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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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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의성 김씨 운암종택(내앞종택)을 찾아서
이장희 추천 0 조회 66 14.04.01 21:26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의성 김씨 운암종택(내앞종택)

 

안동현장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니 고향이 안동이가? 반변천이 어데고?"

"와 예?"

"의성김씨 종택이 그 근방에 있다 카던데 함 가볼라꼬!"

"요오서 한20분 걸릴 낀데예!"

"그라마 별로 멀지도 않네!"

 

안동 시내에서 영덕방향으로 가다보면 안동대학교가 나온다.

안동대학교 정문을 지나자마자 우회전하면 "길안교"라는 반변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다시 좌회전

해서 10여분을 달리면 도로 좌측에 임하면사무소가 있다.

면사무소 건너편 길(폭이 6미터정도)을 따라 오백 여미터 가면 농협이 있고 그곳 마당에 차를 세우고

우측으로 눈을 돌리면 의성김씨 운암종택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미 다녀온 길이라 지금은 이렇게 설명하지만, 갈때는 한참 헤맨 길이다.

안내판의 위치가 잘못 세워졌다.

종택의 안내판은 면사무소를 지난 다음길 입구에 서 있는데 그길을 따라 들어가니 주민에게 물어보지

않고서는 쉽게 찾기가 어려웠다. 표지판의 위치는 목적지에 가장 분명히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담당자들의 무사안일함에 **놈들!하고 혼자 십원짜리를 팔고만다.

도로 안내판은 그곳 지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말이 나온김에 한마디 더하자면 1992년에 전국에서는 최초,최대규모로 대구광역시의 도로 표지판

전부를 새 내용으로 바꾸고,외지인들이 목적지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대구시 전역의 도로에 번호를

부여하여 표기하는 설계용역을 한 바가있어, 도로 표지판에 관한한 그 위치나 문구내용에 관심이 많다.

 

                                                                                                                                운암종택 전경

 

안동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박장영씨의 설명을 들어보자

이 종택은 청계 김진(金璡) 공의 셋째 아들인 운암 김명일(金明一) 선생의 종택으로 영조 30년(1754)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선생의 아호가 운암(雲巖)인 것은 분가한 마을 앞 상류에 있는 운건암(雲蹇巖)에서 취한 것이다.
이 종택은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가옥으로 평면은 일반적으로 널리 취하고 있는 사대부가의 ㅁ자형이다

정침은 민도리 양식의 팔작지붕으로 홑처마이다. 사랑채는 굴다리양식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홑처마이다.
안채는 일자형을 중심으로 좌,우익사를 달고 중문 쪽으로 방과 광을 연결시켜 ㅁ자형이다

사랑채는 안채의 평면에서 완전히 벗어나 따로 돌출된 독립공간을 이루고 있다

 

운암 선생은 아우 학봉 김성일과 함께 퇴계 선생에게 수학하였고 명종 19년에 성일, 복일 아우와 더불어

삼형제가 나란히 생원시에 동방으로 합격하였다. 선생은 본래 몸이 허약하여 학문과 더불어

조용히 전원에서 자적(自適)하려했으나 부모의 뜻을 따라 태학에 유학하여 선조 2년에 향시에 합격하였다

이듬해에 회시를 보기 위하여 상경하는 길에 병이 더하여 고향으로 되돌아오던 중 경기도 용인에서 37세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종택앞의 소박한 길 단장

 

또다른 분의 설명을 옮겨본다. 풍수지리와 고고학 전문가 분이신 것 같은데 어떤 분이신지는 모르겠다.

 

人傑地靈의 명당, 선비정신의 산실

의성김씨 종택은 권력의 부조리를 정면에서 고발하는 기백과 목숨을 내건 의리로 인해 조선시대

금부도사가 세 번이나 체포영장을 들고 오는 수난을 겪었다. 또 비범한 인물들을 배출한 내앞 종택의 산실(産室)은 이문열의 소설 소재로 등장할 만큼 이야깃거리가 풍부하다.

 

 

안동에 있는 의성김씨(義城金氏) 종택을 찾아간다.

안동 시내에서 동쪽으로 반변천(半邊川)을 따라 30

리를 올라가다 보면 국도 연변 좌측에 고풍어린 기

와집들이 즐비하게 자리잡은 풍경이 나타난다. 바로

5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의성김씨 집성촌이다.

그 기와집들 가운데에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년)을 중시조로 모시는 의성김씨 내앞

(川前) 종택이 나그네의 눈길을 끈다. 내앞 종택은

조선 선비의 강렬한 정신이 어려 있는 곳이기 때문

이다. 그 강렬함이란 권력의 부조리를 정면에서 고

발하는 직언(直言) 정신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

을 내놓은 기백을 가리킨다.

내앞 종택은 그 기백과 의리 때문에 조선시대 금부도사(禁府都事)가 직접 체포영장을 들고 찾아와

종택 뜰에 말을 매는 일대 사건을 세 번이나 겪어야 했다. 안동지역 인근에서 회자되는 ‘유가(儒家)

에는 3년마다 금부도사가 드나들어야 하고, 갯밭에는 3년마다 강물이 드나들어야 한다’는 속담은,

 자신의 신념과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 금부도사의 체포영장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영광으로

받아들였던 조선 선비들의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언제부터인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를 과도하게 명심한 나머지 자나깨나 모나지 않기 위해서 박박

기는 삶을 전부로 알고 있는 범부들의 처세 요령과 비교해 보면 너무나 차원이 다른 처세이자 정신

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내앞 종택은 조선 선비의 기개가 전해오는 집이다.

의성김씨 내앞 종택에 전해오는 선비정신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안동문화의 특징

을 간단하게 짚어보는 것이 순서일 성싶다.

명문 종택의 고장

한국의 문화지도에서 안동이라는 지방을 찾아보면 ‘양반문화’라는 코드가 나타난다. 다른 지역에

비해 조선시대 양반 선비들의 문화가 현재까지도 가장 잘 보존된 지역이 안동 일대다.

필자의 주관적인 판단인지는 몰라도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의 풍습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곳이 안동이다. 문중 제사가 있으면 전국에서 모여들고, 외부 손님이 왔을 때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내색하지 않고 정성을 다해 맞이하는 고풍을 간직하고 있다. 필자는 ‘전라도 사람’으로서

수년 동안 안동 일대를 여러 차례 답사했는데, 그때마다 안내를 맡은 청년유도회(靑年儒道會)의

 정성어린 접대를 받으면서 접빈객의 유풍(遺風)이 살아 있음을 실감한 바 있다.v 그런가 하면 종

가에 대한 애착도 각별한 것 같다. 종손의 자녀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대학 등록금을 내지 못하면 지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갹출해서 대신 내주는가 하면, 종가의 건물을 보수하고 선조들의 문집을 번역 출판하는 이른바 ‘보종(補宗)’에도 아주 열심이다. 전국적으로 볼 때 조선시대 선비들의 문집 간행이 가장 활발한 곳 역시 이곳이다.

수백년 역사를 지닌 종택들이 가장 많이 보존되고 있는 곳도 안동 일대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의성김씨, 진성이씨, 안동권씨, 고성이씨, 하회류씨, 전주유씨, 재령이씨, 광산김씨 등등 명문종택 수십 군데가 안동, 봉화, 영양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종택이 안동 일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일대에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일제 36년의 굴욕, 6·25전쟁의 겁살, 산업화로 인한 인구의 대도시 집중, 그리고 유교의 봉제사가 광복 이후 전파된 기독교의 반제사(反祭祀)와 정면으로 문화적 충돌을 겪는 과정에 유교적 풍습과 그를 뒷받침하던 종택(종가)들은 서서히 사라지고 와해돼 왔다.

그러한 역사의 풍파를 겪으면서도 유독 안동 일대만큼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유교문화의 순도를

 유지하고 있다.

왜 그런가? 오늘날 안동 일대에 유교문화 또는 양반문화가 비교적 많이 보존돼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안동 내앞의 의성김씨 종택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다.

풍수가에서 지목하는 영남의 4대 길지는 경주의 양동마을(良佐洞), 풍산의 하회(河回), 임하(臨河)의 내앞, 내성(乃城)의 닭실(酉谷)을 꼽는다. 양동마을은 건축학자 김봉렬의 표현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평창동에 해당되는 고급주택지로서 손중돈과 이언적의 후손들이 사는 곳이다. 하회는 겸암과 서애로 상징되는 류씨들 동네고, 내앞은 의성김씨, 닭실은 충재의 고택으로 뜰 옆 거북바위 위에 앉아 있는 청암정(靑巖亭)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4대 길지 가운데서 양동마을을 제외한 세 군데, 즉 하회·내앞·닭실이 안동 부근에 몰려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종택 뒷 산자락에 있는 "운암정". 문틀의 문종이가 누군가의 장난에 의해 찢기어져 있다.

 

‘택리지’의 4대 길지

그런가 하면 ‘택리지(擇里志)’의 저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2년)은 조선에서 양반선비가 살 만한 가장 이상적인 장소로 경북 예안(禮安)의 퇴계 도산서원이 있는 도산(陶山)·하회·내앞·닭실을 꼽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 풍수가에서 꼽는 영남의 4대 길지와, ‘택리지’에서 지목한 4대 길지 가운데 세 군데가 중복된다는 점이다. 하회·내앞·닭실이 그렇다. 이중환은 경주의 양동마을 대신 퇴계가 살던 도산을 포함시킴으로써 안동 일대 네 군데를 모두 조선의 베스트 명당으로 꼽은 것이다.

이중환은 어떤 기준으로 안동 일대를 선비의 가거지(可居地)로 본 것일까? 여기에는 이중환이 살던 당대의 정치 경제적 상황과 유교적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이중환이 생각하였던 길지의 기준은 첫째 지리, 둘째 생리(生利), 셋째 인심(人心), 넷째 산수(山水) 네 가지였다. ‘택리지’에서 안동 일대를 선비가 살기에 최적지라고 지목한 이유는 이상 네 가지 조건에서 모두 높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 조건을 필자의 소견으로 다시 한 번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리, 즉 풍수를 보자. 경상도는 충청과 호남에 비해서 전체적으로 산세가 높고 가파른 편이지만, 안동 일대만큼은 예외적으로 높지 않은 산들이 고만고만하게 포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위가 뾰족뾰족 돌출된 악산(惡山)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문사(文士)들이 좋아하는 온화하고 방정한 산세에 가깝다.

한반도 전체의 지맥을 놓고 보자면, 척추인 백두대간에서 부산 쪽으로 내려가는 낙동정맥과 태백산에서 방향을 틀어 속리산 쪽으로 내려가는 다른 한 맥의 분기점 중간에 안동 일대가 있다.

흔히 기공(氣功)이나 단전호흡, 쿤달리니 요가를 수련하는 방외일사(方外逸士)들 사이에 종종 화제에 오르는 ‘양백지간(兩白之間)’이 바로 이곳이다. 양백지간이란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를 일컫는 표현으로, 크게 보면 안동 일대, 즉 봉화, 춘양, 안동, 영양 지역이 양백지간에 해당하는 곳이다.

흰 백(白)자가 들어가는 산들은 백의민족이 정신수련을 하기에 적합한 산이라고 일컬어지는데, 태백과 소백은 바로 그러한 신령한 산일 뿐 아니라 이 지역 일대가 현재까지 남한에서 가장 덜 오염된 지역이고 기운이 맑은 곳이라고 평가된다. 경상도가 충청이나 호남보다 먼저 공업화의 길을 걸었지만 주로 낙동강 중하류인 대구와 부산 쪽이 오염되었지, 낙동강 상류인 이곳 양백지간은 오지라서 공장도 거의 들어서지 않은 덕택에 현재도 비교적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둘째, 경제적 조건인 생리 부문이다. 조선시대의 가치관으로 볼 때 사대부가 장사를 하면서 재리(財利)를 취할 수는 없었고, 기껏 한다면 농사나 짓고 사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경상도의 산간지역보다는 호남의 넓은 평야지대가 농사짓기에 훨씬 유리할 것 같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 지리학자 최영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호남평야의 범위가 현재보다 훨씬 좁았으며, 바닷가의 들(갯땅)에는 소금기가 많고 관개시설의 혜택을 고르게 받지 못하여 한해와 염해를 자주 입는 곳이 많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들판보다는 약간 내륙 쪽의 고래실(구릉지와 계곡이 조화를 이룬 지역)에 사대부들이 많이 거주하고 바닷가의 들에는 주로 가난한 농민이 거주하였다. … 기계화의 수준이 낮은 농경사회에서는 홍수의 피해가 크고 관개가 어려운 대하천보다 토양이 비옥하고 관개가 용이한 계거(溪居)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최영준, ‘국토와 민족생활사’, 84쪽)

조선시대에는 관개시설도 부족하고 염해가 발생하는 평야보다는 오히려 내륙의 냇물이 흐르는 곳이 농사짓기에 적합했다는 지적이다. 산이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높은 산도 아니라서 적절한 구릉과 계곡이 이곳 저곳에 형성되어 있는 낙동강 상류지역은 바로 이러한 입지조건에 해당한다.

지형도에 나타난 지명을 통계적으로 분석한 연구에 의하면, 지명에 계곡을 나타내는 골(谷)이라는 접미어가 붙은 곳이 조선시대 안동부에 속하는 안동, 봉화에 각각 27%와 28%로 전국 최고 비율을 점하고 있으며, 골과 같은 의미인 ‘실’과 ‘일’을 더하면 35%, 32%로 역시 전국 평균 19%보다 훨씬 높다고 한다(정원진, ‘한국인의 환경지각에 관한 연구’, 1983)

 

 

냇물가에서 살아가기

‘택리지’에서 이중환이 제시한 지리, 생리, 인심, 산수라는 네 가지 조건을 이상적으로 갖춘 곳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바로 ‘계거(溪居)’다. 계거란 냇가에서 사는 것을 말한다. 바닷가 옆에서 사는 해거(海居)보다는 강 옆에서 사는 강거(江居)가 낫고, 강거보다는 냇가에서 사는 계거를 더 높게 쳤다. 그래서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계거를 이상적인 입지조건으로 인식하였다.

의성김씨 내앞 종택은 바로 그러한 계거의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내앞’(川前)이란 이름도 반변천(半邊川)이라는 냇물 앞에 자리잡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이 집안의 중시조인 청계(靑溪) 김진의 호에 ‘계(溪)’자가 들어간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그런가 하면 내앞과 인근지역인 도산(陶山)에 살면서 청계와 거의 동년배였던 퇴계(退溪) 이황도 그 호에 역시 계자가 들어가 있다.

대략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중반까지의 시기에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명문거족의 집들이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내앞 종택은 경북 영양군에 위치한 일월산(日月山, 1219m)의 지맥(支脈)이 동남방으로 내려오다가 서쪽으로 흘러오는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과 만나면서 자리를 만든 곳이다. 반변천은 마을 앞을 휘돌아 나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모래밭을 형성하였다.

이름하여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 밝은 달 아래에서 귀한 사람이 입는 옷(紗)을 세탁하는(浣) 형국이란 뜻이다. 여기서 완사는 반변천의 맑은 모래밭을 상징하는 것 같다. 모래밭과 밝은 달, 추월양명휘(秋月揚明輝)라고 하였던가.

내앞 종택은 봄이나 여름보다는 가을밤에 둥그런 달이 떴을 때 부서지는 월광 속에서 바라보아야 완사명월의 아름다움을 알 것 같다. 종택 옆의 경포대(鏡浦臺)나 다추월(多秋月)이라는 지명은 가을달의 아름다움을 입증하고 있다. 강릉 경포대보다 가을 달이 더 많이 비친다고 해서 다추월이라고 이름을 붙였단다.

내앞 종택의 풍수지리적인 조건을 살펴보자. 이 집터를 자세히 보면 집 뒤 반달 모양의 입수맥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지 않고 왼쪽으로 치우친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통상 입수맥의 가운데 센터에 집을 앉히는 것과는 다르다.

그 이유는 집 앞에 있던 조그만 연못에서 찾아야 한다. 지금은 메워져서 밭으로 변하고 말았지만 원래 이 연못은 풍수적으로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하는 장치였다. 이 연못은 집터의 기운을 한곳으로 집중시켜 주는 기능도 하고, 밖의 외기와 안의 내기가 서로 교류하면서 집터의 기운을 순환시켜 주는 작용도 한다.

풍수에서는 터의 바로 앞에 위치한 연못이나 샘, 또는 방죽을 혈구(穴口)라고 부른다. 혈구란 혈자리의 입구이자 입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혈구가 있어야 집터의 기운이 다른 곳으로 분산되지 않고, 음기와 양기가 서로 들락거리면서 집터 안에 생기를 유지한다. 인체에 비유하여 설명하면 집터가 코 끝에 자리잡는다고 하면, 혈구는 입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터와 혈구는 일직선상에 놓여 있어야 법식에 맞다. 즉 얼굴의 코와 입이 제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만약 집터와 혈구가 대각선이 되거나 또는 각도가 어긋나서 비뚜름하게 있으면 그 집터는 풍수의 법식에 맞지 않다고 간주한다. 바꾸어 말하면 애시당초 터를 잡을 때 혈구와 일직선상에 맞추어서 터를 잡아야 한다는 말이다.

내앞 종택을 보면 집터를 잡을 때 이 연못과 집의 대문이 거의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방향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혈구의 방향에 직선으로 일치하는 곳에 집터를 잡다 보니까 입수맥의 좌측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혈구와 일치하지 않은 집터일 경우는 그 효과가 반감된다고 본다. 또 명당에는 반드시 혈구가 코앞에 있고, 혈구가 없다면 그 터는 A급 명당은 못 된다. 터는 좋은데 혈구가 없어서 인위적으로라도 땅을 파서 만들어 놓은 사례도 많은데, 묘터나 집터 앞에 인공적으로 방죽을 조성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내앞 종택의 터는 대문 앞쪽으로 30m쯤 떨어져 있던 이 혈구(연못)가 명물이라서, 풍수가에서는 ‘의성김씨 종택에 가거들랑 혈구 먼저 보아야 한다’는 말이 전해져왔다. 그러나 몇 년 전에 필자가 처음 이곳에 답사를 와서 혈구를 확인하려 해도 찾을 수 없었다. 이번 답사에서 안내를 해준 김종선(金鍾善)씨는 옛날에는 이 연못에서 낚시질도 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60년대 중반 흙으로 메워 밭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현재 도로 옆에 보이는 밭이 그것인 모양이다.

그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한숨이 나왔다. 지금이라도 연못을 원상복구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풍수서에 기록된 바로는 양택 앞에 연못으로 된 혈구가 있으면 ‘삼원불패지지(三元不敗之地)’의 명당이라고 일컫는다. 1원(元)은 60년이므로 180년 동안 패하지 않고 오래가는 명당이라는 뜻이다.   

   

        사람마다 그 느낌이 다르겠지만 보도블록(토목용어로 인터로킹이라 한다)보다는 흙길에 군데군데

                                                       넓고 평평한 돌을 놓았으면 더 좋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룡지가(五龍之家)의 명문

내앞 의성김씨들이 명문가로 알려진 계기는 중시조인 청계의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면서부터다.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오자등과택(五子登科宅)이다. 일제 강점기에 촌산지순(村山智順)이 지은 ‘조선(朝鮮)의 풍수(風水)’에도 명택의 사례로 완사명월형에 자리잡은 오자등과택이 소개되고 있다. 다섯 아들을 오룡(五龍)에 비유해서 오룡지가(五龍之家)라 칭하기도 했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보면 아들 다섯 명이 과거에 합격하면 국가가 혜택을 주었다. ‘아들 다섯이 과거에 오른 부모에게는 임금한테 보고하여 해마다 쌀을 보내 주었으며, 부모가 죽으면 벼슬을 추증하고 제사를 지내준다’는 예전(禮典)의 조항이 그것이다.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한 것도 드문 일이지만, 그 다섯 아들 모두가 학행이 뛰어난 선비로서 각각 일가를 이루었다는 사실은 더 중요하다.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 1522∼1585년), 구암(龜峯) 김수일(金守一, 1528∼1583년), 운암(雲岩) 김명일(金明一, 1534∼1570년),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년),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 1541∼1591년)이 바로 그들이다. 장남인 약봉은 내앞의 대종택에서 살았지만, 나머지 네 아들은 안동 인근으로 분가하여 각기 소종택을 형성하였다. 이 소종택들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버지인 청계의 교육방법이다. 어떻게 교육했기에 아들 다섯을 모두 과거에 합격시켰을 뿐만 아니라,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강직한 선비로 키울 수 있었을까? 그 교육철학은 무엇이었는가?

청계가 자신의 성취보다는 자녀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 일화가 전해진다.

청계가 젊은 시절 서울 교외의 사자암에서 대과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어떤 관상가를 만났는데 하는 말이 “살아서 참판(參判)이 되는 것보다는 증판서(贈判書)가 후일을 위해 유리할 것”이라는 충고였다. 이 말을 듣고 즉각 대과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녀교육에 전념하였다는 일화가 문중에 전해진다. 청계가 자녀교육에 관하여 유별나게 관심을 기울인 특별한 아버지였다는 것은 자식들의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넷째 아들 학봉이 작성한 아버지 행장에는 가슴 뭉클한 내용이 나온다.

“큰형이 과거에 급제하고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자녀가 모두 8남매나 되었는데, 대부분 어린아이거나 강보 속에 있었다. 이에 아버지께서 온갖 고생을 다해 기르면서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한밤중에 양쪽으로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있으면 어린아이가 어미젖을 찾는데 그 소리가 아주 애처로웠다. 이에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젖을 물려주었는데, 비록 젖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아이는 젖꼭지를 빨면서 울음을 그쳤다. 아버지께서 이 일을 말씀하실 적마다 좌우에서 듣는 사람 중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린 새끼들이 밤에 젖을 찾으니 중년 남자인 자신의 젖을 물릴 정도로 자녀양육에 온갖 정성을 기울인 인물이 청계다. 그는 인근에 살던 퇴계에게 다섯 아들을 보내 공부시킨다. 다섯 아들은 일찍부터 퇴계의 훈도를 받은 것이다. 그중 넷째 아들인 학봉은 후일 서애 유성룡과 함께 영남학파를 이끄는 양대 기둥으로 성장한다.

청계가 자녀교육에서 강조했던 부분이 있다. 교육철학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영수옥쇄(寧須玉碎) 불의와전(不宜瓦全)’의 가르침이다. ‘차라리 부서지는 옥이 될지언정 구차하게 기왓장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차라리 곧은 도리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도리를 굽혀서 살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런가 하면 평소에도 ‘너희가 군자가 되어 죽는다면 나는 오히려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아줄 것이고, 소인이 되어 산다면 나는 오히려 죽은 사람과 같이 볼 것이다(人寧直道以死 不可枉道以生 汝等爲君子而死 則吾視猶生也 爲小人而生 則吾視猶死也)’고 강조하였다.

직도(直道)를 위해서라면 과감하게 목숨을 버리라는 가르침, 선비 집안에는 3년에 한 번씩 금부도사가 찾아올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각오, 이것이 조선조 선비정신의 정수가 아닌가 싶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회 중에 미꾸라지 회가 제일이다’는 자기 보존의 남루한 처세요령을 가지고,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는 요즘 세태와 비교해보면 너무나 눈부신 철학이 아닐 수 없다.

   

임금에 직언하는 강직한 성품

넷째 아들인 학봉 김성일의 강직한 일화가 ‘조선왕조실록’에 전해진다. 1573년 9월 학봉이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선조가 경연장에서 “경들은

나를 전대(前代)의 어느 임금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정언 정이주가 “요순 같은 분이십니다”라고 대답했더니, 학봉이 “요순도 될 수 있고 걸주(桀紂)도 될 수 있습니다”라고 응답했다. 임금이 “요순과 걸주가 이와 같이 비슷한가?”라고 물으니 학봉이 “능히 생각하면 성인이 되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치광이가 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타고난 자품이 고명하시니 요순 같은 성군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스스로 성인인 체하고 간언(諫言)을 거절하는 병통이 있으시니 이것은 걸주가 망한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주상이 얼굴빛을 바꾸고 고쳐 앉았으며 경연에 있던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 서애 유성룡이 나아가 아뢰기를 “두 사람 말이 다 옳습니다. 요순이라고 응답한 것은 임금을 인도하는 말이고 걸주에 비유한 것은 경계하는 말이니, 모두 임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임금도 얼굴빛을 고치고 신하들에게 술을 내게 하고서 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보통 직장생활에서 윗사람이 듣기 거북한 직언을 하고 나면, 그 후유증이 최소 3년은 계속되어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런데 학봉은 임금 면전에다 대놓고 “스스로 성인인 체하고 직언을 거절하는 병통이 있다”는 직언을 할 정도로 기백이 있었다. 학봉의 그 기백은 어디서 나왔을까. 이는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이다. 아버지 청계의 평소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학봉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풍신수길을 평하여 “그 눈이 쥐와 같으니 두려워할 것 없다”라고 했던 말이 임진왜란 상황을 오판하게 했다고 하여 체포령이 내렸다. 학봉은 그 소식을 듣자 금부도사를 기다릴 것도 없이 서울로 자진출두하였다. 출두하던 도중 충청도 직산에서 경상도초유사를 임명받고 영남으로 돌아와 왜군과 싸우게 되었다.

학봉이 진주성에 도착하니 목사와 주민이 모두 달아나 성은 텅텅 비어 심난한 상황이었다. 옆에 있던 송암(松庵), 대소헌(大笑軒) 두 사람이 산하를 쳐다보고 비통해하면서 강에 빠져 죽자고 하자 공은 웃으면서 사나이가 한번 죽는 것은 어려울 바 없으나 도사(徒死)해서야 되겠느냐 하면서 이때의 비장한 심정을 시로 읊었다. 이 시가 식자층 사이에 회자되는 ‘촉석루중삼장사(矗石樓中三壯士)’라는 유명한 시다.

‘촉석루에 오른 세 사나이(矗石樓中三壯士)/ 한잔 술 마시고 웃으며 남강물 두고 맹세하네(一杯笑指長江水)/ 남강물은 넘실대며 세차게 흐르누나(長江之水流滔滔)/ 저 물결 마르지 않듯 우리 혼도 죽지 않으리(波不渴兮魂不死).’

학봉은 이 시를 쓰고 난 후 임진왜란 삼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진주대첩을 이끌었다. 그리고 얼마 있다 진주공관에서 과로로 죽는다. 평소 학봉을 미워하던 서인들도 그 죽음을 애석해했다고 전해진다.

학봉의 성품이 강직하고 의리가 있었다는 것은 임진왜란 때 전라도 의병장 제봉 고경명 장군(霽峰 高敬命, 1533∼1592년)도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광주에서 살던 제봉은 아들 종후(從厚) 인후(仁厚)와 함께 전쟁터로 나가면서 셋째 아들인 용후(用厚, 당시 16세)만큼은 나이도 어린 데다 대를 잇기 위해서 안동의 학봉 집안으로 피란하라고 당부한다. 학봉집은 의리가 있는 집이니까 네가 가면 틀림없이 돌보아줄 것이라며. 이때 고용후는 안동에 혼자 간 것이 아니라 아녀자를 포함한 가솔 50여 명과 함께 피신을 갔다고 한다.

학봉 가족도 이때 임하(臨河)의 납실(猿谷)이라는 곳에 피란하고 있는 중이라 산나물로 죽을 끓여 연명하면서도, 학봉의 장남 애경당(愛景堂) 김집(金潗)은 이들과 같이 동고동락하였다. 고용후는 이곳에 머물면서 아버지와 형들을 포함한 칠백의사가 모두 금산(錦山)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비보를 접했으며, 학봉부인과 김집은 상주가 된 고용후가 예법에 맞게 장례를 치르도록 도와주고 정성껏 보살펴주었다. 고용후는 50여 명에 달하는 식솔들과 함께 학봉집에서 3∼4년쯤 머물다가 전라도로 되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다.

고용후는 학봉집에 머물 당시 학봉의 손자인 김시권(金是權)과 같이 상을 당한 처지고, 거의 동년배라서 서로 격려하며 함께 공부하였는데, 이 둘은 1605년 서울의 과거 시험장에서 반갑게 해후하였으며 고용후는 생원과에 장원으로, 김시권도 동방(同榜)으로 진사급제를 하였다. 그 후 10년이 지난 1617년 안동부사로 부임하게 된 고용후는 파발마를 보내 학봉 선생 노부인과 장자 김집을 안동관아로 초대하여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잔칫날 고용후는 “소생에게 오늘의 영광이 있는 것은 후덕하신 태부인(太夫人)과 애경당(愛景堂)의 20년 전 은혜 덕택입니다. 두 분의 은덕이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이 있겠습니까?” 하고 울면서 큰절을 올렸다. 비슷한 연배인 고용후와 김시추, 김시권 형제는 그 후로도 친형제처럼 서로 돕고 의지하며 지냈다. 영·호남 간의 이념적 동지들 사이에 피어난 아름다운 이야기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종택들 대부분이 안고있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종손이 그곳에 사는이가 적다는 것이다.문화재가치가 인정되어 보수비는 지원 받을 수 있을지 모르나,사람이 살지 않는 것은    어찌 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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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4.02 13:15

    첫댓글 좋은 글을 잘 보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운암종택은 청계공 셋째 아들 운암 김명일공의 종택으로 임하면 신덕동에 있고,
    운암종택이지, 내앞종택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내앞종택은 川前(내앞)에 있는
    청계공 김진 공의 종택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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