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안의 가보는 청백淸白 뿐
세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오른 박원형은 자제를 가르치는 데도
법도가 있었다. 그 아들 안성이 그의 생일을 맞아 술을 장만하여 박원형에게 올렸다.
공은 그 술을 받아 서로 권해 마시며 밤까지 이르렀다. 공은 그 겨를에 안성을
앞에 불러 시 한편을 지어 불렀다.
“오늘밤 등불 앞에 술이 두어 순배인데,
너의 나이도 서른 둘의 청춘이구나.
우리 집에 내려온 물건이라고는 청백淸白 뿐이니,
고이 간직하여 서로 한없는 사람에게 전하라.”
“今夜燈前酒數巡
汝年三十二靑春
吾家舊物惟淸白
好把相傳無限人”
하였다(.대동야승5권 박원형조)
집안의 전승해오는 가보로 청백한 가풍을 내세우기는 비단 박원형 만이 아니었다.
세종 때 박팽년이 집현전의 학사로 있을 무렵이었다.
그는 경기도의 광주에 땅을 산 일이 있었다. 그러자 그의 벗이 이것을 책망하였다.
“나라의 봉록이 족히 밭갈이에 대신하기에 충분할 터인데 밭때기는 사서 무엇을 하려나?”
박팽년은 친구의 충고에 조금도 불쾌한 낯색을 드러내지 않고 이내 도로 팔아치워 버렸다.
지금의 우리가 지난날 이 땅의 선비 가풍을 족히 알만한 기록이다.(대동야승5권 박팽년조)
기묘사화와 관련되어 정언에서 파직된 김대유는 돌아와 고향의 운문산 밑에
삼족당을 짓고 거기에서 생애를 마치었다. 남명 조식이 그의 묘지를 지었는데 그와는
평소부터 교분이 남달라 항상 세상에 으뜸가는 선비라고 서로 허여하였다.
그리고 그런 관계였으니 김대유로서는 남명 조식의 가난한 생활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들들을 시켜 해마다 곡식을 남명에게 보내게 하였다.
그러나 남명은 받지를 아니하고 돌려보내며 시로써 거기에 화답했다.
於光亦不受
此人劉道原
所以胡康侯
至死貧不言
햇빛도 받지 않은,
이 사람은 유도원劉道原(송나라 때의 선비 삶이 극히 청렴하였음)이다.
그러므로 호강후는
죽을 때까지 가난함을 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