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한국교회 위인들 [22]
이재명(李在明, 1888?-1910)②
이재명 의사(義士)는 1888년 4월에 태어났지만 그해에 아버지가 사망했고, 어머니는 재가해서 동생을 낳았지만 1898년에 산후조리를 하면서 고생하다가 결국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15세가 되던 때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서 사환 노릇을 하다가 얼마 후에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1904년 미국노동이민사가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를 모집했을 때 응모해서 하와이에 가서 노동을 시작했습니다. 19세였던 1906년 3월에는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도산 안창호 선생이 회장으로 있었던 ‘한인공립협회’에 회원으로 가입했습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민족을 위한 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20세가 되던 1907년 헤이그 밀사 중 한 사람이었던 이준 열사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미국에 알려지게 되자 많은 재미동포가 샌프란시스코에 모여 회의를 열었는데, 이때 나라를 위해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매국노들을 숙청하겠다고 결의하고 귀국한 다음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를 돌아다니며 동지들을 규합했습니다. 1908년경 평양에서 성모여학교 교사였던 오인성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일에 여념이 없었고 1909년 1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 황제 평양 순시 때 동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역에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고 대기했으나 순종의 안위가 걱정되었던 안창호 선생의 만류로 중단했습니다. 그러나 그해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게 되면서 이재명의 목표는 매국노들을 처단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중에 가장 먼저 이완용을 목표로 삼았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