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25-37)
2024.6.2(김상수목사, 안흥교회)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어느 날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할 목적으로 질문을 했다(눅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0:25)
의도가 꾀나 불량해 보이는 질문이다. 이 질문을 받은 들은 주님은 율법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는지는 되물었고(26절), 율법교사는 자신 있게 이스라엘의 교육강령인 신명기 6장 5절 말씀으로 대답했다(27절).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
그랬더니 주님께서 율법교사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하시면서 그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셨다(28절)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10:28)
주님의 이 대답과 지적은, 그 율법교사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인가 안했다는 것인가? 안했거나 최소한 부족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 중의 하나인 사랑(Love, 愛)이라는 단어는 명사(名詞)도 되지만, 동사(動詞)도 된다. 명사적인 사랑은 관념과 지식에만 머무는 사랑이다. 그러나 동사적 사랑은 실천하며 살아있는 사랑이다. 주님께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는 말씀은 동사적인 사랑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실천하는 사랑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것처럼 우리들도 움직이고 실천하는 사랑을 해야 한다. 이것이 일관된 성경의 가르침이다.
주님은 율법교사에게 이것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한 이야기를 비유로 들려주셨다. 이 이야기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비유의 내용은 대략 이런 것이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그 강도는 이 사람의 소유를 빼앗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심하게 때려서 거의 죽게 만들고 가버렸다. 그때 한 제사장이 그 곳을 지나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가버렸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오던 레위인도 비슷했다.
그런데 마침 그곳을 지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달랐다.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상처를 싸매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서 주막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면서 부탁하고 떠났다. 심지어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을 것이라고 까지 말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일용직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 이었으므로, 데나리온 둘을 주었다는 말은 곧 이틀분의 품삯을 내었다는 뜻이다.
주님은 율법사에게 이들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지를 질문하셨다(36절).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37절)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주님은 다시 한 번 앞에서 하신 말씀을 재차 강조하셨다(37절).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37)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해 보자. 율법에 대한 지식이 해박했던 율법교사나 비유 속에 등장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왜 강도만난 사람을 피했을까? 율법의 가르침을 몰라서일까? 모를 리 없다. 이들은 모두 알아도 너무 잘 아는 사람들이다. 알면서도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의 사랑은 관념적이고 명사적일 뿐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자. 그러면 이들은 알면서도 왜 실천하지 않았을까? 그 중요한 단서가 35절에 나오는 “데나리온”과 “비용”이라는 말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은 겉으로는 율법에 대한 지식도 있고, 꾀나 고고한 척 하지만, 사실은 내면적으로 “두 주인”(하나님과 재물)을 섬기는 자들이었던 것이다(마6:24). 어쩌면 이 사람들의 모습이 이 시대 많은 사람들 아니 우리 자신의 위선적인 모습은 아닐까?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땅에는 강도만난 것 같은 사람들이 많다. 실제 생활이 강도만난 것처럼 어렵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겉은 멀쩡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마음에는 수많은 강도들로 인해 상처나 있기도 하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는 마귀라는 강도를 만나서 영적인 중병에 걸려서 신음하고 있다.
그렇기에 죽은 생명을 살려내기 위해서 당연히 전도에 힘써야겠지만, 그와 함께 실제 행동으로 자비를 베풀고 사랑을 실천하기를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대한 사랑은 곧 이웃사랑으로 표현되어지고, 이웃사랑은 곧 행동하는 사랑으로 표현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계산하지 않는 믿음이 필요하다. 나눔과 섬김은 꼭 전도목적이 아니라 해도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미국 개척시대에 미네소타의 광활한 숲 앞에서 두 남자가 대화하고 있었다.
"이봐,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줄 아나? 나는 저 산림자원을 개발할걸세. 펄프 공장과 광산도 저기 어딘가에 위치해 있을 것이고, 호수 사이에는 최고급 콘도와 골프장도 들어설 거야. 자네는 뭐가 보이나?"
"어? 나는 그냥 나무 밖에 안 보이는데……."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꿈(Dream)이다! 조각가는 거친 돌에서도 아름다운 작품을 미리 본다. 그것이 꿈이다. 처음에는 작은 씨앗으로 시작하지만, 욕심내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하나씩 해나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큰 나무가 되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꿈을 주셨다. 그것은 우리교회가 이 지역에 사는 영혼들이 쉴만한 큰 나무가 되는 꿈이다. 또한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아시아와 열방의 영혼들을 품는 꿈도 주셨다. 그 꿈에는 전도뿐만 아니라, 나눔과 섬김과 봉사의 꿈도 포함된다.
지난 주간에 학교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이다(현재 본설교자는 월요일마다 대학원에서 배우고 있음). 교수님께서 “김목사님은 전도를 위해 장수사진(영정)도 많이 찍어주셨는데, 이에 대해서 잠깐 학생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라고 하셨다. 그래서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지금까지 200여 분의 어르신들에게 장수사진을 찍어 드렸습니다. 그러나 조금 충격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저는 전도목적으로 봉사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 저희 동네에 이사했을 때, 나도 지역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지역을 위해 어떤 방법으로 봉사할 수 있을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찍다보니까 교회 이미지를 좋게 하는 효과도 같이 나타났을 뿐입니다. 결코 전도목적으로 찍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전도팀은 별도로 따로 있습니다. 봉사는 봉사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지낸다고 생각합니다”
문득 오늘 설교말씀을 준비하다가, 몇 년 전(2016년)에 처음 “빛과 소금 봉사단”을 시작하던 때가 생각났다. 그래서 그 당시의 설교문을 찾아 읽으면서 우리의 꿈과 비전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감사와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때의 설교문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오늘부터 우리교회에서 “빛과 소금 봉사단”을 시작한다.... 처음부터 엄청난 것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작은 것이라도 성도가 성도답고,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자. 강도만난 것과 같은 어려움 중에 있는 이 지역의 소외된 자들에게 찾아가자..... 이러한 꿈과 비전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교회 앞에 있는 주차장이나 주변 땅을 보라. 그곳에 뭐가 보이는가? 단순한 돌멩이나 나무 몇 그루, 텃밭에 있는 상추나 마늘이 보이는가?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라. 수많은 어려운 사람들이 쉼을 얻는 복지관이 보이지 않는가? 교회 현관에 약한 분들을 태운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예배당에서 눈물을 흘리며 감격적인 찬양예배를 드리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마치 암탉의 품에서 병아리들이 나오듯이 우리교회를 통해 세워지는 교회들과 세계선교를 위해 하늘을 날아가는 성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자.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 곧 우리의 미래다.“(2016년 5월 29일 설교)
몇 년 전에 봉사단을 시작하면서 이 설교를 할 때는 아직 본당에 엘리베이터도 없었고, 비전센터도 없었다. 더구나 해외에 교회를 짓거나, 선교여행을 간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때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들이 꿈을 품고 믿음으로 선포한대로 되게 하셨고, 지금도 그런 과정에 있다 새로운 주차장 땅도 이런 과정 속에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하나님을 살아계시다. 복음은 관념이나 철학이 아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살아있는 생명이다. 지금까지도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우리들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기로 결심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것들(재정, 사람, 환경 등)을 넘치도록 공급해 주실 것이다. 며칠 후에 있을 “이웃돕기를 위해 먹거리 나눔 행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선한 사역에 주인공들이 되자.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하신 말씀을 오늘 우리들 모두에게 주신 명령이며, 꿈이며, 축복의 말씀을 받아들이자. 그래서 계산하지 않는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