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현대화를 위한 심리적 문화적 접근 - 불교상담심리를 중심으로 서광 스님_동국대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들어가는 말
불교 현대화의 의미와 당위성
‘현대화’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는“현대에 적합하게 되거나 되게 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불교의 현대화라는 의미는 불교를 현대에 적합하게 되거나 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현대인의 필요와 요구에 맞게, 그들을 위해서, 그들에게 유익하도록 맞추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불교가 현대화되어야 하는지 그 당위성은 어디에 있는가? 불교는 중생을 위해서 존재하므로 중생이 요긴하게 사용할 때, 비로소 그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 그러므로 중생이 외면하는 불법은 진정한 불법이 아니며, 중생을 떠나서 불법이 따로 설 곳은 없다. 불교가 현대인의 필요와 취향, 눈높이에 맞추어서 변화하고 거듭나야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대승적 관점에서 보면, 불교의 현대화는 그 자체가 높은 수행이고 깨달음을 완성하는 과정이다. 왜냐하면 불교가 현대인의 요구와 필요에 맞게 변화한다는 것은 바로 방편 바라밀을 실현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방편 바라밀은 보살이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방편을 사용하고 불법을 가르치는 능력으로써 6바라밀에 이어 일곱 번째 단계에서 완성된다. 즉 6바라밀을 닦은 보살이 대자비의 눈으로 중생의 아픔을 보면서 그들이 깨달음을 얻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적절한 방편을 사용해 불법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때 보살이 사용하는 방편은 지혜의 작용으로 드러나는 자비인 것이다.
한편 우리 불자들이 성불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무상에 대한 깨달음이다. 무상(無常), 항상하지 않다. 즉 조건 지어진 모든 인연은 변화한다. 그러므로 이전의 경험에 집착하지 말고 순간순간 일어나는 새로운 경험에 개방적으로 대처하고 수용하라는 무상의 가르침은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핵심 중의 핵심이다. 반야의 지혜도 결국은 이 무상을 깨달은 결과로써 얻는 지혜이고 무아(無我)나 공(空)도 알고 보면 무상하기 때문에 무아인 것이고 공한 것이다.
수행은 순간순간 일어나는 개인 내면의 식(識)의 생멸 현상을 알아차리고 자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집단의 식(識), 나아가서는 글로벌 의식을 드러내는 우리 사회와 지구촌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의 생멸 현상을 알아차리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갈수록 개인의식과 집단의식의 상호 의존성이 커지고 그 속에는 진정한 연기(緣起)의 도리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연기는 바로 이들 개인의 식(識)과 집단의 식(識), 글로벌, 우주의 현상이 서로 뒤섞여 일어나는 상호작용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불법은 오로지 중생을 위한 것이고, 중생을 통해서만이 드러나고 꽃을 피우고 열매 맺을 수 있다. 그러므로 중생이 변하면 불교도 바뀌어야 한다. 중생의 변화에 따라 불교도 함께 바뀌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의 현대화라고 할 수 있다.
1. 스승에서 프렌드십으로 불교가 우리 사회의 지도적 위치를 상실한 지는 오래되었다. 왜인가? 중생의 변화에 둔감하고 중생의 필요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중생이 변하면 불교도 변해야 한다. 중생이 가는 곳에 불교도 가야 한다. 물론 따라가는 것보다는 변화를 예측하고 앞서갈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그것이 동사섭이 아니겠는가.
불교가 중생과 함께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불교가 과거 스승, 교육자의 자리에서 친구의 자리로 내려오라는 의미다. 지배적이고 권위적인 자세에서 편안하고 개방적인 태도로 바뀌라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배울 줄도 알아야 하고, 말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기도 하라는 것이다. 위로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 중생과 화합한다는 말도 지금 시대에 맞게 표현을 바꾸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왜 프렌드십이어야 되는가? 프렌드십은 교육자와 피교육자,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남자와 여자 등 가부장적인 문화의 산물인 지배적이고 종속적인 이원적 구조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프렌드십은 수직적 구조가 아닌 수평적 구조로써 보다 평화적이고 평등한 인간관계 속에서 자기 개방과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절대 진리인 법신(法身)은 원래 물처럼 허공처럼 걸림 없이 인연 따라 그 모양을 나투는 것인데 어떤 그릇에 담기든 그 모양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생이 알아듣기 쉽고, 중생이 좋아하는 모양으로 나투면 된다. 혹여 불법을 전하는 법사로서의 권위가 상실될까 염려할 필요는 없다. 과거와 달리 현대인은 자기가 먼저 존중받고 인정받고 지지받는다고 느낄 때 다가오고 관심을 보인다.
대승불교에서 보살이 깨달음을 얻고 성불하기 위해서 거치는 52단계의 수행에서 45번째 단계이고, 보살의 10가지 지위로는 다섯 번째 지위에 해당하는 보살이 난승지(難勝地, 정복하기 어려운 단계) 보살이다. 『화엄경』에 보면 난승지 보살은 중생이 원하면 무엇이든지 한다고 나온다. 중생이 원하면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금도 캐고, 약초도 캐고…. 이게 무슨 뜻이겠는가? 중생을 거치지 않고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난승지 보살의 지위는 사성제와 두 가지 진리, 즉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또는 현상적 진리)를 깨닫는 단계다. 중생을 거치지 않고 어떻게 중생의 고통의 실체를 알 것이며 현상적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현상적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성불하는 길은 없다. 불교가 민중불교, 대중불교가 되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대중이 불교를 원하는 것보다 불교가 더 적극적으로 대중을 원해야 한다. 아무튼 대중이 불교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불교가 대중에게 다가가야 한다. 이제 과거처럼 수행이 출가 수행자만의 전유물인 시대는 지났다. 재가불자들 가운데서도 출가 수행자를 능가하는 정진력으로 덕행과 지혜를 갖춘 이들이 많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 법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도반처럼 친구처럼 서로 돕고 격려하는 불교, 전법을 할 때는 친구 같은 스승으로, 부처님의 일을 할 때는 파트너십으로 거듭나는 불교가 필요하다고 본다.
2. 개인의식에서 글로벌의식으로 불교 수행에 대해서 아마도 가장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마음 수행을 자기 내면세계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이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세상에서, 산중에서 수행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와 같은 오해는 불교가 중생의 삶을 외면하고 중생과 멀어짐으로써 사회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초래하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마음에 주의를 집중한다는 의미가 외부의 현상 세계를 무시하고 차단한 상태의 마음이 아니라 외부 현상 세계에 부딪쳐서 일어나고, 반응하는 내면의 마음을 살핀다는 뜻이다.
물론 현실 세계를 완전히 벗어나서 자신의 내면세계에 집중할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서 너무 오랫동안 자신의 내면은 보지 않고 세상일에만 끄달리거나 집착했다면 한동안 일상을 벗어나서 자신의 내면세계에 집중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 현실 속에서 수행하는 것이 너무나 벅차서 수행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정상적인 심리 상태를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약할 때는 일시적으로 현실을 벗어나서 수행의 근기를 좀 더 튼튼하게 쌓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때 불교 수행은 개인의 내적인 마음 구조는 아주 세밀하게 잘 설명하고 있지만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관계의 역동이나 발달에 대해서는 가르치는 것이 없다고 오해하는 서양의 심리치료자들이 있었다. 그만큼 불교가 인간관계와 소통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은둔적이고 개인 내적 수행에 치중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그런 불교를 좋아하고 매력 있어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글로벌 시대다. 글로벌 시대에는 글로벌의식, 글로벌 태도를 가진 글로벌 시민을 원한다. 개인의식을 아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글로벌의식, 글로벌 현상의 변화에도 민감해야 한다.
미국의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과학자들이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본질적 실제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불교와 과학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주력하기 위해서 다람살라에 마음생명연구소(Mind & Life Institute)를 설립하고 1987년 불교와 인지과학 간의 대화로 출발했다. 이들은 불교와 신경과학, 불교와 뇌과학, 정서와 건강, 환경문제 등 현대인에게 필요한 다양한 주제로 워크숍, 세미나를 열었다. 2009년 10월에는 미국 워싱턴에서 21세기의 월드 시민, 즉 글로벌 시민의 교육을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왜냐하면 지금의 세상은 개인의 업(業)도 중요하지만 전쟁, 경제, 교육, 정치 등 집단의 업 또한 개인의 행복과 불행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업이나 마음, 행동을 조절하고 관리하는 것만으로는 행복을 보장받을 수 없는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는 개인의 마음 수행만이 아니라 그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 국가, 세계의 변화와 흐름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대처하는 사회참여 불교로 나아가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인간 간의 문제를 넘어서 인간과 자연환경, 생태계와의 관계에도 불교적 가치관과 가르침의 적용이 시급한 상황이라는 사실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환경오염, 기후문제를 통해서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3. 과거 시점에서 현재 시점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경·율·론 삼장은 기본적으로 2,500여 년 전 부처님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문화와 언어는 물론이고 모든 것이 지금 우리들의 시대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경전을 교학적, 문헌학적으로 연구하고 규명하고자 하는 불교학자가 아니라면 굳이 특정한 시대에 한정된 가치나 문화, 철학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 전통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지켜야 할 전통과 지키지 말아야 할 전통을 구분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담고 있는 그릇에 해당하는 언어나 문화 등을 구분하자는 것이다. 이를테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인과, 연기, 인연, 무상, 무아 등이라면 그런 가르침을 담고 있는 그릇은 계율, 의식, 수행법 등이다. 연기, 무아, 무상 등의 가르침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변화할 수 없는 진리 그 자체지만 계율이나 의식, 수행법 등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바뀌어야 하고 또 그 대상에 따라서 변화할 수 있어야 한다.
경·율·론 삼장은 언어라는 그릇에 담겨 있고 그 언어는 그 시대의 문화, 가치관 등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경·율·론 삼장을 공부할 때는 과거의 시점을 현재의 시점으로 변환해서 봐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가르침을 찾아야 한다. 그릇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부처님의 핵심 메시지를 발견해야 한다.
경전을 과거의 시점이 아닌 현재의 시점으로 보는 구체적 방법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과거의 언어를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로 전환해서 이해한다는 뜻이다.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사건으로 전환하라는 것이다.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서 경전의 세계, 즉 과거의 세계에 매몰되어 과거의 말과 생각,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과거 속에 들어가서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을 찾아내어 수행자, 법사, 포교사, 불교학자로 부르는 어댑터를 통해서 현재의 언어, 현재의 생각, 현재의 행동으로 전환하라는 뜻이다. 부처님의 뜻을 올바르고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과거로 돌아가서 연구(교학적, 문헌학적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럴 필요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마음공부는 어디까지나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도록 철저히 현재의 언어, 문화, 정서에 맞게 살아 있는 언어로 소통해야 한다. 예를 들면 계율에 출가 경력이 100년 된 비구니(여성 수행자)라 할지라도 출가 경력이 1년 된 비구(남성 수행자)에게 절을 해야 한다는 항목이 있다. 만일 누군가 자아 정체성이 약하고 무의식적 열등감과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거나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이라면 부처님의 그 수많은 가르침과 방편은 보이지도 않고 순식간에 이 항목에 집착할 것이다(소위 필이 확 꽂힐 것이다). 그리고는 왜 출가했는지, 왜 수행해야 하는지조차 잊어버리고 불교를 온통 비구와 비구니, 나아가서는 출가와 재가라는 이원적 구조로 분할해서 프렌드십, 파트너십의 수평적 관계, 소통하는 관계가 아니라 상하의 수직적 관계, 단절되고 경직된 관계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이는 불교의 현대화에 역행하는 것이고 연기와 무아, 공의 가르침을 역행하는 것이다.
필자가 미국에 건너간 지 몇 년 되지 않았을 때, 보스턴의 한 불교 여성 모임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그들이 나에게 묻기를, 바로 위에서 예를 든 비구니가 비구에게 절을 해야 된다는 계율을 한국 스님들은 실제로 그렇게 하는지, 또 그것에 대한 나의 개인적 견해는 어떤지 궁금해했다. 남녀차별뿐만 아니라 인종차별, 종교차별, 빈부차별 등 차별을 반대하는 그들의 입장에서 과연 그런 계율 조항을 지금에 와서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면 한국 불교를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굳이 미국이나 여성 불교 단체가 아니더라도 정상적으로 사고하는 현대인이라면 어떻게 반응할지 자명한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방편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과거의 시점에서 과거의 공간에서 과거의 사람에게 적용된 방편은 반드시 현재의 언어로, 가치로, 문화로 변환시킴으로써, 현재의 우리들이 가슴으로 진실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타당한 진리로 거듭나야 한다. 4. 경전을 심리치유적 관점으로 이해 불교는 항상 철학이 필요한 곳에서는 철학의 모습으로, 문화 예술이 필요한 곳에서는 문화 예술의 모습으로, 과학이 필요한 곳에서는 과학의 모습으로 나투면서 중생의 이익을 도모해왔다. 그 말은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서 경전은 철학적 관점에서, 문학 예술적 관점에서, 과학적 관점에서 이해되고 해석되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생존 경쟁에 시달리면서 정신적 평화, 심리적 치유가 필요한 때다. 그러므로 경전을 심리치유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난승지 보살의 예처럼 대승보살은 중생이 원하는 곳에 중생이 필요로 하는 모습으로 나투어야 한다. 미국에서도 해를 거듭할수록 성장하고 있는 불교는 심리치료와 영적 성장을 위한 방편으로 쓰이고 있다.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의 고통을 치료하고 완화하고자 하는 것이 궁극의 목적이었다. 그래서 부처님을 대의왕(大醫王)이라고 부른 것이다. 깨달음도 알고 보면 고통에서의 해방, 완전한 마음치료를 위한 것이지 깨달음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더구나 대부분의 현대인은 깨달음에 대한 욕구도 없을뿐더러 왜 깨달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부처가 되고자 하는 욕망은 더더욱 없다. 그러나 그들이 현재 당면하고 있는 현실적 문제들, 교육, 경제, 문화, 예술 등 사회 전반의 이슈들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다. 불교는 현대인이 관심 있어 하고 알고 싶어 하는 문제를 위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또 현대인은 부부문제, 자녀, 노후, 각종 인간관계로 갈등하고 불안해한다. 그러므로 불교는 부처님의 말씀을 심리치유적 방편으로 재해석하고 심리치료제로 환원함으로써 그들의 문제 해결을 돕는 데 앞장서야 한다.
그런데 심리치유적 관점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앞에서 든 비구니가 비구에게 절을 해야 한다는 항목을 예로 들어보자. 최초의 비구니가 부처님을 키운 이모면서 양어머니였고 왕비였던 마하파자파제다. 부처님의 부인도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의 부처님 제자 중에는 부처님 형제, 사촌, 아들, 조카, 마부, 이발사도 있었다. 현실적으로 과연 비구와 비구니의 평등한 관계가 가능했겠는가? 비구니가 비구에게 절을 해야 된다는 계율은 상식적으로 누구를 위한 것이었으며 왜 필요했겠는가? 마하파자파제를 비롯한 왕족 출신의 비구니들이 자신들의 화려한 과거 신분을 잊고 현재의 수행자 신분에 맞게 겸손과 평등을 수행하고 무아, 공의 도리를 깨치기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조카고 시종이었던 비구에게 절을 함으로써 비구니는 비구보다 열등하고 못났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한 것이었을까? 반대로 비구로 하여금 비구니보다 우월하다는 자만심을 느끼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당시 인도 사회는 출생부터 사람을 차별하는 엄격한 카스트 제도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런데 모든 비구니가 비구에게 절을 해야 한다는 조항을 통해서 불교는 출신 성분보다는 남녀 성별의 차이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인도 전체에 캠페인하기 위해서였겠는가? 그도 아니면 비구, 비구니의 차별이 부처님의 절대평등, 생명존중, 무아, 공의 메시지보다 더 상위 개념이고 더 보편타당한 진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을까?
알려진 바와 같이 불법이 문서화되어 전해진 것은 부처님 열반 후 적어도 200년이 지난 뒤였으니 그러한 계율 조항이 과연 정말 부처님에게서 나온 것인지 아닌지 그것의 진위를 따지는 일은 심리치유적 관점에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또 그런 조항을 지금 우리 시대에 와서까지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면 현실적으로 불법을 유지하고 전파하는 데 얼마만큼 이익이 되고 손해가 될지 그것도 심리치유적 관점에서는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심리치유적 관점은 오직 그러한 조항이 오늘날 우리 현대인의 문제, 고통을 치유하는 데 얼마나 유용하고 효과적인 치료제로 사용할 수 있는지에 관심이 집중된다. 도움이 된다면 어떤 유형의 마음병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반대로 도움이 안 된다면 어떤 유형에 도움이 안 되는지에 관심을 둘 뿐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깨달음이나 성불도 완전한 건강, 완전한 치유, 행복을 위한 수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조항은 만일 누군가 여자라는 이유로, 또는 비구니라는 이유로 우월감을 느끼고 남자와 비구를 무시하는 병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위해서는 정말로 훌륭한 해독제가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반대로 그 약을 남자라는 이유로 여자를 무시하고 비구라는 이유로 비구니를 가볍게 보는 아만과 교만의 병에 걸린 남자나 비구에게 쓴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독이 되지 않겠는가? 경·율·론 삼장을 심리치유적 관점에서 본다는 의미는 경·율·론 삼장을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처방전으로 보자는 뜻이다.
5. 심미적, 정의적, 인지적 수행방편의 다양성 과거에는 치열한 구도의 방법, 심지어는 심한 고통을 유발하는 자학적 고행도 어떤 의미에서는 대중의 관심과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현대인의 태도가 바뀌었다. 그들은 더 이상 누가 동굴에서 무엇을 먹고 몇 년간 얼마나 혹독하게 수행했는지 보다는 그래서 무엇을 얻었으며 그것이 중생의 삶에 얼마나 유익했는지에 더 관심이 많아졌다. 그들은 이제 듣는 것보다는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수동적으로 바라보는 것보다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좋아한다. 또 거칠고 불편한 것보다는 부드럽고 편리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 수행도 어느 한 가지 방식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보다는 몸으로는 움직이고 입으로는 말하고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전체적, 전인적 체험을 좋아한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우리 불자들은 수행의 방식이 신체 감각, 느낌, 정서, 사고, 인지적 영역을 골고루 터치해주는 좀 더 세련되고 다양한 경험에 개방되기를 원한다. 그냥 말로써 오온은 생멸하는 현상이지 진짜 자아가 아니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오온1)이 ‘자기’라고 느껴지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 오온에 대한 구체적 체험을 통해서 무상을 깨달을 수 있도록 먼저 신체 감각, 느낌, 생각, 기억 등 경험의 전 영역을 자각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또 연기나 무아의 가르침을 이론적으로만 설명하면 과거의 사람들은 불교가 이해하기 어렵지만 심오하다고 믿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현대인은 불교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포기하거나 등을 돌린다. 그래서 현대인에게 연기나 무아를 가르치고 싶으면 실제 그들의 삶 속에서, 그들이 당면하고 있는 인간관계의 갈등 속에서 연기나 무아의 작용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예를 들어 설명해줌으로써 그들의 공감을 이끌어내야 좋아한다. 필요하다면 춤이나 노래, 미술, 음악, 드라마, 스포츠 등 무엇이든 그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활동을 수행과 깨달음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받아들이는 상대의 조건과 특성을 무시한 채 어느 한 가지 수행방편의 수승함을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갈수록 현대인은 스스로 체험할 수 없는 방편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사나 천도제, 각종 불공 의식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불자는 스님의 염불소리를 듣고 그냥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충분했는데 지금의 불자는 그 뜻을 알고 공감할 수 있어야 신심을 일으킨다. 여기서 공감한다는 의미는 기도 의식을 통해서 그들의 마음이 감각, 인지, 정서 수준에서 정화 작업이 일어나야 된다는 뜻이다. 즉 기도 의식의 과정이 참여자의 마음을 맑히고 그들이 기도해주고 싶어 하는 대상과의 인연에 감사하며 상대방의 행복이나 성공(또는 망자의 극락왕생)을 진심으로 빌어줄 수 있는 마음을 불러일으켜주기를 기대한다.
불공 의식이 기복불교가 되느냐 아니면 마음을 정화하는 심리치유가 되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의식을 집전하는 법사들의 마음과 능력에 달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식적으로 설명하면 의식의 과정이 불자에게 고리타분하고 시대에 뒤떨어지고 절 살림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상업화된 것이라는 인상을 주어서 불신, 미움, 불쾌함 등의 선하지 않는 마음 작용(불선심소,不善心所)을 불러일으키느냐 아니면 반대로 마음을 비우고 맑힘으로써 자비, 감사, 기쁨과 같은 선한 마음 작용(선심소, 善心所)을 불러일으키느냐의 문제다. 한마디로 불공 의식이 참가자로 하여금 다섯 가지 감각식과 제육식(정서), 마나식(자의식), 아뢰야식(저장식)의 깊이까지 어루만져 감동이 일어나고 의미 부여가 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현대인은 지루하고 지겨워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제일 먼저 젊은 층이 외면하고 소위 고학력, 엘리트 층이 외면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불교의 노화 현상과 비주류로의 전락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6. 현대판 선사, 영적 스승으로서의 불교상담심리 전문가 교육과 양성 지금까지 앞에서 제기된 5가지 제안, 대중을 프렌드십으로 대하고 글로벌의식으로 현실을 넓게 보고, 경·율·론 삼장에 소개된 과거의 가르침을 현재의 필요에 맡게 재해석해서 활용하고, 경·율·론 삼장을 치유적 관점에서 들여다보고, 현대인에게 맞는 심미적, 정의적, 인지적 수행방편을 다양하게 개발하는 일이 그렇게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상당 기간의 체계적인 훈련과 전문성이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마음치료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과정이나 현대인의 필요와 조건에 맞게 불법을 방편적으로 사용하는 것 자체가 깨달음의 길이고 보살도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불법을 대할 때는 독사를 대하듯 조심하고 신중해야지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독사에게 물린다는 말이 있다. 또 경전에 정법(正法, 올바른 법)을 어리석은 자가 사용하면 정법이 사법(邪法, 그릇된 법)으로 바뀌고 사법도 지혜로운 자가 사용하면 사법이 정법으로 바뀐다는 말씀이 있다. 또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같은 물도 뱀이 마시면 독을 만들고 소가 마시면 우유를 만든다는 표현도 있다. 이 모두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법은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극단적으로 다른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의미다. 마치 같은 병도 어떤 의사가 치료하느냐에 따라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마음을 치유하는 의사의 눈으로 보면 경·율·론 삼장은 마음치료를 위한 처방전인 것이다. 이는 대승보살이 중생의 아픔을 인지하고 공감하는 자비의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한편으로는 대승보살이 중생의 아픔을 인지하고 공감하는 지혜의 눈으로 보면, 경·율·론 삼장은 열반의 세계를 그려놓은 지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대승보살은 중생의 아픔을 치유하는 불교상담심리 전문가인 동시에 그 아픔을 수단으로 중생을 열반으로 인도하는 덕 높은 조사, 영적 스승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우리 시대에 중생의 아픔을 치료하기 위한 처방전으로, 또 중생을 열반으로 이끄는 지도로 경·율·론 삼장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현대판 조사, 불교상담심리 전문가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현대화를 위해서는 경·율·론 삼장을 심리치유적 관점에서 올바르게 이해하고 재해석함으로써 현대인의 마음치료에 적용할 수 있는 불교상담심리 전문가의 양성이 시급하다. 또 현대인에게 맞는 다양한 수행과 치유 방편을 통해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할 수 있는 현대판 조사를 길러내는 특별한 교육 프로그램의 운용이 절실하다. 현대판 조사, 불교상담심리 전문가를 양성하는 사회적으로 공인된 자격 제도 안에서 경·율·론 삼장을 심리치유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해하는 연구 방법론을 체계화해야 한다. 불자들로 하여금 어느 경전을 얼마나 공부했는지 보다는 경전을 읽고 어떤 심리적 증상이 좋아지고 치유되었는지 그래서 얼마만큼 인간관계가 증진되고, 얼마나 행복한 사람으로 바뀌었는지에 관심을 두도록 유도할 수 있는 그런 방법론을 연구해야 한다. 사람을 인격적, 정신적으로 성숙시키고 더 행복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그런 불교 수행 연구 방법론을 개발해야 한다. 또 불교학 석사나 박사 논문을 쓰는 과정을 통해서 연구자 자신이 먼저 어떻게 인격적으로 성숙해지고 세상을 보는 눈이나 가치관이 달라졌는지, 그래서 행복한 사람이 되었는지를 자각함으로써 그들의 논문을 읽는 독자들이 따라서 감동하고 변화할 수 있는 그런 불교학 연구 방법론을 개발해야 한다.
현대판 조사, 정신적 스승으로서의 불교상담심리 전문가 교육 프로그램의 필요성과 아울러 경·율·론 삼장을 심리치유적 관점에서 보는 방법론을 개발해야 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불교상담심리를 한다면서 정작 불교에 대한 이해나 심화는 제쳐두고 서양 심리학이나 치료 이론을 헤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다. 미국에서 심리치료가면서 불교 수행자로 유명한 잭 콘필드(Jack Cornfield)가 말했듯이 서양의 심리치료자들과 정신과 의사들을 위한 심리 진단서인 DSMIV2)는 마음의 질병에 대해서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 비해서 불교 경전은 건강한 마음을 기술하는 데 더 많이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를 들면 서양의 심리 진단서가 불안증이나 강박증, 신경증을 기술하는 데 많은 장을 할애한다면 불교 경전은 마음의 평화, 평정, 고요를 기술하고 습득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또 서양의 심리 진단서가 정신증, 우울증을 위해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면 경전은 행복감, 충만감, 열반에 대해서 엄청난 분량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의 심리치료와 서양의 심리치료는 매우 상호보완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경·율·론 삼장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나 깊이가 부족한 상태에서, 게다가 정확하게 어떤 증상을 치료하는 데 도움을 얻고 싶은지 분명한 목표도 없이 무작정 서양 심리학 공부에만 매달린다면 그건 진정한 의미의 불교상담심리와는 거리가 멀다. 불교상담심리학에서 서양 심리학을 공부하는 일차적 목적은 서양의 이론과 방법론이 경·율·론 삼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양의 심리치료가 불교를 자신들의 치료에 도입하고 통합하는 과정에서 그들만의 방법론을 개발했듯이 우리 불교도 서양의 심리치료를 효과적으로 도입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방법론이 필요하다.
나오는 말
처음에는 불교의 현대화를 위한 모색을‘불교상담심리를 중심으로’라는 부제에 초점을 맞추어서 불교상담심리의 정의, 치료 기법, 상담자의 자질, 서양의 심리치료와의 차이 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다루어볼까 했다.3) 그런데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본고에서는 불교의 현대화라는 보다 큰 틀에서 불교상담심리 전문가 양성 기관, 프로그램 등의 필요성을 살펴보았다. 그 이유는 첫째, 아직 불교상담심리 영역이 초기 단계라 제자리조차 잡지 못한 상태고 스스로 그 정체성을 확고히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의에서는 불교상담심리가 앞으로 불교 현대화의 대표 주자로서의 잠재적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또 다른 이유는 아직 경·율·론 삼장을 치유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그에 따른 훈련 프로그램이 부재한 상태에서 그런 구체적 논의만을 계속한다는 것은 어쩐지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불교상담심리의 이론이나 치료 기법 등은 이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의 적극적이고 꾸준한 논의와 합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진흥원에서는 불교를 현대인의 필요와 요구에 맞게, 특히 마음 치료에 활용하기 위해서 불교상담심리 전문가를 양성하는 자격증 프로그램을 대원불교문화대학에 개설했다. 참으로 반갑고 희망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운 마음이다. 왜냐하면 불교상담심리 분야는 아직 걸음마 단계며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당면한 문제 가운데 무엇보다도 급한 것은 차별화되고 전문화된 커리큘럼 개발, 그에 따른 교재와 훈련 프로그램 개발, 전문 교육자 발굴 등이 아닌가 싶다. 또 다른 중요한 과제는 어떻게 하면 젊은 인재를 불러 모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개인적 생각이지만 이번 세미나가 장기적으로는 그러한 문제를 모색하기 위한 전 단계 과정이기를 바라면서 앞으로 좀 더 구체화된 논의를 위한 워크숍이나 세미나가 열리기를 기대한다. 이번 기회에 불교의 현대화를 위해서 불교상담심리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진흥원이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이끌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구체적으로 대원불교문화대학의 불교상담심리 전문가 자격증 프로그램을 대원불교문화대학 강의실로 한정하지 말고 이동식 프로그램, 즉 롱디스턴스 프로그램(Long Distance Program)으로 확장했으면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불교상담심리 전문가 자격증 프로그램에 관심이 크지만 현실적으로 진흥원에 와서 교육받을 수 없는 지방 승가대학의 학인 스님을 위하여 강사를 파견해서 현지에서 교육을 받고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젊은 학인 스님에게 경·율·론 삼장을 심리 치유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의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불교의 현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할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건강한 불교, 현대인의 아픔과 함께하는 불교의 지름길임은 따로 강조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결국 불교의 현대화를 위해서는 현대화된 조사, 현대화된 스님, 불자, 법사, 포교사가 필요한 것이다. 또 현대화된 조사, 불교상담심리 전문가, 법사, 포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앞에서 기술한 5가지 능력과 특징, 즉 법사는 스승의 자세에서 프렌드십으로 거듭나고, 자각 훈련은 개인의식과 글로벌의식을 조화롭게 포함하고, 경·율·론 삼장을 보는 눈은 과거 시점에서 현재 시점으로, 또 심리치유적 관점으로 이해하고, 대중을 지도할 때는 대상에 따라서 심미적, 정의적, 인지적 수행방편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줄 아는 그런 능력을 갖추는 훈련이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1)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form, sensation, perception, mental formation, consciousness) 2) 미국 정신의학 협회에서 출판한 것으로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편람)’의 약자다. 3) 관심 있는 분들은 2009년 12월 조계종 사회복지재단이 주최한 제11회 전국사회복지대회 포럼에서 필자가 발표한 「사회복지의 선 심리치료 활용 방안」을 참고하시길 바란다.
불교의 현대화를 위한 제언 안희영_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 한국 MBSR 연구소 소장
오늘 서광 스님의 발표는 참신하면서도 시의적절하고 매우 유익한 내용이었습니다. 특히 경전을 심리치유적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은 미국을 중심으로 서구 사회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대인이 개인, 가정, 직장 등에서 겪고 있는 많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보다 잘 적응하고 자신의 미해결 과제를 해소하고 극복할 수 있도록 부처님의 가르침을 심리치유적 관점에서 제공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경전을 심리치유적 관점으로 활용하는 노력을 하면서도 깨달음을 통해 의식의 최고 수준까지 이르는 길을 제시한 불교 본연의 장점도 잘 살려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를 보완하는 측면에서 저의 의견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첫째, 불교의 현대화를 논하는 데 있어 우리나라 전통 불교의 장점에 대한 충분한 평가와 인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의 현대화는 불교만의 문제인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우리 사회 전반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사회 전반적인 맥락과 연계해서 풀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둘째, 불교의 핵심 교리를 강조하고 부처님의 원음에 충실한 이론적, 실천적 수행법을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종교의 핵심 가르침은 시대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보편성이 생명이므로 반드시 잘 보존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과학을 적극 활용하면서도 과학에 종속되지 않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특히 뇌과학, 정신신경면역학, 신경과학, 분자생물학 등의 과학 분야를 충분히 활용해서 불교의 가르침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현대화된 교육 프로그램이 많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넷째, 몸과 마음의 연기적 관계를 바로 보고 불교 공부가 마음공부는 물론 몸 공부도 포함하게 해야 합니다. 서광 스님이 주장하신 내용과 관련해 마음챙김 명상에 근거한 스트레스 완화(MBSR) 프로그램을 떠올렸습니다. MBSR 프로그램은 불교의 정념, 사념처 수행을 근간으로 서양의 스트레스 의학을 융합하여 8주간의 의료 프로그램으로 구조화했기 때문에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합니다. 치료자나 치유 교육자 모두 꾸준히 수행하고 학습자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며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치료법과 교육 방법을 개발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불교의 진리는 환자를 치료하는 훌륭한 처방전 전현수_신경정신과 전문의
우선 저는 서광 스님의 발표에서 우리 불교의 큰 희망과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스님의 논문에는 대승불교적인 시각이 많은 것 같습니다. 중생을 돕고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것, 그것이 우리를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훌륭한 수행이라는 내용을 밑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면 중생 중심의 불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글로벌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때문에 지금 불교니까 믿으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스님께서 아까 ‘어댑터’란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불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불교 속에서 가장 보편적인 진리를 빼내라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저는 ‘어댑터’를 통한 불교의 현대적 재해석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정신과의사로서 제가 만난 환자들은 종교적 배경이 다양해 제가 환자를 치료할 때는 보편적인 진리가 아니면 절대 쓸 수가 없습니다. 종교적인 배경이 다양하므로 보편적인 진리를 일단 체득하고 이를 통해 도움을 주도록 해야 합니다. 따라서 다양한 사람들과 종교와 어울려 살 때 불교에서는 보편적인 진리를 빼내서 ‘이것은 세상에 이롭고 당신에게도 이롭고,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게도 이롭다’고 알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스님께서는 정신적인 고통이나 평화 등 어떤 정신적인 것에 묶여 있는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불교심리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한국에서 과연 불교가 불교심리로써 이 시대에 맞는 불교가 될 수 있나 하는 것은 조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불교상담심리 전문가 양성이 불교의 현대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개신교가 지금의 영역을 확보한 것은 도농의 구분 없이 곳곳에 교회를 세워 영역을 확대하고 실천을 통해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입니다. 불교적 이론을 바탕으로 현대인들의 정신적 고통을 해결해주는 불교상담심리 전문가는 산중불교의 한계를 극복하는 적극적인 포교의 대안이 될 것입니다. 불교심리가 우리나라에서 자리 잡으려면 같은 상담 전문가들한테서도 배워야 합니다. 앞으로 전문가 자격증을 주는 등의 교육 과정이 많이 개발되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