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트루먼, 맥아더를 유엔군최고사령관직에서 해임 ← 유엔군최고사령관에서 해임된 맥아더 원수가 기자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고 있다.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1951년 4월 11일 백악관 기자회견을 통해 맥아더 유엔군최고사령관을 해임하고 후임에 리지웨이 중장을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해임 이유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나는 맥아더 원수가 임무를 수행하는데 있어 미국과 유엔의 방침을 전면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한국전쟁에 관한 대통령과 맥아더의 불일치는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마틴 하원공화당 원내총무가 "일본군을 한국전쟁에 참전시켜야 한다"는 맥아더 원수의 편지를 의회에서 공개하자 이에 트루먼 대통령이 격노해 이날 해임에까지 이른 것이다. 맥아더 원수는 트루먼 대통령의 이같은 결정에 애석해하며 일본을 떠나 고국인 미국으로 향했다. 그는 국민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지만, 4월19일 미국 의회에서 연설한 후 군력(軍歷)에 이별을 고해야했다.
[1991년] 언론인 몽향 최석채 사망 ‘대쪽 성격의 평생 논객’(동아일보), ‘독재에도 꺽이지 않는 직필’(세계일보), ‘언론창달에 평생 바친 대기자’(서울신문), ‘시류 영합 않고 정론 지킨 대쪽 논객’(조선일보)... 1991년 4월 11일 몽향이 서거했을 때 주요 신문들이 보도한 기사의 제목들이다. 몽향은 대쪽, 논객, 직필, 대기자, 정론 등 언론인이라면 누구나 어느 한 가지라도 갖고 싶은 칭송의 어휘들을 한 몸에 가졌다. 그는 평생을 논객으로 살아온 언론계의 큰 별이었다. 몽향은 1942년 일본 중앙대 재학중 ‘법제’ 라는 잡지의 기자로 일한 것이 인연이 돼 해방 후인 1946년 경북신문 편집부국장으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뎠다. 그후 대구 매일신문 주필, 경향신문 편집국장, 조선일보 편집국장 및 주필을 지냈고 1966년부터 1977년까지 한국신문편집인협회 3대 회장직을 맡는 등 언론계 발전에 큰 공을 남겼다. 정론-직필의 자세를 견지해왔던 그는 1955년 9월 대구 매일신문에 쓴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 는 사설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는 등 두 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해방 후 현대사의 풍파를 헤쳐온 용기있는 언론인이었다는 점에서 그는 후배 언론인들에게 진정한 언론인으로서의 귀감이 되었다.
[1810년] 롤린슨 Sir Henry Creswicke Rawlinson 출생 1810년 4월 11일 태어남 / 1895년 3월 5일 죽음 롤린슨은 영국의 육군 장교이자 동양학자이다. 1933년 당시 육군 소령이었던 롤린슨은 이란 국왕(Shah)의 군대 개편을 위해 이란에서 복무하던 중 페르시아 유물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비시툰에 있는 다리우스 1세 비문의 페르시아어 설형문자를 해독해냈다. 또한 1857년 다른 학자들과 함께 메소포타미아 설형문자를 해독함으로써 이 지역 역사와 왕들에 대한 값진 정보를 주었다. 대영박물관에 자신이 수집한 골동품을 기증했고, 업적과 공로가 인정되어 1855년에 기사 작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베히스툰에 있는 페르시아 설형문자 비문 Persian Cuneiform Inscription at Behistun>(1846~51)을 비롯해 <바빌로니아 및 아시리아 설형문자 비문 주해 A Commentary on the Cuneiform Inscriptions of Babylonia and Assyria>(1850)·<아시리아 역사 개관 Outline of the History of Assyria> 등이 있다.
[1960년] 고등학생 김주열 시체 발견 1960년 4월 11일 한 낚시꾼이 3·15부정선거에 반대하는 마산부정선거반대시위에 참가했던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체를 발견했다. 시체는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이에 마산의 모든 시민이 규탄·궐기하여 연 3일에 걸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그의 시체를 부검할 때 참가한 한 외과의사는 “사인은 미제 최루탄(길이 17㎝, 폭 3㎝)이 안부에 박힌 것”이라고 진술했다. 그의 시신은 1960년 4월 13일 밤 11시 마산을 출발해 14일 아침 고향인 전라북도 남원군 금지면 용정리에 도착하여 마을 선산에 묻혔다. 그의 죽음은 제2차 마산시위와 이승만정권을 붕괴시킨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1933년] 시인 고은 [高銀] 출생 1933. 8. 1 전북 군산~.
개요 본명은 은태(銀泰), 법명은 일초(一超). 여러 재야단체와 집회에 참가하면서 주로 사회비판의식이 담긴 시를 썼다.
생애와 활동 아버지 근식(根植)과 어머니 최점례(崔點禮)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9세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으며, 1943년 미룡국민학교에 들어가 조기졸업하고 1946년 군산중학교에 수석 입학해 미술과 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6·25전쟁 때 3개월 동안 강제동원되어 비행장 복구작업을 한 뒤 자주 정신착란을 일으켜 가출했다. 1·4후퇴 때 선유도로 피난했다가 군산으로 돌아와 군산북중학교 교사 등을 지냈다. 그뒤 방황을 거듭하다가 1952년 불가(佛家)에 들어가 탁발하는 등 많은 기행(奇行)을 남겼는데, 10여 년간 가짜 고은이 전국 여러 곳에서 나올 지경이었다. 1962년 환속해 폭음과 방랑을 계속하다가 제주도에서 도서관을 설치하고 고등공민학교를 여는 등 사회봉사활동을 했다. 서울 선학원(禪學院)·불교 총무원 간부, 전등사 주지, 해인사 주지대리 등을 지냈다. 1969년 동화통신 부장대우로 잠시 근무한 것이 유일한 직장 경험이다. 1974년부터 민족민주운동에 앞장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초대 대표간사, 김지하구출위원회 부위원장 등 여러 운동단체에 참여했다. 1977년 조태일과 함께 수감되었다가 풀려나 민주청년협의회 고문, 한국인권운동협의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1979년 6월 미국 카터 대통령의 방한을 반대했다가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으로 투옥되어 10·26사태를 감옥에서 맞이했다. 1979년말 석방되었으나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투옥, 대구교도소에서 복역중 귀 수술을 받았다. 1982년 건강이 악화되어 8·15 특사로 풀려난 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공동의장, 민족문학작가회 의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문학세계 〈불교신문〉의 초대 주필로 있을 때 조지훈의 추천으로 〈현대시〉에 시 〈폐결핵〉을 발표한 데 이어, 서정주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봄밤의 말씀〉·〈눈길〉 등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다. 시집 〈피안감성〉(1960)을 펴낸 후, 수필집 〈인간은 슬프려고 태어났다〉(1968)를 내면서 '성(聖) 고은 에세이집'이란 부제를 붙여 사회적 선풍을 일으켰다. 초기에는 '누이·폐결핵' 같은 단어를 자주 써서 인생의 허무를 읊었다. 1970년 짧은 시집 〈세노야〉를 펴낸 뒤, 한때 번역에 힘쓰다가 1974년에 발표한 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를 기점으로 사회비판의식이 강한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78년에 발표한 장시 〈갯비나리〉는 1970년대의 참여시를 민중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 역사의식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시집으로 〈조국의 별〉(1984)·〈전원시편〉(1987)·〈아침이슬〉(1990)·〈해금강〉(1991)을 비롯해, 대하시 〈만인보 萬人譜〉(1986년부터 발간중)·〈백두산〉(1987년부터 발간중) 등을 펴냈다. 소설집으로 〈피안앵 彼岸櫻〉(1962)·〈일식〉(1974)·〈산 넘어 산 넘어 벅찬 아픔이거라〉(1980)·〈소설 화엄경〉(1991) 등을 펴냈다. 2002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975년] 국립민속박물관 개관 1975년 4월 11일 국립민속박물관이 문공부장관을 비롯한 문화계 학계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관됐다. 문공부 문화재관리국이 경복궁안에 마련한 민속박물관은 생업실, 공예실, 식생활실, 주거실, 복식실, 신앙의례실 등 8개 상설전시실을 갖추고 전통적인 민속자료를 수집, 전시하며 생활문화유산을 보존관리하는데 중심역할을 하게 됐다. 민속박물관은 민속자료 5천6점을 중앙홀과 8개 전시실에 나누어 진열했다. 전시자료는 대부분 조선왕조시대 후기 18, 19세기와 20세기 초에 걸치는 유물들이었다. 이 박물관은 3억2천만원의 예산을 들여 2년 만에 세워졌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민속박물관이 설치된 것은 해방 후 이루어진 민족박물관이었으나 6.25동란으로 문을 닫은 뒤 수장품은 경주박물관 창고에 사장되고 말았다. 이때 개관한 민속박물관은 지난 1966년에 문화재관리국이 소규모의 한국민속관을 열었던 것을 박물관규모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박물관의 전시시간은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5시까지였다.
[1939년] 영화사의 큰 별 클라크 케이블의 결혼 - Vivien Reigh and Clark Gable
미국 영화사의 큰 별 클라크 게이블(Gable, Clark, 1901~1960)이 1939년 오늘 생애 세 번째 결혼식을 치른다. 새 신부는 서른여덟 살의 스타 여배우인 캐롤 롬바드! 연기로나 사랑으로나 클라크 게이블에게는 이 때가 최고의 황금기였다. 그러나 3년 뒤 비행기 사고로 새 아내 롬바드를 잃게 된다. 게이블은 이 아픔을 잊고자 공군으로 입대해 제2차 세계대전에 나간다. 게이블은 전쟁이 끝난 뒤 헐리우드로 돌아와 두 번 더 결혼해 모두 다섯 번 결혼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케이 스프렉스와 마지막 결혼 이후 평온한 가정생활을 누리다 심장마비로 예순을 채우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밖에 2006년 日정부 "납북 메구미 남편은 78년 납북 김영남씨" 2006년 신상옥감독 별세 2004년 탤런트 이미경씨 암투병 끝에 사망 2004년 민족사관고등학교 조기졸업생 박원희양(17), 미국 10개 명문대 동시 합격 2001년 국민은행-주택은행 합병 타결 1999년 다우다 말람 완케 소령, 니제르 대통령에 취임 1999년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에 당선 1999년 인도, 핵탄두 탑재 중거리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아그니II 시험 발사 1997년 앙골라 내전 종식하고 22년 만에 단일거국정부 출범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1995년 대종교 총전교 안호상씨와 종무원장 김선적씨,북한의 어천절 행사와 단군릉 방문을 목적으로 불법 입국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 발표 1991년 언론인 몽향 최석채 사망 1991년 유엔안보리서 걸프전 종전 공식 선언 1985년 알바니아 최초의 공산주의자 국가원수인 에베르 호자 사망 1983년 채문식 국회의장 피선 1983년 목동 신시가지 개발 계획 발표 1982년 전북 남원군 아영면 고분서 가야시대의 철제갑옷 등 27점 발굴 1981년 제11대 국회 개원. 입법의회 폐회 1981년 정래혁 국회의장 피선 1980년 한국, 미국 항공기의 중공 이원권 제한 해제 1979년 우간다의 이디 아민 정권 붕괴 1977년 장기영 전 부총리 사망 1975년 다형 김현승 시인 사망 -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시 1972년 이란서 대지진으로 4천명 사망 1972년 치안국, 통일혁명당(약칭 통혁당) 재건 등 획책한 고정간첩 9명 검거발표 1970년 미(美) 아폴로 13호 우주 발사 후 사고 1970년 태평양 한복판 하와이에서 화산 폭발 1970년 경남은행 개점 1969년 마샬 그린 미국 국무부차관보 내한 1968년 미(美)존슨 대통령- 민권 법안 서명 1967년 아시아생산성기구(APO) 제8차 이사회 서울서 개최 1959년 장훈 일본 프로야구 데뷔 첫 안타·홈런 1959년 한국 유네스코(UNESCO)회관 명동서 기공 1953년 한국전쟁 상이 포로 교환협정 1952년 미국 항공기 추락 52명 사망 1948년 이란, 아제르바이잔에 계엄령 선포 1929년 자원조사법 공포(12.1 시행) 1905년 헝가리 시인 요제프 출생 1902년 엔리코 카루소, 최초로 호텔서 음반 녹음 1899년 스페인, 미-서전쟁 종전으로 식민지 필리핀을 미국에 양도 1869년 노르웨이의 조각가 바겔란 출생 - 오슬로의 프로고네르 공원의 분수광장으로 유명 1862년 별의 시선속도를 분광학적으로 측정한 미국의 천문학자 윌리암 캠벨 출생 1814년 나폴레옹 퇴위 1713년 지브롤터, 유트레히트 조약으로 영국 식민지에 편입 1510년 삼포왜란 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