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과 주변 일대를 순례하는 '서울순환버스01'
[뉴스포스트=강대호 기자] 서울시 중구는 서울의 자치구에서 유일하게 마을버스가 없다. 대신 중구와 인접한 자치구의 마을버스들이 중구 영역을 운행하고, ‘서울 순환버스 01’이 중구 영역인 남산과 그 주변을 운행하는 의미에서 중구의 마을버스 역할을 한다.
남산타워. '서울순환버스01'을 타면 남산타워에 쉽게 갈 수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서울에서 남산은
‘남산에 다녀왔다’라는 표현은 시절에 따라 해석을 달리할 수 있다. 오늘날 남산 둘레길을 걸으면 도심 속 자연의 풍광을 즐길 수 있고, 남산타워 부근 전망대에선 동서남북으로 펼쳐진 서울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런데 1970년대나 80년대에 ‘남산에 다녀왔다’라는 표현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는 의미로 쓰였었다. 그만큼 남산은 시대에 따라 다른 이미지를 가졌다.
조선시대에 남산 일대는 평범한 이들이 사는 조용한 동리였다. 사대부나 부자들은 청계천 북쪽의 궁궐과 가까운 지역에 살았다면 청계천 남쪽, 즉 남산의 북쪽 자락에는 평민들과 가난한 선비들이 주로 살았다.
통감관저 터 표석. 조선총독부 이전 식민 통치 기구였던 통감부 수장의 관저 터. 서울시 소방재난본부 근처에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하지만 대한제국 시절 일본이 한반도를 실효 지배하게 되자 남산 일대는 일제를 상징하는 관청들이 들어서게 되고 자연스럽게 일본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된다. 한국 전쟁 이후에는 남산에 군사정권을 보위하는 정보부와 군사 시설이 들어서기까지 한다.
다양한 시절을 겪어온 남산은 시민의 쉼터로 돌아왔고, 남산 일대를 ‘서울 순환버스 01’이 순례하고 있다.
남산에 오르는 편한 방법
‘서울 순환버스 01’은 남산을 찾는 국내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5월 말 어느 평일 오전, 버스는 거의 빈 차로 예장동의 기점을 출발했지만 충무로의 정류장들에서 빈 좌석이 없을 정도로 승객이 탑승했다.
동대입구역 정류장에서는 서 있을 공간이 없을 정도로 탑승했다. 다음 정류장인 국립극장 앞에서는 앞문으로 타기 힘들어 운전기사가 뒷문으로 타도록 유도해야 할 정도였다.
버스 승객 중에는 등산복 차림의 한국인들도 여럿 있었지만 거의 외국인들이었다. 영어와 중국어는 물론 생소한 언어들도 들렸다.
국립극장을 지나자 남산으로 들어섰다. 버스 창문으로 남산의 깊은 숲이 느껴졌다. 간혹 서울 용산 일대와 한강이 보이기도 했다. 버스가 오르는 남산 순환로는 자전거들도 공유했다. 전기차인 버스는 경사진 도로를 소리 없이 힘차게 오르다 자전거만 만나면 속도를 줄였다.
서울순환버스01의 남산타워 정류장.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남산타워 근처 전망대에서 바라본 정경. 한강과 롯데타워가 보인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서울 순환버스 01’ 승객들은 거의 남산타워 정류장에서 내렸다. 버스는 내린 만큼의 승객을 태우고는 반대쪽 남산 순환로로 내려갔다.
남산타워 부근에는 서울 도심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여러 군데 있다. 북쪽으로 삼각산 일대가 보이고 동쪽으로는 한강 줄기와 롯데타워도 보인다. 용산 방향이나 강남 방향 또한 타워 부근 산책로나 도로의 전망대에서 바라볼 수 있다.
남산에는 조선시대의 군사 시설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남산을 가르는 한양도성이 대표적이다. 남산 구간 중간중간 훼손된 곳이 있지만 남소문이 있었던 장충동 일대와 숭례문 일대가 도성으로 연결된 것을 알 수 있다.
한양도성 옆으로 난 남산 순환도로를 '서울순환버스01'이 지나고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목멱산 봉수대. 매일 정오 무렵 봉수 의식 재현 행사가 열린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남산타워 근처에는 봉수대도 있다. 목멱산 봉수대 터는 조선시대에 전국의 봉수대에서 출발한 봉화가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곳이었다. 목멱산 봉수대는 중앙 봉수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갑오개혁 다음 해인 1894년까지 거의 500여 년 동안이나 사용되었다고 한다. 만약 정오 무렵 남산타워에 간다면 봉수 의식 재현 행사를 관람할 수 있다.
국치의 길 혹은 인권 숲
‘서울 순환버스 01’의 출발지는 남산 자락에 있는 예장버스주차장이다. 서울시 소방재난본부 바로 옆에 자리한다. 버스 기점 주변에는 역사에 기록된, 그래서 기억해야 할 장소들이 여러 군데에 있다.
예장동의 기점을 출발하는 서울순환버스01.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소방재난본부 입구의 맞은편 길을 잠시 오르면 ‘기억의 터’라고 쓰인 표석이 나온다. 일본군 위안부를 기리는 공간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전 세계적 여성 문제로 떠올랐음에도 서울 시내에 그 아픔을 기리는 공간이 없다는 지적에서 설립이 추진된 공간이다.
‘기억의 터’는 옛 통감관저 자리에 들어섰다. 통감부는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서울에 설치한 통치기구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 통감부는 1906년 2월 설치되어 1910년 8월 주권 상실로 조선총독부가 설치될 때까지 4년 6개월 동안 한국의 국정 전반을 사실상 장악했던 식민 통치 준비기구이다.
통감관저 표석에는 “1910년 8월 22일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강제병합’ 조약을 조인한 경술국치의 현장”이라고 쓰여 있다.
통감관저 외에도 남산에는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많다.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 있었던 조선총독부 터, 숭의여대 자리에 있었던 경성신사 터, 그리고 조선신궁 터. 이 곳들을 잇는 길을 '국치의 길'이라고 부르는데 보도 곳곳에도 '국치의 길'이라는 글자가 각인되어 있다.
기억의 터 표석. 일본군 위안부를 기리는 의미를 가진 장소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옛 중앙정보부 본관 건물. 지금은 유스호스텔로 쓰인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기억의 터’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가면 ‘서울유스호스텔’ 건물이 나온다. 이 건물은 원래 중앙정보부 본관으로 쓰였었다. 호스텔 본관 앞에는 우체통 형상의 조형물이 서 있는데 거기에는 “이 일대 남산(중앙정보부의 별칭)은 오래도록 출입이 금지된 공간이었”다며 “인권침해의 상징인 이 건물의 표석을 인권우체통”으로 세운다고 쓰여 있다.
옛 중앙정보부 건물로 향하는 도로 초입에는 ‘주자파출소’ 터도 있다. 과거 정보부에 끌려온 이들의 소식을 들으려는 이들이 접수하고 기다렸던 곳이라 ‘면회소’라는 별칭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인권 침해가 벌어졌었던 과거를 기억하며 이 일대를 '인권 숲'으로 부르기도 한다.
옛 중앙정보부와 가까운 필동에는 수도방위사령부도 있었다. 수방사의 주 임무는 수도 서울을 방위하는 것이지만 정확히는 대통령 경호를 담당하는 부대였다. 높은 담이 처져 있었어도 그곳이 군부대라는 건 당시 그 근처를 지나는 이들은 거의 알 수 있었다.
수방사가 있던 곳은 원래 일본군이 주둔하던 곳이었다. 1904년 일제의 한국주차군사령부가 주둔했고, 이 부대가 용산으로 이전한 뒤에는 일본군 헌병대가 주둔했다. 해방 뒤에도 한국군 헌병대가 사용했다.
그러다 1961년 박정희의 쿠데타 후 수도경비사령부를 창설해 이곳을 사용하게 했다. 그리고 전두환 시절 수도방위사령부로 부대 이름을 바꿨다.
남산골 한옥마을. 예전에 수도방위사령부가 있던 장소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1991년 수방사는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고, 1998년 그 자리에 ‘남산골 한옥마을’이 들어섰다. 서울 각 처의 한옥들을 옮겨 놓은 한옥마을에는 전통 정원과 국악당도 있다.
그런데, 국내외 관광객에게 이곳이 원래 군부대였다는 걸 아느냐고 물었더니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공식 사이트나 브로셔 등 안내 자료에는 수방사 관련 언급을 찾기 어려웠다.
이렇듯 남산은 일제 식민 통치를 상징하는 시설이 들어선 시절이 있었고, 한때는 정권을 수호하는 정보부와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 남산은 서울 시민이 자유로이 오르는 곳이 되었다. 나아가 국내외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굳이 걸어 오를 필요도 없다. 케이블카를 타거나 ‘서울 순환버스 01’을 탄다면 쉽게 오를 수 있다.
첫댓글 두발이면 끝
뭐하러. 버스타고 그래야 ㅎㅎㅎㅎㅎ
중구는 어린시절을 보낸
마음의 고향이지요.
남산, 남대문 시장
퇴계로, 신세계백화점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