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오싱 여행13 - 안창고진의 운하에서 오봉선을 보고 조선 선비 최부를 생각하다!
어제는 사오싱 시내 루쉰꾸리 로 나가 루쉰고거와 심원 및 월왕전에 운하 챵챠오즈제를
구경했는데 여행 나흘째인 10월 19일 오늘은 소흥북역 인근의 호텔을 나와
솽차오 双桥 (쌍교) 정류소에서 118로 버스 를 타고 종점 安昌公交站
(안창공교참) 에 내려 삼륜차를 타고 안창구전 安昌古镇(안창고진) 에 도착합니다.
안창진 安昌镇 은 유명 인사들을 배출한 천년고진 으로 버퉈(餺飥, 고대 면류) 가 전승되고
명장과 상인, 한림과 사서, 과거(科擧) 의 명소로 문인이나 무사들을 수하에 키우는
풍속인 무펑 (幕風 모풍)이 성행한데다가 스예 (師爺 사옹)의 고향으로 소문이 자자합니다.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에 안창진 安昌镇 은 상품 경제가 발달하고 무역 지위가 월등하며
유명인사들이 속출하고 문화적인 바탕이 심후하였으니 저쟝성 동쪽 내하 운송 에
주요한 상업 부두였고 사오싱 주변의 상품 집산지 였으며 도심지가 번창하고
상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으며 금융이 발달한 저쟝 북부의 중요한 대읍이었다고 합니다.
안창고진 安昌古镇 은 경관이 아름답과 환경이 깨끗하여 국가 AAA 급 관광지인데 현재 보존
되어있는 싼리창제 (三里長街 삼리장가)는 강을 따라 읍을 건설하고 점포와 수공업공장
작방이 옛스러우며 처마가 들린 옛 점포 건물인 판쐔치러우 (飜軒騎樓) 가 늘어서 있습니다.
석판 골목길인 쓰판눙탕 (石板弄堂) 이 굴곡을 이루고 있어 옛날부터 “벽수관가천만거,
채홍과하십칠교(碧水貫街千萬居, 彩虹跨河十七橋” 풀이하자면 “푸른 물이
천만 가옥 거리를 가로지르고 17개 무지개 다리가 강을 수놓다”라고 소문나있다 합니다.
안창고진 安昌古镇 은 저장성(浙江省) 사오싱시(绍兴市 소흥시) 사오싱현(绍兴县) 북부에
있는 향급 행정구 로 중국 역사문화 명진 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인구는 4만에
가까운데 강남 10대 물의 도시중 시탕 西塘(서당) 보다는 때가 덜 묻었다는 평판을 듣습니다.
운하를 떠다니는 검은 지붕으로 덮인 배는 까마귀 같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우펑추안
(烏蓬船 오봉선) 이 눈길을 끄는데 할아버지는 오른손으로 방향키 를 조종하고 발로
노를 저으며 족대라고 불리는 일종의 뜰채로 물고기를 잡는 옆에 빨래 를 하기도 합니다.
민속박물관 (民俗博物馆)에는 결혼식때 사용한다는 가마와 제사 풍습이며 그외 일년동안의
절기를 나타낸 그림이 있는데 입춘, 한식, 단오, 청명, 중추절 등 우리나라와 비슷한
것은 이런 명절들이 모두 중국에서 생겨나 2천년전 우리나라에 전해졌기 때문인가 합니다.
조선은 오래토록 국기 가 없었으니... "태극기" 는 1882년 수신사 박영효 가
일본에 사신으로 갈때 음양을 뜻하는 태극 에 오행을 나타내는
8괘 중에서 4괘 만을 차용해서 만들어 고베 여관에 게양 한게 최초입니다.
태극 太極 은“주역”에“역(易) 에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兩儀 : 음양)를 낳는다"
에서 유래하며 팔괘(八卦) 는 복희씨(伏羲氏) 가 황허강 黃河 에서
나온 용마(龍馬) 의 등에 있는 도형을 보고 계시 를 얻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른 아침에 중국의 광장에 나가보면 사람들이 줄을 지어 太極拳(태극권) 을 하는
모습을 볼수 있는데 몇년전 강릉시가 "오월 단오제" 를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하려
했을때 중국이 뒤집어졌으니“중국의 고유 명절 단오를 한국인들이 훔쳐가려 한다”라고...
우리나라에도 명절이 있었으니 5월에는 삼한에 수릿날이 있었고 10월에는 고구려에 동맹,
동예에 무천, 삼한에 상달제 12월에 부여에 영고 인데 중국에서 설날과 한식 및 단오
중추절(추석)에 동지 가 들어오니 우리 명절은 사라지고 중국 명절 을 지내게 된 것입니다.
조선선비 최부는 소흥부 관헌에게 조선의 역사를 말하는데,“연혁과 도읍은 단군 에서 시작
하는데 당요(唐堯)의 시대와 같다. 국호는 조선이며 도읍은 평양으로 천여년을 누렸다.
주나라 무왕이 기자(箕子) 를 조선에 봉한뒤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팔조(八條) 로써 백성을
가르쳤다. 지금 나라 사람들이 예의로써 풍속을 이룬 것은 이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라고 말하니 중국 성인이 와서 중국문화를 전해준데 대해 자부심 을 느끼고 있는걸 봅니다.
중국 강남에 水乡古镇(수향고진) 은 운하 강 호수등 물과 어우러진 옛마을로 현재 주민이
살고있으니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중국의 맛과 멋을 가장
잘 느낄 수 있으니 中国十大水乡古镇-梦里水乡(중국10대수향고진- 몽리수향) 이라 부릅니다.
절강성에 4곳이 있으니 绍兴有名的四大古镇之一 이란 安昌(안창) 에 鱼米之乡, 丝绸之府
이라는 가흥의 우전 乌镇(오진) 과 영화 '미션임파셔블3' 의 촬영지로 越角人家
로 불리는 시탕 西塘(서당) 그리고 南浔历史上园林众多 이라고 하는 南浔(남심) 입니다
강소성에는 중국 제1의 수향이라는 周庄(주장) 에 동방의 베네치아라 불리는 同里(동리),
文化底蕴深厚 라는 甪直(록직) 에 吴中第一镇 木渎(목독) 과 湖光山色의 光福(광복) 이
있고 상해시 북쪽 교외에 江南明珠 라고도 불리는 주지아지오 朱家角(주가각) 이 있습니다.
마을을 관통하는 1,700m 운하에 늘어선 전통 거리를 “싼리라오제 (三里老街 삼리노가 )”
라고 부르는데 수로에는 늘 배 한척이 떠있어 오물을 제거 하는 탓으로 비교적 깨끗한
편이며 주변에는 부인들이 향장을 만들어 대나무에 널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수 있습니다.
강남의 물고장 수향(水鄕)으로 수로에서 빼놓을 수 없는게 우펑추안 (烏蓬船 오봉선) 인데
8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검은색 나룻배인 오봉선 은 검은 천의 지붕과 손과 발을 동시에
사용해서 노를 젓는 소흥만의 전통적이고 특이한 배로 오랫동안 소흥의 교통수단 이었습니다.
집집마다 마도라 불리는 선착장 과 오봉선(烏蓬船) 을 가지고 있으니 예전에 수로에
의존해 살았던 이 지역사람들의 이동수단이었던 오봉선이 지금은
관광용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고풍스런 역사의 흔적은 아직 남아 있다고 여겨집니다.
한 폭의 수묵담채화 같은 소박한 마을 안창고진은 수로 옆 건물의 1층은 가게와 식당이고
2층은 민박집이니 객잔(客棧) 이라고 하는데 도시 생활에 바빴던 여행자들에게
이 마을은 "여백과 자연의 미" 가 살아 있고 낮에는 수로에 의존해
느긋하게 살고 밤에는 강물을 물베개 삼아 잠들 주민들이 조금은 부럽기도 합니다.
안창진은 천년역사를 보유한 강남 수향고진(水乡古镇)으로 작은 다리가 많은데 2㎞에 달하는
하천을 끼고 옛거리와 고색창연한 점포, 민가, 공방이 얽혀 정취가 가득하며 구불구불
석판(石板) 으로 된 골목길에 오래된 소석교(小石桥) 로 인해 많은 관광객이 즐겨 찾습니다.
누가‘인창장유(仁昌醬油)’라고 하는 장(醬) 을 만드는 공장을 방문했는데 된장 이 담긴
항아리와 숙성과정에 있는 간장 이 담긴 항아리가 즐비하니 직원은 인창간장은 모두
수작업으로 이뤄지는데 된장은 삼복때 3~4개월 동안 뜨거운 태양아래에서 말린다고 합니다.
우리 상식으로 된장은 오래 묵혀둘수록 좋다지만... 술은 오래둘수록 더욱 좋지만 된장은
신선할수록 좋으므로 매년 새로 나오는 된장이 신선하고 좋다는 것인데 생간장 은
된장에서 나온 것으로 음식물을 찍어먹을때 사용하고 묵힌 간장은 요리할 때 사용한답니다.
여행객 처녀들이 무슨 껍질 벗겨 바짝 말린 고기 를 사가지고 가는데 보니 이건
아주 작으니 오리 일리는 없고 그럼 "오리새끼나 병아리" 이지 싶습니다?
그러고는 다음 골목에서 "스예(師爺 사옹)" 라고 적힌 집을 지나는데 무엇 하는
곳인지 통 짐작이 안되는데..... 보자니 영어로도 적혀 있으니
Privit Advance 라... “개인적인 조언?” 그러고 보니 "점치는 집" 인가 봅니다?
안창구전 (安昌古镇) 운하에 우펑선(乌蓬船 오봉선)이 떠다니는 모습을 보니 문득 동양의
베니스라 불리는 사오싱(소흥) 운하를 지나간 조선 선비 최부의 표해록 (漂海錄) 이
떠오르니 마르코폴로 동방견문록, 엔닌의 입당구법순례기와 더불어 중국 3대 기행문 입니다.
최부(崔溥) 는 조선 성종때인 1488년 부친상을 당해 제주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오던중
태풍 을 만나 표류하였으니 44명이 탄 배는 생사를 넘나드는 14일간의 표류끝에
천신만고로 중국 절강성 연해에 표착했으나 두차례나 해적 을 만나 죽음의 순간을
여러차레 넘기고 구사일생 탈출하나 왜구로 오인되어 고초를 겪은후 북경으로 호송됩니다.
영파를 거쳐 감호(鑑湖) 를 지나 사오싱(소흥) 에 도착하니 소흥부 저자의 번화함,
사람과 물자의 풍성함은 영파부의 3배나 되는 것 같다고 적었는데 관부에
도착해 다시한번 더 심문 을 받았는데 최부의 남다른 기개와 해박한
지식 에 명나라 관리들도 탄복하고는 존경을 표하며 예물과 여비 를 줍니다.
최부는 소흥부 관리들의 융숭한 대접 으로 회계, 산음 등 소흥부의 여러 고적을 둘러보고
왕희지가 수계를 지냈다는 난정 를 찾아볼 기회를 가지는데 소흥부 관리들은 최부가
왕희지의 “난정집서”의 한구절을 읊자, 다시 한번 박학함과 문화적 소양에 감탄합니다.
소흥을 떠나 소흥하 운하 를 따라 북상하던 최부 일행은 배에서 내려 산길로 10리쯤 가다
절강에 이르러 다시 배로 갈아타니 강물이 굽이 굽이 흘러서 산을 끼고 돌아가는데
물길이 험해서 파도가 높으니 전당강으로 해마다 8월 18일이면 조수의 차가
심하여 썰물 때는 육지 가 되고 밀물에는 호수 가 될 정도로 물의 차이가 큰 곳입니다.
천리길을 달려 항주성에 도착하자 진수태감 장경이 기일을 어기고 늦게 도착한 죄를 물어
호송관인 적룡을 문책하고 곤장을 치니 최부는 억울하게 생각하고 가엾게 여겼으나
달리 어찌 할 방법이 없었으니 계속해 운하를 따라 소주를 지나 큰 도시 양주에 도착합니다.
양주에서 운하를 따라 산동· 천진을 거쳐 북경에 도착해 명나라 황제 효종(孝宗) 을 알현
한후 서울에 도착해 왕명으로 6개월간 중국 견문을 일기체 기행문 으로 저술하고 부의로
포 50필과 마필을 지급받아 나주로 내려가 부친상에 다시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릅니다.
1,491년 서울로 상경해 성종으로 부터 사헌부 지평 에 제수되었으나 사간원 에서
한달이 넘도록 동의해 주지 않아 부임하지 못하는데 중국에서 돌아와
상주된 몸으로 견문기를 쓴 것이 "명교(名敎) 에 어긋나는 행위" 였다나요?
성종은 최부가 상주의 몸으로 기행문을 쓴 일은 자기가 시켜서 한 일 이고 또 최부가
4년동안 여묘(廬墓) 살이 를 할 만큼 효행을 행했다고 두둔하며 어렵게
관철시키는데 1년후 홍문관 교리로 임명될때도 대간은 전날의 일을 들어 다시 반대합니다.
몇년전 최부가 표착했던 중국 절강성 영해현 월계촌 에는 현지 행정당국과
최씨 문중의 협조로 “최부표류사적비 (崔溥漂流事迹碑)”가 세워
졌다고 하는데 여행전에 저 사실을 몰랐던 탓으로 찾아보지 못한게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