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6.5.26 지붕 위에서 떨어진 빗물에서 '극미동물'을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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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뛰어난 관찰력과 묘사력으로 미생물학의 기초를 일군 안토니 판 레이우엔훅은 초등 교육밖에는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가 영국 왕립학회에 보낸 서한들은 ‘영어로 번역되어’ 학회지에 실려야 했다. 당시 지식인들의 공용어라 할 수 있는 라틴어를 몰라 모국어인 네덜란드어로 써서 보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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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우엔훅이 제작한 현미경의 성능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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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 판 레이우엔훅은 1632년 10월 24, 네덜란드의 델프트에서 태어났다. 바구니 제작일을 하던 아버지는 레이우엔훅이 여섯 살 때 세상을 떴다. 레이우엔훅은 레이던 근처에 있는 학교에 들어갔지만 정규 교육을 마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곳에 살던 친척으로부터 수학과 물리의 기초적인 원리를 배울 수 있었다. 열여섯 살 되던 해인 1648년, 레이우엔훅은 한 스코틀랜드계 포목상인 밑에서 도제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현미경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바로 이 시기였을 것이다. 그는 도제 생활을 하면서 유리를 입으로 불어 형태를 만드는 기술도 배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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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우엔훅이 제작한 현미경을 실물 그대로 복원한 모습](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cc.phinf.naver.net%2Fncc02%2F2010%2F7%2F30%2F86%2F1-1.jpg)
레이우엔훅이 제작한 현미경을 실물 그대로 복원한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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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미경은 1590년에 네덜란드의 안경 제작자인 자카리아스 얀센이 처음 발명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쩌면 그의 아버지였을 수도 있다.) 현미경은 망원경 보다 먼저 발명되었다. 하지만 1608년 한스 리페르세이에 의해 발명된 후, 바로 그 다음 해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달과 행성 관측에 활용한 망원경과는 달리 초창기 현미경은 과학과 관련해 별다른 성과물을 내놓지 못했다. 마르첼로 말피기 나 로버트 훅같은 이들이 현미경을 과학에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1660년대의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티 없이 맑은 유리를 만들기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그런 유리를 갈아 만든 렌즈를 통해 물체를 보면 모양이 뒤틀려 보이기도 하고, 가장자리에는 얼룩얼룩한 색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1654년 레이우엔훅은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가게를 열었다. 그리고 이 무렵 직접 현미경을 제작했다. 그러다 시 공무원 등의 일을 하게 되면서 경제적으로 안정을 이루게 되자 자신의 취미 생활에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가 직접 렌즈를 갈아 제작한 현미경들의 배율은 50배에서 300배였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500배나 되기도 했다. 그의 현미경은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하지만 레이우엔훅의 렌즈는 남달랐다. 그가 만든 렌즈들의 성능은 아마추어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 게다가 그는 당시의 일반적인 복합 현미경 대신 초점 거리가 짧은 단일 렌즈를 사용했다. 그는 얇은 황동판 두 개 사이에 자신이 간 렌즈를 끼워 넣었다. 렌즈 중 어떤 것들은 핀머리만큼이나 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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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 속에서의 미생물 발견, 혈액순환과 정자의 운동까지 관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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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우엔훅의 취미 생활은 현미경 제작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현미경을 과학 연구에 활용했다. 그리고 1670년대 중반 그는 현미경을 통해 ‘극미동물’(미생물)을 관찰할 수 있었다. 특히 1676년 5월 26일, 그는 지붕 위에서 떨어진 물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다가 순수한 빗방울에는 존재하지 않는 동물을 발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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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우엔훅이 제작한 현미경의 설계도(1756)](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cc.phinf.naver.net%2Fncc02%2F2010%2F7%2F30%2F181%2F2-1.jpg)
레이우엔훅이 제작한 현미경의 설계도(1756)
그 해 10월 8일, 그는 자신이 관찰한 것을 담은 서신을 왕립학회에 보냈다. 보고를 받은 왕립학회에서는 그의 주장이 사실인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회원들 중에는, 당시의 관행과는 달리, 그가 보낸 서신에 아무런 공적인 증빙이 따라붙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문제 삼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레이우엔훅은 델프트 시민 십여 명을 집으로 불러 이들에게 현미경으로 그 극미동물을 직접 보여준 후 시민들의 확인 내용을 담은 서신을 왕립학회에 다시 보냈다. 그럼에도 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진위 논란은 로버트 훅에게 사실 확인을 의뢰한 후 보고를 듣고 나서야 진정되었다. 훅도 처음에는 현미경으로 미세한 동물들을 볼 수 없었다고 했지만 반복 실험을 통해 최종적으로는 레이우엔훅의 보고 내용이 사실이라고 발표했다. 이 일을 계기로 레이우엔훅은 과학계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마추어로 연구자로 남았다. 강의를 하는 것도 기부를 받는 것도 거부했다. 1716년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런 일은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으며, 자신은 ‘자유인’이 되는 쪽을 선호한다고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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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우엔훅은 곰팡이, 꿀벌의 촉수, 기생충, 머리카락 등 수많은 것들을 현미경으로 관찰했다. 그는 혈액의 순환을 눈으로 확인하기도 했다. 뱀장어 꼬리의 얇은 피막에서 모세혈관을 흐르는 혈액을 현미경으로 관찰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정액도 관찰했다. 왕립학회가 그에게 정액을 연구해 달라고 의뢰한 것이다. 그는 과학적 탐구심이라는 열정만으로 수치심을 버리고 자신의 정액을 현미경 렌즈로 관찰해 정자를 확인했다. 왕립학회에 보낸 서신에서 그는 “나는 정액 속에 사는 천 개도 넘는 수많은 매우 미세한 동물들이 깨알만한 공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 이러한 관찰 결과가 학자들 사이에 혐오감을 주거나 분노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고 생각된다면 간곡히 바라옵건대 부디 비밀에 부쳐 주시고, 출판을 할 것인지 폐기할 것인지는 귀하의 뜻에 맡기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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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미경으로 관찰한 1년생 애쉬나무의 목질. 레이우엔훅이직접 그린 관찰도다.](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cc.phinf.naver.net%2Fncc01%2F2010%2F7%2F30%2F213%2F0-1.jpg)
현미경으로 관찰한 1년생 애쉬나무의 목질. 레이우엔훅이 직접 그린 관찰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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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12시간 전까지도 관찰을 계속했고 왕립학회에 서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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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3년 8월 26일, 안토니 판 레이우엔훅이 세상을 떴다. 아흔이 넘게 장수한 이 아마추어 미생물학자는 평생 500개가 넘는 렌즈를 갈았다. 게다가 약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자신이 관찰한 내용을 담은 서신을 영국 왕립학회를 포함한 학회와 학자들에게 약 600통이나 보낼 정도로 연구에 매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 한 권의 책도 쓰지 않았다. 과학에 대한 그의 열정은 정말 대단했다. 그는 죽기 12시간 전까지도 관찰을 계속했고, 왕립 학회에 서신 두 통을 보냈다. 레이우엔훅은 자신이 만든 현미경 26개를 왕립학회에 기증했다. 하지만 관리 소홀 때문에 한 대조차도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레이우엔혹이 제작한 현미경은 고작 9개 뿐이다. 그는 자신만의 현미경 제작법과 활용법을 평생 공개하지 않았고 무덤까지 가져갔다. 레이우엔훅은 아마추어 과학자였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과학에 대한 열정과 성실함 만큼은 세상의 그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1680년 영국 왕립학회는 그를 회원으로 추대했다. 레이우엔훅은 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학회는 그에게 메달을 수여했다. 그 메달에는 라틴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의 연구는 아주 작은 것이지만, 그 영광은 결코 작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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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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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 판 레이우엔훅에 대해 가장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책은 <의학사의 이단자들>(줄리 M. 펜스터 / 휴먼앤북스)일 것이다. 이 책 2부에 그를 설명한 글이 나온다. 과학사를 다룬 거의 모든 책에 이 아마추어 과학자의 이름이 등장하지만, 아쉽게도 그 스무 쪽 남짓이 그에 관해 현재 우리말로 읽을 수 있는 가장 긴 글이다. 레이우엔훅과 현미경의 역사에 관한 간략한 설명은 <발견자들 2>(대니얼 부어스틴/ 범양사), 66-73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레이우엔훅이 본 ‘아주 미세한 동물’ 즉, 미생물에 대한 지식을 얻기를 원한다면 버나드 딕슨이 쓴 <미생물의 힘>(사이언스북스)와 그 책의 공동역자 중 한 사람이 쓴 이재열 교수가 쓴 <보이지 않는 권력자>(사이언스북스)를 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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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장석봉 / 저술가, 번역가
- 장석봉 씨는 '인류의 문화를 바꾼 물건 이야기 100'등을 쓴 젊은 저술가다. 나라 안팎의 책을 맹렬하게 읽는 독서가이기도 하다. 특히 과학에 관심이 커서 수 십 권의 책을 번역, 소개했다. 위인들의 일생을 다룬 외국 원서들을 즐겨 읽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 피카소, 에디슨 등의 평전을 번역,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