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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광주 신창동에서 발굴된 고조선시대인 약 2600여년전추정 청동기로 알려진 유물에는 고구려인이 흔이 쓰던 조우관을 쓴듯한 농부가 따비라는 농기구로 밭을 갈고있다. 이 청동기의 연대가 고조선시대라면 분명히 고구려는 고조선의 문화와 습속을 그대로 유지하고 한반도 전체를 특히 한반도 남부까지도 그 지배권으로 두었다고 보여진다 반대논리로 고구려가 조우관을 한것이 통념적 상황이므로 고구려시대의 청동기라 가정해도 역시 한반도남부까지 고구려의 지배영역이 되기에 한반도에서 서남부에서 백제의 존재는 무의미하게 되어질것이다.
또한가지 사례로 1946년 호우총에서 발굴된 고구려광개토대왕의 명문이 있는 청동합을 보기로한다.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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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동남부 경주에서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하사했던지 아니면 껴묻으라고 명령하에 부장되었던지 아니면 일인들에의해 조작된 유물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사학자들에 의해서 신라지역이라고 알려진 경상북도 역시 고구려의 영향하에 있었음이 틀림없는것 같다. 그렇다면 광개토대왕 시기에 고구려의 호우를 받들고 경주까지 내려온 일파는 신라인일까 아니면 금관족일까?
삼국사기 기록에 고구려 기병5만이 신라를 치기위해 통념적 지리학상으로 요녕에서 조령을 넘어 경주로 왔다는 설은 넌센스도 보통 넌센스가 아닐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조령은 사람 하나가 다니기에도 좁고 위험한 통로임을 여러자료를 통해 알수있다. 하물며 당시 기병5만이라면 보병과 사역병까지 합해 족이 2~30만은 되는 대규모명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공격한 신라는 새재를 넘어야하는 한반도 일 수 없고 구릉이 있는 평야지대이어야만 한다. 만주북동부 평원으로해서 회령들을 지나 해안선을 끼고 남행하는 청진 동해루트가 고대에도 있었으나 이루트 또한 소규모 인원만 움직일수있는 통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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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무용수의 머리에쓴 조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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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회도에 보이는 고구려사신 조우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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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후반 아프라시압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사신은 환두대도와 조우관을 역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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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영총 수렵도에 그려진 엽사의 머리에 역시 조우관이 씌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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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서성 서안에서 발굴된 7세기말엽 예빈도에 역시 조우관을 쓴 고구려사신 (시기적으로 신라사신이라는 설도 있다)
결국 청동기명문에서 보듯이 조우관이라는것은 북방샤머니즘으로 부터 시작된 천손으로서 "하늘에 닿는다 하늘과 통한다"는 새를 형상화한 정신세계를 형상화시킨것으로 보여진다.
운영자 심제글.
사진들은 인터넷에서 발췌.
첫댓글 명사 동이 왜전, 남사 및 북사, 그리고 양서 등에 부상국에 관한 기록이 고대의한반도를 가르키는 것으로 보이고,
추모경의 동부여 강성기 관련기록에 보이는 우산과 왜 등이 바로 고대 한반도 또는 그 북변 언저리를 가르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작금 우리 땅에서 나타나는 유물 유적들에 대한 명쾌한 해석과
적확한 졸본고지 등의 비정이 선결요건일 것으로 보입니다.
저 호우는 진품일까?
右上의 두 글자가 간지라면 "국강상광개토지평안호태왕(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재위시기와 맞아떨어지는 지 확인해 볼 일일 것입니다...
의문 하나... 저 유물이 하나 밖에 발견 되지 않앗나요. 어떤 용도로 쓰였던 것인지 몰라도 그당시에 저정도의 주조를 할려면 하나만 하지는 않았을 거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