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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카페 게시글
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소호헌(蘇湖軒)
이장희 추천 0 조회 34 14.04.01 21: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소호헌(蘇湖軒)

 

          구안국도(大邱~安東간 國道)를 따라서 안동에 다다르기 전에 "일직"이란 면소재지가 있다.

                               일직면에 들어서기 직전에 구안국도의 일직I.C를 빠져 나오면 기품있는 기와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곳이 무엇이다하고 미리 알지 못하면 그냥 지나치기 쉽상이기도 한 곳이다.

         사실 나도 몇 번을 지나가면서 그저 옛날 기와집들이 모여있는 곳이구나 하는 정도로만 인식되어진

        곳이기도하다. 저 기와집이 무엇일까? 도로에서도 보이지만 왕복 4차로의 국도를 거침없이 달리는

       차량때문에 갓길에 차를 세우고 살펴보기란 위험 천만한 일이다.

             넓지않은 길을 따라 주차 할 만한 곳을 찾아서 내려보니 소호헌(蘇湖軒)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소호헌은 조선 중종 때 문신 서해 선생이 서재로 쓰기 위해 명종(재위 1545∼1567) 때 지은 별당이다.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부속된 방은 지붕 양식이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왼쪽 3칸은 대청, 오른쪽 1칸은 누마루며 앞쪽으로 온돌방 2칸을 붙여 집의 구조가 T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간략한 새 날개 모양의 구조로 꾸몄다.
누(樓)마루와 온돌방 뒤쪽으로 난간을 둘렀고 건물 안쪽은 민가 건축에서 볼 수 없는 재료를 사용하여 지붕 맨 윗부분에 있는 재료를 받치고 있다.

기와에 새겨진 용 두 마리가 나는 문양은 민가에서 보기 드문 것이며 건물에 나타나는 오래된 수법들은 조선시대 민가 건축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보물 475호로 지정 되어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여러 의견이 있겠으나 우리나라의 명문가(名門家)라 함은 일시적 권력에 의함이 아니라 신라,고려,조선을 통하여

긴 세월동안 명문가로서의 자격과 덕망이 있는 가문을 말하는데 이를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나라의 삼대 명문가는 광산(光山) 김씨(金氏)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연안(延安) 이씨(李氏)인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달성(達城) 서씨(徐氏)인 약봉(藥峰) 서성(徐 )집안을 들 수있다. 

 

우리 나라 서씨들의 본관은 일곱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이천(利川) 서씨(徐氏)가 신라 때의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삼고 있는데, 이 이천 서씨에서 달성 서씨와 대구 서씨가 갈라져 나왔다. 그런데 대구 서씨와 달성 서씨는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版圖), 판서(判書) 등을 지내고 나라에 큰공을 세워 대구의 옛 지명인 달성을 따서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진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는 판도공파(版圖公派)와 고려조 조봉대부(朝奉大夫)로 군기소윤(軍器少尹)을 지낸 서한을 시조로 하는 소윤공파(少尹公派)의 두 계통으로 나뉘어 있다. 이 두 파는 모두 달성에 세거하였으므로 서로 같은 집안인 줄은 알면서 지내고는 있으나, 전하는 문헌이 없어 두 집안의 정확한 관계를 여지껏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세종 때 사가정(四佳正) 서거정(徐居正)이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 때까지 6대의 왕을 섬기면서, 무려 45년 동안 육조의 판서와 대제학을 지내 가문의 세력을 잠시 떨쳤다. 그러다가 선조와 인조 때 약봉 서성이 나와 5도의 관찰사 및 3조의 판서를 지내면서 가문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약봉의 자손 중에서 3대 정승과 3대 대제학, 3대 대학자가 연이어 배출되면서, 1백여 년에 걸쳐 가장 현달한 가문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대구 서씨를 반석 위에 올려 놓은 약봉이 태어난 방. 태실이 있는 안채


  이조참의(李朝參議 )를 지낸 서고(徐固)의 셋째 아들 서해(徐?)는 어릴 때부터 학문이 뛰어 났고 후덕한 인품으

로 안동지방 향교의 장으로 추대되었다. 호는 함재(函齋), 23년의 짧은 생애였지만 퇴계 선생의 수제자로 동

문수학한 인물로는 서애 유성룡(西厓柳成龍),학봉 김성일(鶴峰金誠一),한강 정구(寒岡鄭逑)등이 있었다. 그러나

퇴계는 “나의 후계자는 서해가 될 것이다”라며 널리 자랑을 하기도 했다. 공의 덕망으로 하여 아드님이래 조선 중

기 이후 300여년간 기라성 같은 자손들이 줄을 이어 배출하여 명문대가를 이루었다. 공은 영의정(領議政)에 추증

(追贈)되었고 대구의 귀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시었다.



  함재의 부인 고성이씨는 안폐(眼廢)한(시력을 잃어버리신) 분이나 아들 약봉을 훌륭하게 키워 정경부인(貞敬夫

人)이 되었으며 신사임당과 더불어 3대 현모(賢母)로 숭앙받게 되었다.


이씨부인의 특수한 음식솜씨는 자부(子婦)에게로 이어져 소문이 왕실에까지 알려져 진상하기에 이르렀다. 선조

임금이 음식 맛에 감탄하여 약봉가(藥峰家)의 음식이니 약(藥)자를 붙여 약식(藥食),약과(藥果),약주(藥酒)라 명명

했다 한다. 오늘날 우리가 애용하는 약식, 약과, 약주 뿐만 아니라 다식, 산자, 강정 등이 이씨 부인의 창작 음식이

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함재의 외아들 서성(徐?)은 두 살 때 부친을 여의자 어머니 이씨 부인은 어린 선생을 성공시키기 위해 서울로 거

처를 옮겼고, 당시 서울에 계시던 성균사예(成均司藝)인 숙부 서엄에게서 자랐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달성, 자(字)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峰)이다. 대제학 서거정의 현손이고, 율곡

이이와 구봉 송익필의 문인으로 선조 19년(158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성균학유(成均學諭), 춘추관

검열(春秋館檢閱),봉교(奉敎),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예조,병조좌랑을 지내며 재주를 발휘했다. 임진왜란 때 왕

을 호종(扈從)하다 황정욱의 요청으로 종사관이 되었다.삼남지방(三南地方)암행어사, 제용감정(濟用監正)에 특

진, 도승지, 5개도 관찰사와 3조의 판서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613년(광해군5) 계축

옥사에 연루되어 11년간 단양,원주,영해로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형조판서에 복직하고 이어 병조판서가 되

었다.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에도 각각 왕을 호종했다.


  인조9년 4월 18일에 졸하니 춘추 74세다. 상감께서 철조(輟朝:조정휴무)를 2일 동안 하시고, 두터운 부의를 내

리고 치제(致祭)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증직하고, 시호를 충숙(忠肅)이라 했다. 
 

                                소호헌 마당 끝자락에 있는 250년된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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