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믿는데도 왜 우울감이 사라지지 않을까?... 감정을 컨트롤해야 죄를 피한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한 질문은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 성도가 질문하였습니다. “예수님과의 동행이 혼잣말 앞에 그냥 ‘주님’을 붙여서 말하면 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자기암시나 최면 같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길에서 ‘주님, 저 너무 힘들어서 이번에 오는 버스에 앉을 자리를 주세요...’라고 기도했는데, 진짜 앉을 자리가 있어서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했지만, 이것이 우연인지 응답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응답이라는 확신이 없이 자꾸 의심하게 됩니다. 한 시간 기도하면 반나절 정도 평안이 오지만 그 후엔 너무나 쉽게 불안이 찾아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분명한데도 깨닫지 못합니다. 버스에 의지가 나는 일보다.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놀라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를 자가 없다 하였습니다(고전 12:3). 결코 자기 암시나 최면이 아닙니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이 바로 주님과의 친밀함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계속 믿음으로 취하고 나가면 주님의 평안, 기쁨, 감사와 사랑이 지속됩니다. 그러자고 예수동행일기를 쓰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예수동행일기와 묵상으로도 우울증이 사라지지 않아요”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두명의 자녀를 혼자 키우고 있습니다. 예수동행일기와 묵상을 한 지 5년 정도 되었습니다. 하나님도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알고 감사와 감격이 있고 방언도 받았는데, 우울, 불안, 두려움, 죽고 싶은 생각들은 왜 사라지지 않는 걸까요. 제 나이 42세인데 40년 달고 산 것 같아요. 예수동행일기를 쓰고 내 삶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느끼는데도 왜 우울함은 사라지지 않는 걸까요?”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하셔서 새 생명이 시작되어도 그로 인한 감정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인 것 같습니다. 믿음과 순종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기질도 영향을 미친다고 봅니다.
저는 마음에 분노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 성질은 여전히 제 안에 역사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주님을 의식하게 되면서 제 성질대로 반응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 안에 분노가 많은 줄 모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아내도 모를 때가 있습니다. 매일 일기를 쓰며 예수님을 바라보려 했더니, 점점 주님의 감정이 느껴졌습니다. 아내를 볼 때, 딸들을 볼 때, 교인들을 볼 때, 문제가 많은 어떤 사람을 볼 때, 때로는 혼자 있을 때 주님의 마음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우울한 성향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기질을 너무 탓하지 말기 바랍니다. 자신 안에 주님도 분명히 역사함을 믿어야 됩니다. 평안, 기쁨, 사랑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정직하게 자신의 마음 상태를 고백하고 ‘주님의 마음’을 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과 동행하고자 갈망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리기를 기도합니다.
- 유기성 목사의 페이스북 포스팅
감정을 컨트롤해야 죄를 피한다
아직 영성 개발의 초기 단계에 있는 사람의 처지에서 본다면, 진심으로 갈망 – 단순히 죄짓지 않으려는 갈망이 아니라 다른 감정, 곧 죄와 멀어지게 하는 감정을 품으려는 갈망 – 을 갖는 것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도약이다. 이 초기 단계에는 지금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대신 지금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하려는 간절한 원함이 필요하다. 현재 느끼고 있거나 느끼기 쉬운 나쁜 감정에 강한 반감을 느껴야 한다.
동시에 현재 느끼고 있지 못한 좋은 감정에 강한 끌림이 있어야 한다. “옛 사람(나쁜 감정 포함)을 벗고 새 사람(좋은 감정 포함)을 입으려면”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예컨대, 남을 욕하지 않거나 간음에 빠지지 않으려는 마음만으로는 안 된다. 그런 행동을 유발하는 감정을 품지 않기를 간절히 원해야 하며, 그런 감정을 피하기 위해 구체적 행동을 취해야 한다.
-달라스 윌라드, <마음의 혁신>(복 있는 사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