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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48
10월14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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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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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04-ukj9wdT0&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index=2&t=0s
**서울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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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너희 율법교사들도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견디기 어려운 짐을 남에게 지워 놓고 자기는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다."
<묵주기도 한번 때릴까요?>
지난 주일엔 평소보다 약간 일찍 산행을 나섰습니다. 미사를 끝내고 마당에 나와보니 선발된(지난 한 주간 열심히 산) 아이들 열 명이 벌써 봉고차에 빼곡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좋은 자리에 앉겠다고 서로 티격태격 다툰 두 명이 "짤리고" 다른 아이들로 교체되는 실랑이도 있었지만 일단 시동을 걸고 신나는 음악을 크게 틀었습니다.
단골로 다니는 산이 주로 가까운 관악산이나 이웃동네 뒷동산이었는데, 이번 주에는 좀 무리를 했습니다. 김포에서 강화방면으로 가다가 강화대교 건너기 직전에 오른 쪽에 보면 "문수산성"이란 삼림욕장이 있습니다. 바다를 낀 산성인데 주변 경관이 말로 다 표현 못할 정도로 빼어나기에 가을이 더 깊어지기 전에 꼭 한번 가보시기를 적극 추천합니다.
입장료는 없고 얼마 전부터 주차료를 받기 시작했는데, 주차요원들이 얼마나 친절하고 인사성이 밝은지 모릅니다. 한 시간 정도 올라가니 그리 힘들이지 않고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맑은 공기, 서서히 물드는 단풍, 손에 잡힐 듯한 강화도의 전경 등등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세속의 묵은 때가 다 씻기는 듯 했습니다.
아이들 역시 눈앞에 펼쳐진 절경을 내려다보며 다들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다들 산정에서의 성취감을 만끽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제게 "신부님, 정상에 올라왔는데, 단체로 묵주기도 한번 때려요!"라고 말했습니다. 요즘 우리 아이들 사이에 묵주기도가 유행이거든요. 그 순간 제 머리 속이 갑자기 바빠지면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럴까? 좋은 생각이기는 한데... 그런데 여기 정상에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좀 어색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의아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지 않을까? 그런데 오늘 이 녀석들이 왠 일로 이렇게 오바들을 한다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엉겁결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애들아, 아이디어는 좋은 아이디언데... 여기 다른 등산객들도 많이 계시니 묵주기도는 나중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 드리도록 하자."
저도 모르게 그 말을 던져놓고 나서 하산 길 제 발걸음이 참으로 무거워졌습니다. 왜냐하면 기회 있을 때마다 틈만 나면 아이들에게 신자들에게 제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증거하는 삶을 사십시오. 신자임을 떳떳하게 밝히며 사십시오. 기도하는 신앙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십시오. 공공장소에서 자랑스럽게 성호도 긋고 묵주기도도 열심히 바치십시오."
그렇게 외쳐놓고는 "하느님이 가까운 곳, 산꼭대기에 올라왔으니 묵주기도 한번 때리자"는 아이들을 만류했던 제 모습이 참으로 부끄러워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혹독하게 몰아 부치십니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다 민족 안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여러 부류의 집단 가운데 가장 순수한 혈통을 자랑하던 유다인들 가운데 유다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6,000여명 정도의 수효를 유지하던 엘리트 가운데 엘리트들이었습니다. 한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 질책의 단골 대상이었지만 다들 정통 유다인들이었습니다. 율법에 지극히 충실했던 정예 유다교인들이었습니다. 기도생활에 하루의 많은 부분을 할애했고, 기도도 실제로 열심히 바쳤던 훌륭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치명적인 결핍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신앙을 삶으로 보여주지 못함"이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신앙, 열렬한 기도 생활, 하느님 공경, 이웃사랑의 실천 등은 주로 신체 윗부분(입술, 귀, 머리, 생각)만을 사용했던 지극히 비정상적인 것들이었습니다. 기도와 신앙을 가슴과 몸으로, 손과 발로 보여주지 못한 것, 그것이 그들의 가장 결정적인 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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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율법 학자의 초대>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0nu2Ggmck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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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에게 초대받으신 것이 인격적인 메시아로서가 아니라 그저 율법 조항처럼 머리로만 초대받으셨다는 것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일어나는 일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이웃을 심판하는 사람이 됩니다. 바리사이는 율법을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름을 증명하는 데 사용합니다. 하지만 율법 자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우리 마음에 초대받으시면 그 율법으로 우선 우리 죄가 드러나기에 누구도 심판할 수 없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를 심판하고 질책하게 된 이유는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자신 안에 초대하지 않고 지식적으로 머리로만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율법 학자’에 관한 내용입니다. 바리사이와 마찬가지로 율법 학자들도 예수님을 자신 안에 초대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자신을 들어 높이는 데 이용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질책하시자 율법 학자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타인들의 시선을 매우 중시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을 거부했다가는 하와가 자신을 싫어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인정보다는 사람의 인정을 더 추구한 것입니다. 만약 선악과를 주님께 바치는 것만으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굳이 사람에게 더 인정받으려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강생하신 율법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자신 안에 받아들인다는 것은 율법을 지킬 때 그분이 미소 짓고 인정해주시는 것까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자신 안에 초대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들은 타인들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선이 명확합니다. 자신을 죄짓게 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단호하게 끊을 수 있는 용기가 있습니다. 그들을 살게 하는 힘은 타인의 평가가 아닌 자신 안 그리스도의 평가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롤프 젤린’의 『나는 단호해지기로 결심했다』라는 책은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휘둘리는 사람들에 대한 처세술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희생자가 되어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데도 그들로부터 미움이나 나쁜 평가를 받는 것이 두려워 과감하게 관계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에 관한 책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는 이런 병에 걸려있습니다.
부모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 인정받지 못한 것을 채우려 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휘둘리게 됩니다. 이들을 집으로 비유하자면 담장의 경계선이 명확하지 않은 집과 같습니다. 어느 선까지 들어가야 주거침입죄로 걸리는지 도저히 구분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아주 사소한 침입으로도 화를 내는가 하면, 어떤 때는 당연히 주거침입죄로 신고해야 하는데도 당하고만 있습니다. 이런 삶이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집의 담장을 명확히 쌓아야 상대도 나를 대할 때 편하고 들어오려고 할 때 초인종을 누르게 됩니다. 나의 경계가 확실하지 않은 사람은 타인의 경계도 알아볼 수 없기 때문에 관계에서 항상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자 롤프 젤린의 친구도 정신과 의사인데 그는 외모도 출중하고 말도 잘해서 TV에 출연해 유명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엔 그 인기에 기분이 너무 좋았으나, 몇 달 뒤에 만났을 때는 우울증 걸리기 직전이었다고 합니다. 어디서나 사람들이 알아보고 상담을 하고자 하는데, 그것을 거부하자니 유명해져서 교만해졌다는 소리를 들을까 겁나고 그들을 다 받아주자니 체력의 한계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상담하는 시간을 정하고 그 외에는 절대 상담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에 대해 안 좋게 말하는 사람도 생겨났으나 결국 자신의 삶을 찾았고 다시 기쁨과 활기를 찾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 안에서 먼저 인정을 받아야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으로 지쳐 쓰러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군가에게는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힘이 바로 다른 이로부터의 인정입니다. 이 인정받음은 자존감을 높여줍니다. 자존감은 자신의 힘이 아닌 타인의 인정으로 높아집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면 사람들의 노예가 됩니다. 율법 학자들이 율법이라는 무기로 사람들의 시선에 노예가 되어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무시당하는 것 같으면 자신들이 잘 지키고 있는 율법으로 자신들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짓누릅니다. 이는 아담이 비록 선악과는 따먹기 전이라 할지라도 그 따먹지 말라고 하신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못했던 상태와 같습니다. 하느님이 옆에 계심을 인식했다면 굳이 하와의 애정을 잃지 않기 위해 선악과를 받아먹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초대할 때, 두 가지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사이처럼 율법으로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 율법을 주신 분이 동시에 그 율법을 지키는 이를 인정해주시기에 내가 율법을 지키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요구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율법 학자를 넘어서게 됩니다. 남을 심판하지 않고 또 남의 심판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다면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자신의 마음에 초대한 것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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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1,42-46 : 정의와 사랑의 실천을 소홀히 하는구나
율법의 근본정신을 외면하며, 결과적으로 계명을 어기고 그래서 율법을 어기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42절)고 하신다.
그들은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 같은, 반드시 실천해야 할 중요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단지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계명들만 철저히 지키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쳤다. 자기들에게 편한 것만 찾아 지켰으니 나머지 계명들은 지키지 않은 것이니,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42절)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은 또한 잔칫집에서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바리사이들의 교만과 허세를 꾸짖으신다. 그들을 “드러나지 않는 무덤”(44절)이라고 하신다. 그들은 겉꾸밈으로 자기를 감추고 그럴듯한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을 속인다. 입으로는 옳은 말을 늘어놓지만 속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마태 23,27참조).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면서 남들에게만 그렇게 하라고 시키는 교사들이 많다. 그러니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시편 5,10)이라 한 것 같이 그들은 무덤이다.
위선이라는 것은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역겨운 것이다. 위선자는 겉모습과 말로 자기를 감춘다. 좋은 평판을 듣는 행위로 자신의 수치스러운 것을 감추려고 한다. 그러나 자기가 찬미하고 칭송하는 일에는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만 지키라고 요구한다. 그 위선은 오래 감출 수 없다. 잠깐 동안은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머지않아 본색이 드러난다.
이렇게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자 율법 교사들이 이에 대해 분개한다.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45절)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들까지 책망하신다. 사실, 그들은 바리사이들과 한통속이었기 때문에 책망을 들어 마땅하였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자기들까지 모욕하는 것으로 들렸다면 그들 또한 바리사이들과 똑같은 사람들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나와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나와 만나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하느님의 뜻대로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성찰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분을 닮으려고 하는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이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그분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
이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 때에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44절)고 엄한 책망을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주의자 되지 않고 진정한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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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어느 잡지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매번 음반 제작 제의를 퇴짜 맞던 무명 가수가 있었습니다. 그날도 한 음반사에서 거절당하고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데, 허리가 굽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노인이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노인의 행색이 안타까워 청년은 얼른 노인을 부축하였습니다.
낑낑거리며 길을 다 건널 무렵, 노인이 웃으면서 물었습니다. “어떤가, 기분이 좀 나아졌나?” 청년은 어리둥절하였지만 솔직하게 “네, 조금 나아진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노인이 굽은 허리를 쭉 펴고 똑바로 섰습니다. 청년이 깜짝 놀라자 노인이 말하였습니다. “사실 나는 아주 건강하지만 근심이 가득한 자네 얼굴을 보 고 잠깐 연기했지. 사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 때 한결 기분이 나아지거든.”
행복은 언제 찾아올까요? 정답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에게 아쉬운 것이 다 채워진다고 행복이 찾아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니, 행복이란 ‘나’ 자신만 잘살고,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갈 때 찾아오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불행하여라.”라고 네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자기 몫만 챙길 줄 알고, 자기 명예와 안위만 챙길 줄 알았지 다른 사람의 처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행복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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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꾸짖으시다.>
관례적으로, 어떤 직업이나 직책 명칭 뒤에 ‘님’자 존칭을 붙여서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그 직업이나 직책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기도 하고,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동시에 그것은, 존경을 받을 수 있도록 제대로 일하라는 요구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당신과 당신이 하는 일을 존경할 테니 당신도 존경받을만한 사람이 되어라.”) 만일에 존경받을만한 사람이 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존경받기만을 바란다면, 그러면서 자신의 직업이나 직책 명칭 뒤에 ‘님’자 존칭을 붙이라고 먼저 요구한다면, 존경받기는커녕 멸시만 받게 될 것입니다. (존경이 멸시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힘에 눌려서, 속으로는 멸시하지만 어쩔 수 없이 존칭을 붙여서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위선이 아니라 힘없는 사람들이 겪는 서글픈 상황입니다. 그런 경우에 그 존칭을 듣고서 자기를 존경하는 줄로 착각하고 흐뭇해하고 좋아하는 것은 ‘헛된 허영심’과 ‘교만’입니다. 자기가 정말로 존경받을만한 사람인지 먼저 반성해야 하고, 상대방이 사용하는 존칭에 대해서 겸손해야 하고, 진짜로 존경받을만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루카 11,42)
여기서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내는 일”은 하기 쉬운 일,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는 일, 생색내기 좋은 일입니다.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하기 어려운 일, 사람들의 눈에 안 보이는 일, 열심히 해도 생색이 안 나는 일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십일조를 잘 낸 것은, 하느님을 위해서도 아니었고, 불우이웃을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였고, 열성적인 신앙인이라는 칭찬과 존경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것은, 실천하기도 어렵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라서 사람들에게 과시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선자들이었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루카 11,43).”
이 말씀에서, 자기들을 “......님”이라고 부르라고 요구하는 특정 직업의 사람들이 연상됩니다. (그렇게 존칭을 붙여서 부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기분 나빠 하고......) 바리사이들이 윗자리를 좋아한다는 것은, 윗자리에 앉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당연한 일로 생각하니까, 윗자리에 앉으라는 말을 누가 하기도 전에 자기들이 먼저 당연하게 그 자리에 앉습니다. 인사받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인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뜻이기도 하고, 자기들에게 인사하라고 요구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인사하지 않으면 예의 없다고 호통치고......) 존경받을만한 사람으로서 살지도 않으면서 존경받기를 바라는 자들을 하느님께서(예수님께서) 보실 때, 무슨 말씀을 하실까? 이 질문의 답을 예수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가 답입니다. 존경받을 자격도 없으면서 존경받기를 바라는 교만한 위선자들은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을 받지 못하고 탈락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위선자들을 구원에서 제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자기들의 교만 때문에 스스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루카 11,44).”
‘드러나지 않는 무덤’은 ‘남을 죄짓게 하는 자’를 뜻합니다. <무덤에 접촉한 사람은 7일 동안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 율법입니다.(민수 19,16) 그런데 무덤이라는 것이 표시나지 않는, 즉 ‘드러나지 않는 무덤’에 접촉했어도(무덤이라는 것을 모르고서 접촉했어도) 7일 동안 부정하게 된다는 율법은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부정하게 된 사람은 율법에 정해져 있는 대로 사흘째 되는 날과 이레째 되는 날에 ‘정화 예식’을(민수 19,17-19) 해야 하는데, 만일에 그 정화 예식을 하지 않으면 공동체에서 추방됩니다.(민수 19,20) 무덤인 줄 모르고 접촉해서, 자기가 부정하게 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또는 남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은, ‘위선’을 버리지 않으면 모두 ‘드러나지 않는 무덤’이 됩니다. 배우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대로 따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매우 엄하게 단죄하셨습니다.(루카 17,1-3)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6)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는다는 것은, 계명들과 율법들을 내려 주신 하느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또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온갖 규정들을 잔뜩 만들어서 그것들을 철저하게 지키라고 사람들에게 강요한다는 뜻입니다.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됩니다. 1) <남들에게는 철저하게 지키라고 강요하면서 자기들은 안 지킨다.> 사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율법들과 규정들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으로 유명한 자들이었는데,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2)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것을 알면서도 도와주지 않는다.> 율법학자들의 원래 임무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도와주는 것인데, 도와주기는커녕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기만 한다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신앙생활은 ‘사랑과 기쁨’으로 해야 하는 생활인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때문에 사랑과 기쁨 없이, 마치 중노동을 하듯이 억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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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읽은 동화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 쥐는 딸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딸을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에게 시집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하늘의 태양을 보니 강해 보였습니다. 아버지 쥐는 말했습니다. ‘태양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강합니까?’ 태양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보다 더 강한 것은 구름입니다. 구름이 나를 가리면 힘을 쓸 수 없답니다.’ 아버지 쥐는 구름에게 물었습니다. ‘구름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강합니까?’ 구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보다 더 강한 것은 바람입니다. 바람이 불면 나는 옮겨 가야 합니다.’ 아버지 쥐는 바람에게 물었습니다. ‘바람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강합니까?’ 바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보다 더 강한 것은 벽입니다. 벽은 나의 길을 막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 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벽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강합니까?’ 벽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보다 더 강한 것은 쥐랍니다. 쥐는 나에게 구멍을 내고 다닌답니다.’ 결국 아버지 쥐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같이 사는 ‘쥐’라는 걸 알았고, 사랑하는 딸을 쥐에게 시집보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육의 행실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을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의 행실을 따라서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성서는 육의 뜻을 따라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담은 교만함으로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카인은 시기와 질투 때문에 동생을 죽였습니다. 다윗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충실한 신하인 우리아를 죽도록 했습니다. 헤로데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2살 이하의 어린아이와 세례자 요한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성령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부귀, 권력, 명예가 아니라 성령의 뜻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식과 위선 그리고 허영에 빠진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2000년 전에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목자와 신앙인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花無十日紅이고 權不十年’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곧 사라지고 마는 것들 때문에 중요한 것을 잃어버립니다. 돈 때문에 소중한 가족을 등한시하기도 하고, 권력 때문에 우정을 팔기도 합니다. 세상의 것을 추구하다가,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蘭香千里 德香萬里’라는 말이 있습니다. 난의 향기는 멀리가야 천리이지만 사람의 덕은 만리까지 간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희생, 사랑, 나눔, 봉사는 아름다운 향기가 되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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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누가 먹은 걸까>
루카 11,42-46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꾸짖으시다)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먹은 걸까>
사랑하는 하느님께
정성껏 차린
소박한 밥 한 그릇
하느님께서 몸소
드실 수는 없어도
하느님께서 보내신
하느님 닮은 사람은
맛있게 먹을 수 있지
누가 먹은 걸까
밥 한 그릇
사람이 먹은 걸까
하느님께서 드신 걸까
하느님의 사람이
든든하게 먹고 나니
하느님께서 배부르신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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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귀웅 토마스 신부님]
<의로움>
한자로 의(義)는 양(羊)과 나(我)를 합친 글자입니다. 옛날에 제사를 지낼 때 사람을 대신해서 짐승을 제물로 바쳤는데, 바로 거기서 나를 대신하여 제물로 바쳐진 양과 같은 일을 행할 때 의로움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사실 의로운 일, 정의로운 일이라고 하면 자신의 처지, 자신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고 더 많은 사람, 더 큰 사회를 위하여 자신을 헌신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의로움과 사랑은 똑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개인이나 교회는 정의로운 일에 투신해야 할 당연한 소명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자리를 떠나 연약한 인간이 되시고, 그 인간이 다른 수많은 인간을 위하여 대신 희생 제물이 되었다는 데서 최고로 드러납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을 닮는 것이 정의라고 하겠지요.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하여 신앙을 찾는다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각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희생되어 다른 사람이 평안을 얻도록 하는 것, 교회의 희생을 통하여 교회가 속한 사회가 하느님 나라를 닮도록 하는 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거룩한 전례를 거행하지만 스스로 희생자가 되지 못하는 개인과 교회는 불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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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정의와 사랑의 실천을 소홀히 하는구나!>
오늘 복음[루카 11:42-46]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해 십일조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십일조가 어떠한 것인지,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 소출의 1/10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일생을 봉사하는 레위인들에게 바쳤고, 레위인들은 그것을 받아 그중의 1/10을 제사장에게 바쳤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렇게 십일조를 바치는 행위가 잘못 되어서 그들을 책하시는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십일조를 바치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시고 있다.
그러면 어디에 탓이 있어서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이다!" 라고 까지 책망하시는 것인가? 그들이 십일조를 바치고 율법의 모든 규정을 잘 지킨다고 해서 그들은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스스로 만족하여 그렇게 하고 있는 자기 자신들을 스스로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우월감에 사로잡혀 그렇게 못하는 다른이를 업신여기기 때문에 책망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비해 볼 때 어떠한가? 그들은 그래도 자기 소출의 자기 수입의 1/10을 바치면서 우쭐댓다고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께 얼마나 바치고 있으면서 그러면서도 하느님 앞에, 사람들 앞에 자신이 무엇인양 내세우지는 않는지?
예수님은 말씀 하신다. "10분의 1을 바치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되지만,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위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신다. 하느님은 사람이 하느님 자리에다 자기 자신을 앉혀놓고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것을 그토록 싫어하시며 경고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의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과연 나는 나의 수입의 얼마를 하느님을 위해서 쓰며, 또한 나와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나와 만나는 사람들에게, 특히 나의 말을 듣고 살아야만 하는 수가 사람들에게 진정 어떠한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지 우리 모두가 다시 한 번 오늘 복음앞에 반성해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구원과 후세 천국을 위해서 하느님을 알고 섬긴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의례히 해야되고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예수님의 가르치심대로 우리가 실천하지 않을 때 예수님은 "너는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 고 엄책하시는 책망을 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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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작정하고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이른바 독설을 뿜어내십니다. “불행하여라!”라고 선언하시고, 그 이유를 그들이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며,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구체적으로 지적하십니다.
오죽하면 속이 불편한 율법 교사 한 사람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라는 항변을 했을까요? 치부를 들추어내고, 상대방을 면전에서 모욕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분노를 자아냅니다. 사람들 앞에서 벌거숭이가 되어 버린 당혹감을 느껴 본 사람이라면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분노와 앙심을 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상대방의 ‘리듬’을 잘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잘못을 비난하고 훈계하기보다는 상대방의 감정의 리듬에 따라 먼저 장단을 맞춰 주고 공감해 주면, 사람들은 현실에 대한 왜곡된 자아를 쉽게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완고해진 이들,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힌 이들에게는 가끔 돌직구를 날리는 충격 요법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개인의 이익보다 공공선을 위해 일해야 하는 이들, 사람들에게 도덕적 표양과 지도자로서의 표양을 보여야 하는 이들에게 더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바리사이나 율법 교사들에게 개인적인 감정의 분노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의로운 분노[義憤], 또는 공공의 분노[公憤]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상식과 기본이 무너진 우리 사회에 그리스도인이 보여 줄 것은, 개인적인 분노나 원한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공익을 해치는 악에 함께 대항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덕은 하느님 앞에서 순종하는 것이지, 불의에 순종하고 이기적 자기애에 빠지는 것이 아님을 명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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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교만으로 일어나는 죄악들>
코로나 시대를 맞이해 우리 성당의 신자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유튜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번거로운 일이지만 자모분들이 궁금해 할 법한 질문, 평소에 당연한 듯 지나친 교리에 대한 설명을 해 드리고 태교모임과 예비자 교리도 이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그저 사명감만으로 영상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커다란 부담을 느낍니다. 양질의 영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도 아니고 영상을 준비하고 촬영하는데 필요한 시간적 부담도 아닙니다.
이 부담은 오롯이, 얼굴을 드러내고 교리를 가르치는데 과연 나는 얼마나 그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아무리 애쓴다고 해도 저 역시 인간이기에 완벽할 수도 없고, 여러모로 부족합니다. 그러다 보니 공연히 얼굴을 드러내고 하는 일에 있어 혹시라도 저도 모르게 부끄러운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제가 하는 모든 일에 이러한 반성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미사 때의 강론, 교리 교육, 나아가 대학에서의 수업까지 모두가 그렇습니다. 과연 나는 얼마나 윤리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과연 나는 얼마나 원수를 사랑하고 있는가 등등 고민해야 할 것이 한 둘이 아닙니다.
부족하게나마 유튜브를 빌미로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온라인 활동을 잘 시작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이러한 계기가 아니었다면 나 자신을 합리화 하면서 보다 교만한 사제 생활을 했으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을 향한 신앙 안에서, 자기의 소출과 수입의 십분의 일을 꾸준히 바쳤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신앙은 의심할 여지없이 매우 강했고 지식도 많았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제자들에 비하면 신앙의 출발선은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교만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하느님께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드러내고 자랑하는데 급급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랑의 실천에는 무디고 남들보다 자신들이 더욱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 교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사회적 지위가 높다는 이유로 항상 거만했으며 다른 이들에게 일을 종용할 뿐 모범을 보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러한 비난을 예수님으로부터 받게 된 이유는, 스스로의 삶에 반성이 없었고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만은 결국 위선으로 이어져 속은 썩어 들어가지만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는, 땅에 숨겨진 무덤과 같은 모습으로 사람을 바꿔 놓았던 것입니다. 반면, 이들과 대척점에는 예수님을 따르던 죄인들과 병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 지위도 낮고 지식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즉,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만큼의 노력을 더 하는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오늘 복음을 관통하는 주제는 “교만과 위선”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조금은 두려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나 스스로 커다란 문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스스로가 교만해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있고 스스로를 정당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정작 내가 저지른 문제들 혹은 죄악들조차 정당한 것이라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는, 우리가 교만을 통해 저지르게 되는 죄악을 제시합니다. 저는 이중에서, 당시 문화 안에서 유행했던 특정한 죄악들을 떼어내고, 만취, 불륜과 같은 특정한 사람들의 사회적 부정 행위를 배제한 나머지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그 죄악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놀랍게도 이 죄악들은 말만 다를 뿐 결국 공통적인 행위를 전제합니다. 이는 곧 “분열” 이라는 한 단어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이 모두는 교만을 통해 우리 모두가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죄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봅시다. 평소 타인에게 <적개심>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타인을 대하는 데에 있어서 쉽게 <격분>하지는 않습니까? 타인은 <시기>, <질투>함으로써 <분쟁>을 조장하거나 <분파>를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나친 <이기심>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렇게 강론을 적다보니 또 다시 마음 한편이 찔려옵니다. 저 또한 이러한 죄악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오늘의 복음과 독서를 기억하며 죄악을 저지르지 말고, <사랑>, <기쁨>, <평화>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을 스스로 다짐해 봅니다. 이 강론을 듣는 분들 역시 저와 함께 이러한 성령의 열매 맺기에 동참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오늘 독서의 사도 바오로 역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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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방송에서는 코로나 19로 인한 마이너스 성장에 대한 염려를 쏟아냅니다. 그런데 마이너스 성장이 무조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나라도 이 마이너스 성장을 막기 위해, 바이러스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에도 봉쇄조치를 풀고 사람들이 예전과 같은 활동을 해야한다고 권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민의 아픔이 커지는 성장이라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경제의 목표는 온 국민이 편안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장 자체를 목표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이 마치 성장 자체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목표인 것처럼 여기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순간의 만족만을 바라보고 있기에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을 바라보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주는 순간의 만족만을 먼저 생각하기에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늘 뒤로 미루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순간의 만족을 주시지 않음은 분명합니다. 즉, 순간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지금은 세상의 것이 더 크고 중요해 보이지만, 주님을 따름으로 인해 계속된 행복의 시간 안에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불행하여라”라고 하시면서 바리사이들을 향해 메시지를 전해주십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내고 회당 앞자리에 앉으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합니다. 이들은 겉으로 보이는 부분만을 신경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참된 의로움과 사랑을 보여 주는 일이나 하느님의 사랑은 소홀히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드러나지 않는 무덤’에 비유하십니다. 민수기 19,16을 보면, 무덤에 닿으면 칠 일간 부정해지기 때문에 회칠하여 표시하도록 명했습니다.
즉, 사람들이 부정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회칠하지 않거나, 땅속에 묻혀 있어서 무덤인지를 몰랐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해질 수 있습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이러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뜻만을 내세우면서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표시하지 않은 드러나지 않는 무덤처럼, 자신의 부패를 은폐시키고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자기 뜻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가장 중요한, 주님의 뜻을 놓치지 않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그래야 다른 이도 올바르게 이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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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을 즐기세요.>
한 20년 전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교육을 받았는데, 다음 날 일정이 의정부에 있는 어느 산 중턱에 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정상에 모이는 것이 아니어서 다행이기는 했지만, 인천에서 의정부까지 가는 시간에 대한 부담이 너무 컸습니다(당시는 운전하지 않을 때라서 전철을 타고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본당에 급한 일이 생겨서 일 처리를 한 뒤에 전철을 타고 의정부로 향했습니다. 늦지 않을까 싶었는데, 예상대로 늦고 말았습니다. 당시에는 휴대전화가 흔하지도 않을 때라서 연락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래서 늦어도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약속 시각보다 1시간 늦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시 내려오는데, 산행이 너무나 싫은 것입니다. 짜증도 나고 화도 납니다.
바로 그 순간 다른 등산객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어두운 표정으로 산을 오르지 않았습니다. 모두 즐거워 보였습니다. 똑같이 산행하는데, 저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을 즐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마음으로 즐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하지요. 그런데 지금을 즐기고 계십니까? 이런 명언이 생각납니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희생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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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한 삶>
-성령의 인도에 따른 삶-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어제도 집무실에 면담고백성사차 들렸던 여러분들에게 ‘십자가의 예수님’ 밑에서 예수님과 함께 사진을 찍어 드린 후 사진과 함께 ‘사진처럼 웃으며 행복하게 사세요! 사랑하는 형제님’ 메시지도 전송해 드리니 저절로 행복한 기분이었습니다.
누구나 원하는 바 행복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행복은 선택이자 발견입니다. 오늘 복음 묵상중 어제 3시경 기도 때 읽은 잠언 독서가 생각났습니다.
“행복하여라, 지혜를 찾는 사람! 행복하여라, 슬기를 얻은 사람! 지혜의 소득은 은보다 낫고 그 소출은 순금보다 낫다. 지혜는 산호보다 값진 것, 네 모든 귀중품도 그것에 비길 수 없다.”(잠언3,13-15)
오늘 화답송 후렴 시편 첫 마디도 ‘행복하여라!’로 시작됩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시편1,1-2)
행복의 비결이 환히 드러납니다. 지혜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삶입니다. 지혜와 저절로 함께 가는 사랑과 겸손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이는 사랑하는 이요 겸손한 이요 말씀을 사랑하여 밤낮으로 그 지혜로운 말씀을 되새기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의 불행선언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무려 ‘불행하여라!’는 말마디가 연속 4회 나옵니다. 일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 대한 주님의 불행선언입니다. 이 또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 교회 지도자는 물론 신자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무지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자초한 불행임을 깨닫습니다.
보십시오. 무지로 인한 분별력의 상실로 십일조를 꼬박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소홀히 합니다. 회당에서 윗자리를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니 이런 허영 또한 무지의 소산입니다. 위선과 부정을 은폐한 드러나지 않은 무덤과 같아 그 위를 밟고 다니는 이를 오염시키니 이 역시 무지의 소산입니다. 이런 바리사이와 더불어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자신은 손가락 하나 대려 하지 않는 이기적인 율법교사 또한 무지의 사람입니다. 이들 모두에 결핍되어 있는 지혜와 사랑, 겸손입니다.
오늘 갈라타아서의 육의 행실 또한 무지의 산물입니다. 얼마나 뿌리 깊은 무지의 어둡고 어둔 인간 현실인지 오늘날 우리는 안팎에서 무수히 목격하지 않습니까? 1.불륜, 2.더러움, 3.방탕, 4.우상 숭배, 5.마술, 6.적개심, 7.분쟁, 8.시기, 9.격분, 10.이기심, 11.분열, 12.분파, 13.질투, 14.만취, 15.흥청대는 술판등, 이런 짓을 저지르는 자는 결코 하늘 나라를 차지 하지 못합니다. 과연 이런 무지의 현실에서 자유로운 자 몇이나 될런지요? 이렇게 살 때 사람은 괴물도 되고 악마도 되고 폐인도 되는 것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성령뿐입니다. 성령은 사랑이자 지혜요 진리입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갈 때 성령의 열매입니다. 육의 악한 행실은 순전히 우리 무지의 탓이자 소행이지만 성령의 열매는 우리 힘으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따라 살 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1.사랑, 2.기쁨, 3.평화, 4.인내, 5.호의, 6.선의, 7.성실, 8.온유, 9.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얼마나 고무적인 성령의 열매들인지요! 참으로 탐나는 이런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지닌 ‘성령의 사람’이 무지로부터 해방된 지혜롭고 자유롭고 행복한 참사람이요 우리의 평생과제이자 목표입니다. 그러니 무지에 대한 결정적 답은 성령의 인도에 따른 행복한 삶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평생 간절히 항구히 추구해야 할 것은 성령의 인도에 따른 삶뿐이겠습니다. 이런 성령의 인도따라 살고 싶은 간절한 청정욕淸淨慾은 얼마든 좋으며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령의 인도에 따라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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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꾸중을 감당하라>
다행이란 목마른 이가 사막에서 우물을 발견한 것이고, 불행이란 너무 좋아 덤벙대다 그 우물에 빠져 죽는 것이랍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는 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꾸중을 통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다행입니다. 아니 그 꾸중은 행복입니다. 그러나 듣지 않는 이에게는 불행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끼는 아들을 꾸짖듯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꾸짖으신다.”(잠언3,12)
“내 아들아, 너는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히브12,5)
오늘 복음의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루가11,42),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루가11,46)는 주님의 꾸중은 그들의 회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트집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행하는 일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높은 자리를 찾고 인사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남에게는 이러저러한 것을 요구하면서도 자기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행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으니 더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들은 의인처럼 보인 죄인이었습니다. 오히려 죄인처럼 보인 의인이 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2,6) 그런데 정작 저 자신이 율법학자요, 바리사이인 것을 잊고 삽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 하신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바리사이들도 율법학자도 예수님의 꾸중을 들을 수 있었으니 그의 사랑 안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거부하는 것은 주님도 어찌하지 못하셨습니다. 따라서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면 그것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육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무슨 견책이든지 그 당장에는 즐겁기보다는 오히려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책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은 마침내 평화의 열매를 맺어 올바르게 살아가게 됩니다.)(히브12,11) 회개에로 이끌기 위한 예수님의 표현을 잘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꾸짖거든 행복한 줄 아십시오.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제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잠언12,15).
꾸중을 듣는다는 것은 밝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꾸중을 두려워 마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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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에서 매우 중요하면서도 놓치기 쉬운 의무를 알려 주십니다.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루카 11,42)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이 율법에 준하여 기꺼이 지키는 십일조 의무와 대비해 이를 제시하십니다. "의로움"은 다양한 의미를 포함하지만, 무엇보다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또 이웃 간에 분배 정의를 실천함으로써 구현되는 덕목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사랑"은 긴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본질이지요. 사실 우리의 원천이고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의무가 아니라 권리라고 하는 편이 맞을 듯합니다.
그런데 각자의 가치관과 중요도에 따라서 마음을 주는 것보다 물질로 때우는 것이 더 편한 대상이 있기는 합니다. 사랑이 의무가 되어 버릴 때 일어나는 슬픈 현상이지요.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매너리즘에 빠지면 쉬이 그렇게 변질됩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그런 태도를 지적하시는 겁니다.
사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이미 충만하시기에 무엇도 더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의례와 예물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시하신 건 당신과의 사랑의 관계를 기억하고 마음에 간직하라는 뜻이지요. 의례와 예물은 하느님께 대해 인간이 가지는 사랑과 정성의 아주 작은 표현일 뿐입니다.
그러니 십일조는 공동체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의무일 뿐,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뜨거운 사랑을 전부 다 담아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십일조로는 다 담지 못하는 우리의 열렬한 사랑을 하느님 향한 믿음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표현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다시금 이렇게 정리해 주십니다.
"윗자리, 인사받기"(루카 11,43)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숨은 욕망을 지적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받으셔야 할 사랑과 경외를 제도와 신분에 기대어 가로채고 제 영광으로 누리며 즐기는 모습이지요. 바리사이들이 행복 또는 성공이라 여기는 것들을 예수님께서 불행하다고 선언하십니다. 잠시의 우쭐함과 만족, 쾌락은 있을지언정 하느님과 관계에도 본인 영혼에도 독이 되는 올가미에 불과하니까요. 지위나 재물, 명예나 찬사는 하느님과 우리를 잇는 탯줄에 아무 영양도 공급하지 못합니다. 실상 자기 영광의 끝은 하느님을 잃어버리는 안타까운 결과로 이어질 뿐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율법과 성령을 대비시킵니다.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갈라 5,18)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사는 사람은 율법을 무시하거나 어기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 없이도 사랑을 살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과 일치해 사는 이에게는 사랑이 법이고 지침이며 원동력이 되니까요. 사랑의 실천은 율법의 의무 이행을 넘어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이는 예수님과 함께 율법을 완성하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
그저 읽고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아름다운 단어들을 만납니다. 이 덕목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획득하는 외부적 보상이 아니라, 성령께 마음을 다해 순종하고 따를 때 존재 안에서 솟아나는 영적 결실들입니다. 잔칫집 윗자리나 사람들에게 인사받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행복이지요.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갈라 5,25)
사도는 우리의 정체성을 콕 짚어 이야기합니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이를 움직이는 동력은 외부에 있지 않지요. 우리가 받은 성령만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갑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사랑에 온 존재를 내어맡긴 채 나아가는 이는 율법에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의 사랑이 의무로 냉각되지 않도록 늘 성령을 청합시다. 성령께서 우리 영혼에 사랑의 불을 놓으시어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지치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비록 윗자리나 인사받기가 우리 몫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뜨겁게 뜨겁게 주님 곁에 머무를 수 있으니 족합니다. 성령으로 사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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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나를 바꾸는 심리학의 더 지혜로운 사람의 10가지 프레임- 1.
목사이자 신학자인 찰스 스윈돌은 삶에 있어서 객관적 사실은 인생을 통틀어 겨우 10%에 불과하고, 나머지 90%는 그 일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정신과의사 빅터 프랭클은“한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는 있지만, 한 가지 자유는 빼앗아 갈 수 없다. 바로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삶에 대한 태도만큼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프레임이란 심리학과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세상을 보는 틀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프레임은 한 마디로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이다.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 세상을 향한 마인드 셋, 세상에 대한 은유,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 등이 모두 프레임의 범주에 포함되는 말이다. 프레임을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
-최인철, 나를 바꾸는 심리학 지혜- 「프레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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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어제 <복음>에서 정결법의 정신이 사랑에 있음을 밝혀주셨습니다. 이어서 여섯 가지의 예를 들어가면서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에게 ‘불행선언’을 통하여 신랄하게 질타하십니다. 그러나 이 질책은 저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회개에로 부르는 더 강력한 요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중에서 바리사이들에 대한 세 가지와 율법 교사들에 대한 한 가지를 들려줍니다.
<첫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십일조는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2)
이는 십일조의 율법준수를 부정하거나 율법준수를 질책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결여된 율법준수를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레위기(27,30-33)와 신명기(14,22-29)에 따르면, 주요 곡식과 가축의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이를 더 세분화하여 뗄 나무에까지 십일조를 적용할 만큼 율법준수에는 규정 이상으로 열성적이고 철저하고 엄격했지만, 율법의 정신인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을 행하는 일을 실천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그릇된 열성은 오히려 위험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본질 위에 서 있는 열성이어야 합니다. 곧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보다 그 정신인 의로움과 사랑을 행하는 일입니다.
<두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루카 11,43)
사람들이 그들에게 윗자리를 내어주고 먼저 인사하는 것은 존경의 표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맡은 바 종교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특권적 우월의식과 교만한 과시욕에 몰두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의 특권의식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사실, 존경받기보다 존경하고, 인사받기보다 인사하고, 섬기받기보다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윗자리가 아니라, 그 자리에 합당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드러나지 않은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으면서 무덤인 줄을 모른다.”(루카 11,44)
민수기(19,16)에 따르면, 무덤에 닿으면 칠 일간 부정하기에 때문에 회칠하여 표시함으로써 사람들이 불결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표시하지 않은 드러나지 않는 무덤처럼, 자신의 부패를 은폐시키고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위선’은 우리에게도 큰 경각심을 줍니다. 사실, 악보다 더 추악한 것은 마치 선인 양 자신의 얼굴을 꾸미고 사람들을 속이는 거짓된 선입니다.
<네 번째> 불행 선언은 율법 교사들에 대한 것입니다.
“너희 율법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루가 11,46)
율법 교사들의 언행의 불일치에 대한 질타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면서도 자신들은 율법을 실행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는 짐을 지웠던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보다도 조상들의 전통과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존중했고, 더구나 그것을 지나치게 세분화하여 모세의 율법 외에도 613개의 규범을 지키게 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백성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짐을 지워놓으면서도 자신들은 스스로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마태 23,3).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들은 그 당시의 종교적 길잡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자신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받은 많은 사람들까지도 파멸로 인도한다는 경각심을 일깨워줍니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 참된 신앙인이요, 신앙의 참된 길잡이로 살아가라는 강력한 요청입니다. 아멘.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주님의 의로움과 사랑을 행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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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2)
주님!
제가 행복하지 못한 것은
당신을 믿으면서도 의로움과 사랑을 행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불의와 부패 속에서는 행복이 있을 수 없고,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는 행복이 있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뜻을 행함으로 진정한 행복을 얻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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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과 너희 율법 교사들아!"
<성령을 따라갑시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서 예수님께서 바라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질책하시는 말씀입니다.
위선과 교만으로 가득 차 있는 그들을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따라가지 않고 율법을 따라갔으며, 육의 행실 안에 갇혀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안에 위선과 교만이 가득했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갈라티아 교회와 지금의 교회와 우리에게 강하게 경고하면서 권고합니다.
"육의 행실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미 경고한 그대로 이제 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갈라5,19-25)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육의 행실을 따라가지 말고, 성령을 따라갑시다!
그래서 불행한 또 하나의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이 되지 말고, 행복한 그리스도인들이 됩시다!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자꾸만 뒤로 미루지 말고 지금 행복할 수 있도록, 오늘 우리에게 들려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깊이 새기면서 살아가는 깨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됩시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복음환호송)
성령을 따라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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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9QeqmRMWQH0&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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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루카 11, 44)
가을 햇살은
꽃을 피우고
무덤을 환히
비춘다.
교만은
모든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다.
교만의 끝에는
언제나
무덤이 있다.
무덤과 같은
교만의 삶이다.
다시
겸손에서
길을 찾는다.
높은 자리
높은 사람이
아니라
작아지고
낮아지는 삶이다.
낮아지는 것이
행복이다.
모든 불행의
시작은
하느님보다
높아지는 데 있다.
우리의 삶이란
무덤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하는
우리들 인생이다.
낮아지시는
하느님이시다.
행복은 무덤에
있지 않다.
행복은
작아지는
생활에 있다.
무덤같은
우리의 일상을
깨우신다.
그분은 바로
낮아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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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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