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우리예절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송은석
전통예절과 생활사례 - 도산서원, 소수서원, 학봉종택, 병곡종택, 병산서원, 한지마을 - 제2회 생활예절지도자과정 : 2010. 4. 17(토) - 18(일) 제6회 전통예절지도자과정 : 2010. 5. 1(토) - 2(일) 陶山우리禮節院 (http://cafe.daum.net/dosanyaewon)
【 목차 】 도산우리예절원 전통예절과 생활사례(답사) 연혁-------------1 도산서원(陶山書院)---------------------------------------3 소수서원(紹修書院)--------------------------------------15 의성김씨 학봉종택(義城金氏 鶴峯宗宅)------------------21 안동권씨 병곡종택(安東權氏 屛谷宗宅)------------------26 병산서원(屛山書院)---------------------------------------31 길제(吉祭)------------------------------------------------40 알묘(謁廟)와 봉심(奉審)----------------------------------41 小學구조와 읽는 自矜心----------------------------------42 退溪 詩 吟味--------------------------------------------55 도산우리예절원 전통예절과 생활사례(답사) 연혁 ◯ 전통예절지도자과정 제1회 전통예절지도자과정 - 2005.4.1(노송정종택, 퇴계종택, 퇴계기념공원, 퇴계산소, 이육사문학관) - 상반기 6. 25 (안동지방, 하회마을, 학봉종택, 張太師齋舍) - 하반기 11. 12 (상주지방, 우복종가, 정기룡장군사당, 사벌왕릉) 제2회 전통예절지도자과정 - 상반기 2006.6.10-11 (학봉종택, 경당종택, 서애종택, 하회마을, 국학 진흥원) - 하반기 2006.10.21 (사벌왕릉, 정기룡장군사당, 우복종가, 유교박물관,세재박물 관) 제3회 전통예절지도자과정 - 상반기 2007.6.22-23(도산서원, 퇴계종택, 퇴계산소, 퇴계태실, 이육사 문학관, 농암종택, 국학진흥원) - 하반기 2007.10.27 (화기리 인동장씨종택, 소수서원, 괴헌고택) 제4회 전통예절지도자과정 - 상반기 2008.5.24-25 (도산서원, 소수서원, 부석사, 괴헌고택) - 하반기 2008.10.25 (농암종택, 학봉종택, 임천서원) 제5회 전통예절지도자과정 - 상반기 2009.4.18-19 (도산서원, 소수서원, 부석사, 괴헌고택) - 하반기 2009.10.24 (동춘당고택, 우암사적공원, 돈암서원, 명재종택, 종학당) 제6회 전통예절지도자과정 - 상반기 2010.5.1-2 (도산서원, 소수서원, 학봉종택, 병곡종택, 병산서원, 안동 한지마을) - 하반기 (실시예정) ◯ 생활예절지도자과정 제1회 생활예절지도자과정 - 2009.10.25 (농암종택, 퇴계산소, 임청각, 안동댐, 독립기념관) 제2회 생활예절지도자과정 - 상반기 2010.4.17-18 (도산서원, 소수서원, 학봉종택, 병곡종택, 병산서원, 안 동 한지마을) - 하반기 (실시예정)
의성김씨 학봉종택(義城金氏 鶴峯宗宅) [자료출처 : 유교문화권 역사체험 안동(http://tour.koreastudy.or.kr)]
◯ 문중 이야기 ▶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청계공(靑溪公) 김진(金璡)의 네 번째 아들인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자가 사순(士純)이고, 호가 학봉(鶴峯)이며, 시호가 문충공(文忠公)이다. 그는 1538년(중종 33)에 탄생하여, 1593년(선조 26)에 진주성에서 타계하니, 향년 56세이다. 김성일은 19세에 퇴계 문하에 들었다. 1564년(명종 19) 진사이고, 1568년(선조 1) 문과 출신이며, 형조 참의, 경상병사, 경상좌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선무원종공신에 1등으로 녹훈되었으며 대제학이 추증되었다. 호계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 천년불패지 “학봉선조 배위가 안동권씨지요.” 라고 학봉종택에서 만난 학봉의 14대 종손 김시인은 말하였다. “무남독녀였지요. 그래서 처가로 들어왔지요. 처가가 검제였어요. 지금도 여전히 외손봉사를 하지요.” 안동의 서쪽으로 뻗은 국도, 풍산 나가는 길을 가다가 송야교를 건너면서 우측으로 접어들면 길은 한참동안 시내의 제방을 따라 거슬러 오른다. 그러다가 길과 시내가 떨어져서 달리기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른쪽으로 학봉종택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일대가 바로 검제, 안동 사람들이 흔히 금제라고 발음하는 곳이다. “보기에는 보잘 것 없지만, 마을 역사가 1천여 년이나 돼요. 5백 년 동안 역사에 오른 명현들이 15분 배출된 땅이지요. 학봉 이전부터 인물들이 났어요. 마을은 한데 모아져 있지 않고 5집, 6집 …… 이런 식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요. 그래서 12검제라고 합니다. 외지에 나가면 면소재지도 검제라고 합니다. 이렇게 마을이 흩어져 있으니까 별 볼품은 없지요. ‘들을 검제지, 볼 검제는 못된다’는 옛 말도 있어요. 「동지」에는 검제를 ‘천년불패지지’라고 했어요. 땅덩어리 생겨난 이래 여기 변란 난 적이 없어요. 임진왜란 때도, 6.25 때도 별 일이 없었지요.” ▶학봉의 우국충정 학봉종택이 자랑삼고 있는 것은 건물이나 유적 등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 나라 일에 전력을 다하다 타계한 학봉의 우국충정과 그러한 정신을 이어받은 후손들의 삶의 모습이야말로 학봉종택이 자랑삼고자 하는 것이다. 학봉종택이 주체가 되어 『4백년을 이어온 학봉선생 고택의 구국활동』이라는 제목으로 발간한 소책자에는 다음과 같은 일절이 보인다. “이 검제마을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서서 ‘학봉선생구택’이라는 커다란 현판을 걸고 있는 고옥이 바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본류인 퇴계학의 연원정맥을 근세에까지 이어온 우리나라 중근세 정신문화의 중심지의 하나였고, 임진왜란과 한일합방이라는 치욕의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400년 줄기차게 이어온 항일구국활동의 산실이었던 ‘학봉선생고택’이며, 그 주인공이 바로 학봉 김성일 선생과 선생의 장손인 단곡 김시추 선생, 선생의 11대 종손인 서산 김흥락 선생, 13대 종손인 김용환 지사이다. …… 단곡 김시추 선생은 1621년(광해군 13) 영남 유림의 소수로 추대되어 오국의 원흉이며 패륜의 권신인 이이첨 일당의 죄과를 추상같이 단죄하는 ‘영남유생 만인소’를 3소까지 올려 …… 정묘호란 시에는 안동 의병대장으로, 병자호란 시에는 안동 유진장으로 …… 선생께서는 당호를 ‘풍뇌헌’이라 이름지었으며, 이때부터 학봉선생고택을 ‘풍뢰헌’이라 부르고 있다. …… 김흥락 선생은 …… 일제가 국모를 시해하고 왕권이 흔들리자 …… 전국 최초의 항일의병인 ‘안동갑오의병’을 일으켰으며, 을미의병과 병신의병을 총지휘하여 안동부를 점령 …… 수천 명의 후학들에게 성리학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와 독립사상을 가르쳐 그 중 석주 이상룡, 일송 김동삼, 기암 이중업, 공산 송준필, 성제 권상익과 같은 수많은 걸출한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 김용환 지사는 젊어서는 의병에 가담하여 경북 지방의 무수한 의병전장을 누볐고, 김지사 소유의 학봉종가 전재산과 임천서원의 재산을 포함하여 20여 만 평의 전답을 처분하여 존고종형인 만주의 석주 이상룡 서로군정서 총재에게 독립군 자금으로 헌납하고, 비밀 독립운동 단체인 ‘의용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자금 모집 중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9개월간 옥고를 치루는 등 네 번이나 구속되었으며 …….” 이러한 종가의 가계는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학봉종택을 지키고 있는 김시인이 자랑삼는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 외손봉사 학봉종택에서는 외손봉사를 한다. 학봉이 무남독녀였던 안동권씨를 배위로 삼고 그 제사를 받들었기 때문이다. 16세기인 학봉의 시대까지 양자의 문화는 일반화 되어 있지 않았음을 알게 하는 부분이다. ▶ 처가살이 학봉은 처가로 들어갔으며, 새로 집을 짓지는 않았다. 학봉이 검제로 옮긴 것은 학봉종택에서 나온 「운장각」이라는 소책자에 의하면 1582년이라고 한다. 처가살이를 한 셈인데, 장모와 아내에 대한 정성이 각별하였던 모양이다. “요사이 추위에 모두들 어찌 계신지 가장 사념하네. …… 장모 모시고 설 잘 쇠시오. …… 살아서 다시 보면 그때나 나을지 모르지만 기필 못하네. 그리워하지 말고 편안히 계시오. 끝없어 이만.” 이 간단한 한글 편지는 학봉이 경남 산음현에서 보낸 것인데, 4개월 후에는 학봉이 타계하므로, 마지막 말이 담겨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 속에서 우리는 전란의 와중에 휩쓸려 들어간 한 유학자가 담담하게 표출하여 주는 절제된 그리움의 모습을 본다.
◯ 중앙선 철도 노선의 변경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중앙선을 설계할 때, 노선이 학봉의 묘소가 있는 안동시 와룡면 이하동 가수천을 관통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학봉 묘소의 내룡이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 학봉의 제자들과 후손들을 포함한 영남 유림들이 총독부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설계 책임자였던 일본인도 학봉이 영남에서 존경받는 큰 선비임을 알고 철도 노선을 수정했다고 한다. ◯ 건축 이야기 학봉 김성일이 처가로 들어온 것이므로, 집은 원래 안동권문의 소유였으며, 김성일이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을 것이다. “증손 되시는 분이 나중에 집을 새로 지었지요.”라고 현지의 관리자인 김시인이 말하였다. 그러나 그 집은 수해로 사라지고, 지금의 집은 현 종손의 6대조 되시는 분이 지금의 집으로부터 오른쪽, 그러니까 서쪽으로 보이는 산기슭에 지었던 집을 뜯어서 옮긴 것이라고 한다. 터는 옛 집터인데, 집은 옛 집이 아니라는 말이다. 6대조가 처음 지은 집이라면 200년 가까이 되는 연륜을 갖는 집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집은 해방 후에 옮겨지었다고 한다. 집 뒤울 산기슭에 석빙고가 있다. 종가는 남향을 하고 있고, 오른쪽으로 口자 형상의 안채, 그 서편으로 또 내붙인 口자 형상의 안채 부속 영역, 왼쪽으로 一자 형상의 바깥채, 그리고 그보다 더 왼쪽의 뒤로 썩 물러앉아 있는 사당이 기본구조를 이루고 있다. 사당의 왼편으로 서향을 하고 있는 운장각은 새로 지은 것이고, 운장각의 남쪽으로 역시 동향을 하고 서 있는 정자는 1987년에 낸 「운장각」 속의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그 후에 옮긴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학봉종택은 아주 잘 관리되고 있다. 바깥마당의 수목들도 세심한 보살핌을 받은 흔적이 역력하다. ◯ 거문고 모양으로 생긴 마을(금계마을) 금계리는 마을의 지세가 거문고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금지라 불렀으나,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이곳으로 옮겨와 검재로 고치고 한자로 금계라 적었다. 안동권씨 병곡종택(安東權氏 屛谷宗宅) [자료출처 : 유교문화권 역사체험 안동(http://tour.koreastudy.or.kr)]
◯ 문중이야기 ▶ 정산(井山) 기슭에 터를 잡다 처음 안동권씨 일문이 이 정산(井山) 기슭에 자리 잡은 것은 18대 권항(權恒) 때이다. 권항의 부친 17대 권심(權心) 묘가 평해(平海)에 있다. 배위가 평해손씨인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권항의 묘는 정산(井山)에 있다. 권항은 자가 변지(變之)이며, 1403년(태종 3)에 태어나서 아마도 1483년(성종 14)에 영천의 임소(任所)에서 타계한다. 배위는 풍산유씨이다. 풍산유씨의 사위가 됨으로써 권항은 여기 풍산벌의 한쪽에 숨어 있는 마을로 입향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권항의 장인은 사직(司直) 유서(柳湑)이고, 가일마을은 유서가 처음 마을을 연 곳이다. 권항의 아들 권이(權邇)는 진사이고 현령이다. 나중에 증직으로 이조판서를 받았다. 생년은 불명이고 졸년은 1490년(성종 21)이다. 배위는 덕산송씨이다. 권이의 아들은 권주(權柱)이다.
▶ 풍산 벌의 끝자락을 깔고 있다 가일마을은 풍산 벌의 한쪽 끝에 숨겨진 마을이다. 풍산읍에서 하회 나가는 길. 이 길 가에는 드러나 있는 마을이 하나 있고, 숨겨져 있는 마을이 하나 있다. 드러나 있는 마을은 소산마을이고, 숨겨져 있는 마을은 가일마을이다. 소산마을이 드러나 있다는 것은 길 가에서 그 마을이 잘 보인다는 말이고, 가일마을이 숨겨져 있다는 것은 길 가에서는 좀처럼 그 마을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2차선의 국도가 짧은 반원을 그리며 굽어 도는 곳, 길의 한쪽은 너른 풍산 벌의 끝자락을 깔고 있고, 다른 한쪽은 높다란 경사면 위의 제방으로 막혀 있다. 제방 쪽으로 올라서야 가일마을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제방의 한쪽 끝에 열려 있는 도로를 택해 산기슭을 올라서면 먼저 제방 안쪽으로 제법 너른 못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보이고, 제방 위쪽으로 또 멀리 반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낮은 산의 능선이 보인다. 못의 위쪽으로 못의 경계면을 따라 돌아가는 마을길이 풀려 있고, 그 위쪽으로는 논이 펼쳐진다. 그리고 논 위로 또 못 쪽을 바라보며 반월형상으로 돌아가는 마을길이 보인다. 이 마을길은 양쪽 끝에서 마을 속으로 파고드는 길을 풀어놓고 있다. 이 양쪽의 길은 마을 안에서 서로 통하지만, 통한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지동차로 움직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마을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나아가려면 마을 앞쪽의 반원형 길 쪽으로 나와서 돌아가야 한다. 마을 안쪽에서 양쪽의 길은 중앙의 소로에 의하여 연결되기 때문이다. 마을은 많은 기와집과 판축의 황토 울타리가 뒤섞여 고풍스러운 느낌을 한껏 드러낸다. 그 점은 마을의 이쪽이나 저쪽이나 마찬가지이다. 안동권씨 병곡종택은 마을의 서쪽부분에 있다. 마을 앞의 호선을 그리며 휘도는 길을 버리고 마을 안쪽으로 파고드는 서쪽의 길을 택하면 바로 병곡종택에 이르는 것이다.
◯ 건축 이야기
집이 세워진 것이 언제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현재의 건물은 19세기 중엽에 중건된 것이라 한다. 병곡종택은 시습재(時習齋)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자기를 닦는 공부를 멈추지 않으리라는 의지의 표현이리라. 길 가에 키 큰 회화나무 한 그루가 높이 팔을 뻗고 서 있고, 그 뒤를 판축으로 다져 만든 붉은 색 흙 담이 줄을 잇는다. 회화나무는 무슨 문지기라도 되는 양, 터진 울의 한쪽에 버티고 서서 마을 길 입구 쪽을 내다본다. 그 그림자의 한 끝은 병곡종택의 바깥마당에 사선으로 누워 있다. 대문은 따로 없고 축담 사이의 터진 부분을 들어서면 바로 바깥마당이다. 집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바깥마당을 앞쪽에서 일선으로 막고 선 사랑채, 그 뒤쪽에 붙어선 안채, 오른편에 키 낮은 담장을 두르고 있는 사당 등이 그것이다. 사랑채는 정면 6칸 규모이다. 동쪽 끝의 1칸은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대문이고, 서쪽 끝의 1칸은 중문이다. 그 안쪽으로, 동쪽 2칸은 마루이고 서쪽 2칸은 방이다. 처마 밑에는 시습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사랑채의 당호일텐데, 붓을 떨듯이 꾹꾹 눌러서 멋을 부린 글씨이다. 검은 판에 흰 글씨이다. 대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좁은 안마당이 나온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양쪽으로 방을 놓고 중안에 마루를 배치하였다. 서쪽 끝의 방으로부터는 아래로 건물이 더 연장되어 사랑채와 만나고 있고, 동쪽 끝은 1칸을 더 내밀어 방을 짓고는 그 아래 작은 측문을 두고 그 끝으로부터 낮은 울타리를 꺾어 돌려 사랑채 동편의 벽과 연결시켰다. 집의 동북쪽 모서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당이다. 마을 길 쪽의 모서리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앞쪽의 3분의 1칸은 그저 기단 위에 기둥만을 세워 놓았고, 그 뒤쪽으로 사당의 문과 벽이 자리 잡고 있다. 키 낮은 담장으로 둘러쳐 4각의 독립 공간을 만들었다. 앞쪽에 사랑으로 드는 작고 아담한 솟을대문이 있다. 원래 이 집에는 대문간에 오른편으로 따로 사랑채가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60년 전에 철거하여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는 것이다. 넓은 바깥마당은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겠다. 시습재 현판은 사랑채 마루방 쪽에 걸려 있다. ◯ 관련인물
▶ 권주의 가계 권주(權柱, 1457~1505)의 자는 지경(支卿)이고 호는 화산(花山)이다. 1457년(세조 3)에 탄생하여 1505년(연산군 10)에 타계하였다. 10세에 이미 유학의 여러 경전과 역사서에 통달하여 주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1474년(성종 5)에 진사가 되었고, 1481년(성종 12)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1504년(연산군 9)에 사화에 연루되어 평해(平海)로 귀양을 갔고, 1505년에 후명(後命)이 떨어져 사사되었다. 중종 때 억울한 처지에서 풀려 우참찬이 증직으로 내려졌다. 권주의 큰아들은 권질(權礩)이다. 자는 사안(士安)이고 호는 사락정(四樂亭)이다. 1483년(성종 14)에 태어나서 1545년(인조 1)에 타계하였다. 배위는 정선전씨이다. 딸들만을 여럿 두었다. 그 중 한 딸은 퇴계 이황의 후 부인으로 들어갔다. 이 부인은 정신이 조금 온전하지 못하여 아무에게나 맡길 만하지 못하였고, 사락정 권질은 퇴계 이황이라면 맡길 만하다 여겨서 청을 넣었는데, 퇴계 이황이 받아들여 후 부인으로 삼은 것이다. 오늘날 병곡종택의 종손은 37대 권종만(權種萬)이다. 자가 보여(甫汝)이고, 1940년생이다. 27세인 병곡 권구로부터 10대를 이어 내려와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병곡 권구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가문의 삶은 전적으로 가일마을을 중심에 두고 전개되는 것이다. ◯ 500여 년 동안 이어진 안동권씨의 동성마을 (가일마을) 가곡리는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1895년 안동군 풍서면에 편입되었고, 1914년 가일(佳日·佳谷), 지곡촌, 갈전리의 일부와 풍남면의 하회리의 일부를 합하였다. 가일과 지곡의 마을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와서 가곡이라 이름 하였다. 가곡리는 가곡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다. 가곡 1리는 가일, 시골, 논동골[魯洞], 도가걸 등 4개의 마을이고, 가곡 2리는 선원(仙原·仙安), 중리(中里), 평장골, 못밑 등 4개의 마을로 되어 있다. 이 마을은 안동권씨(安東權氏) 복야공파 권항(權恒)이 입향한 이후 약 500년 동안 이어진 안동권씨의 동성마을이다. 가일은 옛날에 지곡(枝谷)이라 불렸고, 안동권씨와 순흥안씨(順興安氏)가 사이좋게 땅을 갈라서 사는 집성마을이다. 마을 뒷산인 정산(井山)을 바라보며 오른쪽에 안동권씨가, 왼쪽에 순흥안씨가 터를 잡았다. 이곳을 지곡이라 부른 까닭은 권(權)은 가지가 많아야 번성한다는 뜻에서였으나, 훗날 풍산들의 아침 해가 아름다워 가(佳)로 바꾸었다 한다. 정산에 당이 있어 안일과 풍년을 기원하는 정월 보름날 당제(堂祭)를 지냈으나 현재 지내지 않는다. 정산은 가일을 감싸고 있는 산이다. 『영가지(永嘉誌)』에 “거물산(巨?山) 동쪽에 있다. 산 위에 오래된 우물이 있어 정산이라 한다.”고 하였고, 『팔역지(八域志)』에 ‘정산지하 활만인(井山之下活萬人)’이라 했지만, 지금은 찾을 수 없다. 마을 입구 왼편 가일못 둑에 큰 회나무가 있는데, 이 아래에서 학동들이 글공부를 했다 하여 학자수(學者樹)라 한다.
병산서원(屛山書院) [자료출처 : 유교문화권 역사체험 안동(http://tour.koreastudy.or.kr)]
병산서원은 풍산현(豊山縣)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이 그 전신이다. 1572년(선조 5)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 지금의 병산동으로 옮겨 놓았다. 서당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병에 의해 불태워졌다. 『영가지(永嘉志)』에는 1605년 남쪽 묏부리 자좌오향(子坐午向)의 터로 이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병산서원 홈페이지에는 1607년 이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 1605년(선조 38)에 시작하여 1607(선조 40)년에 완공된 듯하다. 이후의 건축 기록이 보이는 것은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다. 1978년 3월 31일에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이상의 기록에 따라 보면 병산서원은 풍악서당이 그 전신인데, 1572년(선조 5) 서애 유성룡이 서당이 길가에 있어 학문을 닦고 고요히 수양하는 장소로는 합당하지 않다 하여 지금의 병산동으로 이건하였다. 서당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 1604년(선조 37) 서애가 타계하자 서애의 제자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를 비롯한 후학들이 1614년(광해군 6) 존덕사를 세워 그의 위패를 봉안하고 병산서원으로 개칭했다. 1620년(광해군 12)에 서애 유성룡의 위패를 여강서원(廬江書院:현 호계서원의 전신)으로 옮겼다가 1629년(인조 7)에 다시 현 위치로 옮겨와 주향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여강서원은 퇴계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었다. 퇴계의 위패를 모신 도산서원에는 월천 조목이 배향되어 있었다. 퇴계 사후 예안 출신 퇴계 제자들과 안동 출신 퇴계 제자 사이에는 퇴계의 문집 간행, 서원 배향 등에 있어서 약간의 긴장관계가 있었고, 그 긴장은 정치적 상황과도 결부되어 지속되어 왔다. 1613년(광해군 5)에 북인과 관련이 있었던 월천 조목이 도산서원에 종향되었다. 이에 안동지역 사림들은 서애 유성룡과 학봉 김성일의 위패를 종향하여 자신들이 명실상부한 퇴계 학파의 계승자임을 천명하고 여강서원을 퇴계 학파의 주 서원으로 발전시키려던 의도였던 것 같다. 하지만 서애와 학봉의 위패를 동시에 봉안할 때 누구를 높은 서열에 두는가 하는 문제가 생겼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병호시비(屛虎是非)’의 발단이다. 결국 서애의 위패를 선위(先位)인 동쪽에, 학봉 위패는 차위(次位)인 서쪽에 배향함으로써 일단락을 지었다. 학봉 계열이 서원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자 이에 반발한 서애 계열은 1629년 서애의 위패를 다시 병산서원으로 모셔 오게 된다. 동시에 서애의 셋째 아들인 수암(修巖) 유진(柳袗, 1582∼1635)을 배향하여 오늘에 이른다. 철종 때 사액을 받아서 서원의 위치를 굳게 다졌다. ▶ 향사일은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 ◯ 건축 이야기 병산서원(입교당)은 1572년(선조 5) 서애 유성룡이 풍산현(豊山縣)에 있던 하회유씨들의 풍악서당이 길가에 있어 학문을 닦고 고요히 수양하는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다고 하여 지금의 병산동으로 이건하고 병산서당이라 하였다. 경사지 아래쪽의 정문인 외삼문 복례문(復禮門)을 들어서면 왼쪽에 연못이 있고 건너편 높은 석축의 계단을 오르면 보기 드물게 큰 만대루가 동서로 길게 놓여 있다. 누각 밑을 지나 계단을 다시 오르면 마당 건너편에 강당과 그 앞 양측에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는 교육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동재 뒤편 담장 밖에는 주소(廚所)인 뜰집 口자형 주택이 자리 잡고 있다. 강당 뒤편에는 사당인 존덕사(尊德祠)를 앉힌 사당 공간이 전체의 중심축에서 약간 벗어난 오른쪽 높은 곳에 별도로 한 구역을 이루고 있는데 전면 담장 가운데에 내삼문이 나 있다. 사당 영역 왼쪽에는 장판각을, 오른쪽에는 전사청을 두었다. 만대루는 향사나 서원의 행사시에 큰 모임이 열리는 곳으로 사용되며,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에 팔작지붕으로 꾸민 누각이다. 2층 누마루 주위에는 계자각난간을 돌렸고, 그 밖에 만대루와 복례문 사이에는 물길을 끌어 만든 ‘천원지방(天圓地方)’ 형태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강당인 입교당은 팔작지붕인데,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중앙 3칸에 대청을 두고 그 좌우측에 각 1칸씩의 온돌방을 두었다. 동재와 서재는 구조가 크게 다르지 않은 대칭적 구성의 건물로 각기 정면 5칸, 측면 1칸 반 크기의 맞배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존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에 처마는 겹처마이며, 특히 기단 앞 양측에는 8각 석주 위에 반원구의 돌을 얹어놓은 석조물이 있는데, 이는 자정에 제사를 지낼 때 관솔불을 켜놓는 자리라 한다. 병산서원 경내의 건물로는 존덕사(尊德祠), 입교당(立敎堂), 신문(神門), 전사청(典祀廳), 장판각(藏板閣), 동재(東齋), 서재(西齋), 만대루(晩對樓), 복례문(復禮門), 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다. 묘우(廟宇)인 존덕사에는 유성룡을 주향으로 하고 유진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다. 현판 등으로는 복례문(復禮門), 병산서원(屛山書院,) 장서실(藏書室), 동직재(動直齋), 존덕사(尊德祠), 장판각(藏板閣), 존덕사복향기(尊德祠復享記) 등이 있다. 존덕사복향기(尊德祠復享記) : 서애 유성룡의 제자로 부제학을 지낸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이 글을 지었다. 병호시비의 과정에서 서애 후학들이 서애의 위패를 병산서원에 다시 모시게 되어 이를 ‘복향’이라 이른다.
◯ 주향(主享) 류성룡(柳成龍, 1542~1607)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자는 이견(而見)이다. 호는 서애(西厓)이고, 의성 출생이다. 아버지는 승지 유중영(柳仲郢)이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으로서 1564년(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검열과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이어 경연검토관 등을 지내고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후 교리·응교 등을 거쳐, 1575년 직제학, 다음해 부제학을 지내고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자원하여 향리의 노모를 봉양하였다. 이어 대사간·도승지·대사헌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1584년 예조판서로 경연춘추관동지사(經筵春秋館同知事)를 겸직하였고, 1588년 양관(兩館) 대제학이 되었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왜구의 침입에 대비,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을 의주목사와 전라좌수사에 추천하는 한편 「제승방략(制勝方略)」의 분군법(分軍法)을 예전처럼 진관제도(鎭管制度)로 되돌릴 것을 주장했다. 이듬해 좌의정·이조판서를 겸하다가,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강경파인 북인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 등 명장을 등용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하여 평양에 이르렀는데,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으나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그 후 충청·경상·전라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 이해에 다시 영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등 군비 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군대양성을 역설하여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講解)하였다. 1597년 이순신이 탄핵을 받아 백의종군할 때 이순신을 천거했다 하여 여러 차례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했다.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은 하지 않고 은거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사회·경제 시책은 대부분이 임진왜란 과정에서 이반된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의 인적·물적 자원을 전쟁과 전후 수습에 동원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제시되었다. 그 중 가장 역점을 둔 것은 민심 수습책으로 그는 임란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신분에 따라 수관(授官)·면천(免賤)·면역(免役)·부과(赴科) 등 파격적인 포상제를 실시하고, 군사비 이외의 기출을 최대한 억제하여 공물(貢物)·진상(進上) 등을 경감해주는 등 백성에게 실제 혜택이 있게 하여 파탄·와해된 민심을 수습해야만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전제 아래 문벌에 관계없이 각 방면의 인재를 등용하며 공사천(公私賤)을 막론하고 병력을 확보하는 등 인적 자원을 동원할 것을 제시했다. 또한 공물·둔전에서 나오는 양곡(糧穀), 노비의 신공(身貢) 등을 미곡으로 대납(代納)하게 하고, 파격적인 포상을 대가로 모속(募粟)을 행하며, 소금을 구워 곡물로 바꾸거나 중강개시(中江開市)를 통해 중국의 곡물을 사들이는 등의 방법을 통해 전쟁에 필요한 군량미를 확보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전시 군량 확보를 위한 응급책으로서의 성격을 지니지만, 한편으로는 16세기 이래의 공물제(貢物制)의 폐단을 시정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한편 임진왜란 중 그가 제기한 국방 대책은 민심 수습과 인적·물적 자원의 동원을 위한 사회·경제 시책 속에서 구상되었다. 그는 중앙군으로서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정병을 양성하는 한편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원칙 아래 거주지 촌락 단위로 지방군인 속오군을 편성하는 등의 군사 기구 개편을 주장했다. 이 구상은 난민·유민(流民)을 구제하기 위한 둔전론(屯田論)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즉 훈련도감의 경우 정병으로 양성하기 위한 군인 외에 서울에서 1만 명을 더 모집하여 5영(五營)을 두고, 각 영에 2,000명을 배치하여 해마다 반수는 성중(城中)에 남아 연습하고, 나머지는 성 외에서 빈 땅을 골라 둔전을 만들고 윤번으로 교대시켜 군량 공급을 담당하게 했다. 또한 종전의 양민만이 아니라 양반과 천인(賤人)까지도 편입시키는 속오군도 둔전의 설치와 표리 관계에 있었다. 그가 제시한 둔전책은 전란으로 동요하고 있는 농민을 안정시켜 무농경작(務農耕作)하게 하는 방안이었다. 떠도는 백성들이나 일본군 점령 하의 농민을 둔전 가능 지역에 모아 정부에서 소·종자·농기구 등을 지급하고 둔전을 경작시켜 궁극적으로는 주민 보호, 군량확보,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는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스승 퇴계의 학설에 따라 이기론(理氣論)을 펼치고 양명학을 비판했다. 또한 퇴계의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좇아 기(氣)는 이(理)가 아니면 생(生)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여 기보다 앞서 있는 실체로서의 이를 규정했다. 그는 퇴계처럼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이기로 분석하지 않았지만, 도심을 한결같이 지켜야 함을 강조했다. 또한 정통 성리학자로서 양명학이 불교의 선학(禪學)에서 연유한 것으로 간주하고 맹렬히 비판했다. 유성룡은 양명학의 핵심적 이론인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과 치양지설(致良知說)이 ‘교왕이과직(矯枉而過直: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 지나치게 곧아지다)’ 폐단에 빠진 것으로 불교의 학설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지(知)로, 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을 행(行)으로 병립하는 존재로 파악하고, 어느 하나에 치중됨이 없이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지행병진설(知行竝進說)을 주장했다.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에 『서애집(西厓集)』, 『징비록(懲毖錄)』 등이, 편서에 『황화집(皇華集)』, 『정충록(精忠錄)』 등이 있다.
▶ 배향(配享) 류진(柳袗, 1582~1635)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계화(季華), 호는 수암(修巖), 아버지는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다. ◯ 관련문집
수암집(修巖集) 이 책은 도산서원이 소장하던 『수암집(修巖集)』이다. 유진(柳袗, 1582~1635)의 시문을 총 4권 2책으로 엮어서 1734년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징비록(懲毖錄) 이 책은 안동권씨 정남문고에서 소장하던 『징비록(懲毖錄)』이다.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 임진왜란 기간 동안 기록한 야사들을 엮어 총6책의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서애선생문집(西厓先生文集) 이 책은 안동권씨 정남문고에서 소장하던 『서애선생문집(西厓先生文集)』이다.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시문을 총10책으로 엮어서 1894년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우복선생문집(愚伏先生文集) 의성김씨 청계종택에서 소장하던 『우복선생문집(愚伏先生文集)』이다. 정경세(鄭經世, 1563~1633)의 시문을 총17책으로 엮어 기해년에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원병산, 효부골, 정자골로 구성된 마을(병산리) 병산리는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1895년 안동군 풍남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풍산현의 상리와 하리의 일부, 풍서면의 가곡리 일부를 합하여 병산리라 하였다. 그 후 1934년 풍천면에 편입되었고, 1995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가 되었다. 병산리는 원병산, 효부골(孝婦谷), 정자골(亭子谷) 등 3개의 마을이다. 풍천면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마을로서, 지명은 병산서원 앞에 병풍처럼 둘러 있는 병산(屛山)에서 따온 것이다. 원병산마을은 앞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서 병산이라 했다. 배티골 앞에 병산 나루터가 있었고, 병산 절벽 아래 병산소라는 깊은 소(沼)가 있었지만 지금은 물길이 바뀌어 약수터로 변하였다. 길제(吉祭) (자료출처 : 하동상변 상례下권) 길제의 의의 길제는 좋은 뜻으로 새로운 주인(主人)이 대(代)를 이어서 조상의 사판(祠版)을 뫼시게 된다. 어리기만 하던 자손이 이제 다 커서 조상들의 뜻을 받들어 가문을 빛내며, 가전(家傳)되어 오던 전통을 자기의 후손에게 전하는 일을 책임지는 시점이 되기도 한다. 이를 간단하게 생각하면 과거사를 털어 잊어버리고 새로운 자기 집안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가는 뜻이 있기 때문에 옛날에는 길사 때에는 최대의 준비와 최고의 정성을 드렸고, 가세가 넉넉한 집안에서는 소를 잡아서 큰 잔치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 예기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예를 알맞게 행하는 의식인 것이다. 그러나 한편은 아무리 예를 알맞게 하기 위하여 친진(親盡)이란 이름으로 자기 아버지까지 정성으로 뫼시던 오대조고비(五代祖考妣)를 자기네 사당에서 밖으로 나가게 하는 일종의 불효이다. 또 체천(遞遷)을 못하는 오대조고비는 조매(祧埋)를 하여야 하니 좋은 뜻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 길사의 일이다. 그래서 우암(尤庵)은 길제도 사실 상(喪)의 여분 제사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일희일비가 섞인 것이 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보내는 조상은 곡(哭)으로 보내고, 봉사자(奉仕者)의 대(代)를 바꾸는 남은 조상은 사당으로 뫼시고 좋은 뜻을 다하라고 축사를 하는 것이다.
알묘(謁廟)와 봉심(奉審) (자료출처 : 陶山書院 院規와 儀節) ◯ 알묘(謁廟) 알묘는 성균관, 향교, 서원, 가묘 등에 모셔진 선현의 위패에 참배하는 의식을 말한다. 도산서원의 알묘례는 일반 내방객이 참배하는 의식인 ‘일반알묘’와 서원의 유사가 매월 삭, 망일에 향을 올리고 참배하는 ‘향알(香謁)’, 매년 정월 초 5일에 유생들이 함께 참배하는 ‘정알(正謁)’, 또한 춘, 추 향례 전일에 향례 임, 사원이 함께 참배하는 알묘례 등이 있다. 도산서원 내방객의 알묘 시에는 관리인 및 유사의 안내를 받아 사당에 들어가 분향례(焚香禮)를 올리고 배석(拜席)에서 재배(再拜)한다. ◯ 참배홀기(參拜笏記) ◯謁者引參禮者就門外位 ◯引入廟廷 ◯諸執事各就位 ◯謁者引參禮者詣盥洗位 ◯盥洗 ◯引詣神位前 ◯跪 ◯三上香 ◯俯 伏 興 ◯引降復位 ◯參禮者 皆再拜 ◯鞠躬拜興拜興平身 ◯禮畢出 ◯알자는 참례자를 인도하여 사당문 밖에 나아간다 ◯인도하여 사당 뜰 앞에 들어간다 ◯모든 집사가 각각 자기 자리에 나아간다 ◯알자는 참례자(다중일 때는 대표자 1인)를 인도하여 손 씻는 자리로 나아간다 ◯참례자는 손을 씻고 닦는다 ◯인도하여 신위 앞에 나아간다 ◯끓어 앉는다 ◯향을 세 번 올린다 ◯몸을 굽혀 엎드렸다가 일어나 제 자리로 돌아온다 ◯참례자는 모두 제배하다 ◯몸을 굽혀 두 번 절하고 일어선다 ◯참배를 마치고 사당을 나온다.
◯ 봉심(奉審) 알묘를 마치고 다시 사당에 들어가 경건한 마음과 몸가짐으로 읍례(揖禮)를 하며 봉심(받들어 살핌)을 한다. 본래 경국대전의 예전(禮典)에 의하면 왕명(王命)에 의하여 침묘(寢廟), 산릉(山陵), 사고(史庫) 등의 이상유무를 살피고 결과를 왕께 보고하는 것으로서 향교와 서원에서도 삭, 망일에 재유사(齋有司)가 향알(香謁)을 마치고 봉심을 행하며 사당내외의 이상유무를 살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