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게하기와 의미연관/김송배
지난달 시인들의 최대 관심은 1월 1일자에 게재되
는 신춘문예 시 당선작품일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
은 열병처럼 앓아 본 경험들이 있을 터이기 때문이
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새해 첫날 아침 일찍
신문 가판대를 헤매면서 각 신문을 사 모아다가 꼼
꼼히 살펴보던 열정이 이제는 편안하게 집에 앉아서
컴퓨터로 뒤져서 인쇄까지 해내는 참으로 편리한 세
상에서도 시 읽기는 계속되고 있다.
그토록 신춘문예에 많은 시인 지망생들이 기대를 거
는 이유는 화려한 등단을 꿈꾸는 것도 있지만 지금
까지 닦아 온 본인의 창작 역량을 공개적으로 평가
를 받아보자는 갸륵함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요즘처럼 문학지들이 많이 늘어나서 비교적 등단의
기회가 그만큼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례행사
로 신춘문예에 매달리는 경향은 예나 지금이나 문학
청년들에게서 떨치지 못하는 어떤 마력이 잠재되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금년도 당선작들은 어떤 소재를 다루면서 작
품의 도입 부문이나 상황 설정을 하고 있는지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아파트 공터 한 귀퉁이
속도를 잊은 폐타이어
땅속에 반쯤 묻힌 깊은 침묵 속
햇빛을 둥글게 가두어 놓고
동그랗게 누워 있다
- 조선일보, 김종현의 <폐타이어>첫 연
이 ‘폐타이어'의 이미지는 누구나 감지할 수 있는 인
생의 역정이다. 문제는 이 하찮은 ‘폐타이어’에서 인
생의 심오한 의미를 제공하는 시어의 번득임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지면 관계로 전문을 인용하지 못해
서 이해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지만 셋째 연
에서 “지금 저 동그라미는 자신의 일생이/ 얼마나
속도에 짓눌려 왔는지 기억하고 있을까/ 튕겨 나가
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했으리라/ 예약된 모든
속도를 다 빠져나가고/ 속도는 한 줌 모래처럼 눈부
신 한계였을 뿐/ 얼마나 어지러웠을까/ 속도에서 벗
어나기 위해 매달린 세월”로 시적 의미를 압축함으
로써 ‘세월’과 ‘폐타이어'의 상관적 이미지의 창출을
시도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평택 三里에 비가 내렸다
저 탄더미 속에 들어간 빗물이
검은 까치독사로 기어 나왔다
-서울신문, 권혁제의 <土雨>첫 부분
가슴을 풀어헤친 여인
젖꼭지를 물고 있는 갓난아기
온몸이 흉터로 덮인 사내
동굴에서 세 구(具)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 동아일보, 김성규의 <독산동 반지하 동굴 유적지
>첫 부분
권혁제는 ‘평택 삼리에 내리는 흙비(土雨)에서 ‘한
평 쪽방의 몇 푼어치 사랑'과 '누이의 嬌聲’과 ‘비
명'이 '축축한 신음소리’로 ‘되돌아오는/ 갈 길 먼 꿈
들은’ ‘갈 수 없는 가난한 어머니의 품을 찾아서' 비
속에 ‘부활의 율동으로 옷을 벗는 누이’로 분화함으
로써 우리의 현실적 애환이 이미지로 녹아내리고 있
다.
한편 김성규도 “신문 하단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가/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 새벽/ 지금도 발굴을 기다리
는 유적들/ 독산동 반지하 동굴에는 인간들이 살고
있다”라고 결론지음으로써 우리 서민, 아니 빈민들
의 참상이 그대로 시적 이미지로 승화하고 있어서
어쩌면 모두가 현실적 비애나 물질적 빈곤과 애증이
투영된 비극의 현장을 투사하여 시적인 효과를 극대
화하는 경향의 작품들이 당선작으로 결정되는 특성
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마찬가지로 경향신문 안성호의 <가스통이 사는 동
네>와 세계일보 문 신의 <작은 손>도 동일한 맥락에
서 이해되는 작품이며, 한국일보 예현연의 <유적>
은 시간성에 대한 집착이 강하면서 “폐관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어지럽고/ 출구를 기다리는 비상등은
꺼져 버린다/ 어둠 속에서 모든 금간 유물들이 무너
져 내린다”는 인간과 시간의 간극을 어쩔 수 없이 수
용해야 하는 순응과 동시에 '인연'을 승화하고 있어
서 주목된다.
새해를 맞으면서 각 단체마다 사화집이라는 이름으
로 회원들의 작품을 한곳에 모아 서로 읽고 기념하
는 일도 이젠 연례행사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한국
시인협회에서는 2003 한국시인협회 시선집 모국어
에로의 긴 여행을 펴내었으며, 한맥문학동인회에서
는 한脈文學同人詞華集 제5호를 펴내어 세간의 관
심을 모으고 있다.
먼저 한맥동인사화집에서 작품 몇 편을 읽어 보기로
한다.
문을 열었다
푸른 형광빛에
반쪽 잘려진 어둠 위로
모든 벽과 기둥들이 일어나서
눈을 깜박일 때마다
기억만큼 흐르며 회전을 한다
시공 속에 지배당한 나는
짝사랑의 비명도 한 번 지르지 못한 채
내 안의 벽에 방황하는 빛을 가둔다
건축은 서서
안으로만 키를 재고
미완성 건축철학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오늘도 나는
싱싱한 산소를 여과해 줄
황토벽 집을
꿈의 분량만큼 짓는다.
- 박미자의 <꿈꾸는 건축가>전문
환한 홍등이
비밀 한 조각 숨겨 놓을 틈도 없이
투명한 유리방을 샅샅이 훑어내고 있다
소녀티를 벗어내지 못한 여자는
손가락보다 굵은 담배 끝에서 그려지는 동그라미를
보며
표정을 감춘 짙은 화장 아래 음모의 웃음을 웃는다
여자와 맞바꾸 져야 할
지폐 몇 장의 웃음이 새어 나오는 호주머니를 뒤적
이며
하루살이들이 불빛을 찾으며
밤을 끌고 온다
최신글
-배두순의 <함정 또는 사냥꾼>앞 부분
이 두 작품의 배경설정이 방 안이라는 공통점을 갖
지만 사유의 향방이나 이미지의 추출은 서로 다르
다. 그러나 시적 언술에서 분출하는 형상화의 기법
은 서로 동질성을 확인하게 되는데, 그 언술이 각각
낯설게 표현하여 직접적인 의미 전달을 뛰어넘고 있
어서 그 은유가 포괄하는 의미론적 연관을 극명하게
하면서 시의 기능을 더욱 심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낯설게 하기(depamliarization)에 대
해서 잠시 알아보자. 러시아의 문예학자 슈끌롭스끼
가 주장하여 한때는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이론이기
도 했는데, 이는 우리의 언어와 우리가 접하는 삼라
만상의 인상과 그에 대한 판단이 이미 낡고 관습화
되어 있어서 모든 것은 추상화되어 있고 평판화되어
있는데 문학은 여기에서 전혀 새로운 충격과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한다.
김대행 교수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에 보면 슈클롭스
끼는 이를 위하여 낯설게 해야 하며 ‘해’라고 부르던
사물을 새로운 이름으로 불러서 전혀 낯선 사물로
새로이 깨닫게 해야 하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내야
한다고 말한다.
슈끌롭스끼는 이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제언을 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순수하게 자신의 경험으로 발견할 것.
-비일상적 시각을 동원할 것.
-현미경적 시각으로 관찰할 것.
- 인습적인 인과관계에서 벗어나 역전적인 발견을 할것.
-낯선 대상과 병치함으로써 낯선 인상을 줄 것.
을 제시하고 있다. 서론이 너무 길어졌지만 위의 박
미자나 배두순의 경우 이를 충실하게 이행하는 언술
을 살필 수 있다. 왜냐하면 ‘건축가’의 ‘꿈’이 원대하
거나 건축물의 웅장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박한
하나의 방 안(‘문을 열었다')에서 온갖 삼라만상을
회유하고 있으며, 결론적으로 “싱싱한 산소를 여과
해 줄/ 황토벽 집”이며 그것도 '꿈의 분량만큼’이라
는 수사가 이를 인습적인 인과관계를 배제하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또한 배두순도 ‘홍등’이라는 사물이 ‘함정 또는 사
냥’이라는 낯선 방식을 취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지폐 몇 장의 웃음이 새어 나오는
호주머니를 뒤적이며/ 하루살이들이 불빛을 찾으
감을 끌고 온다”는 언술의 창조는 위에서 본 바
와 같이 역전적인 발견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근원적
으로 시는 이러한 은유에 의한 기교가 그 절정을 이
루는 것이지만 상당한 고급 독자를 확보하기 위해서
는 직접적 의미 전달보다는 어떤 면에서 바람직하다
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이재성의 <민들레 홀씨>는 어떠한가.
바람이 정해 준 자리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따사로운 봄날
꽃을 피운다는
희망으로
흙 속에서
자신을 여미며
기인 겨울을
꿈꾼다.
아주 소박하면서도 서정적이다. ‘홀씨'가 새롭게 태
어나야 하는 과정이지만 자연의 순리요 생명의 순환
을 간략하게, 그리고 정교하게 그리고 있다. 이런 현
상을 김대행 교수는 “말하자면 뻔하고 그저 그런 생
각과 인식 속에서 그러저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뜻도 된다. 문학은 여기에 전혀 새
로운 충격과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말하
고 있다.
이재성은 사물의 비밀을 알고 있다. 어쩌면 그 비밀
을 발견하고 창조적으로 표현하느냐가 관건이다. 그
것이 은유의 기본이며 흔히들 말하는 원초적 언어(p
rimitive language;태초의 언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김소해가 “설마하는 매미 울음/ 한 입에 삼켜/
폐허로 게워낸 황톳빛 물 속으로/ 한숨과 눈물마저
수장되었다”는 <매미>에서 언술하듯이 여기에서
‘매미’는 여름날 울어대는 매미가 아니고 지난해 이
땅을 훑고 지나간 태풍 매미임을 우리는 알아차릴
수 있는 것과 같이 현대시의 기법에는 은유로 투영
된 언술이 아무래도 시의 멋을 더해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한맥문학사에서도 초대시 曺基鉉의 <抽象畵
의 誘因>외 5편이 이러한 현상의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다음 <겨울 가야금>을 읽어 보자.
희미한 형광등에 작은 거미가
거꾸로 매달려 내려온다
방안이 추워서이다.
...중략...
눈(雪)은 어두운 방을 하얗게 칠한다
얼굴에도 가슴에도 자꾸만 칠한다
겨울은 입을 맞추며 내린다.
대체로 ‘추워서’나 ‘눈’이라는 시어로 보아서 선뜻
'겨울'은 이해가 되지만 '가야금'의 이미지는 숨겨져
있다. 낯이 설다. 시적 구도로 보아서는 신즉물주의
나 모더니즘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우선 제
목에서 <네트워크 거리><노송 블루스><고도성장이
란 이름>등) 원래 미술 용어에서 기능적․합목적적
양식미라는 신즉물주의는 문학에서 역사적.사회적
통찰이 결여된 경향을 배제하여 사물을 즉물적이며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그 본질을 냉혹하게 묘사하려
는 독특한 기법으로써 조기현의 작품은 고찰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시는 어떤 기대와 확인이라는 개념을 동시에 제공한
다. 시인이나 독자는 이 동시성에 초점을 맞추어 시
를 읽기 때문에 곧 기대는 낯선 사물이나 현장에서
찾아내는 의미의 확인임에 다름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