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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7편 3절: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찌라(셀라)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왜 하늘에서 보내셨다는 거냐? 성도를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보냈다고 한다. 뭘 보냈다는 거냐? 인자와 진리를 보내신다고 한다. 그러면 인자와 진리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을 말한다. 그러니까 성도의 구원을 위해 인자와 진리의 말씀으로 하셨고, 또 선지자들을 붙들어서 말씀을 하셨고, 또 이 말씀으로 보호하셨고, 하나님의 이적 기사로 보호하셨고, 또 하나님의 신으로, 즉 성령으로 하셨고, 또 하늘에서 보내셨으니 성육신으로 하셨고, 사도들을 붙잡고 하셨고, 천사들을 보내서 하셨다. 이 모든 것이 하늘로부터 된 성도의 구원의 역사다.
성도의 구원역사는 땅에서 올라와서 되는 게 아니라 원칙상으로 하늘로부터 되는 거다. 하늘로부터 되는 것이 구원역사다. 우리 성도들을 보호, 육성, 성장케 하고, 실력을 키워주시려고, 우리의 영적인 면이 잘 되라고, 이룰구원이 잘 되라고 모두 하늘로부터 역사가 되어진 거다. 우리가 이런 믿음의 눈을 가지고 보면 이방 불신계, 또는 모든 삼라만상 자연만물이 돌아가는 것 전부가 하나님께서 성도의 구원을 위한 이용물이요 재료감으로 보게 된다.
일반사람들은 일반지식의 수준으로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가지고 ‘크네, 적네. 성공했네, 망했네’ 라고 하고, 큰 것을 보고 무서워하지만 믿는 우리들에게는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이룰구원을 위한 재료들이니 하나도 무서울 게 없는 거다. 영의 눈을 가진 신앙인들은 이런 걸 무서워하지 않는다.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 주권적으로 돌리신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 모든 것을 믿음으로 대처해 나가면 이룰구원이 되어지는 거다. 내 육신에 좋은 것만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성도들이 자칫 잘못하면 이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이러면 신앙 믿음의 성장에, 영능의 실력 면에 한 발짝도 못 나간다.
군대에서 훈련할 때 높은 곳에 올라가기도 하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절벽에서 줄을 잡고 냅다 내려오기도 한다. 이런 게 일반사람들 보기에 편한 거냐? 육신적으로 그만큼 힘들고 고달픈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훈련이 있어야 만이 적을 쳐부술 수 있는 거다. 문제는 적들도 똑같은 훈련을 하기 때문에 그 적을 이길 수 있는 더 강한 훈련이 필요한 거다.
실력이 없는 군대는 낯에 싸우지만 실력이 있는 군대는 밤에 싸운다. 밤에도 주변을 훤히 볼 수 있는 안경을 끼고 싸운다. 그런 것처럼 안 믿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하고 신앙 믿음의 다림줄을 놓는다. 그리고 세상 속화된 교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 그 이면에 무엇이 어른거리고 어떤 영의 감화성이 그 사람을 지배하고 움직이는지를 보는 거다. 이걸 볼 줄 알아야지 이걸 못 보면 신앙인이 못 된다.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찌라(셀라).’ 삼키려는 자가 뭘로 삼키려고 하느냐? 비방이다. 그러면 진리의 신앙노선을 가는 성도들을 삼키려는 비방이 어떤 것일까?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이 무슨 신앙을 가지고 사느냐? 교회이름을 왜 ‘궁극’이라고 한 거냐? 일반사람들은 이 뜻을 모른다. ‘궁극교회’ 라고 한 것은 우리가 궁극적 신앙을 가지자는 거다. 그러면 궁극적 신앙이 뭐냐? 한자로는 다할 궁(窮) 다할 극(極)인데, 그 이상 없는 최고의 결과를 놓고 이 결과를 잡고 이 결과를 위해 오늘을 살고자 ‘궁극’이라고 한 거다. 다윗의 신앙도 결국은 이런 정신이다.
우리교회의 설교의 내용이 어떤 거냐? 현세에 소원 목적을 둔 게 아니라 죽음 저 너머의 세계에서 실현될 것을 위한 실력을 이 물질계 세상에서 모든 존재와 사건과 사물 속에서 이뤄나가게 하는 내용이다. 이 땅에 살면서 닥치는 모든 사건과 환경 속에서 죽음 저 너머의 세계를 주님과 함께 영원히 다스리고 통치하면서 극치의 쾌락을 누릴 수 있는 영능의 실력을 만들어 가는 성도가 보통 단수가 높은 거냐? 낮은 신앙이겠느냐? 이건 영의 눈이 아니면 안 되는 거다.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안 되는 거다.
그러면 ‘나를 감동해 주옵소서’ 라고 하면 이런 사람이 되는 거냐? 그게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그 세계의 지식을 내가 가지게 되면 나의 생각과 소원 목적이 성령님의 것과 같아지는 것이니, 이런 사고방식, 이런 신앙사상이 성령의 감화성이다. 성령의 감화를 따라 움직여야 만이 영능의 실력자로 성장이 되는 거다.
진짜 성령을 받은 사람은 펄펄 뛴다거나 울고불고 하는 게 아니라 정신이 또렷해지고 분별력이 빨라진다. 예언 방언하며 눈을 뒤집고, 춤을 추고, 이상한 말을 하는 게 성령을 받은 게 아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일에, 생활에, 사람에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적용이 들어간다. 진리이치대로 적용이 들어간다. 생활로 들어가고, 정신으로 들어가고, 이러면 분별력이 생기게 되어서 매사가 바로 된다.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맨날 방안에 처박혀 있다면 이게 성령을 받은 거냐? 아니다. 성령이 아니라 귀신이 들린 거다. 성령 받은 사람은 영원 궁극적인 세계에 대해 지혜가 있다. 자기를 죄에서 보호할 줄 안다. 매사를 잘 분별하면서 죄악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진리말씀을 받고서 진리의 교훈과 비진리의 교훈을 분별할 수 있는 지식을 가졌다고 해도 자기가 가진 진리지식으로 인격화 되는 것과는 다를 수도 있다. 그래서 목사님들을 보면 여기에 와서 교훈을 받으면서(주-김경형목사님이 신학생 및 교역자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 나름대로 분별력이 생기니까 노회고 총회고 다 썩었다고 하며 교단에서 탈퇴를 한 분도 있는데, 이 분이 하는 말이 김목사님(김경형목사님)처럼 독불장군 식으로 교회를 하면 교회가 안 된다고 한다.
우리교회에 배우겠다고 오신 목사님이 몇 분 계시고, 아직 장로는 없는데, 헌금을 내가 다 관리하는데, 내가 이 돈으로 술 받아먹고 여자 집에 가고 하느냐? 십일조는 내가 쓴다고 광고했는데, 그 대신 우리 교인들에게 ‘김장해 와라. 도서비 달라. 교통비 달라’ 하지 않는다. 헌금위원을 세워놓고 이런 걸 일일이 집행하게 하면 복잡해진다. 그리고 현재 우리교회에서 나오는 헌금의 금액이 목사에게 월급을 주고, 이 외에 내가 강의를 위해 대전이나 포도원교회에 가는데 쓰는 교통비니 무슨 비니 하는 것을 교회에 다 청구를 하게 되면 오히려 모자란다. 이 외에도 예배 후에 먹는 식사준비나 건물세, 경조사비 등등을 일일이 지출하려고 하면 더 많이 모자란다.
헌금종류가 주일헌금, 감사헌금, 건축헌금 등등이 있는데, 자기 교인들과 함께 우리교회로 나오는 목사님들이 계신데, 평택에서 오신 O목사님의 교인들이 내는 것은 십일조와 다른 헌금을 O목사님께 드리고 있고, 다른 목사님들의 교인들이 내는 것도 다 해당 목사님께 드리고 있다. 그리고 건축헌금은 헌금담당 집사님을 통해 은행에 넣고 있다.
우리교회가 교단에 가입하지 않고 독립으로 나가는 것과, 헌금을 관리하는 것과, 내세복음의 교훈만 하는 것 등등에 대해 너무 독불장군 식으로 하면 교회가 안 된다고 말을 한다면 이게 영의 생각이냐, 육의 생각이냐? 이런 식으로 본다면 본문의 다윗도 독불장군으로 나가고 있는데, 이런 다윗을 누가 알아주겠느냐? 다윗만 아니라 주님께서도 독불장군 식으로 나갔는데 당시에 어느 누가 주님의 심정을 알아주었느냐?
내가 독립으로 나가는 것을 독불장군이라고 한다면 이런 말을 하는 목사가 노회 총회에 들어가서 목회를 하니까 자기 교회가 어려울 때 노회 총회가 물질로 도와주더냐? 아마 안 그럴 거다. 이런 말이 여기에 와서 이 진리교훈을 배우는 목사님들 중에서 나오는데, 진리사상은 그런 게 아니다. 목사 자기가 진리의 교훈을 받았으면 얄팍한 인본주의 정신은 버리고 교인들을 진리본질의 실력으로 자라게 해야 한다. 여기서 와서 다른 곳에서 듣지 못하던 말을 들었으니 ‘들은 이것을 교인들에게 전하면 많은 사람들이 모일 거다’ 라고 생각한다면 이건 벌써 교회의 성질에서 빗나간 거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비판 판단해야 한다. 이건 교만이 아니다. 자기가 하나님 기준을 가지고 있다면, 빛을 가지고 있다면 다 분별을 하게 되는 거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은 이런 자가 되기 위해서다. 악한 자들이 이런 진리신앙 노선을 가고 있는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을 비방한다면, 천국의 소망을 품고 진리로써 하나님의 성품으로 인격화 성품화 하려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인격화 실상화 자체화로 성장하려는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을 비방하고 삼키려고 한다면 이들이 어떤 방법을 쓰겠느냐? 어떤 비방이라야 진리신앙의 노선을 걷고 있는 교인들의 마음이 상하고, 마음이 흔들리고, 주님으로부터 떨어지게 되겠느냐?
이단자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자기들 쪽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 교회에 대해 뭘 물고 늘어지느냐? ‘목사님이 헌금처리를 어떻게 하느냐? 교회에 무슨 다툼이 있느냐?’ 이런 것들을 주로 말을 한다. 물론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도 상대를 진리로 가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편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진리의 교훈만큼은 흐트러지면 안 된다.
교회라고 하면 교훈이 큰 비중이 있는 것이므로 어떤 일을 할지라도 진리이치의 교훈에서 떠나면 안 된다. 교인들이 듣기 좋아한다고 해서 ‘세상에서 부자로 살고’ 이런 소리가 나오면 안 된다. ‘교단이 크다느니, 목사님이 학박사라느니’ 이런 자랑을 하면 안 된다. 우리가 진리로써 늘 구별 분별을 하지 않으면 이런 거짓된 교훈에게 언제 넘어가는지도 모르게 넘어가 버린다.
눈이 왔을 때 언덕에서 비료포대 같은 걸 깔고 내가 그 위에 타면 이 비료포대가 나를 태우고 아래로 내려간다. 그런가 하면 나는 그 자리에 앉아있는데 내 아래에 있는 것만 슬슬 빠져서 내려가는 것도 있다. 이걸 우리의 신앙 이치적으로 봐라. 나는 가만히 있는데 내 아래의 것이 슬슬 빠져나가면 나중에 어떻게 되느냐? 징검다리를 건널 때는 뭘 주의해야 하느냐? 물이끼다. 이걸 밟으면 사정없이 미끄러져 넘어진다. 물에 이끼가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만큼 안 다녔다는 거다. 이런 걸 분별하지 못하면 자기가 해를 당하듯이 교회의 교훈도 마찬가지다.
우리 입장에서는 이방 종교적인 사상적 이론과 주장도 심각하지만 이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교회 안에서 이방인들의 소원 목적에 성경을 둘러 덮어씌운 혼합된 가르침이다. 이게 교인들에게 아주 위험하다. 교회에서의 교훈이 사람의 속을 들춰내서 자기가 가진 생각과 정신이 하나님의 성품과 얼마나 다른지를 알게 하고 고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그대로 둔 채 행동을 어떻게 선하게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식의 가르침이라면 이게 바로 거짓적인 혼합된 가르침이다. 우리는 교훈의 성질을 잘 분별해야 한다.
사람의 몸이 건강하려면 먼저 속을 잘 다스려야 한다. 이러면 육체도 건강해진다. 성경에 마음에서 모든 병이 난다고 하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마음을 잘 다스리라는 거다. 마음을 잘 다스리면 모든 병이 물러간다. 반대로 자기 마음을 못 다스리면 자기가 막 병을 불러들인다. 그런 것처럼 교회 안의 비진리의 정신 사상들이 성도들을 삼킨다. 성도들을 여기에서 구원시키기 위해서는 순전히 하늘로부터 온 교훈이라야 한다. 하늘로부터 되어지는 것이라야 인간이 구원이 된다.
세상적인 비진리의 육적 정신 사상들은, 세상 주장성들은 다 땅에 속한 거다. 따라서 목사가 교회에서 성경을 들고 땅에 속한 것을 가르치고 주장한다면 이건 비진리다. 그런데 비진리적 교훈에 성경구절을 덮어씌워서 말을 하면 분별력이 없는 교인들은 그게 비진리의 거짓교훈임을 잘 모른다. 우리는 누가 아무리 성경구절을 덮어씌워서 말을 할지라도 그 말 속에 들어있는 근원을 캐서,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정신 사상을 끌어내서 ‘하나님의 뜻에 맞나, 안 맞나’ 하고 봐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지식성, 하나님의 도덕성, 일반 도덕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덕성,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성의 가르침들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성도가 이런 가르침을 받으면 세속화된 사람들의 신앙이 어떻다고 하는 것이 다 분별이 된다. 말하자면 영의 눈이 밝아진다. 그러니 가치판단 평가성이 바로 되고, 영능의 실력자가 된다. 이렇게 된 상태에서 자기가 무엇을 한다면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역사가 되는 거다. 하나님의 역사다. 성령님의 역사다. 이런 역사는 모든 거짓과 비방과 훼방과 압박으로부터 구원이 되는 역사다.
우리가 성경의 역사들을 보면서 싸움이나 전쟁에서 단순히 ‘이겼다. 졌다’ 하는 표면만 보면 안 된다. 그들이 어떤 정신 사상에게 정복을 당해서 먹혔는지, 어떤 정신 사상이 그들을 정복을 하고 들어갔는지, 무엇은 먹힌 것 같으나 안 먹히고 속으로 들어가서 상대를 녹이고 있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정신 사상은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구원의 역사에 속하는 것인데, 이 구원의 역사는 세상 마지막 때까지 하나님의 주격적 역사로서 진리성도에게 계속적으로 진행이 되는 역사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의 이 역사 속에 살고 있다는 긍지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교만한 말이라고 할런지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서 ‘진리신앙의 노선을 걸어가는 우리 궁극교회는 하나님께서 잡고 쓰시는 이 시대의 주격체가 아닌가?’ 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일반교인들은 주일날 의례히 쇼핑도 하고 먹는 것도 사 먹고 하는데 우리교회에 와서 이런 걸 금하는 말을 들으면 이 말을 받아들이겠느냐, 못 받아들이겠느냐? 이런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우리교회에 와서 이런 교훈을 듣는다면 참으로 고역인 거다. 진리 길 생명 길을 가는 성도가 비진리에 삼켜지는 것은 하나님의 원하심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대국적인 큰 구원의 역사가 주된 역사임을 안다면 어느 신앙노선에서 어디에 소속하고 어느 입장에서 신앙생활을 해아 하겠느냐? 이게 매우 중요한 거다. 우리교인들이 어디에 소속이 되었느냐? 자기는 어느 교회 교인이냐? 궁극교회 교인이냐? 그렇다면 궁극교회에 소속된 교인으로서 자기의 입장은 어느 입장이냐? 하나님 입장이냐, 마귀 입장이냐? 천국 입장이냐, 세상 입장이냐?
궁극교회에 적을 올려놓으면 궁극교회 교인이 된 거다. 궁극교회에 소속이 된 거다. 그리고 진리교훈이 좋다고 하면서 진리를 받고 있다면 이 사람은 어느 교회에 다니던 진리에 소속이 된 거다. 그리고 진리교훈이 좋다고 하며 이 교훈의 정신을 따라 살면 이 사람은 진리정신의 입장에 선 거다. 그런데 소속은 진리교훈으로 되어있지만 자기의 입장은 전혀 다른 곳에 가 있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이런 걸 잘 구별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에게 소속이요, 주님의 입장이요, 여기에는 말로만 아니라 나의 정신 사상이 다 포함이 되는 거다. 그래서 우리교인들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고 자기의 이룰구원을 염두에 두고 그 말씀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가를 판단해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