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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신을 어디가 팔고 있는지.. 살던 대로 살다보니 늘 불만족스럽고 잠재적으로 하나님 앞에 짜증과 불만이 있는지.. 감사치 못한다는 것은 아직도 우리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것이고.. 우리가 놓쳐버린 많은 은혜들을 되찾아서 죽어도 좋다는 감사가 터져 나오게 하소서.
창세기 49장 8-12절.
8절,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9절,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절,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11절,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12절,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유다에게 이런 야곱이 축복을 했던 것은 야곱 언약이 품고 있는 그 내용이 한껏 펼쳐지고 있다,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이것은 유다자손에게 복이 온다고 해서 유다자손 그들이 대단하고 인격적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사람 대 사람을 상대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의식해서 보여주려고 합니다. 나 이만큼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로 잘났다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고 말았습니다.
야곱이 아들에게 축복하는 것은 신약으로 말하면 성령의 은사입니다. 은사라고 하는 말은 그 사람을 통해서 드러나는 겁니다. 그 사람이 잘난 것을 제거하는 일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강도라면, 누가 봐도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통해서 주님의 공로만 마음껏 드러나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은사가 드러나는 겁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그러한 일로 인하여 결과로 드러나는 것이 성령의 은사에요.
그것이 성령이 축복이라면, 따라서 오늘날 유다에게 복을 주었다면 유다가 훌륭하다는 인식을 하면 안 돼요. 기능이 달라서 그래요. 하는 일이 달라서 그래요. 그 예가 요셉을 통해서 나왔습니다. 요셉은 남이 갖지 않은 것을 추가적으로 짊어지고 간 겁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괴롭혀서 바깥에 드러나도록 했고 요셉은 그러한 작용에 말려든 겁니다. 요셉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훌륭하신 겁니다. 우리도 같이 훌륭하다고 해달라는 것은 마귀가 하는 짓입니다. 누구를 훌륭하다, 라고 하지 마세요. 그 사람이 얼마나 쥐어 터졌기에 그러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본인은 봉사할 만큼이 손톱만큼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목 졸라서 봉사하는 겁니다.
야곱이 지금 뭘 뒤집어썼어요. 야곱이 뒤집어 쓴 것이 야곱언약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찾아와서 야곱을 갖고 노시는 겁니다. 창세기 27장에서 이삭이 에서에게 사냥한 고기를 가져오면 축복을 준다고 하는 이것은 짜고 치는 고스톱입니다. 창세기 27장 29절,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이삭이 에서인줄 알고 축복한 것이 이거에요. 야곱이라고 생각도 못했어요. 축복받는 야곱은 에서인 듯, 에서 아닌 에서가 돼버렸다 이 말이죠.
야곱이 받은 것이 이삭언약인데, 언약을 받은 자가 언약의 실행자가 아니에요. 언약을 주신 하나님이 실행자가 되는 겁니다. 언약을 준 이삭이 언약의 방해자에요. 그 이삭을 닮은 자가 에서에요. 창세기 25장에서 배고픈 에서에게 야곱은 팥죽 냄새를 풍깁니다. 근데 어떻게 음식과 장자의 명분과 딜이 될 수 있습니까?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의 일관성, 맏이에게 복을 준다는 복 주심에 자기가 포함되고 싶었던 겁니다. 에서는 사람만 상대한 반면에 야곱은 하나님을 생각한 거예요. 지금 하나님은 일관성 있게 무엇을 목표로 해서 일을 하실까? 이것에 관심이 있었던 겁니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그 노선, 그 흐름이 있는 거예요. 야곱은 그 노선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싶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일, 약속은 야곱에게 필요했고 에서는 그 배고픔만 가시는 음식이 필요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에서는 돈이 필요했고 야곱은 영생의 복만 필요했습니다. 현대인들이 자기 재산보다 예수님을 더 귀한 것으로 여기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에서를 특이하다고 여기고 잘못했다고 보면 안 되고요, 야곱이 특이하다고 봐야 합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동물적인 본성을 야곱은 벗어나고 있는 겁니다. 야곱의 특이성이 요셉에게 주어집니다. 어린 요셉을 보면 요셉의 다른 형제들은 인간들만 생각하면 되지만 요셉에게는 뭔가 안겨 준 것이 있어요. 약속, 또는 꿈이라고 해도 괜찮아요. 요셉을 인간적으로 살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관리 하에 들어가는 겁니다. 요셉은 편하게 살고 싶어도 일거수일투족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성도의 특징이 있어요. 본인이 뜻이 있지만 내 뜻대로 안 되게 해주신다는 것.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찾아와요. 내 자신이 성경의 인물이 되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본인 자신의 모든 뜻이 삭제되고 배제되고 아픈 겁니다. 본인은 힘들어요. 남의 사정을 모릅니다. 야곱이 가졌던 그 특이성이 요셉의 꿈으로 인도했고 그로 말미암아 요셉의 삶과 그 외의 형제들의 삶이 확연하게 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요셉의 꿈에 기반 해서 다른 형제들에게 할당해줍니다. 그러면 요셉의 일반화가 됩니다. 요셉이 일어난 일을 할당받는 무지개 같은 일이 일어난 겁니다. 요셉이 갔던 길을 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유다는 죽었어요. 날마다 자기 뜻이 깨져야 돼요. 소방관은 불나면 제일 먼저 뛰어 들어가야 해요. 혜택은 다른 사람이 입고요. 이처럼 복을 받은 상은 사도행전 20장 35절,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상이 되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9장 18절에서 사도바울은 내 상이 뭐냐? 라고 질문을 해요. 값없이 복음전하는 자체가 복이라는 겁니다. 누가 이 상을 원하겠습니까? 상이라고 하니까 한우갈비나 보너스가 아닙니다. 줘놓고 반대급부가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것이 상이에요. 주는 것이 아까워서 몇 년 간 우려 먹는 것이 상이 아닙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딜이라고 하는 것은, 야곱이 형과 교환한 것은 에서는 자기 자신이 더욱 만족스럽게 되는 것이지만, 야곱은 하나님의 일에 참여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비난하든지 간에.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얼마나 원망했겠어요? 근데 소경된 자, 그것이 바로 상이 된 자는 사실을, 그게 믿음이라는 것을 누가 알았겠어요?
유다는 사자가 화를 날 때 내는 그 분노 차원에서 심판을 행사합니다. 유다의 원수에요. 그 원수는 다른 형제에게도 포함이 됩니다. 유다지파가 심판을 충실히 해줘야 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의 뜻이 주님께서 십자가로 모든 뜻이 완전히 작살내 줄 때 비로소 우리가 창녀가 되고 세리가 될 때 성공하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일관성 있게, 통지표에 ‘가가가가...’ 나와야 합니다. 그래놓고도 구원받았다면 유다를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다지파에서 메시야가 나오니까. 성도의 모든 뜻이 자기 뜻대로 안 됨으로 말미암아 성도를 구원하신 주님의 뜻은 만사가 오케이입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은 하자도 없고 실수도 없습니다.
그 심판의 맹렬함은 봐주는 것이 없거든요. 계5장 5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심판으로 이기신 거예요. 일절 자비가 없습니다. 9절,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이거는 하고 싶은 대로 다해버리는 낱낱이 찢어버리는 겁니다.
심판을 하는 것은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10절,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임금님만이 가질 수 있는 지팡이.. 심판을 완료할 수 있는 자리가 왕의 자리니까, 왕이 있다는 말은 심판이 영원토록 멈추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심판주라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감사합니다. 왜? 우리들만이 아는 비밀이니까. 주님 외에 심판 할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그 누구에게도 공갈이나 협박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사채업자가 삽으로 땅 파서 묻는다고 하면 묻으라 하세요. 내 목숨가지고 마귀한테 구걸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길갈 위에 보면 실로가 있습니다. 언약궤가 안치된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일관성이 있는 취지가 약속의 땅에서 보이는 장소가 실로에요. 근데 실로가 인격자 같아요. 어떤 지명이 뚜벅뚜벅 걸어서 다가오신다는 뜻이에요. 실로에서 일어났던, 시공간이 구약에서는 제한되어 있어요. 실로가 보여줬던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이 장소에서 어떤 특정한 인물로 전환되는 시점이 온다는 거예요.
그 내용이 시편 78편 59절부터 60절에 나와 있습니다. 59절,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69절, 실로의 성막 곧 인간에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 현재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어떤 장소를 실제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함께 어떤 공간을 점유하신 하나님께서 떠나버렸어요. 공간적인 의미의 실로는 그 기능을 다한 거예요. 실로가 품고 있는 모든 언약적인 예언은, 접촉자, 유다지파가 된다는 겁니다. 유다지파만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거처된다는 개념이, 드디어 유다지파에게 인수인계가 된 겁니다.
전에는 요셉중심이었지만, 여기서는 유다지파 중심으로 가는 겁니다. 모든 지파가 유다지파를 결과적으로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11절,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12절,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유다지파 중심으로 풍성하게 혜택이 주어진다고 나와 있습니다. 약속의 성취는 유다지파를 통해서 전해진다는 겁니다.
좀 세밀하게 유다 후손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한 것이 매치가 되고 구현이 되는 거예요. 그 일을 할 때 심판자, 사사기 1장에 1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2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가나안 사람들과 누가 먼저 싸우리이까? 할 때에 유다보고 싸우라고 합니다. 유다가 선봉장이 되어서 이스라엘 적과 싸웁니다. 이렇게 유다가 나설 때, 유다에게만 언약이 주어지는 것을 다윗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나중에 다윗이 가진 나라가 정통성을 가진 유다나라입니다. 거기서 메시야가 나옵니다.
유다자손에게 전제한 것은 심판입니다. 그 심판에게 물어뜯기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유다자손에서 나오는 예수님만 물어뜯을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우리는 물어뜯길 때마다 감사해야 합니다. 인생 자체가 주님이 손 안 댄 구석이 없이 누더기가 될 때, 이제는 자기에 대한 찬송이 아니고 다윗 자손인 주님에게만 찬송이 간다는 예언이 어설픈 우리를 통해서도 성취가 되는 겁니다.
에서처럼 내 몸 하나만 챙기면 남는 장사로 여겼습니다. 남한테 안 지는 것을 오기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진짜 축복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죄인을 주의 마음으로 다루어주신다는 것, 주의 마음이 내 속에 들어왔다는 것, 내 뜻이 밀리게 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은사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입니다.
첫댓글
주님만이 심판하신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심판주가 되신다는 것에...
심판을 행사하실 수 있는 권한은, 오직 주님께만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십자가에서 먼저 우리 대신 심판을 받으심으로 심판을 완료하시고 심판주로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그 심판에게 물어뜯기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라는 말씀이 얼마나 감사한 말씀인지... 감사합니다.
에서의 속성밖에 없는, 팥죽만 그립고, 팥죽에 온 정신이 팔려있다.
야곱은 잘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에서도 있고 야곱도 있다는 것이다.
단지 그냥,
왜.. 이러는지 모르면서 할 수밖에 없고,
왜.. 사는지 모르면서 살 수밖에 없다는 고백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