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4편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
"6: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다윗은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라는 말을 무심코 흘려 듣기엔 그의 영성이 매우 불편합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들의 말이라서 그럴까요? 성령님께서는 누가복음 18장의 한 관원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선생님 앞에 "선한"이란 형용사를 붙힌 것을 매우 못마땅해 하십니다.
우리가 알 것은 사람이 생각하는 선이라해서 진리이냐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선악과 시스템에서 생산된 선은 어디까지나 선악과 체제 안에서나 유통되는 선으로 결코 생명나무로서의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하나님 한 분이시라고 증거합니다.
이것을 면밀히 규명,통찰,분별하지 못하면 가나안 땅의 원주민이라 할 수 있는 일곱 족속과 그들에게 속한 임산부나 신생아나 순진무구한 유아일지라도 다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법이 어찌 선하다는 것일까?라는 의혹에 휘둘리게 됩니다.
때문에 성령님께서 우리의 이해력을 돕지 않으시면 하나님의 명령과 법으로 포진된 성경 전체를 흐르고 있는 절대 선에 100%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는 불순종의 결과 영의 눈은 실종,실명되고 혼적 눈은 유독 수치심과 부끄러움 쪽으로 밝아져서 자신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는 하나님 같은 존재가 되었음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사람이 아닌 단 한 사람의 말인 "선한 선생님이여!"라는 말을 흘려 듣지 않습니다.우리 생각에 당신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러 주셨으면 기특하게 여겨 주셔도 될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보다 하늘만큼 더 높고 그 길도 그러하다고 증거합니다
복음서에는 진리일수록 일대 일로 양육해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가령 니고데모,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혈루병 걸린 여인 등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악과에 연루된 모든 인류가 생각하는 "선"의 범주 안으로,그러니깐 선악체제로 당신을 끌어 내려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름에 "No!"하십니다.예수 그리스도는 선악과를 따먹은 분이 아니시쟎습니까?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여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이 다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신22:9
구약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 있습니다.그것은 이스라엘이 주변국의 신들과 당신을 같은 범주의 신으로 놓고 그것들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비교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 관원의 수준에 맞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는 말씀으로 양육해 주십니다.
이제 다윗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라는 말에 왜 잠시 그의 영성을 다듬어야만 했을까? 그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 생각해봅니다
여러 사람이 한 그 말은 어쩌면 최고의 수장격인 다윗 왕이 선을 보이지 못하니 압살롬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는 반란이 일어난게 아니냐?는 불만을 표출한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죄짓고도 떨지 않다가 나단 선지자의 지혜로운 책망에 침상을 젖시며 회개하는 과정 속에 모태 죄인으로 태어난 자라고 토설합니다
그같이 왕도 백성들과 다를 바 없는 죄인인데 신하들이 자기를 신처럼 받드는 것도 버겹고, 그렇다고 뒷전에서 수군거리는 것과 무관하게 살려니 쉽지 않습니다. 나아가 온 나라 백성 모두가 행복하게 살도록 선정을 베푸는 것도 어렵습니다.
이에 다윗은 깨달은 말씀에 민첩한 반응을 보이는 간구하는 마음으로 "여호와여!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다윗의 이 기도는 민6:22~27절 말씀을 압축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제가 다윗에게 전률하는 것은 기도가 길든,짧든 말씀을 깨달은 마음으로 여호와께 기도하면 응답을 주신다는 산 믿음의 소유자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한건데 그의 산 믿음에 자꾸만 새록 새록 놀라는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6:22~27
선을 보일 자가 누구뇨? 라는 말에 다윗은 여호와께서 주의 얼굴을 보이사 비춰주시길 기도합니다. 이는 복의 원천이신 여호와가 선의 원천도 되시는 주의 얼굴이시기 때문입니다.
7 :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나이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들어 자기를 비취실 때 본인 마음에 두신 기쁨의 질과 양의 어떠함을 자주 자주 체험한 자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두신 기쁨의 정체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을 붓듯 부으신 성령이심을 발견한 자입니다. 때문에 그는 범죄 후 자신에게 두신 기쁨의 기름,돌파의 기름,곧 성령을 거두어갈까봐 제일 두려웠던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두신 성령을 거두지 않는 대신 징계를 감당할만할 때에 주십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그가 받는 혹독한 징계를 달게 순적하게 돌파해 나가도록 진리로 인도,감동 감화시켜 주십니다.
이는 오늘날 모든 성도를 대하심이 그렇습니다. 우리 중 징계를 피해갈 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징계가 없으면 혹여 나는 사생아가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실까요?
다윗이 이러한즉 이스라엘 족속을 위하여 "어찌 여호와여!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라고 간구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어둠 속에 빛이 있으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이셨는데,이 빛이 어디를 비추냐면 감사하게도 꺼져가는 심지같은 우리 마음을 비추는 빛이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내 마음이 사망과 흑암에 앉아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해보신 분과 안해보신 분과는 영성이 다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는 빛을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마음에 비추시면 그 때부터 소숫점만한 옥토(새 마음)가 생긴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이 심길만한 옥토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마음으로 깨달아지면 우리의 기쁨은 시들거나 마르지 않습니다. 사도요한은 주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이라고 소개해 주십니다.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인생이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와 은혜의 말씀을 알게 되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다윗은 기쁨의 기름이며,어떠한 역경도 뚫고 나가게 하는 돌파의 기름이며, 은혜와 진리를 비극적인 현장 속에서도 풀어 주시는 진리의 기름인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나이다"라고 선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시편36:9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요 영원한 분깃이라"시73:26
아버지!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의 어떠함을 진리의 성령으로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