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1891~1995 보성전문학교 교장 · 동아일보사장
1891년 10월 11일 전북도 고창에서 태어났다. 호는 이다. 1906년에 전라남도 창평 영학숙에서, 1907년에는 내소사에서 공부했다. 1908년 10월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했다가 1909년 4월 도쿄 긴조중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 1910년 4월 와세다대학 예과에 입학한 뒤 이듬해 같은 대학 정경학부로 진학했다가 1914년 7월에 졸업했다.
1915년 4월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1917년 3월에 교장에 취임했다. 이해에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인수하고 경영했다. 1918년 3월 중앙학교 교장을 사직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10월 조선총독부로부터 경성방직 설립 인가를 받았고, 동아일보 사장으로 일했다. 1921년 7월 조선인산업대회 발기총회에서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9월 동아일보가 주식회사로 전환하면서 사장을 사임하고 취체역으로 활동했다. 동아일보를 매개로 1922년 11월부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했고, 1923년 3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회금 보관위원으로 활동했다. 1924년 4월 동아일보 취체역을 사직했으며, 같은 해 9월 고문으로 동아일보에 복귀했다.
이어 1924년 10월부터 동아일보 사장으로서 전무와 상무를 겸하다가 1927년 10월에 사임했다. 1928년 3월 경성방직 이사에서 물러났다. 1931년 9월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32년 3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뒤 1932년 6월부터 1935년 6월까지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활동했다. 그 해 5월 중앙학교 교장을 사임했다. 1935년 3월 ‘조선문화 향상을 위해 도서출판의 진흥을 도모한다’는 취지로 설립된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의 관장 겸 이사로 추대되었다. 1935년 11월 경기도청의 주도로 ‘경기도내의 사상선도와 사상범의 전향 지도 보호’를 목적으로 조직된 소도회의 이사에 선임되었다. 1936년 11월 ‘일장기말소사건’의 여파로 동아일보 취체역에서 물러났다.
1937년 5월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다시 취임했다. 같은 해 7월에 일어난 중일전쟁의 의미를 널리 확산시키기 위해 마련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를 7월 30일과 8월 2일 이틀 동안 담당했다. 같은 해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 같은 해 9월 학무국이 추최한 전조선시국강연대의 일원으로 춘천 철원 등 강원도 일대에서 시국강연에 나섰다.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ㄴ연맹 발기에 참여하고 이사를 맡았다. 같은 해 8월 경성부 방면위원, 10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국민생활개선위원회의 의례 및 사회풍조쇄신부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39년 4월 경성부내 중학교 이상 학교장의 자격으로 신설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이사 및 평의원을 지냈다. 같은 해 8월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위원 및 경기도위원을 지냈다. 이어 9월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에 참여하고 10월에 감사로 뽑혔다. 1941년 조선방송협회 평의원과 조선사회사업협회 평의원도 겸했다.
조선에서 징병제 실시가 결정되자 1943년 8월 5일자 『매일신보』에 「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기풍을 조장하라」는 징병격려문을 기고했다. 이글에서 징병제 실시로 비로서 조선인이 명실상부한 황국신민으로 되었다면서 지난 오백년 동안 문약했던 조선의 분위기를 일신할 기회를 얻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상무 기풍을 조장하여 문약한 성질을 고치기 위해서 인고 단련할 것을 청년들에게 요구했다. 그리고 이를 실천할 지름길로서 ‘황국신민의 서사’의 정신을 온몸으로 체득할 것을 당부했다. 10월 20일 조선에 학도지원병제가 실시된 이후 보성전문학교의 지원율를 높이기 위한 각종 활동에 나섰다. 같은 해 11월 6일 매일신보사가 주최하는 ‘학도출진을 말하는 좌담회’에 참석하여 지원율이 저조한 이유를 조선인의 문약한 성질에서 찾았다.
1943년 11월 7일자 『매일신』에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라는 글을 게재했다. 이 글에서 “의무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독려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의무는 “대동아 성전에 대해 제군과 반도 동포가 가지고 있는 의무”로서, 살아오면서 받은 국가-가정-사회의 혜택에 보답하는 것이다. 만약 학병에 지원하지 않아서 ‘대동아건설’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제국의 제일분자로서 ‘내지’와 조금도 다름없는 대우, 곧 권리를 받지 못할 것이라 경고했다. 게대가 권리를 주장하여 의무를 지는 서양과 달리 동양은 의무를 다함으로써 필연적으로 권리가 생긱는 것임을 강조했다. ㅇ리본인은 3000년 동안 의무를 수행하여 권리를 얻었지만 조선인은 단시일이라도 ‘위대한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일본인의 오랫동안의 희생에 필적할 수 잇다고 보았다.
그 의무는 “제군이 생을 받은 이 반도를 위하여 희생”하는 r서, 곧 죽을지도 모르는 학병에 지원하는 것이었다. 11월 20일 학병지원 마감일을 맞아서는 『경성일보』에 학병 미지원자는 모두 원칙대로 징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12월 7일에는 학병들이 남아 있는 가족 걱정으로 전추할 때 지장을 받지 않도록 후방에서 군인원호사업에 힘쓸 것을 강조했다. 12월 10일 징병검사를 맞이하여 『매일신보』에 「학병을 보내는 은사의 염원」을 밝히면서, 한 사람도 주저함 없이 “광영스러운 군문으로 들어가는”징병검사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12월 17일 보성전문학교의 학도지원병 예비군사학교 입소식에서 “제군은 t계뭅2ㅣ의 황군의 일원의 광영을 입게 되었으니 학도의 기분을 버리고 군인의 마음으로 규율 있는 생활을 하라”고 훈시했다.
해방 후, 1945년 9월 미군정청 한국교육위원회 위원으로, 10월 미군정청 한국인고문단 의장으로 활동했다. 1946년 1월 동아일보 사장에 다시 취임했고, 송진우의 사망으로 공백이 된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2월에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1947년 2월에는 동아일보 사장을 사임했다. 1949년 2월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7월 동일보고문이 되었다. 1951년 대한민국부통령으로 선출되어 1952년 5월까지 활동했다. 1955년 2월 18일 사망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추서되었다.
-설 배운자다. 나라가 있었더면 일본에 대한 의무를 생각했겠는가, 읿본이 3000년이라는 의식도 가소롭고 가증스럽기 짝이 없지만 의무를 이행해야 권리가 보장된다니 이것은 얄팍한 궤변일 뿐이다. 조선에서 난 목숨을 반도에 바치라 했다지, 이 작자는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가, 안났으면 좋을 인간들의 악취가 100년을 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