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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7편 4절-6절: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셀라).
4절: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했다’는 것은 악한 자들 가운데 처해진 다윗의 현재 상태를 말함이고,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다’는 것은 악한 자들이 맹렬한 분노로 추격하며 다윗을 찾고 있는 상태를 말함인데,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동굴 속에 숨어있는 상태를 비유로 말하는 거다.
다윗의 이 말을 볼 때 사단 마귀가 진리신앙의 성도를 죽이려면, 진리를 붙잡고 따르는 성도를 죽이려면 먼저 무엇부터 죽여야 하겠느냐? 성도를 죽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은 마귀가 하는 일인데,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진리성도를 죽이려고 하는 사단 마귀의 수법을 미리 알아서 정신을 바싹 차리고 경계심을 늦추지 말자는 거다.
사단 마귀가 역사하는 세상에 사는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지식성, 하나님의 신적인 도덕성, 하나님의 옳음, 즉 능력성을 깨달으면서 이 눈을 가지고 경계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 마귀의 조종을 받는 거짓 종들이 성도를 죽이려는 가르침에, 즉 세상 물질성적 개념의 정신에 넘어가게 된다.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창은 가까이에서 던져 사람을 찌르거나 손에 쥐고 사람을 찌르는 무기이고, 화살은 멀리서 겨냥하여 사람을 쏜다. 창이나 화살에 가슴을 맞으면 사람이 죽는다. 이게 무슨 말이냐? 일반적인 악한 자들은 멀리서나 가까이에서나 혀를 놀려서 사람을 헐뜯고, 사람의 마음을 찌르고, 상처를 내는 일을 하듯이 영적인 면에 있어서의 악한 자들은 비진리의 혀를 놀려서 진리성도를 비난하고 헐뜯어서 진리 길로 가지 못하게 한다는 거다.
비진리는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라서 일반 세상사람들은 뭐가 진리이고 뭐가 비진리인지를 모른다. 세상에서 ‘진리’ 라고 하는 것은 성경의 진리와는 질이 다르다. 교회에서 비진리라고 하는 것은 신앙정신 면으로 쓰는 말인데,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경이 진리의 말씀이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말씀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전체적인 뜻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온전의 성품을 덧입게 하는 거다.
하나님의 성품에는 하나님의 지혜지식이 있고, 하나님의 선 사랑 거룩 진실이 있고, 하나님의 의와 주권이 있다. 이게 하나님의 성품이다. 성도 속에 이 성품이 들어있으면 이 사람은 진리의 사람이다. 사람 속에 성품의 질이 이렇게 들어있으면 이런 사고방식이 나가게 되고, 이런 이해타산 평가성이 나가게 된다. 생명력이 있는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이 되면 영적인 기능과 지능 면이 자꾸 개발이 돼서 깨달아져 나가고, 자타의 마음중심을 얼마든지 볼 수 있고, 도덕성의 질이 어떤 건지, 지혜가 얼마나 있는지, 얼마나 옳은 것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안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또한 이 세상의 역사의 흐름 속에는 ‘너는 이 시대에 어떻게 살아라’ 하고 성도들에게 말을 하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는 건데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은 이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세상만사를 보면서 그 가운데서 ‘어떻게 사는 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거다’ 라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참 하나님의 종이고, 이 말은 선지자의 말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거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서 말씀을 들을 때는 저 말이 공갈인지 협박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진리이치의 말씀인지를 객관적 입장에서 판단을 해야 한다. 그러니 교회를 우습게 생각하지 말아라.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우습게 생각지 말아라.
우리가 교회에서 목사님이 전하는 말을 듣는데, 교인들이 보편적으로 이 말을 누구의 말이라고 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마땅히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러나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전하는 말이 하나님의 뜻에서 이탈된 된 말이라면 그 말을 믿고 그대로 살다가는 자기 재앙이요 자기 앙화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아무리 목사의 말이라도 진리의 정신에서 이탈이 된 말이라면 들을 수가 없는 거다.
일반적인 면에서의 죄인이 있고 악인이 있는가 하면, 영적인 면에서도 죄인이 있고 악인이 있다. 그러면 영적인 면에서 악인과 죄인을 어떻게 구별하느냐? 죄인이란 법을 거스른 자, 즉 법대로 안 한 자를 말한다. 악인이란 사람에게 악한 일을 한 사람인데, 하나님의 법을 거스리니, 즉 생명과를 따먹으라고 했는데 선악과를 따먹으면 죄인이 된다.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인이 될 때 그들이 누굴 죽였느냐? 그런 죄는 짓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법을 거스리니 그 자체로 죄인이 된 거다.
사람이 이렇게 죄인이 되면 이 사람은 얼마든지 악행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돼버리는 거다. 이 상태에서 행동적으로 악한 짓을 하게 되면 악인이 되는 거다. 그러니까 죄인은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는 짓을 한 사람이고, 악인은 죄인이 된 결과로 인해 행동적으로 악한 짓을 한 사람을 말한다. 이처럼 죄인과 악인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거다.
현재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안 받고 있고, 말씀을 안 먹고 있고, 근원으로 올라가서 보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은 것과 같은 상태로 살고 있기 때문에 다 죄인이다. 이런 상태의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육신적으로 해코자 하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은 이걸 볼 수 있는 눈이 없기 때문에 이 사실을 전혀 모른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떠냐? 우리가 기본구원은 얻었다고 해도 하나님의 성품으로 닮아가는 이룰구원을 이뤄 가는데 있어서 그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먹고 영적인 차원에서 무장이 되고 해야 하는데 이걸 안 한다면 의인이 되느냐, 악인이 되느냐? 악인이 된다. 이걸 잘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일반인들이 보는 일반적인 악인은 우리가 잘 아는 거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보시는 악인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악인은 악행을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만 악한 짓을 하느냐? 아니다. 자기 스스로에게도 악한 짓을 한다. 남에게 병을 퍼지게 하려면 먼저 자기부터 병이 들어야 남에게 그 병을 퍼지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자기가 자기에게 악한 짓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도 악한 짓을 하는 거다. 이런 면으로 보면 교회 안에도 악한 자들이 너무나 많다. 무슨 말이냐? 영적인 면에서 성도들의 기능과 지능 면을 차단시키고 못 자라게 하는 것은 악행이고 악인이다.
교회에서 성경을 들고 가르친다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줘야 하는 게 당연한 거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교과서를 들고 가르친다면 학생들에게 교과서의 내용을 알게 하는 게 당연하다. 마찬가지로 목사가 성경을 들었다면 성경의 뜻을 풀어서 알게 하는 게 목사다. 그런데 뜻은 풀지 않고 세상자랑만 잔뜩 들어놓는다면 이건 악인이다. 영적인 면에서 악한 자들은 혀를 놀려서 세상을 자랑한다. 사람을 넓은 길로 가게 한다. 그러나 옳은 종은 좁은 길 생명 길로 가게 한다.
사람은 다 자유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자유하기를 원하는데, 그렇다고 자기 마음대로 생각한다고 해서 그게 다 생명이 되느냐? 그렇지 않다. 생각은 자유롭게 할지라도 허황된 생각도 있다. 그래서 자기 속에 든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면 꾸중을 듣고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라’ 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젊은이들은 꿈이 많은데, 공상이 좋은 거냐, 나쁜 거냐? 망상은 어떠냐? 아무리 미래에 대한 꿈을 꿀지라도 허공으로 막 날아다니는 꿈을 꿔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성경의 뜻에 대해 생각을 한다면 이것이 망상이나 허상이냐? 성경을 보고 실상세계를 생각한다면 이건 망상이나 허상이 아니다. 사람의 머리가 참 신비롭다. 하나님의 말씀 쪽으로 생각을 하면 이 사람의 머리는 맑아진다. 그런데 ‘세상에서 뭘 먹고 사나? 우리 집은 언제 펴지나? 나이는 먹어 들어가고, 월급은 쥐꼬리만 하고, 저 새끼들은 언제 크나?’ 라는 생각을 하면 이 사람의 머리가 어떻게 되느냐?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밤새도록 이 생각을 하면 그 생각이 사람을 잠을 재우느냐? 이러다 아침에 일어나면 눈알이 십리나 들어가 있다.
사람이 세상에 속한 생각을 하면 병이 들고 시험에 든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생각을 하면 마음이 자꾸 넓어지고 마음이 평안해진다. 이게 참 신비롭다. 자기의 생각 속에 말씀의 빛이 들어가면 사람이 즐겁고 기뻐진다. 왜 그러냐? 분별이 되니 기쁘고 평안한 거다. 반대로 자기의 생각 속에 말씀의 빛이 없으면 어두침침하고, 암울하고, 사람이 생각이 자꾸 꼬이면서 시험에 들어버린다.
영적인 면에서 악한 자들은 비진리의 혀를 놀려서 교인들을 세상 길 넓은 길로 가게 하고, 이런 소원 목적을 품게 해서 그 일을 하게 하니 이걸 사망운동이라, 죽는 운동이라, 죽어가는 운동이라고 하는 거다. 그 결과는 심판을 받는다. 우리 진리의 성도들은 혀를 놀릴 적마다 진리이치가 나와야 할 것이고, 사망권 안에 들어있는 자를 생명권 안으로 인도해서 살려야 한다.
세상사람들은 소원이나 목적이나 모든 사고방식 이해타산이 어디 안에 들어 있느냐? 세상 안에 들어있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은 소원 목적 희망성 행복감을 갖는 게 전부가 세상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를 그 안에서 끄집어낸다.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을 하늘나라 쪽으로, 하나님의 말씀 쪽으로, 하나님 쪽으로 이끌어 낸다. 이러면 사람이 자유가 된다. 세상에 매이지 않게 된다. 세상을 다스리게 된다.
일반적으로 볼 때도 미련한 사람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느냐? 미련한 사람을 나라의 지도자로 세우면 그 나라는 망한다.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생명의 말씀을 받고 깨달아서 세상과 함께 망할 수밖에 없고, 세상과 함께 불 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끄집어내는 거다. 이게 전도요, 다른 말로 하면 교육이요, 다른 말로 하면 깨달음을 주는 거다. 차원을 올리는 거다.
5절: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다윗은 자기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이 영광되게 높아지기를 원하고 있다. 환난과 핍박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하고 있다.
주님이 영광되게 높아지는 것은 성도다윗의 영광과 직결이 되어있다. 무슨 뜻이냐? 주님이 높이 되려면 성도들의 차원이 높아져야 한다. 도덕적으로 높아져야 하고, 능력적으로 높아져야 하고, 깨달음적으로 높아져야 하고, 모든 면에서 영특해야 한다. 우리교회 교인들이 어디서든지 모든 면에서 영특하게 리더십을 가진다면 누가 올라가겠느냐? 이런 나를 보고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 하고 묻고, ‘몇 시부터 예배를 시작하느냐?’ 하고 묻는다면 이게 누가 높이 올라간 거냐? 자기로 인해서 주님이 높아진 거다.
자기의 영능의 실력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는다면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겠느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뭐라고 하시느냐? 다윗으로 통해 당신의 일을 이루겠다고 하신다. 이걸 생각해 봐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 많고 많은 인간 중에 다윗을 통해 당신의 일을 이루시겠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봐라. 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이 자기만 불러서 심부름을 시키면 기분이 굉장히 좋으냐? 다른 친구들이 시샘을 한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이 나를 불러서 화장실 청소를 시킨다면 내 기분이 좋으냐?
우리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도덕적으로 높아져야 하고, 지혜지식적으로 높아져야 한다. 차원적으로 높아져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요,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 공부를 하는 것이니 성경말씀을 듣고 배우면 하나님의 머리를 닮아가는 것은 당연한 거다. 그런데 하나님의 책을 펴놓고 자꾸 세상생각만 하고 있다면 어찌 되겠느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높아지기를 원하신다. 우리 부모님도 우리가 높아지길 원하고, 학교 선생님도 우리가 높아지기를 원하는데, 우리 주님은 우리가 어디까지 높아지기를 원하시느냐? 하늘나라에까지 높아지길 원하신다. 세상의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우리가 높아지길 원하는 것은 그 질이 하늘에까지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 역시 예수님을 닮아서 하나님처럼 올라가기를 원해야 하겠는데, 어떻게 해야 하늘나라에까지 올라가는 거냐? 로켓을 타고 올라가느냐? 우리가 높아지려면 누구를 높이 올려야 하느냐? 하나님을 높이 올려야 한다. 예수님을 높이 올려야 한다. 그런데 그러냐? 구하는 것도 세상, 가르치는 것도 세상이라면 어떻게 내가 올라가겠으며, 어떻게 나로 인해서 주님이 높이 올라가겠느냐?
우리가 제일 가치 있고 영원히 존귀와 영광이 되는 분을 듣고 배우고 깨달으면 우리가 그 분처럼 만들어지니 우리의 차원이 올라가게 된다. 우리가 주님을 높이는 일을 하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높이 올라간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주님을 높이 올리는 거냐? 우리가 성품적으로, 인격적으로, 지혜지식적으로 주님을 깨달아 나가는 게 주님을 높이 올리는 거다.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주님의 영광 역시 온 세계 성도의 영광과 직결이 되어있다.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이 주님의 성품을 많이 닮을수록 주 하나님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는 거다. 반대로 예수님을 믿는 기독자들이 주님의 성품을 온전히 닮지 못하면 우리 때문에 주님이 욕을 먹는다. 자식이 못된 짓을 하면 부모가 욕을 먹게 되고, 자식인 자기도 자꾸 떨어진다. 기독자들이 세상을 따라가면 자기는 짓밟히게 되어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결국은 망하게 된다.
자기가 영광스럽게 되고 싶으냐? 주님을 배우고 깨닫고 닮아라. 지혜지식적으로 닮고, 도덕성적으로 닮고, 능력성적으로 닮아라. 이렇게 해서 된 영광은 주님의 영광이고, 자기의 영광이 되는 거다. 직결이 되어있다 그 말이다.
6절: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셀라).’ 다윗의 걸음걸이가 어떤 걸음걸이냐? 성도 자기의 걸음걸이는 어떤 걸음걸이냐? 예수님의 걸음걸이는 어떤 걸음걸이냐? 일반 세상사람들의 삶의 걸음걸이는 어떤 걸음걸이냐? 일반 세상사람들은 무슨 목적을 두고 왔다 갔다 하는 거냐? 세상적 임시적인 것을 가지려고 움직인다. 삶의 목표가 그렇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다 가고자 하는 게 일반사람들의 공통적인 목적이다.
예수님의 삶의 목표와 걸음걸이도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다 가자는 거냐? 100% 성도들의 구원을 위한 걸음걸이다. 예수님의 이 걸음걸이는 우리의 구원과 직결이 되어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전 삶을 우리를 위해 사신 거다. 그러면 우리를 위해 어떻게 사신 거냐? 예수님의 전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받아주실 수밖에 없는 걸음걸이로 사셨다. 그러니 예수님의 삶은 일반적인 걸음걸이가 아니다. 일반적인 삶의 생애가 아니다. 그냥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 세상사람들이 사는 것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예수님의 정신이나 사상이나 그 삶의 목적은 질적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수님의 생애와 일반사람들의 생애는 질적으로 다르다. 예수님의 이런 극진한 사랑을 받은 우리는 삶의 걸음걸이와 목표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이룰구원을 잘 이루는 면으로, 즉 예수님을 닮는 면으로 나가야 한다. 예수를 닮는 것은 하나님을 닮는 것과 직결이 되어있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사신 예수님의 이 정신으로 살아가면 우리는 예수님으로 닮고 하나님으로 닮게 된다. 이렇게 살면 예수를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미래적으로 영광의 길과 사망의 길로 나누어진다. 우리는 이 결과를 알기 때문에 넓은 길과 좁은 길을 분별하며 진리 길, 생명 길, 좁은 길로 나가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