같은 세상 속에서도 주님이 나를 위해 예비하신 은혜의 샘물이 있는 곳이 있다. 그곳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가 세워졌던 골고다 언덕이다.
골고다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라는 영생의 샘물을 예비하신 곳이다. 그곳에서 주님은 나를 위해 영생의 샘물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쏟아 내셨다. 주님이 나를 정결케 하기 위해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아낌없이 쏟아 주신 영생의 샘물,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보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밑에 나와서 눈물로 내 모든 짐을 풀어야 한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눈물로 간구하는 것은 곧 주님의 십자가 밑에서 우는 것과 같다. 우리들 자신을 위해 울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 밑에서 울어야 한다. 자신의 그을린 나무 같은 처지를 생각하면서 사람들에서 신세타령하면,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서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울면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시고, 보이지 않던 은혜의 샘물(베에르)이 보이게 하시고, 메마른 우리의 심령에 성령의 단비를 풍성하게 내려 주신다.
그래서 19세기 설교의 황태자라는 별명을 얻었던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은 “10년 걱정하는 것보다 10분 기도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말했다. OM선교회” 창설자인 조지 버워(George Verwer)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일할 뿐이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When man works, man works, When man prays, God works)
시편 126편 6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6)
우리들이 애창하는 찬송 중에 “주 안에 있는 나에게”(370장)라는 찬송이 있다. 이 찬송 가사에 “십자가 밑에 나아와 내 짐을 풀었네”라는 부분이 있다. “내 짐을 풀었네”라는 표현이 더욱 마음이 와 닿는다. 내 삶의 어떤 짐이든지(설령 내가 감당 못할 짐이라도), 십자가 밑에 풀 때, 참된 위로와 쉼을 얻는다.
이 찬송은 지금부터 약 120여 년 전에 엘리자 히윗(Eliza E. Hewitt, 1851∼1920)이 작사했다. 히윗은 여(女) 교사였는데, 어느 날 불량 학생을 지도하다가 그 학생이 던진 벽돌에 맞아서 등뼈가 부러지고 척추에 이상이 생겼다. 그래서 7년이 넘게 고통스러운 병원생활을 하는 동안 모든 의욕들을 상실했다.
그러던 어느 봄날 병실 청소를 하던 흑인여성의 흥얼거리는 찬송소리를 듣고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동안 주님을 원망했던 것을 회개하면서, 눈물로 이 찬송 가사를 썼다. 그 찬송이 바로 “주 안에 있는 나에게”이다. 이후 그녀는 평생 주일학교 교사와 찬송 작사가로 헌신하면서, 인생의 이모작의 시간들을 가장 의미 있게 보냈다(히윗의 곡 :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예수 앞에 나오면”,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등).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주님 앞에서 울어야 눈이 밝아져서 보이는 은총의 샘물(베에르)이 있다. 십자가의 보혈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 친히 흘려주신 은혜의 샘물이다. 이 생명의 피를 마신 자 마다 영생을 얻는다.
그러므로 주님을 향해 우리 마음의 두 손을 번쩍 들자. 우리들도 십자가 밑에 나와서 눈물의 기도로 무거운 삶의 짐들을 다 풀어놓자. 그래서 주님이 예비하신 은혜의 샘물을 마음껏 마시자.
하늘을 나는 어린 새의 애처로운 울음소리, 바다 속에 이름 모를 작은 미물의 몸짓까지 외면하지 않는 하나님, 애굽여인 하갈과 어린 이스마엘의 눈물까지도 외면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하물며 택하신 자녀들의 눈물의 기도를 외면하실 이유가 없다. 제발 너무 바쁘고, 시간이 없다고 안타까워하면서도, 마치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처럼 살아가지 말자.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