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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루나 칼럼 >
뉘우침의 길
글 |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죄가 무엇이냐, 정의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깊게 들어가자면 쉽게 답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이겠지만 그냥 한 마디로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나쁜 놈이 저지른 나쁜 짓거리가 죄이고 그런 것을 벌주고 제대로 바로잡는 것이 정의다.
세상살이가 이렇게 단순하게만 되어 있다면 골치 아플 일도 적겠지. 하지만 불행히도 세상은 그렇지가 않다. 그러니 겹겹이 쌓이고 숨어 있는 세상만사를 스마트 폰 하나로 착착 넘기며 곁눈으로 그 꼭지만 대충 훑어보고는 섣불리 단정을 내려서는 안 된다. 얽히고 겹쳐진 이 현대문명의 실상은 제가 만든 미로에 제 스스로 갇혀 길을 잃어버릴 만치 복잡하다. 물질 세계도 그렇지만 이런 선악이나 옳고 그름을 따지는 추상적인 문제에 대해서 믿고 기댈 수 있는 표준이란 찾기가 점점 더 어렵고 인터넷을 다 뒤져도 정말 확신이 오기는커녕 오히려 날이 갈수록 헷갈리는 점이 많아진다. 자칫 눈 번히 뜨고 바보되기 십상이다. 온라인 세상을 헤매면서 내 파일을 열어 볼 열쇠말이나 암호만 잘 간직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듯한 눈가림이나 부추김에 휩쓸리지 말고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나이나 학력이 지혜를 기른다는 말, 믿지 않는 게 좋다.
그나저나 죄라는 것은 나쁜 놈들이 짓는 것인데, 나쁘고 좋다 하는 것의 기준은 무엇이냐? 우리가 무엇을 제대로 따지자면 그 시작, 밑뿌리부터 알아야 한다. 이래서 철학이 어려운 것이다. 수천 년 쌓아 온 이때까지의 공부는 도로아미타불, 늘 근본적이고 원시적인 물음부터 나 자신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니 나쁘다 좋다 하는 이런 말들도 나 자신 혼자 앉아서 그말의 밑뿌리, 곧 어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쁘다’는 본래 ‘낮브다’였다. 곧 ‘질이 낮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좋다’는 본래 ‘둏다’였는데 처음에는 ‘깨끗하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한다. 깨끗이 하자면 물로 잘 씻어야 하니까 ‘됴’라는 말 조각에는 ‘물’의 뜻이 있었을지 모르겠다. 지금 살아남은 ‘도랑’이란 말의 먼 친척일 수가 있겠다. 아무튼 좋은 사람이란 더운 물로 샤워를 자주 하는 깨끗한 사람이 아니라 착한 짓, 착한 생각으로 몸과 마음의 때를 수시로 씻어내린 정갈하고 건강한 사람을 일컫는다. 이런 선한 사람을 옛날 말로는 ‘읻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옛날 천자문을 보면 한자의 善을 ‘착할 선, 좋을 선, 읻을 선’ 등으로 새겨 놓았다.
善의 반대가 惡인데 이 한자는 ‘악’ 대신 ‘혐오’ 라고 할 때처럼 ‘오’로 읽힐 때에는 ‘싫어할 오’가 된다. 악은 누구나 싫어할 테니까 말이다. 또 옛날 말을 가져오자면 선하다 하는 것은 ‘읻다’, 악하다 하는 것은 ‘아니완하다’고 하여 각각 고유한 우리말로 짝이 갖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읻든 아니완하든 다 땅에 묻혀 버리고 선악만 한참 헷갈리는 세상이 되었다.
아무튼 아니완하고 나쁜 놈들이 짓는 짓거리가 죄인데 특히 단체생활에서는 이게 문제다. 말로 타일러서는 잘 안 되기도 하지만 특히 종교 집단 같은 데서 알아들으라고 조목조목 늘어놓고 말 안 들으면 힘으로라도 다스리겠다고 일러 놓은 것이 계율이다. (戒라는 한자도 죄인의 목에 칼[廾] 씌어 놓고 옆에서 창[戈]을 들고 지키는 모양새다.)
아시다시피 불교도들에게는 기본적으로 다섯 계율이 주어져 있는데 그 첫번째부터가 엄청나서 지키기가 쉽지 않다. 가라사대 ‘죽이지 말라’다. 여기에는 사람만이 아니라 목숨 가진 모든 것들이 대상이다.
이 죽인다는 문제를 샅샅이 파고들자면 한이 없겠지만 단언컨대 눈에 보이건 안 보이건 한 목숨도 끊지 않고 일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상대적이라는 얘기다. 일단 다음으로 넘어가 보자.
두 번째는 ‘속이지 말라’다. 속인다는 것은 자신의 속과겉을 다르게 표현하여 입으로 '속말'은 숨겨 놓고 '겉말', 곧 거짓말을 하여 듣는 이가 진실을 모르고 거짓을 믿게 하는 짓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모든 광고, 선전, 뭐뭐인 체함, 내세움에는 얼마간의 거짓이 들어 있다.
세 번째는 ‘훔치지 말라’다. 보기에 따라서는 현대의 모든 경제구조, 경제행위에는 남의 것을, 자연의 것을 훔치는 행위가 들어 있다. 훔치는 동작은 본래 걸레로 마루를 훔치듯이 바닥에 떨어졌거나 묻은 오물을 걷고 닦아내는 일이라, 보기에 따라서는 남의 것을 훔치는 도둑질도 더럽혀진 세상을 쓱싹쓱싹 걸레질하거나 일그러진 세상의 표면을 깨끗이 닦아 내는 행위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이겠지?
네 번째는 ‘사음하지 말라’다. 이것도 참 논란의 여지가 많다. 누가 사음인지 아닌지 그 기준을 정하느냐? 세상은 일년 삼백 육십오일, 하루 스물 네 시간 사음을 부추기면서 어쩌다 한 순간 잠깐 한눈 팔린 재수 없는 작자만 어이없게 낚싯바늘에 걸려 낚시꾼을 기쁘게 하기 일쑤다.
마지막이 ‘술 마시지 말라’다. 마찬가지다. 요새 와서 ‘습관성 마약 같은 것을 하지 말라’로 재해석하기도 하지만 아무튼 술은 이 세상에 넘쳐난다. 본래 ‘술’이란 말도 ‘물’을 뜻하는 말에서 나왔는데 바른 말이지 이젠 물보다 술이 흔한 세상이 되었다.
아무튼 이렇게 오계의 해석과 적용에 뱀발을 붙이고 손목을 비틀고 해 쌓아도 이러한 계율들의 본래의 의도와 엄중성을 안다면 우리는 한사코 이를 지키도록, 적어도 이에 가깝게는 다가가도록 애써야 함을 알겠다. 왜 죽이지 말라고 했겠는가? 그것은 목숨이란 한 번 죽이면 되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사람의 목을 뗐다 붙였다 마음대로 해서 목숨을 마음먹은 대로 금방 복구할 수 있는 세상, 불에 구워 먹은 짐승을 고스란히 생시로 되돌려 놓아 새끼까지 칠 수 있는 세상이 오지 않는 한 이 불살생의 계율은 엄정하다.
나머지 계율들도 마찬가지다.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바람 피우고 술독에 빠져 사는 것은 그 개인적, 사회적 폐해와 비용이 사실 엄청나다. 생명을 건강하게 지키고 번성하는 것을 심각하게 좀먹는 일이다. 그리 하더라도 아무런 해가 없을 세상은 아직 수억 광년 떨어진 저 먼 하늘의 별만큼 까마득하다. 그러니 계율은 지켜야 한다. 지키려고, 가까이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위의 글줄에서 이미 내비친 바와 같이 이러한 계율이니 죄니 하는 것들도 어떠한 조건과 한계 안에서만 문자 그대로 규정지어지는 상대적인 것임을 아시리라. 이러한 조건과 한계를 곧이곧대로 너무 절대시하는 것도 문제겠지만 이를 너무 쉽게 여겨 무시하는 돌팔이들이 종교계, 특히 한국 불교계에 없지 않다는 것도 문제다. 아무 때, 아무 데서나 일탈하고 파계하는 것이 마치 무슨 멋인 양, 깨침의 드러남인 양 하며 사기를 치는 일도 없지 않은 모양이다.
그 옛날 인도의 초기불교 시절의 승가에서는 이러한 일탈이나 범계에 대해서는 스스로 바로잡고 맑히는 절차가 있었는데 바로 ‘포살(布薩, upovasatha의 음역)’과 ‘자자(自恣 pravarana)’라는 것이다. 승가의 비구, 비구니에게는 불자 일반의 오계가 아니라 승려가 지켜야 할 많은 계율, 골고루 다 갖춘 구족계 (具足戒: 갖춘 계율)가 주어졌다. 이 구족계의 앞머리를 차지하는 것이 이른바 바라이죄(波羅夷罪 parajika)인데 이는 너무나 엄중하여 비구의 4바라이죄, 비구니의 8바라이죄 가운데 하나라도 범한 경우에는 참회고 뭐고 없다. 무조건 승가에서 쫓아낸다. 이른바 산문출송(山門黜送)이다. 바라이죄가 뭔가?
4바라이 죄에는 음행, 사람을 죽임, 훔침, 큰 거짓말이 있다. 작은 거짓말이나 피치 못할 거짓말은 그래도 봐줄 구석이 있나 보다. 여승, 곧 비구니는 여기에 네 가지가 더해져 8바라이죄가 된다. 성적인 욕망에 가득 찬 남자의 몸 중에서 어깨와 무릎 사이의 몸을 자신도 성적인 욕망에 이끌려 비비거나 잡거나 대거나 누르는 것이 다섯 번째 바라이죄다. 그리고 이런 남자와 여덟 가지 짓거리[八事] 가운데 하나라도 하는 것이 여섯 번째 바라이죄요, 다른 비구니가 바라이죄를 범한 줄을 알면서도 숨겨 주는 것이 일곱 번째, 파계하여 쫓겨난 비구를 따르는 것이 마지막 여덟 번째의 바라이죄가 된다.
하는 김에 좀 더 알아보자. 위에서 말한, 하면 안 되는 비구니의 여덟 가지 짓거리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염정을 품은 남자에게 손잡는 것을 허락하거나, 그런 남자가 비구니 자신의 겉옷 끄트머리를 잡도록 허락하거나, 그런 남자와 같이 서있거나, 같이 이야기하거나, 약속을 잡아 만나거나,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거나, 같이 숨겨진 장소에 들어가거나, 어떤 목적에서건 그런 남자에게 알몸을 드러내는 것이 이 여덟 가지에 해당한다. 이렇듯이 바라이죄든 그 일부인 팔사에 있어서든 음행의 죄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공자님(부처님이셨던가?) 말씀인지, 이런 것[性]이 사람마다 하나씩이었기에 망정이지 둘이었다면 공부를 마쳐 군자를 이룰 자 하나도 없으리라고 하셨다던가!
일반 불자와는 달리 비구, 비구니에게는 각각 250계, 348계가 주어져 있는데 왜 이리 비구니에게는 더 많은 계율의 짐이 씌었나, 언뜻 보기에 남녀불평등의 명확한 보기 같기도 하다. 그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계의 유수한 종교 가운데 초창기부터 여성을 받아들여 그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지, 불교의 경우 깨달음과 성불의 가능성을 가진 대상자로 남성과 함께 여성을 동등하게 대우한 종교는 불교 말고는 없다. 기독교의 경우, 알다시피 여자는 남자를 꽤서 죄악으로 이끌고 간 교활한 죄인으로 묘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태생 자체가 남자의 갈비뼈 하나로, 남자의 심심풀이 삼을 양으로 만들어졌다는 얘기를 지금도 하고 있다.
아무튼 비구니의 계가 비구의 계보다 많아진 것은 그 당시의 사회상으로 보나 여성의 특성으로 보나 침해당하기 쉽고 무너지기 쉬운 그 나마의 여성의 존재와 지위를 최대한 보호해 주고자 하는 고려가 많이 반영되었음을 지나쳐 볼 수 없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비구계든 비구니계든 시대에 맞지 않고 남녀평등을 위해서도 이제는 불필요해 보이는 계율들에 대해서는 재해석과 정비가 필요해 보인다.
근본불교 시절, 바라이죄가 아닌 나머지 범계에 대해서는 위에서 말했듯이 포살과 자자로 이를 다스렸다고 했는데 포살이 뭔가? 이는 보름에 한 번씩, 비구들이 부처님이나 큰 스님을 모시고 계율에 관한 경전을 읽으며 하는 참회(懺悔 ksama)의 의식이다. 이때 계를 범한 비구들은 대중 속에서 그 죄를 고백하여 참회한다. 참회를 받아들여 훈계를 하는 큰 스님은 다음 다섯 가지를 유념해야 한다. 곧, 때에 맞게 일러줄 것, 진실하게 말할 것, 부드럽게 말할 것, 도움을 주는(득이 되는) 쪽으로 말할 것, 자비심을 지니고 말할 것 등이다. 이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자식이나 후배, 아랫사람을 타이를 때에도 꼭 필요한 지침이 아닌가 한다. 괜히 한 마디 해 주다가, 아무리 좋고 옳은 얘기라도 장소와 때가 맞지 않아서, 말에 뼈가 있어서, 실제로 아무 득이 되지 않는 꼰대의 설교조라서 감정만 상하게 하고 결과적으로 역효과가 나는 일도 없지 않나!
이에 반해 자자는 매해 여름 안거 마지막 날에 비구들이 모여 앉아 차례로, ‘이 가운데 누구든지 내가 그 동안 잘못한 일이 있으면 기꺼이 말해 주시오’ 하고 지적 받기를 청하면 대중 가운데에서 ‘그대는 이러이러한 점이 잘못된 것 같소’ 하고 격의 없이 타인의 잘못을 지적해 주는 방식이다. 지적 받은 이는 이에 대해 혹시 오해가 있었으면 해명을 하거나 자기도 모르고 지은 잘못과 알고 지은 잘못을 진정으로 참회하는 의식이다. 일면 우리가 그렇다고 배워 왔던 공산주의식 자아비판 장면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처벌과 제재가 아니라 뒤끝이 없게 종교적으로 정화를 하는 용서와 화합의 자리임이 다르다.
북방의 대승불교에 와서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이가 시방삼세의 부처님께 귀의하여 참회함으로써 이것이 받아들여져[攝受] 죄악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천수경에 나오는 구절, 열 가지 죄악을 참회하고 나서 잇달아 나오는 다음 문구를 읽어 보자.
오랜 세월 쌓인 죄 한 생각에 없어지니
百劫積集罪 一念頓蕩盡
마른 풀 타 버리듯 남김없이 사라지네
如火焚枯草 滅盡無有餘
죄의 본성 본래 없어 마음 따라 일어나니
罪無自性從心起
마음이 없어지면 죄업 또한 사라지네
心若滅時罪亦亡
모든 죄 없어지고 마음마저 사라지면
罪亡心滅兩俱空
이것을 진실로 참회라 이름하네
是則名爲眞懺悔
죄(罪)라는 것은 있다. 그런데 그 죄는 어디에서 오는가?
마음에서 온다. 그 마음이 죄를 비롯하였고 그 마음의 못 가눈 일떠섬으로 실제로 일을 벌여 결과를 끼치며 죄를 지었다.
그리고 그 죄가 나를 옥죈다. 바깥에서 물리적으로도, 내 마음 안에서 심정적으로도 나를 괴롭힌다. 그리고 내가 알든 모르든, 잊고 있든 수시로 떠오르든, 그 죄의 결과, 죄악의 영향력인 업보는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당장이든 한참 지난 훗날에든, 나 자신에게든 나와 인연 있는 어떤 이들에게든, 아니면 나와 얽혔던 모든 존재들에게든 반드시 찾아온다. 에너지 불멸의 법칙이다. 번뇌다.
어떻게 해야 하나? 진심으로 뉘우치는 것이 먼저다(이건 절에 가나 교회에 가나 마찬가지로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 죄, 그 죄의 결과인 업보를 누구에게 헐값으로 땡처리하거나 얌체같이 한 순간에 떠넘기려 하지 않고 저지른 그대로 백 프로 다 자신이 받아들인다. 참회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참회하는 마음자리는 번뇌라는 땔감을 태우는 아궁이다. 태우고 사르고 또 태우면 마침내 태울 땔감도, 불길도, 아궁이도 사라지고……, 태운다는 생각도 마음도 사라진다. 이 정도가 돼야, 이 정도의 과정을 거쳐야 이것을 진실로 참회라 이름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렇게 질기게도 나를 괴롭히던 죄책감과 불안, 태워도 태워도 질기게 꺼지지 않던 번뇌의 불씨가 어느 순간 한 생각 사라지듯 싹 가시고 마는 것이다. 물리적인 증감이나 창조, 소멸이 아니다. 화학적 변화랄까, 다른 차원으로의 건너뜀이요 변성이며 탈바꿈이다.
이렇듯 모든 맑힘[淨化]과 놓여남[解脫]은 참회(懺悔), 즉 뉘우침에서 비롯된다. 참회란 말은 본래 범어인 크사마(ksama)에서 왔다. 이 낱말의 소리를 따서 懺 자를 쓰고 그 뜻을 따서 悔자를 가져와 참회라는 한자어가 만들어졌다(한문 불교용어에는 이런 식의 조어가 더러 있다). 참회에 해당하는 우리말 ‘뉘우침’은 아마도 ‘되뇌다’ ‘뇌까리다’ 같은 말에서 보듯이 말로써 잘못을 고백한다는 뜻이 아닌가 한다. 그야 어찌됐든 우리 인간이라는 것들은 개인으로나 집단으로나 참 뉘우치기가 진실로 어려운 짐승들인가 보다. 제대로 잘못을 인정하고 후회하며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부끄러움 다 벗어 던지고서는 용기 있게 골방에서 떨치고 나와 밝은 햇빛 아래 넓은 마당의 대중 앞에서 사죄하고 다짐하는 그런 아름답고도 멋진 참회는 갈수록 보기가 어려워졌다. 왜 그럴까? 참회할 일이 드물어진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죄업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참회 역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야 할진대 그런 마음의 싹이 아예 트지를 못하고 있으니 참회라는 나무가 자랄 수가 없고 따라서 참회할 일도 없어진다. 왜 그런 마음의 싹은 움트지 않는 것일까? 참회의 싹은 고사하고 한 술 더 떠서 난데없는 헛다리 넘겨짚기 광란의 넝쿨이 얽히고 우거지는 것이 사바세계 아닐는지!
이렇듯이 참회가 없는 그 첫째 까닭은 자신이 저지른 죄악이 죄악인 줄도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알았었는데도 금방 잊어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부끄럽게도 고국과 해외의 많은 동포들 중에는 지나간 어두운 시절에 대한 기억이 없거나 왜곡되어 오히려 그 시절을 미화하는 이들이 없지 않다. 그 가운데 일부 철없는 인사들은 건망증의 결과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민망하고 참담한 금수의 모습을 연출하기도 한다. 대놓고 독재와 탄압과 폭력의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그 희생자들을 폄하하는 무리가 있기에 혀를 찼더니 그건 약과다. 자식 잃어 울부짖고 밥을 못 넘기는 에미 애비 앞에서 젊으나 젊은 것들이 일부러 쩝쩝 닭다리를 뜯는다.
그리고 이것은 목불인견의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몰라서 짓는 죄업이라고 해도 그 죄과를 다 어이하리? 사실 모르고 짓는 죄는 알고 짓는 죄보다 그 죄값이 훨씬 크다고 한다. 알고 지은 죄는 일말의 회한이라도 남기지만 모르고 짓는 죄에는 브레이크도 없기 때문이다.
외로움과 설움이 복받치면 한이 되고 한이 갈 곳을 잃으면 저주로 맺힌다. 굼벵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고, 그리고 잠깐동안 그렇게 꿈틀거리다가 하찮게 그만 죽고 마는 미물의 작은 원한이라 할지라도 결코 그대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하물며 자식 잃은 어미의 원한에 있어서랴! 돌고 돌아 그 맺힌 한의 에너지는 이윽고 그 꿈틀거리게 밟았던 내 발부리를 타고 어느 결에 내가 엮어 둔 인연의 그물을 찾아 내려앉는다. 진정으로 곧바로 참회하고 용서를 빌지 않는 한.
남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 언젠가 나에게도, 나의 후손의 정수리에도 칼날이 내리꽂힐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에 그런 불감증은 흔치 않을 텐데, 누가 지금 당장 얼굴 보며 마주하고 있지 않다고 독하고 모진 말로 너도 나도 함부로 단죄하고 뇌까린다. 그 부정적인 에너지와 딸려 오는 결과가 결코 만만치가 않을 텐데도 천연덕스럽게 그러고 있는 것을 보니 악다받고 무모하다고 해야 하나 둔감하다고 해야 하나.
많은 이들이 실체적인 진실에 대해서는 세밀히 알아보지도, 차분히 생각해 보지도 않으며 그럴 마음도 없어 보인다.
무식하고 용감한데다 부지런하기까지 하면 약도 없다는데,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는지 카톡에 유튜브에……, 온 세상 동네방네 가짜 뉴스를 퍼나르며 부지런을 떠는 이들도 있다.
노는 입에 염불은 못할망정 징벌을 사서 불러들이고 제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셈이다. 모르면 가만이나 있든가, 입 있다고 함부로 지껄이며 글 안다고 함부로 써 갈기는 그 구업을 다 어찌할꼬?
시절이 시절인 만큼 시사 현안에도 눈을 한 번 돌려 보자면, 일본의 수상이 요 근래에 또 우리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을 했다고라. 수천만의 목숨을 앗았을 뿐 아니라 살아남은 이들의 가슴에 못을 박고 두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만든 그 모든 일제의 짓거리들이 본래 한일 서로 간의 무리 없는 합의에 의해 합법적으로 이뤄진 일들이었기에 자기들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맹랑한 소리다.
한일합방은 조선인이 간절히 원해서, 조선인의 동의를 받은 정상적인 행위였으며 그로 인해 조선인은 많은 혜택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 위안부도, 징용도 다 조선인 자신들의 돈 벌기 위한 자발적인 참여와 협조였다는 일본 극우세력의 숨 막히는 막무가내한 주장의 인정이요 그 사상적 연장선상에 서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숨 막히는 일이 있다.
그것은 우리 안의 자발적 동조자들 내지 부역자들이다.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보기에도 황당하고 의심스런 그런 기가 막힌 병적 현상이다. 정말 뭘 몰라서 그러는가, 불안해서 그러는가! 아니면 우리 안의 누군가가 너무나도 미워서들 그러는가!
식자우환(識字憂患)인가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나 할까. 한 10년, 아니 4~5년만 더 끌며 진중히 잘 생각하고 참고 움직였더라면 우리 근세의 역사에도 본받을 만한 선각자와 선구자들을 한 소쿠리나 더 건졌을 텐데, 그 사이를 못 참고 기어나와 날치다 그물에 걸려 버린 저 불행했던 3, 40년대, 해방의 전야를 떠올린다. 그게 아니고, 실은 그런 커밍아웃(coming out)이야말로 겨레의 암이 될 저질의 씨앗을 그나마 걸러내고 골라내게 해 준 천금 같은 시간의 체였는지도 모른다고 하면 너무 냉혈한스런 시각이겠지. 그런데 지금 그로부터 80년, 90년의 시간이 흘러 100 년에 다가가니 이윽고 두 번째의 역사의 체가 우리들의 발걸음 앞에 걸쳐지는 듯하다. 그 그물을 내딛으며 이때까지의 헛된 이름, 헛된 이미지를 스스로 벗어 던지고 커밍아웃하여 나서는 인사들이 하루에도 여럿 보인다. 다시 한 번 옥석이 가려지는 마지막 기회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민망스런 기시감이다.
지금은 그러한 날뜀의 시간이 아니라 자중과 참회의 시간이다. 그리고 물 건너 일본이 하는 진정한 참회는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뜻하는 그런 참회는 일본에는 본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인에게 있어서의 참회란 이 세상에서 가장 꺾기 어려운 적인 자신[ego]마저 정복한 위대한 승리자에게 월계관을 씌워 주는 대관식이 아니라 싸움에 진 자에게 이긴 자가 공개적으로 창피를 주는 절차에 다름 아니다. 그들에게 참회의 마당이란 이러한 창피의 댓가로 과거의 죄과나 기억과 함께 미래의 책임마저 한꺼번에 벗어 던지게 해 주는, 패자의 승자에 대한 항복의식이다. 그래서 일본은 억울해하는 것이다.
도대체 전쟁의 승자도 아닌 한국에게 강자인 자기들이 몇 번이나 용서를 구해야 하느냐고……. 사실 제대로 된 의식도 없었지마는 일본은 몇 번이나 그런 의식을 더 치러야 하냐고 답답해한다. 진심이 없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 그런 사과는 백 번하나 한 번 하나 마찬가지라는 세계 공통의 언어, 보편적인 양심의 공감대를 이들은 모르는 것이다.
개별 전쟁에 따른 승패의 뒷처리로서가 아니라 뭇 생명의 억울함과 원한에 대한 뉘우침이나 해원이란 개념이 이들에겐 아예 없어 보인다. 일찍이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여사가 <국화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에서 설파했듯이 이들의 마음자리는 ‘옳고 그름’, ‘사람의 도리와 무도함’ 같은 선악의 분별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낯설어 한다. 대신 힘과 서열의 구조 앞에서 내가 누구 앞에서 낯(체면)을 세웠느냐 잃었느냐가 중요하다. 마음으로 진정 죄스럽냐, 인간으로서 차마 할 도리냐가 아니라 남보기에 얼마나 남세스럽냐 아니냐, 내가 누구 앞에 꿇었느냐 누구를 꿇게 했느냐에 극도로 예민하다. 그러니 아무리 인륜 도덕에 어긋나는 무도한 짓이라도 남이 모르고 안 봤다면 크게 개의치 않는다. 특히 자기들 섬나라를 벗어난 바깥의 약자들에 대해서는.
이렇듯 일본이 여태 정신적으로 이런 야만의 상태인 것은 우리의 불행이다. 박경리 선생의 말마따나 이런 일본인들에게 우리가 차려 줄 예는 없다. 현재로선 이들의 변화를 강제할 수단도 마땅치 않다. 그러니 그에 대한 대응의 방패와 회초리를 마련하여 때를 기다리는 한 편 우리 자신의 뉘우침의 길을 먼저 닦자.
남에게만 전적으로 죄를 물을 수 없는 우리 자신의 허물도 많다. 쓰라리고 얽힌 과거를 정리하지도 않은 채 내버려 둔 죄, 저 허공에 떠도는 원혼들을 팽개치고 이 한 몸 잘 먹고 잘사는 포르노에 취해 이불 뒤집어쓰고 잊어 먹은 죄, 최소한의 정기를 세울 반민특위의 제단마저 눈 번히 뜨고 어이없이 침범 당하게 방조한 죄, 작은 이해에 얽혀 상생의 길, 통일의 길로 매진하지 못하고 수많은 부모형제의 생령을 끝내 사지로 몰아넣은 죄, 도적인지 세작인지 원군인지 의병인지 피아를 구분 못하고 희떱게 바깥 세력에 부화뇌동한 죄, 뜬금없는 의처증, 의부증에 걸려 제 식구를 집요하게 스토킹 한 죄……, 아 이 몸이 이 순간에도 양수겸장으로 짓고 있는 죄 셀 수도 없이 하고많도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진실로 우리의 죄를 참회할 생각이 없다면 그 누구라도, 심지어 우리 자신마저도 우리를 용서해줄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일본이 택할 수 있는 상책 중의 상책, 수백 가지 정략과 술수와 뭉개기와 미루기, 기회 보기에 앞서는 가장 확실한 방책은 단 하나, 참회다. 진정한 참회에 용서와 화해가 따름은 우주의 법칙이다. 용서가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을 접고 상대의 참회한 마음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일이다. 접지 못하는 마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참회하지 않는 이들의 정수리에 언젠가 반드시 칼날을 내리치리라는 응어리진 모진 마음이요 날카로운 벼름이다. 번뇌다.
하지만 번뇌가 성가시다 하여 마지막 번뇌를 살라 버릴 아궁이부터 미리 헐어 버릴 생각은 없어야 한다. 번뇌 속에 진리가 있고 진리 속에 번뇌가 있으니 번뇌가 곧 진리요 진리가 곧 번뇌다. 이러한 번뇌들이 지금 잔설 되어 덮고 낙엽으로 눌어붙은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리하여 너와 나, 비록 남들이 자는 새벽에 여기저기 잠에서 깨어 주섬주섬 빗자루를 들고 길바닥을 쓸고들 있으나 오늘도 내일도 먼 훗날에도, 일본이 마침내 이 길로 끝내 오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가 함께 번뇌의 소멸로 가는 이웃으로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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