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연의 본래 성은 조(趙)씨이며 영천(穎川) 사람이다. 위(魏)나라 사공(司空) 조엄(趙儼)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였다. 구족계를 받은 후에는 오로지 불교 교리만을 공부하였다.
처음 서주(徐州)에서 노닐다가 백탑사(白塔寺)에 머물렀다. 승숭(僧崇)으로부터 『성실론』과 아비담을 전수받았다. 배운 지 3년이 안되었으나, 그 공업은 10년 배운 사람을 뛰어넘어 슬기로운 이해력의 명성이 멀고 가까운 지방에 치달렸다.
승연은 고상한 자태가 크고 우람하여 허리띠가 열 아름이나 되었다. 정신과 기개가 맑고 넉넉하며, 자유자재하여 속된 기가 없이 깨끗하였다.
은둔하는 선비 유인지(劉因之)가 머물던 산을 희사하여 승연에게 주어 정사로 삼았다.
∙혜기(慧記)ㆍ도등(道登)
담도(曇度)ㆍ혜기ㆍ도등도 모두 승연으로부터 수업 받았다. 혜기는 논리를 따지는 데 뛰어나고, 도등은 『열반경』과 『법화경』에 빼어났다. 모두 위왕(魏王)ㆍ원굉(元宏)의 존중을 받으면서 위나라에 명성을 날렸다.
승연은 위조(僞朝)의 태화(太和) 5년(481)에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68세이다. 이때는 바로 제(齊)나라의 건원(建元) 3년(481)이다.
2) 석담도(釋曇度)
담도의 본래 성은 채(蔡)씨이며, 강릉(江陵)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경건하여 행동거지를 삼가고, 평소 계율의 모범으로 칭송을 받았다. 마음이 민첩하고 슬기로워 꿰뚫어 보는 안목이 보통 사람을 넘었다.
그 후 서울에 유학하여 두루 많은 경전을 꿰뚫었다. 『열반경』ㆍ『법화경』ㆍ『대품경』ㆍ『유마경』에 대하여 모두 미세하게 숨어있는 뜻을 탐색하였다. 그리하여 생각이 말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일어났다.
이어 각기병 때문에 서쪽으로 노닐다가, 마침내 서주(徐州)에 이르러 승연(僧淵) 법사로부터 다시 『성실론』을 전수 받았다. 끝내 이 논에 정통한 당시의 독보적 존재가 되었다.
위(魏)의 임금인 원굉(元宏)이 그의 도풍을 듣고, 멀리서 머리 숙여 사신을 보내 모시기를 청하였다. 평성(平城)에 이르자마자 크게 강석을 열었다. 원굉이 공경을 표하여 아랫자리에 앉아 몸소 진리의 맛을 관장하였다.
이에 위나라의 서울에 머물며 불법 교화를 이어나갔다. 배우는 무리들이 먼 곳에서 찾아와 1천여 명이나 되었다.
위위(僞魏) 태화(太和) 13년(489)에 위나라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해는 곧 제(齊)의 영명(永明) 7년(489)이다. 『성실론대의소(大義疏)』 8권을 지었는데 북쪽 나라에서 성대히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