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익희 송덕비[ 全益禧 頌德碑 ]
분야 역사/전통 시대,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출처 디지털구미문화대전-전익희 송덕비
정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선산부사를 역임한 전익희의 선정비.
개설
전익희는 본관이 옥천(沃川), 호가 망일당(望日堂)이다.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으로서 인조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지평, 정언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는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서예에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건립경위
전익희는 선산부사로서 역역(力役)과 부세(賦稅)를 경감토록 하는 등 백성들을 위한 선정을 베풀었으며, 정사를 바르게 하고자 하여 백성들이 그 선정을 기려 비석을 세웠다.
위치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 영남유교문화진흥원 안으로 150m 정도 올라가면 십이지신상 앞에 세워져 있다.
형태
높이 129㎝, 너비 91㎝, 두께 25.5㎝의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하엽(荷葉)을 얹은 형태다. 하엽은 높이 95㎝, 너비 114㎝, 두께 41㎝이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는 ‘부사전익희송덕비(府使全益禧頌德碑)’라 새겨져 있고, 1660년(현종 1)에 백성들이 비석을 처음 세웠으며, 1685년(숙종 11)에 4월에 중수하였다.
현황
비석은 오랜 기간을 경과하여 비문 등을 살펴보기 어려우며, 1972년에 이를 바탕으로 새롭게 세운 비석이 있으므로 참고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전근대 사회에서 각 고을의 수령은 지역 주민들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관직이었으며, 선정을 베푼 수령은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 따라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공직자 상을 생각하게 한다.
참고문헌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인조실록(仁祖實錄)』
『문화유적분포지도』-구미시(구미시·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2)
『구미시지』(구미문화원, 2005)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전익희 송덕비 [全益禧 頌德碑]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清德碑文
自律之廉
施惠之均
氷玉之潔
慈祥之仁
二年治化
百里陽春
臨設遺言
眷眷吾民
於戲可忘
有漏沾巾
公雖去世
公德人人
자신을 단속함엔 청렴으로
은혜를 베푸심엔 고르게 하였네.
깨끗함은 얼음과 같고 옥과 같네.
인자하고 자상함은 그지없으셨네.
다스린 지 이 년 동안 베푸신 덕화
백 리에 가득한 봄볕이네
마지막 가실 제 남기신 마지막 말씀
살뜰하사 우리 백성 가엾어서 하셨네
아 ~ 어찌 잊을쏘냐.
하염없는 눈물이 수건을 적시네.
임은 비록 이 세상을 떠났으나
그 은덕 이 땅의 백성에게 길이 스며드네.
※清德碑는 지금 구미시 儒教文化振興院 경내에 세워져 있음.
[출처] 沃川全氏 吉也堂公派譜 宗史錄
※호 설월당(雪月堂)
칠성루및휴계재사[ 七星樓─休溪齋舍 ]
소재지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용상리 449 지도
1983년 9월 29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74호로 지정되었다. 칠성루(七星樓)는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을 추모하기 위하여 1631년(인조 9)에 후손 설월당(雪月堂) 전익희(全益禧)가 지었고, 휴계재사(休溪齋舍)는 증손인 망일당(望日堂)이 1576년(선조 9)에 지었다 한다. 그러나 상량문(上樑文)에 따르면, 휴계재사는 1696∼1697년(숙종22∼23)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칠성루및휴계재사 [七星樓─休溪齋舍]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