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라얀의 지휘와 베를린 필하모니의 연주로 듣는 <윌리암 텔 서곡>, 이 곡은 후반부 3부와 4부가 우리 귀에
익숙합니다. 맨 밑에 <윌리암 텔> 서곡에 대하여 설명이 되어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음향이 작으면 화면 밑
줄에서 소리를 키우시기를...잘 아시겠지만 <윌리암 텔>은 독어권에서는 <빌헬름 텔>이지요.
[ 실러의 <빌헬름 텔(영어로는 윌리암 텔)> 탄생지를 찾아 ]
* 마르바하의 국립 실러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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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른은 스위스의 파리라고 불리우는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중세의 아치가 남아있어 관광의 명소로 손꼽힙니다. 이 고도(古都)를 왼쪽 끝에 낀 호수는 보통 루체른 호(湖)라 불리지만 정식 이름은 <네 개의 숲의 주(州)의 호수>.
우리, 슈비츠, 운테르발덴, 루체른 등 4개의 삼림 지대의 주로 둘러싸인 채 스위스 땅의 한복판에 위치한 이 호수가 스위스 독립의 진원지(震源地)입니다.
* 스위스와 루체른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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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가 신성로마제국의 속령으로 있을 때 합스부르크 왕가의 압정에 반항하여 네 삼림 주(州) 중 루체른 주를 제외한 3개 주가 뭉쳐 독립의 봉화를 올린 것이 1291년 8월. 이것을 기념하여 지금도 스위스 건국일은 8월 1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독립 운동 때 나타난 전설상의 영웅이 바로 빌헬름 텔입니다. 빌헬름 텔이라면 누구나 자기 아들의 머리 위에 얹힌 빨간 사과를 활로 쏘는 장면을 맨 먼저 연상하게 됩니다.
한낱 옛이야기 속에 썩고 말았을 이 사과가 온 세계인의 가슴 속에 자유의 불씨처럼 빨갛게 오늘날까지 싱싱한 것은 실러의 덕택입니다.
루체른에서는 호수를 일주하는 유람선이 떠납니다. <실러 호(號)> 등 5척의 배가 3시간 코스로 빌헬름 텔의 전설을 따라 다닙니다.
<빌헬름 텔>의 고향으로 알려진 곳은 뷔르글렌. 호수의 동남쪽 맨 끝인 플륄렌에서 배를 내려 버스를 갈아 타면 알트돌프를 지나 약 15분만에 이 조그만 고지대의 마을에 닿습니다. 여기 빌헬름 텔의 기념관이 있습니다.
* 빌헬름 텔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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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에 개관된 기념관에는 1585에 최초로 제작된 이래 지금까지 텔 얼굴의 모델이 되어 오는 초상의 원화와 함께 기록상으로 텔이 맨 처음 등장하는 <사르넨 백서>가 사본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1470년에 쓰인 이 <수필연대기>에 텔의 전설이 나옵니다. 그러나 텔이 실재 인물이었는지는 아직까지 미결상태입니다.
기념관의 안내서에서도 <이 기념관은 텔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자는 것도 아니고 할 수도 없다>고 미리 못 박아 놓았습니다.
전설은 굳으면 신앙이 되고 신앙은 집을 짓는 버릇이 있습니다. 뷔르글렌 마을의 빌헬름 텔 호텔 뒤쪽에는 조그만 사당이 하나 서서 텔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참배시킵니다. 텔의 생가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자리에 1582년에 세운 것입니다. 1949년 안을 손질하면서 텔의 일생을 그린 11폭의 벽화가 발견되어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 빌헬름 텔의 생가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자리에 세운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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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텔이 자기 아들의 머리 위에 사과를 얹어 놓고 활을 당기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의 현장으로 전해지는 곳은 알트돌프. 뷔르글렌에서 5km의 거리입니다. 우리 주(州)에서 대관(代官)이던 포악한 게슬러가 막대기 끝에 모자를 걸어 놓고 경례를 강요하던 자리에는 지금 텔 부자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1891년 우리 주(州) 정부가 현상 모집하여 세운 것입니다.
* 빌헬름 텔 부자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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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맞은편에는 두 줄기의 분수대가 텔의 자식의 머리 위로 활을 겨누던 가슴 아픈 자리임을 말해 줍니다.
알트돌프의 빌헬름 텔 극장에서는 3년마다 한 번씩 <빌헬름 텔>이 주민들끼리의 출연으로 공연되고 있습니다. 우리 주의 상인, 농부들이 분장을 하고 나오는 소인극(素人劇)입니다. 텔 극(劇)이 이 마을에서 맨 처음 상연된 것은 실러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인 1599년이었고 마을 사람들은 연대기(年代記)의 기록에 따라 극을 꾸몄던 것이라고 합니다.
사과를 명중시켜 아들의 목숨을 살린 빌헬름 텔은 활 통 속에 남은 다른 한 개의 화살이 대관 게슬러를 죽이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풀려나지 않고 게슬러의 성이 있는 퀴스나크까지 호송됩니다. 당시는 알트돌프에서 퀴스나크까지 육로가 없어서 플륄렌에서 나가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야 했습니다.
지금도 11월이면 호수에 풍랑이 거셉니다. 게슬러 일행의 배가 난파하게 되었을 때 텔은 배를 기슭으로 몰아 달아납니다.
알트돌프에서 호수를 따라 난 길로 루체른 쪽으로 향하면 시시콘 조금 못 미쳐의 호숫가에 텔스카 펠레라고 부르는 사당이 외따로 서 있습니다. 텔이 배를 밀어 버리고 상륙한 지점을 기념한 것입니다.
* 텔스카 펠레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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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벽화가 그려진 이 예배당은 1590년에 세워져 1956년에 복구했습니다. 이미 4백년 전이니 기념물 자체가 역사적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빌헬름 텔은 육지에 오르자 퀴스나스크로 달려가 대관의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그가 나타나자 활을 당깁니다.
퀴스나스크도 루체른 호반의 마을입니다. 마을 어귀에 호울레 갓세(움푹 파인 길)라 부르는 호젓한 숲 사잇길이 길게 나 있고 이 길을 한참 올라가면 또 사당이 하나 나타납니다. 바깥 벽에 텔이 게슬러에게 활을 쏘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궤테도 찾아왔던 곳입니다.
일대는 성역처럼 깨끗이 가꾸어 놓았습니다. 여기서 과히 멀지 않은 리지로 가는 쪽에는 게슬러의 성으로 전해지는 것이 폐허로 남아 있습니다.
* 스위스 곳곳에 있는 빌헬름 텔 부자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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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가 그 자유와 독립의 영웅 빌헬름 텔을 불멸화해 준 실러에게 바친 경의는 루체른 호(湖) 기슭에 바위로 서 있습니다. 호수의 유람선은 젤리스베르크에서 높이 30m 가량의 피라밋 형 천연색 앞을 지납니다. 거기 <빌헬름 텔의 가인(歌人) 프리드리히 실러에게>라고 새겨진 글씨가 호수를 향해 외치는 고함소리처럼 커다랗습니다. 실러 탄생 1백주년 때인 1859년애 새긴 것입니다.
스위스는 실러를 이렇게 모시지만 정작 실러 자신은 <빌헬름 텔>의 땅인 스위스에 한 번도 온 적이 없습니다. <빌헬름 텔>은 궤테가 스위스 여행 중에 취재한 전설을 실러에게 작품화하도록 권유하여 희곡으로 탄생하였고 당시 바이마르 극장의 총감독이던 궤테 자신이 연출을 맡아 1804년 초연되었습니다.
* 바이마르의 실러와 궤테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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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러는 이 작품을 발표한 이듬해에 죽었습니다. 바이마르의 그 집은 지금은 실러 기념관으로 남아 있습니다.
* 마르바하의 실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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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러는 남부 독일 데카 강변의 마르바하에서 태어났습니다. 생가는 외벽만 개축을 한 채 실러가 쓰던 모자며 지팡이 등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인구가 불과 1만 2천명이던 마르바하는 1859년 이래 실러 기념 도시가 되어, 실러의 동상을 마당에 세운 국립 실러 박물관(맨위 사진)이 있습니다.
* 실러의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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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독일 문학가들의 육필 원고와 자료들을 소장한 독일문학 기록보관소가 있습니다.
[ 실러와 <빌헬름 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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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폰 실러(1759~1805년)는 궤테와 함께 독일 고전문학의 2대 시인입니다. 그의 희곡 <빌헬름 텔>은 스위스의 전설에서 취재한 것입니다.
중세 말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각 주(州)애 대관(代官)을 파견하여 갖은 압정을 저질렀습니다. 스위스 민중들의 원성이 높을 때 대관의 하나인 게슬러는 막대기 끝에 모자를 걸어놓고 통행인들에게 경례를 강요합니다.
3주의 대표가 밀회하여 봉기를 계획합니다. 활의 명수인 사냥꾼 빌헬름 텔이 모자 밑을 경례를 하지 않고 지나가다가 게슬러의 벌을 받습니다. 아들의 머리 위에 사과를 얹어 놓고 활을 쏘아 맞히라는 명령입니다.
텔의 화살은 사과를 궤뚫습니다. 그러고는 달아나던 중 한 개의 화살로 게슬러를 쏘아 죽입니다. 스위스 민중은 일어나 황제군을 몰아냅니다.
실러의 <빌헬름 텔>은 롯시니가 오페라화하여 더욱 널리 알려졌습니다.
[ 롯시니의 <윌리암 텔 서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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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음악가 롯시니는 평생 동안 37편의 오페라를 썼는데 <윌리암 텔)>은 그의 최후의 오페라입니다. 이 오페라는 지금 거의 상연되지 않고 다만 <서곡>만이 흔히 연주되고 있습니다. 오페라는 가고 서곡만 남았습니다.
총 4부로 되어 있으며 <새벽>, <폭풍우>, <정적>, <스위스군의 행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제1부 <새벽>
1부는 첼로의 독주로 시작합니다. 이 후 첼로의 5중주를 주체로 하여 스위스의 새벽을 조용히 묘사합니다.
제2부 <폭풍우>
처음에는 현악기로 폭풍우의 내습을 알리는 질풍의 묘사가 있고, 이윽고 전 악기에 의해 폭풍우가 몰아칩니다. 격렬한 폭풍우가 차차 멀어지고 팀파니에 의한 천둥소리가 멀리 들리며 플루트의 조용한 독주로 제3부로 옮겨 갑니다.
제3부 <정적>
폭풍우가 가라앉은 뒤 평화로운 목가가 불리웁니다. 전원에 울려 퍼지는 목자의 아름다운 피리의 선율은 잉글리쉬 혼에 의해 연주되고 이 선율에 따라서 플루트가 장식적인 오블리가토를 부르는데 이것은 스위스에 찾아든 평화의 정경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제4부 <스위스군의 행진>
<서곡>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스위스에 평화를 가져온 독립군의 행진과 민중의 끝없이 환호하는 정경을 묘사한 것입니다. 트럼펫의 힘찬 독주에 이끌려 관악기가 서주를 연주하면 화려한 리듬으로 행진곡이 시작되고, 중간부에서는 주로 목관이 노래하며 다시 행진곡으로 돌아와 클라이막스가 되어 흥분과 환희가 넘치면서 곡이 끝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