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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근원의 무형의 주시자
켄 윌버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여러 전승에서 말하듯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죽음에 대해 말하자면 신비가들은 만장일치로
죽음이 삶의 비밀을,
사실은 영원한 삶에 대한 비밀을 담고 있다고 한다.
어디서나 신비가들에 의해 울려퍼지는 에크하르트의 말처럼 말이다.
"철저하게 죽은 사람만큼 신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면 라마나 마하리시의
"존재를 멈추는 곳에 영광이 있음을 적당한 때에 알게 될 것이다" 나
"살아 있는 동안에는 완전히 죽은 사람처럼 살라" 의 말처럼,
그들은 육체적인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분리된 자아의 감각을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상상함으로써
죽음에 관한 스스로의 영적 의식을 시험해볼 수 있다.
1
어느 유명한 禪의 공안에서는
"그대의 근원적 면면, 그대의 부모님이 태어나기 전에 가졌던 면면을 보여 달라" 라고 한다
이것은 농담이나 상징적 질문이 아니다.
분명하고 간단한 답이 있는 매우 직설적인 질문인것이다.
우리의 근원적 면면은 다시 현시된 세계와 이전의 순수한 무형의 주시자다.
그 자체가 시간을 초월한 또는 시간에 앞서는 순수한 주시자는
시간의 모든 시점에서 똑같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것은 당연히 우리의 부모님이 태어나기 전에 가졌던 참나다.
빅뱅 이전에도 가졌던 참나다.
또한 우리의 몸, 그리고 모든 우주가 사라진 후에도 갖게 될 참나다.
이 참나는 시간과 시대에 앞서 존재했다.
그리고 그저 바로 지금 순수한 주시자 안에서 안식함으로써,
우리의 부모님이 태어나기 전에 가졌던 참나에 직접 접촉할 수 있다.
이것들은 바로 지금 또 바로 지금, 하나이자 똑같은 무형의 참나인 것이다.
우리의 부모님이 태어나기 전에 우리가 무엇이었을지 "상상함"으로써 우리는
현재의 신체 그리고 에고와의 모든 동일시를 버리도록 강요받는다.
실제로 우리를 넘어서는 우리 안의 무엇,
즉 순수하고 비어있는 무형의 영원한 주시자
또는 근원적 참나를 발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영원한 주시자로서 안식할 수 있기 위해서
"나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정도까지 우리는 분리된 자아를 버리고
우리의 근원적 면면, 우리 부모님이 태어나기 전에
또 빅뱅 이전에
그리고 시간이 태어나기 전에 가졌던 얼굴을 발견하는 것이다.
실제로 광대한 불생자, 단지 이것을 발견한 것이다.
2.
이와 비슷하게 , 우리가 죽고 백년 후에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를 상상해 보라.
구체적이고 상세한 모습은 상상할 필요가 없고, 그저 우리가 사라지고 백년 후
세상의 모습을 인식해보라, 우리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정말 많은 것이 변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 다른 기술들, 다른차와 비행기들.
그러나 한 가지는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가지 , 즉 空, 일미, 영은
똑같을 것이다.
자ㅡ 우리는 그것을 바로 지금 맛볼 수 있다.
하나의 똑같은 무형의 주시자는
모든 눈을 통해 내다보고 모든 귀로 듣고 모든 손으로 만질 것이다.
바로 지금 우리 자신의 근원적 참나인 무형의 주시자,
바로 지금 우리의 것인 똑같은 일미,
바로 지금 우리의 것인 똑같은 찬란한 영이.
천년 전에 우리는 다른 사람이었는가?
영원히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존재인 이 하나의 참나는 무엇인가?
우리는 시간의 거짓말을 믿어야 하는가?
하나의 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미친 소리를 곧이곧대로 들어야 하는가?
모든 세상에서 하나, 단 하나만이 존재하는 우리의 근원적 면면을
바로 지금 보여 줄 수 있는가?
양자역학의 공동 창설자인 노벨상 수상자
에르빈 슈레딩거의 말을 들어보자.
이 말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라는 것을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의식은 그 복수형이 알려져 있지 않은 단수다."
우리가 자기 자신이라고 부르는 지식과 감각, 그리고 선택의 이 통일체가
오래지 않은 어느 일정한 순간 無로부터 갑자기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은 있음직하지 않다.
그보다는 이 지식과 감각 그리고 선택은 본질적으로 영원하고 불변하며,
모든 사람들 아니 모든 지각 있는 존재에 있어 수적으로 하나인 것이다.
우리의 존재 상태는 거의 바위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수천년 동안 남성은 싸우고 고통받고 자식을 얻었으며
여성은 고통 속에 아이를 낳아왔다.
백년 전에 거기에 영적 시험이 있다.
또 다른 남자가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빙하 위에서 사라져가는 빛을 두려움과 동경으로 바라보면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남자로부터 잉태되어 여자에게서 태어났다.
그 역시 우리처럼 고통과 잠깐의 기쁨을 느꼈다.
그는 다른 사람이었는가?
우리, 우리 자신이 아니었는가?
그것은 우리 자신, 우리의 근원적 참 나가 아니었는가?
우리는 인류 그 자체가 아닌가?
우리는 그 유일한 주시자이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것을 어루만지지 않는가?
따라서 우리는 그 유일한 참나이므로
세상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온 우주를 사랑하지 않는가?
누군가 다쳤을 때 눈물을 흘리지 않는가?
한 아이가 굶주릴 때 울지 않는가?
누군가 고문을 당할 때 비명을 지르지 않는가?
다른 이들이 고통받을 때 자신이 고통받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이미 이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였는가?
우리, 우리 자신이 아니었는가?
3,
천년 전에 자신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또는 천년 후에 어떤 모습일지를 생각함으로써
우리는 지금의 신체 그리고 에고와의 동일시를 버리고
우리를 넘어서는 우리 안의 무엇,
즉 순수한 무형의 영원한 참나 또는 모든 세상의 주시자를 발견한다.
매일 24시간마다 자신의 에고와의 동일시를
그저 상상 속의 연습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완전히 버리는 것이다.
매일 밤 꿈 없는 깊은 잠에서 형태가 없는 영역 속으로,
대상이 없는 순수한 의식의 영역 속으로,
형태가 없는 영원한 참나의 영역 속으로 다시 던져지는 것이다.
이것이 라마나 마하르시가
"꿈 없는 깊은 잠 상태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실재가 아니다" 라고 한 이유다.
참된 실재는 꿈 없는 깊은 잠 상태를 포함한
세 가지 상태에서 모두 존재해야 하며,
세 가지 상태에서 모두 존재하는 유일한 것은
무형의 참 나 또는 순수한 의식이다.
그리고 매일 밤 우리는 분리된 자아의 감각을 버리고,에고를 버리고,
우리의 근원적 면면인 무한의 바다 속으로 다시 던져지는 것이다.
이런 세 가지 경우 -
우리 부모님이 태어나기 전에 우리가 가졌던 참 나,
지금으로부터 백년후에 갖게 될 참 나,
꿈없는 깊은 잠에서 갖는 참 나,
모두 하나의 같은 것을 가리킨다.
즉 우리를 넘어서는 우리 안의 영원한 주시자,
모든 형태와 하나인 순수한 공,
근본적인 일미 안에서 모든 것을 감싸 안는 근원적 참 나를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눈물과 공포를 가졌음에도
결코 시간의 타락한 흐름 속으로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그러고 보면 궁극적인 영적시험은 그저 죽음에 대한 우리의 관계인 것이다.
바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궁극적 진실을 알고 싶다면,
그저 그런 시험중에 아무것에나 맡겨 보라.
점성술을 연습하는 것?
꿈 없는 깊은 잠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늑대와 함께 달리는 것?
백년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영혼에 대한 배려?
꿈없는 깊은 잠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우리 내면의 아이를 치유하는 것?
우리의 부모가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전생을 기억한다고?
꿈없는 깊은 잠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영을 깨끗히 하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는 것?
백년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가이아 숭배?
꿈 없는 깊은 잠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그런 상대적 수행과 변환적 믿음 모두 그 자체로 괜찮고 아주 유용할 수 있다.
정말로, 어떤 것도 과소평가하길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부차적이라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안된다.
광대한 불생자, 우리의 근원적 면면에 비하여, 그리고
모든 그 빛나는 형상, 이따금씩 언제까지라도 언제나 그리고
이미 우리 자신의 존재와 형상이 갖는 형상 안 靈의 면면에 비하여.
그것은 다른 누군가였는가?
우리, 우리 자신이 아니었는가?
첫댓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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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참나" 꼭 만나고 싶은 나의 본질.....언젠가는 만나고 일체되겠지요^^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 잚못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