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오싱 여행19 - 팔자교 다리와 운하를 구경하고 성당을 거쳐 주은래 조거에 가다!
10월 19일 사오싱(소흥) 에서 란팅 蘭亭(난정) 에 도착해 鹅池碑亭 (압지비정) 을
지나 蘭亭碑亭 (난정비정) 을 찾아 청나라 강희제가 쓴 난정집서 글씨를
보고는...... 다시 신라의 포석정 과 같은 유상정 (流觴亭) 을 찾아서
서기 354년 음력 3월 3일 유상곡수 를 하며 왕희지가 쓴 난정서 를 회상합니다.
왕희지 사당 왕우군사 (王右軍祠)를 보고 강을 건너 蘭亭書法博物館(난정서법박물관) 을
찾아 동진의 재상 사안(謝安) 일족이 383년 비수대전 에서 승리해 부견의 前秦(전진)이
망하고 그 기회를 틈타 모용수가 건국한 後燕(후연) 과 싸운 광개토대왕 을 회상해 봅니다.
그러고는 란팅 蘭亭(난정) 을 나와서 4시경에 다시 3路 버스 를 타고는 강을 지나고
7의원 에서 우회전을 하여 40여분만에 시내로 들어오는데...... 八字橋
(팔자교) 를 보기 위해 청스꽝창 (城市广场 성시광장) 을 지나면서 정류소를 살핍니다.
어제 버스를 탔던 移动公司(이동공사) 정류소에 내릴까하다 버스가 직진하거나 아님 요행히
우회전 이라도 하면 八字橋(팔자교) 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 한정류소를 더 가니 이런?
차가 좌회전 하는게..... 그럼 버스 터미널인 객운중심 으로 가는 모양이라 얼른 내립니다.
되돌아 내려와 대로를 건너 아주 오래된 엣날 거리 인 广宇桥直街(광우교직가) 를
찾아 골목길 로 들어가니 비록 좁고 오래된 도로 이긴 하지만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엄청 유명한 골목인지라..... 집들은 새로 흰색 페인트를 칠했나 봅니다?
긴 골목길을 빠져 나가니 강 이 나오고 드디어 비스듬히 올라가는 돌다리 가 보이길래
이게 그 유명한 八字橋(팔자교) 이지 싶어 사람들에게 물으니 이건 그냥
광우교 라는 보통 다리 라는데...... 다리 위에 올라서서 운하 주변 집 들을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물어서 좀더 걸으니 조금 전에 본 것과 비슷한 오르막 돌다리 가 보이니
여기가 야경이 유명하다는 "八字橋(팔자교)" 인지라..... 다리 위에
올라서서 주변을 둘러 보니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 이라고 경치 가 탁월 합니다.
주변에 돌 비석 이 하나 서 있어 다가가 읽어보니 유네스코 마크 가 보이고 그 아래에
世界遺産 中國大運河 (세계유산 중국대운하) 라... 그럼 이 강도 운하 인
모양이니 다시 한번 더 찬찬히 강변에 들어선 기와집이며 빨래하는 모습 을 둘러봅니다.
八字橋(팔자교) 의 명물이라는 야경 을 보자면 아직도 한시간은 더 있어야 하지 싶은데...
망설이다가 우리 숙소가 너무 먼지라 마음이 급하니 아쉽지만 그냥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다리를 내려와 골목길을 걸어 분홍색 오래된 천주교 성당 이 보이길래 내부로 들어가니
소박한 모습인데, 탁자 위에 성경과 찬송가 책 이 놓여져 있으니 독실한 크리스찬 인
마눌이 살펴보더니... 손때 가 묻은걸 보니 사람들이 실제로 이용하는 성경 이라고 합니다.
성당 내부에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 을 오르는 유화 그림이 보이는데
우리 부부는 이스라엘을 2번 방문했으니... 첫 번째 방문때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 그리고 사해 마사다 에서 갈릴리를 거쳐 가버나움과 골란고원을
보고 하이파 까지 이스라엘 전국일주 여행시에 예루살렘 에 들른 일이 떠오릅니다.
예루살렘 구시가지 는 아직도 높은 성벽 으로 둘러쌓여 있으며 성 내부로 들어서면
유대인 구역, 아랍인 구역, 기독교인 구역에 아르메니아파 구역등....
좁은 골목길이 미로 처럼 얽혀있는데 서쪽 다마스크스문 근처에서
성묘교회 로 오르는 비탈길에 저 예수가 십자가 를 진 비아돌로로사 가 있습니다.
그러고는 천주당을 나와 사람들에게 물어 주은래의 집 을 찾아가는데 금방 나올것 같더니
큰 도로에 이르기로 결국 몾찾는게 아니가 염려했으니... 물어서 대로를 건너 도로로
들어서는데 네거리에서 많은 청년 학생들을 보니 문득 떠오르는게 “송·송” 커플 이라?
중국 여배우 장쯔이 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가장 아름다운 사랑, 가장 아름다운
모습. 송중기 송혜교 축하해요”란 글과 함께 결혼식 사진 을 공개했으니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맺어준 송중기와 송혜교 가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결혼식을 올렸었지요?
중국 인터넷 에서도 한류스타 커플 송중기-송혜교의 결혼식이 큰 화제가 됐으니 결혼당일
오후 8시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 화제 분야 실시간 검색 순위에서 송중기 - 송혜교
결혼식은 조회수 1억 9000만건으로 1위를 기록했으며 포털 바이두(百度) 에서 중국
매체들이 몰래 생중계로 보도한 채팅방에는 597만명이 접속하는 등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당시 수개월 동안 중국 매체는 물론이고 인터넷에서도 한류 스타에 대한 보도가 없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한중 화해무드’가 대중문화 분야 부터 나타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었는데, 중국 '한한령(限韓令)’조치가 완전히 풀릴 것이라는 관측도 나왔었지만....
길을 건너 100 미터를 가니 朱恩來故居(주은래고거) 를 발견하는데 아뿔사! 문이 닫혔길래
시계를 보니 오후 5시 14분이라? 읽어보니 오후 5시에 마감 한다니 그럼 최소한 오후
4시 30분 이전에 와야하는 것이니 移动公司(이동공사) 정류소에 내려 바로 왔어야 했네요?
왜 바로오지 않았느냐 하면..... 내가 가진 아주 오래된 옛날 여행 가이드북 안에
아주 작은 지도 에 주은래고거(朱恩來故居) 가 저 팔자교 옆에 있는 걸로
잘못 표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팔자교에 가서 들러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 입니다.
만약에 작은 지도에 주은래고거(朱恩來故居) 가 정확히 표시되어 있었다면 그럼 당연히
입장 시간이 있으니, 우리가 버스에서 내린 정류소에서 한정거장 전인 移动公司
(이동공사) 정류소에 내려서 위치도 가까운 여기 주은래 고거를 먼저 찾아왔을 것입니다.
아쉬운 마음에 문을 기웃거리다가 조금 열리는 틈을 타서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멀리서 왔는데 사진 한 장만 찍자니까 그러라길래 안쪽을
향해 디카 를 들이 밀었는데.... 어두운 탓인지 사진이 선명하지는 않습니다.
저우언라이 (周恩來 주은래) 는 장쑤성(江蘇省) 화이안(淮安) 의 지주· 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1917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에서 공부한후
톈진의 난카이 대학 재학중에 5· 4운동에 참가하여 투옥 된 후에는
퇴학당하였고 이후 1920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대학 에서 정치학을 공부했습니다.
주은래(周恩來) 는 1922년 중국 공산당 파리지부(支部) 를 창설하였고, 런던 · 베를린
· 모스크바를 거쳐 귀국하여 1924년 황푸(黃織) 군관학교 정치부 대리에 발탁
되었으며 1927년 국민당 장개석의 북벌군에 호응해 상하이(上海) 봉기를 지도 했습니다.
그후 국공합작중 에 돌연 배신한 장제스(蔣介石 장개석)의 반공 쿠데타 를 피하여
우한 (武漢 무한) 으로 가서 노동자 무장규찰대 를 조직해 공산당 난창(南昌)
봉기를 지도하고 이후 광저우 (廣州 광동) 코뮌 을 조직해 장개석군에 대항 합니다.
1931년 말 광시성(廣西省) 의 소비에트구(區) 에 들어가 군사부장과 제1방면군
정치위원으로서 정보공작과 국민당군의 포위에 대한 전략을 지도했는데
1936년 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 으로서 장정(長征) 에 참가하였고...
시안(西安) 사건 때 국공(國共) 내전의 정지와 항일연합전선의 결성 에 힘썼습니다.
항일전 이 발발한 후에 주은래(周恩來) 는 우한· 충칭(重慶 중경) 에서 2차 국공합작
중에 공산당의 대표로 중화민국 정부의 국방위원회 와 군사위원회 위원등
요직에 있으면서 국공관계의 처리를 맡아 탁월한 정치적· 외교적 수완 을 발휘합니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후 문화대혁명을 거쳐 최후 까지 공산당에서
지도적 위치를 유지하면서 27년간 총리 로서 국내외의 중요한
여러 문제를 해결했으니... 중국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 라고 합니다.
6.25 때 유엔군이 평양으로 진격 하자 일본과 국경선이 접하는걸 꺼려한 임진왜란 때
처럼 중공군이 참전 하는데, 서울을 지나 평택 에 이르니 영국과 캐나다 및
호주등 영연방 국가들은 미국에 압력을 넣어 현 전선에서 휴전하지
않으면 우린 철수하겠다고 위협하니.... 미군은 "일주인 기한부로 휴전을 제의" 합니다.
모택동이 고민하자 주은래는 휴전제의를 거부 하자고 제안하니 전투는 재개되어 유엔군은
엄청난 물량의 융단폭격 으로 중공군을 밀어 올리는데... 만약 주은래와 모택동 이
휴전 제의를 받아 들였으면 대한민국 국경선은 충청도 ~ 경상북도 선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만 해도 아찔한데 친일파 논란이 있지만 6.25전쟁의 영웅인 백선엽 장군의 회고 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6.25 때 맥아더가 易地思之 (역지사지) 해서 평양 앞에서 진격을 멈추고
중국에 휴전을 제의 했더라면.... 평안도와 함경도의 북한 정권을 인정 하겠다고
제의했으면 중공군의 참전은 없었을 것이고 대한민국 국경선은 대동강~원산선 이라...
중국은 미군이 압록강에 주둔하는걸 절대로 용인할수 없으니 완충지대가 필요한 것이라?
훗날 동구권이 무느질때 북한을 흡수통일할수 있을텐데 이승만과 맥아더의 어리석음 이여!
맹자(孟子)“이루편(離婁編)”에 나오는‘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에 易地思之(역지사지)
는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 하라는 뜻이니‘아전인수(我田引水)’와는 반대 개념인데
나폴레옹 은 부하 장교 한 사람에게 늘 "독일인(오스트리아인) 의 입장" 에서
생각하라 이르고는 주요 전투시 그 장교를 통해 적군의 진격방향등을 예상 했다고 합니다.
6.25 때 양측에서 3번의 오판 이 있었으니 첫번째는 김일성은 인민군이 3개월 내에
부산을 점령하면 "미군의 개입은 없을 것" 이라고 스탈린에게 장담했는데....
미국은 남한에 주둔중인 미군을 철수한후 1950년 1월 12일 국무장관은 미국의
방위선에서 지도를 겻들여 한국과 대만을 제외 시킨 "애치슨 라인" 을 발표했습니다.
미국 군사고문단은 3개월간 지속된 국군의 비상경계령을 해제하도록 강권해 6월 24일부터
장병의 3분지 1을 휴가내지 외박으로 내보냈으며, 서울에 장교구락부 낙성 축하연 을
강행하도록해서 수도권 장성과 고급 장교들이 댄스파티를 열어 6월 24일 밤 10시까지
술마시고 자기들은 도쿄로 휴가 갔으니 유인책 이라? 어리석은 김일성이 걸려든 것이지요!
두번째는 맥아더 는 유엔군이 북한으로 진격해도 국공내전에서 지친 중공군이 절대로
한반도에 참전하는 일은 없을 것 이라고 호언장담했는데 중공군 포로들이 잡히자
이는 소규모 척후부대 라며 끝끝내 참전사실을 인정하지 않다가 결국에는 장진호
전투등... 중공군에 포위된 미군들이 흥남철수로 내몰리는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세번째는 모택동과 주은래의 오판 인데... 평택까지 내려온 중공군은 조금만 더 밀어 붙이면
부산까지 진격하는 것도 가능하다 여겨 휴전제의를 거부 했던 것인데 문제는 보급 이라?
낮에는 미군기의 폭격으로 꼼짝 못하고 밤에 보급품을 운반하는데, 보급선이 길어지니
힘들고 또 미군이 융단폭격으로 나올줄이야! 모두 易地思之(역지사지) 하지 못한 것이지요?
그러고는 밤길을 걸어 대로로 나와 승리로 를 만나 큰 길을 건너서 캔맥주 2개 를 사서는
移动公司(이동공사) 정류소에서 5시 40분에 166 路 버스 를 타고 港鉞路口(항월로구)를
지나 거진 한시간을 달려서 북쪽 중심가인 스마쭝신 世貿中心(세무중심) 정류소에 내립니다.
이제 여기서 832 路 버스 를 타고 서너 정거장을 가서 소흥북역 못미쳐 변두리인
勤俭村 (근검촌) 정류소에 내리면 바로 우리 호텔로 钱陶路 9号 에 자리한
绍兴鲁越大酒店 (소흥노월대주점) 일명 越剑大厦 입니다. 그런데
10여분을 기다려도 832 路 버스가 오지 않기로 정류소 전광판 을 살펴보니......
다른 버스는 몇분후에 온다는 표시 가 게속 뜨는데도 우리 832번 버스는 전혀 뜨지
않으니... 뭔가 잘못 되었다는 불길한 생각이 듭니다. 다시 노선도를 차찬히
살펴보니 다른 버스는 밤 11시 까지도 운행을 하는데 변두리로 가는 우리
832 路 버스는 오후 6시가 막차 라고 나오길래 시계를 보니 오후 6시 40분 입니다.
해서 택시 를 탈려니까 울 마늘 극구 말리며 좀 기다려 보잡니다. 마눌은 푼돈에 엄청
민감한지라... 어떤 경우에도 비싼 택시를 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우린 언제나 지하철이나 버스 아니면 1시간이래도 좋으니 걸어가는 것 을 택합니다.
그러면서 하느 말이 저 6시는 버스 출발지에서 막차 시간이니 지금 6시 40분이면 이제
도착할 시간이 되었다며 자기 좋을대로 해석 합니다? 해서 나는 그게 아니고 여기
정류소 막차 시간이라고 말해주는데 서로 자기주장만 하다가 다음날 勤俭村 (근검촌)
정류소에서 내 말이 맞다는게 확인 되는게 거기 막차시간이 6시 15분 으로 적혀있더군요?
그래도 미련을 못버리고 자꾸 되돌아 보는 마늘을 재촉해 택시를 타려는데 이런? 10분을
기다려도 택시가 오지 않는지라, 할수없이 걸어 내려와서 옆 도로로 가서 5분을 기다려
간신히 택시를 잡아 호텔 앞에 내리니 10위안이 나오는데 몇 위안 때문에 이런 난리네요?
호텔로 돌아와 마눌이 휴대한 전기남비로 밥을 하는동안 식어버리 캔맥주를 마시는데
내일은 소흥북역 에서 고속철 기차를 타고 멀리 남창 으로 가서 관광후 1박을
하고 모래는 주유와 도연명의 주장(구강) 을 거쳐서 이백과 소동파 가 놀았으며
장개석과 송미령에 모택동이며 주은래가 둥지를 틀었던 루산(여산) 에 오를 생각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