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오싱 여행16 - 난정에서 왕희지의 아지비정을 거쳐 난정비정을 지나 어비정에 가다!
10월 19일 소흥북역 솽차오 双桥(쌍교) 에서 118로 버스를 타고 安昌公交站(안창공교참)
에 내려 水乡(수향) 안창구전 安昌古镇 (안창고진) 을 구경하고 安康寺(안강사)
절 앞에서 806路 버스를 타고 소흥 시내 世貿中心(세무중심) 에 내려 166路 버스를
바꾸어 타고 제7의원 앞에 내려서 3路 버스 로 환승해 란팅 蘭亭(난정) 에 도착 합니다.
오후 1시 15분 蘭亭风景区(난정풍경구) 에서 버스에서 내려 3분을 걸어 80위안
하는 표를 끊어 란팅 蘭亭(난정) 에 들어서는데, 월나라왕 구천이
蘭(난) 을 키우던 곳으로.... 王羲之(왕희지) 의 난정서(蘭亭集序) 가
유명한데 국제 난정 서예제 는 매년 음력 3월 3일 삼짓날 에 열린다고 합니다.
문을 들어서서 옛 집을 지나 대나무가 심어진 길을 따라가니 삼각형 모양 정자인 아지비정
(鹅池碑亭) 인데...“오리 압(鸭)” 이 아니라 “거위 아 (鹅)” 자를 쓰니 그럼
왕희지가 서법을 배운게 거위가 자유자재로 목을 돌리는데서 착안했다는게 맞는가 봅니다?
그런데 비석을 보니 我(아) 와 鳥(조) 자가 옆으로 붙여 쓴게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따로
쓴 것이 특이한데.... 이는 왕희지가 거위가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글씨체 서법을
배운 때문에 일부러 그리 쓴 것이라 여겨지는데 물론 서성 왕희지(王羲之) 의 글씨 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위의 “아(鹅 )” 자는 왕희지 가 썼고 그 아래에 “지(池 지)”
글씨는 왕희지의 일곱번째 아들로 8세에 불과한 왕헌지 가 썼다고 전하는데
“아(鵝 )”자는 왕희지 가 사랑한 "거위" 를 뜻하니... 그는 거위가
한가롭고 자유스럽게 헤엄치는 모습을 관찰 하며 "필법을 익혔다" 고 합니다.
그러고는 작은 연못이 나오고 거위가 많이 헤엄치는 모습을 보는데 거위 연못인 鹅池(아지)
이건만 물에는 금붕어 도 있는지라 특히 아이들이 손뼉치며 좋아 하는 광경을 봅니다?
저런게 童心(동심) 일테지요... 거위를 보노라니 문득 왕희지의 거위 이야기 가 떠오릅니다.
산음에 어느 도사는 왕희지 에게 “도덕경(道德經)”을 써 달라는 청탁을 하고 싶었지만
왕희지가 경서를 베끼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니 감히 입밖에 내지 못하다가...
왕희지 가 흰 거위 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으니, 왕희지는 붓글씨를 더욱 생동하고
힘차게 표현하기 위해 늘 거위가 물에서 헤엄치는 모양을 본떠서 손목을 단련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사는 새끼 거위들을 사서 정성을 다해 기르니 몇 달이 지나자 새끼 거위들은
백설같이 아름다운 거위 로 자라났으니 도사는 거위들을 왕희지가 늘 지나다니는
길목에다 가져다 놓았는데..... 그곳을 지나가던 왕희지는 깃털이 눈같이 희고
자태가 고운 거위들을 보고는 욕심이 나서 거위를 자기에게 팔라고 도사에게 사정합니다.
그러자 도사는“이 거위들은 원래 팔지 않는 것인데... 선생님께서 저의 소원대로
”도덕경“ 한 책을 필사해 주신다면 선물로 드릴 수는 있습니다.”
왕희지는 두말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응낙하고는 그 자리에서
“도덕경”을 필사해 주고는 그 거위들을 품에 안고 가던 길을 갔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蘭亭碑亭(난정비정) 이란 정자 에 도착하는데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어
한참이나 기다려야 비석 을 볼수 있으니 바로 “蘭亭(난정)” 두 글자가
위에서 아래로 쓰여져 있는데 한 눈에 보아도 파손된 비석을 이어 붙인 표가 납니다.
정자 안의 큰 비석에“蘭亭(난정)”이라는 두 글자는 바로 청나라 강희제 가
직접 쓴 글씨 라고 하는데...... 문화혁명(1966~1976) 시기에
홍위병들에 의해 세토막 으로 잘린 것을 이후에 다시 이어 붙였다고 합니다.
청나라 황제 라면 조선인들이 미개하다고 생각한 여진족(만주족) 인데 저 황제들은
중국을 점령하고 청나라를 세운후 강역을 확장하고 문예를 진흥 시켰으니...
그럼 우리 조선인들의 생각은 너무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고루 했던 것일까요?
여기 짚인지 갈대 인지를 인 소박한 정자 가 있는 연못 에는
대나무 뗏목 이 보이는데 무얼 하는 용도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걸어서 하늘을 향해 높이 치솟은 처마를 지닌 정자 안에 서
있는 어마어마 하게 큰 비석 을 보는데 바로 御碑亭(어비정) 이니....
그럼 여기서 부터는 왕희지의 사당 인 왕우군사(王右軍祠) 경내인가 합니다.
저장성 사오싱시 (紹興市) 에서 서남쪽으로 18㎞ 떨어진 란주산(蘭渚山) 의
란팅풍경구 (蘭亭景區)에 있는 란팅 蘭亭(난정) 경내에는 사오싱
왕우군사 (紹興王右軍祠) 라고 있으니 대 서예가 왕희지(王羲之) 의 사당 입니다.
서성(書聖) 으로 추앙받는 동진(東晉)의 서예가 왕희지를 기리기 위하여 지은 사당으로,
우군(右軍) 은 왕희지가 지냈던 관직 명칭인데 창건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명나라
때인 1548년에 재건되었고 청나라 때 여러차례 개축 및 보수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왕우군사 (王右軍祠) 내에는 어비정 (御碑亭) 등 주요 건물은 후대에
신축되었으며 1980년 전면적 유지 보수 작업을 거쳐 명승고적
및 산수원림 풍경구 로 국내외에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비정(御碑亭) 안에 석비 는 높이 6.8m, 너비 2.6m, 두께 0.2m 에 이르는 중국 최대
크기라고 하는데... 석비 앞면에는 1693년 강희제 가 쓴 “난정집서”가 그리고
뒷면에 1751년 건륭제 가 여기 난정을 직접 방문해 쓴 “난정즉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청나라 강희제는 1661년부터 1722년까지 61년 집권했으며 옹정제는 13년 그리고 건륭제는
1735년에서 1795년까지 재위했으니 3대 135년은 청나라의 황금기 로 마치 로마의
5현제 시대에 비견되는데 "할아버지와 손자 글씨" 가 앞뒷면에 새겨진 것도 유례 없네요?
건륭제 는 왕희지의 쾌설시청첩, 왕헌지의 중추첩, 왕순의 백원첩 을 세가지 보물이라
부르며 베이징 쯔진청(자금성) 내 집무실인 양심전 三希堂(삼희당) 에 걸어
두었다는데 시진핑은 미국 대통령 트럼프에게 차를 대접 했다고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보안 때문인지 실제로는 寶蘊樓(보온루) 에서 차담회 를 가졌으니... 쾌설시청첩 :
羲之頓首 왕희지 절합니다.
快雪時晴 佳 많은 눈 내리더니 지금은 맑아져 좋습니다
想安善 편히 잘 지내시리라 생각합니다
未果爲結力 일에 성과가 없어 공연히 힘만 든 셈입니다
不次 이만 줄입니다
王羲之頓首 왕희지 절함
山陰張侯 산음의 장후에게
그런데 저 차담회 에서 시진핑은 트럼프의 외손녀 아라벨라 (아방카의 어린 딸) 가
중국어로 노래를 부르고 송나라때 아이들에게 문자를 가르칠때 사용한 교과서
三字經(삼자경) 과 중국의 옛 시를 암송 한 것을 보고는.... 아라벨라가
중국에서 꼬마 스타라며“아라벨라에게 “A+" 을 줄수 있어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방카 는 유대인 남편을 따라 기독교에서 유대교로 개종 했다고 하는데 유대인은 어릴때
아이 교육을 중요시 하는지라 아버지는 이방인이어도 어머니가 유대인 이어야
자식을 유대인으로 인정 한다는데.... 그래서 아이 교육에 저리도 열성적인 것일까요?
시진핑과 트럼프의 정상회담에서 배석한 미국인은 다섯명으로 그 중에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로 실세인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보좌관이 있었으며 트럼프 보다 일본을
먼저 방문한 이방카 에게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따라 다니면서 칙사대접 을 했으니....
그런 대접을 한건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를 아베 총리가 세계 최초로 만날수 있도록
이방카가 주선해 주었기 때문이었다는데... 다음날 아베는 트럼프와 골프를
치며 웃으면서 서로 주먹을 부딪히는 하이파이브 를 하는등 친밀감을 과시 했습니다.
그럼 이방카와 연결고리 는...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로 확정되기전 거의 미친사람 취급을
받을때 일본 전직 국회의원 이 트럼프 빌딩에 방을 세내어 트럼프 진영 사람들과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같은 식당에서 밥먹으며 함께 얼굴을 익혔다니 일본인의 준비성 이란?
러일전쟁시 일본은 만주까지 보급선이 길어지니 전비조달이 어려워져 탄약과 무기 및 식량
부족에 허덕이는데, 이토 히로부미 는 혜안이 있는지라 사태를 예상하고 미리 조치를
해두었으니..... 하버드대 로스쿨 출신 가네코 겐타로 를 미국에 보내 하버드 대학교
동문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에게 니토베 이나조 의 영문판 "무사도" 책 을 선물합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책을 읽고 일본 무사도 정신에 흠뻑 빠져 스스로 진심을
가지고 "친일파" 로 자처했으며 책을 대량 구입해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데....
육군의 군수물자가 바닥난 일본은 마침 도고 헤이하치로 가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가
쓰시마해전에서 러시아 해군을 격파하자 루스벨트 대통령 에게 종전 중재를 요청 합니다.
루스벨트 는 러시아와 일본 대표를 미국 포츠머스에 불러 러시아를 윽박질러 "종전협정을
강요" 하고 성사시키니 노벨 평화상 까지 챙기는데, 이런 인연으로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동향인 조슈번 출신 가쓰라 다로 총리는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와 "필리핀은
미국이 조선은 일본" 이 갈라 먹기로 협정 하고는 을사보호조약 을 체결했던 것이네요?
여기 마당에 붓글씨 를 쓸수 있는 대가 여러개 놓여져 있는데 먹물로 쓰는 것은
아니고 붓을 물통내의 물에 적셔 돌에 쓰는데 울 마눌 냉큼
달려가 한자로 자기 이름 을 적어 보더니... 내게도 한번 써 보라고 성화 입니다.
그러고는 왕우군사(王右軍祠) 건물로 들어가는데 건축물의 평면 구조는 사각형이며 대문
(大門)· 묵화정(墨華亭)· 정전(正殿)· 회랑(回廊)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당
주위를 시냇물이 감돌아 흐르는데 대문 안쪽에는 묵지(墨池) 라고 부르는 연못이 있습니다.
그 양쪽의 회랑에는 역대 서예가들이 왕희지의 “난정집서(蘭亭集序)”를 모사한 석각
들이 끼워넣어져 있으니 왕희지의 초상과 연혁이며 여러 글씨등 자료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353년 3월 3일에 사안(謝安)· 지둔(支遁) 등 41인 이 회계산 양란저의
정자에 모여서 제를 올리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는데 왕희지가 서(序)를 지었습니다.
서(序) 에는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경치를 묘사한후 모인 사람의 감상을 적었는데,
소리와 색이 어울려 정경이 서로 일어나서 성대한 모임을 부각시켰을 뿐만아니라
문장을 지어 의론을 발표하는데 자연스럽고 적절한 배치를 했으니... 성대한 일도
영원하지 못하고 길고 짧은 것도 변하듯이 흥이 다하면 슬픔이 온다는 감탄을 표현했습니다.
마지막에 서를 지은 연유를 밝혔는데 문장은 삶과 죽음, 장수와 요절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을 황당무계한 것으로 생각해 당시 성행한 허무주의 사상과 언론을 비판하며 현실에
대한 낙관적인 자세 를 중시했으니... 높은 사상적 경지를 보인 것은 아닐지라도 서로
속고 속이는 과정에서 구차히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맑은 태도 를 드러낸 것입니다.
문을 나와 뜰에 나서니 책상 이 보이는데 아마도 옛날 왕희지가 글씨를 쓰던 책상이라
여겨지는데... 작은 연못이 있으니 이른바 붓을 씼었다는 墨池(묵지) 인가 본데
한가운데 네모난 석대(石臺) 는 석교(石橋) 를 통해 대문 및 정전과 연결된다고 합니다.
석대 위에는 처마 서까래 끝에 부연을 달아 기와집의 네 귀가 높이 들린 처마인 비첨교각
(飛檐翹角) 구조의 묵화정(墨華亭) 이 있으니 정자 는 사람들이 서예를 겨루는 곳으로
활용되며, 현대 중국의 지도자들과 당대의 문인들이 방문하여 친필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가장 뒤쪽에 있는 정전의 전면에는 현대의 저명한 서예가 사멍하이(沙孟海) 가
쓴 주련 이 있고 안쪽 한가운데 왕희지의 전신(全身) 화상 이
걸려 있으며 또 역대 서예가들이 모사한 “난정집서”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後之視今亦由今之視昔( 후지시금역유금지시석 ) 진열된 난정서의 한 구절로 후대 사람들이
현재의 우리를 보는 것은 지금 우리가 옛 사람을 보는 것과 같다 라는 뜻인데
왕희지와 난정 및 그가 지은 蘭亭序(난정서) 로 서예가들에게는 마치 성지와 같은 곳입니다.
어디나 그렇듯 출구는 기념품 가게 를 거쳐서 나가게 되어 있으니 중간 통로로 자연스레
들러는데 유난히도 붓과 벼루등 문방사우에다가 멋스런 부채 가 많은게 인상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