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안용복 (4)방침전환
-交渉難航で幕府が譲歩 下條正男・拓殖大教授に聞く
-교섭난항으로 막부가 양보, 시모죠 마사오 다쿠쇼쿠대학교수에게 듣는다
当初「軟着陸」を目指していた鬱陵島の帰属問題は、朝鮮政府内の政変によって混迷の度を深めていく。対する江戸幕府の反応、そして結末は。軌跡をたどると、そこには竹島の領有権問題がこじれ、現在もなお決着しない原因が潜む。
당초 <연착륙>을 목표로 했던 울릉도 귀속문제는 조선정부 내의 정변으로 인해 더욱 혼미해져 간다. 이에 대한 에도막부의 반응, 그리고 결말은? 궤적을 더듬어보면, 거기에는 다케시마의 영유권문제가 얽혀서 지금도 여전히 마무리되지 않는 원인이 숨어 있다.
-領土紛争の早期解決を望んだ朝鮮政府と、対馬藩の交渉のその後は。
-영토분쟁의 조기해결을 바랐던 조선정부와 쓰시마번의 교섭 후는?
「対馬藩の抗議に対し、朝鮮政府は元来、鬱陵島への往来を許可しておらず、指示徹底と、その禁を破った安龍福と朴於屯の処罰を約束する返書を送った。だが、対馬藩は受け取りを拒んだ。鬱陵島が朝鮮領であることを示す『弊境の鬱陵島』という記述があったためだ。対馬藩からすれば、同島は日本領でなければならず、削除を求めた。江戸幕府の命令もあった」
쓰시마번의 저항에 대해 조선정부는 원래 울릉도의 왕래를 금하고 있었는데 이를 어긴 안용복과 박어둔의 처벌을 약속한다는 답신을 보냈다. 하지만 쓰시마번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울릉도가 조선영토임을 가리키는 <폐경의 울릉도>라는 기술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쓰시마번에서 보면 울릉도가 일본영토여야 했기에 삭제를 요구했다. 에도막부의 명령도 있었다.
-朝鮮政府の反応は。
-조선정부의 반응은?
「譲歩に難色を示した。このため、対馬藩の担当者は釜山から一時帰国するが、その間に朝鮮政府内で対日政策を一変させる事態が起きた。南人派から少論派への政権交代だ。朝鮮王朝の歩みは官僚の党派抗争の歴史でもある。鬱陵島の帰属をめぐる対日交渉で融和策を取った南人派に対し、少論派は強硬姿勢に転じた。前政権の政策を否定することで、政権基盤を強化する側面もあった」
양보에 난색을 표했다. 그 때문에 쓰시마번 담당자가 부산에서 잠시 귀국을 했는데, 그 사이에 조선정부 내에서 대일정책을 일변시키는 사태가 발생했다. 남인파에서 소론파로 정권이 교체된 것이다. 조선왕조는 관료들의 당파싸움으로 얼룩진 역사이기도 하다. 울릉도의 귀속을 둘러싼 대일교섭에서 유화정책을 폈던 남인파와는 달리, 소론파는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앞 정권의 정책을 부정함으로써 정권 기반을 강화하려는 측면도 있었다.
「さらに、少論派は南人派と違って対馬藩を敵視した。きっかけは、鳥取藩では厚遇されたのに、対馬藩では取り調べが厳しくなったという安龍福の証言だった。それを少論派政権は、日本側が鬱陵島を自国領と主張するのは対馬藩の策略だと拡大解釈し、逆に同島の領有権を強調し、日本側の越境行為を批判した」
더욱이 소론파는 남인파와 달리 쓰시마번을 적대시했다. 그 이유는 돗토리번에서는 후하게 대접을 했는데 쓰시마번에서는 조사가 엄했다는 안용복의 증언 때문이었다. 안용복의 증언을 근거로 소론파 정권은 일본측이 울릉도를 자국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쓰시마번의 책략 때문이라고 확대 해석, 역으로 울릉도의 영유권을 강조하고 일본 측의 월경행위를 비판했다.
-対馬藩の反応は。
-쓰시마번의 반응은?
「担当者の多田與左衛門は朝鮮側の主張に対する四点の疑問を指摘した文書を出したが、回答に進展はなく、交渉は決裂した。一方、藩内でも、藩主・宗義倫が病没するという緊急事態が発生していた。これを機に、領土問題をめぐる藩論が二分。交渉が物別れに終わり、多田が対馬に戻った1695年6月には、鬱陵島を朝鮮領と認めて領土紛争を終結させるべきとの意見が大勢だった」
당시 쓰시마번의 담당자였던 다다는, 조선 측 주장에 대한 네 가지 의문을 지적한 문서를 보냈으나 회답에 진전이 없어 교섭은 결렬되었다. 한편 쓰시마번 내에서도 번주 宗義倫이 병사하는 긴급 사태가 발생했다. 이 일을 계기로 영토문제를 둘러싼 번의 여론이 양분되었다. 교섭이 결렬된 채 끝나고 다다가 쓰시마로 돌아온 1695년 6월에는, 울릉도를 조선영토로 인정해서 영토분쟁을 종결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領土紛争により、藩の生計を担っていた貿易に支障も出ていた。逆に、朝鮮側が対馬藩を敵視した背景には、貿易でコメなどが流出し、国内経済が疲弊したことに対する積年のうらみもあった」
영토분쟁으로 인해 번의 생계를 떠맡고 있던 무역에 지장이 생겼다. 반대로 조선측이 쓰시마를 적대했던 배경에는 무역에서 쌀 등이 유출되어 국내 경제가 피폐해진 것에 대한 쌓인 원한도 있었다.
-結末は。결말은?
「そういった事情で対馬藩は1695年10月、新藩主の襲名と参勤交代を機に、江戸幕府に鬱陵島は朝鮮領であるとし、交渉打ち切りを申し出た。その結果、幕府は翌年の1696年1月28日付で鳥取藩に鬱陵島への渡海禁止令を出すと同時に、対馬藩に朝鮮政府へ伝えるよう指示した」
이러한 사정으로 쓰시마번은 1695년 10월, 새로운 번주가 교체되면서 에도막부에 울릉도가 조선영토라며 교섭중단을 요청했다. 그 결과 막부는 이듬해 1696년 1월 28일자로 돗토리번에서 울릉도로 건너가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공표함과 동시에 쓰시마번을 경유해서 조선정부에 이 내용을 전하도록 지시했다.
「幕府が方針転換する経緯を『通航一覧』は、鬱陵島までの距離は鳥取藩からより、朝鮮側からがはるかに近い。軍事力で解決を図ることはできるが、朝鮮との友好関係を損なう。事を荒立てず、対立しないにこしたことはない、と記している」
막부가 방침을 전환한 경위를 <통항일람>은, 울릉도까지의 거리는 돗토리번보다 조선이 훨씬 가깝다. 군사력으로 해결을 꾀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조선과의 우호관계를 해치게 된다. 일을 복잡하게 만들거나 대립하지 않고 해결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고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