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들의 보석상자 [제1편]
시는 은유들의 보석상자다. 시가 은유들의 보석상자라는 걸 프랑시스 풍주는 이렇게 보여준다. “가는 화살 또는 짧고 굵은 투창./지붕 모서리를 에둘러가는 대신,/우리는 하늘의 쥐, 고깃덩이 번개, 수뢰/깃털로 된 배, 식물의 이/때로 높은 가지 위에 자리잡고/나는 그곳을 엿본다, 어리석고,/불평처럼 찌부러져서……”(프랑시스 풍주, 「새」)이 은유에 따르면 새는 하늘의 쥐, 고깃덩이 번개, 수뢰, 깃털로 된 배다. 은유를 직조해내는 것은 바로 시적 상상력의 언어들이다. 언어, 이 괴이쩍은 것! 이 야만! 이 색(色)과 공(空)의 전쟁터! 시는 아포리아나 코스모스가 아니라 언어 그 자체를 직격한다.
시와 언어의 본질적인 관계는 오직 죽음과 언어 사이의 본질 관계에 견줄 만하다. “언어가 본질적인 의미에서 시”라고 생각한 철학자 하이데거는 “죽음과 언어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가 섬광처럼 빛나건만, 그것은 아직 사유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라고 말한다. 그는 언어가 시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처음으로 언어가 존재자를 명명함으로써, 그런 명명함이 존재자를 낱말로 가져오며 현상하게 한다. 이런 명명함은 존재로 향해 있는 존재자를 그것의 존재로부터 지명한다. 그런 말함은 밝힘의 기획투사이며, 그 속에서 존재자를 개방하는 것이 알려진다. 기획 투사함이란 어떤 던짐을 불러일으킴이고, 여기서 던짐은 비은폐성이며, 비은폐성은 존재자 안으로 자신을 보낸다.
언어는 우주 안에 흩어진 채 존재하는 ‘있음’들을 하나씩 불러 이름을 주고 그것에 실존을 입혀 누군가에게 건넨다. ‘있음’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 그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말함”이고 “밝힘의 기획투사”다. 나의 “말함”은 당신에게 세계를 건네줌이다. 시 쓰기는 넓은 범주에서 “말함”에 속한다. 언어는 투명하거나 불투명하다. 언어는 사물, 형태, 진실, 존재의 집 등등이 아니고, 다른 무엇도 아니다. 언어는 사물과 형태의 허상이고, 그 허상은 진실과 인식의 기호로 춤추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단어는 죽음의 현전을 그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겨우 그것의 추상성을 모호하게 지시한다. ‘괴로움’이라는 단어는 어떤 심적 상태, 기억의 단층(斷層)을 어렴풋하게 가리킬 뿐이다. 어떤 경우에도 언어가 실제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현실의 진흙탕이란 언어 표현도 실재 없이 중심이 텅 빈 기호의 묶음이다! 언어에 대한 단 한 가지 진실은 언어가 실재와는 다른 그 무엇이라는 점이다. 언어는 시에서 직관과 예감의 기미들을 품고 드러내는 도구지만 그 불완전함으로 말미암아 그 기능은 한계가 분명하다. 언어는 오성과 형상의 대체물이다.
장석주 「은유의 힘」
2024. 3. 16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