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차 문학기행 시인 신동엽편(부여, 6/4~6/5)
엊그제 6월 초 연휴를 맞이하여 내가 쓴 산문집 바람처럼 재즈처럼 중에서 “백제의 눈물”을 기억하며 부여로 여행을 떠났다. 1976년, 2012년 그리고 2015년에 이어서 이번이 4번째 부여로의 여행이었다. 궁남지 포룡정의 단아한 초여름의 운치와 정림사지5층석탑의 고고함이 1,400여 년 전의 백제의 아픔을 대변하고 있었다.
몇년 전부터 문학기행을 이어가는 중에 시인의 생가와 문학관을 7년 만에 다시 찾았다. 문학관을 들어가면 입구에 진열된 신동엽 시전집과 부여군에서 발행한 단행본 신동엽 시인의 길 조성사업을 압축하는 말인 “발자국이 쌓여 길이 되었다”를 먼저 구입했다.
시인 신동엽은 1959년에 등단하여 만 10년 동안 활동하다 39세에 요절했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과 4·19의 한복판을 관통한 시정신은 이후 세대들에게 산업사회의 너머를 꿈꿀 대안적 상상력의 모델로 커다란 영향력을 미쳐왔을 뿐만 아니라 권위주의 사회에서 그가 저항시인으로서 자리하고자 했던 존재방식, 창작실제에서 거둔 미적 형식 또한 선구적인 모델로 평가받아 왔다.
신동엽은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서 태어났다. 1944년 부여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같은 해 국가에서 숙식비와 학비를 지원해주는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했다. 또한 사범학교 시절에 독서에 힘씀으로써 아나키즘(개인을 지배하는 모든 정치 조직이나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 정의,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상이나 운동)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 갔다. 1948년 11월 이승만 정권이 토지개혁을 실시하지 않는 것과 친일파를 청산하지 않는 것에 항의하는 동맹휴학으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고향으로 내려와 있었던 그는 1949년 부여에 있는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비록 사범학교에서 퇴학을 당했지만 교원자격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3일 만에 교사직을 그만두고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6.25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지만 7월 15일 인민군이 부여를 점령했다. 그 당시 인민군은 토지개혁과 조직사업으로써 공산주의를 실천하고 있었다. 따라서 시인 신동엽의 지식을 조직사업에 활용하려는 인민군의 요구로 9월말까지 부여민주청년동맹선전부장으로 일하였다. 시인은 세상을 바꾸어 가야 한다는 공산주의자 주장에 동의는 하였지만 정작 시인의 생각은 무정부주의자였다. 1953년 단국대를 졸업한 후 서울 돈암동에서 자취를 하며 헌책방을 열었다. 이때 시인은 이화여고 3학년이던 부인 인병선을 만났다.
1957년 인병선과 결혼한 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인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부여읍에서 모교의 이름을 딴 이화양장점(현재 부여읍에서 제일 번화한 자리)을 열었으며 시인은 보령군 주산농업고등학교 교사로 부임을 하였다. 하지만 폐결핵을 앓게 되면서 교사직을 그만두고, 전염이 될 것을 우려해 부인과 딸아이를 서울 장모 곁으로 떠나보내고 집에서 요양을 하며 독서와 글쓰기에 빠진다. 1959년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를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신춘문예에 당선이 되면서 문단에 등단을 하였다. 건강을 되찾은 시인은 서울에 있는 교육평론사에 취업을 한 후, 학생혁명시집을 집필하며 4.19혁명에 뛰어 들었다. 그래서 신동엽을 4.19시인으로 평가하는 문인들이 많다. 훗날 4.19혁명의 기억을 되살려 대표적인 참여 저항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와 “껍데기는 가라” 라는 시가 나올 수가 있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서사시 금강(錦江)에 들어 있는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중에서
동학농민전쟁사를 서사시로 풀어 쓴 금강은 동학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시인의 눈으로 예리하게 진단한 작품으로 시대를 가로지르는 시인의 통찰력이 들어 있으며, 과거와 현재의 실상을 가로지르며 시대를 비판하는 시인의 정신이 드러나 있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전문.
시인은 1961년에 명성여고 야간부 교사를 하면서 안정적으로 시작에 몰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1964년 건국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고 시집 “아사녀”를 출간, 1967년 장편서사시 “금강”을 발표했다. 하지만 1969년 4월 7일 간암이 악화되어 39세의 젊은 나이로 부인과 2남 1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인병선씨는 지금까지 혼자 자녀들을 키워내며 짚풀문화를 연구해 왔다. 출판사 등에 다니며 생활을 꾸려나가는 한편 신동엽 시인의 육필 원고를 모아 책을 냈다. 시인이 알려진 것은 온전히 부인 인씨의 노력에 힘입은 결과다. 70년대 민주화의 상징시 ‘껍데기는 가라’는 출판이 되자마자 곧바로 판매 금지되지만 절창(絶唱, 아주 뛰어나게 잘 지은 시문)은 숨겨질 수가 없었다
신동엽은 민주세력에 스며든 기회주의 세력을 비판하고 통일을 노래한 껍데기는 가라를 필두로 삼월, 4월은 갈아엎는 달, 우리가 본 하늘 등 여러 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그밖에 장시(長詩)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여자의 삶’ 등이 있으며, 시인정신론, 시와 사상성 등 평론 10여 편을 썼다.
" 얼마 아니 지나면 가로수마다 윤기 짙은 새잎이 화창하게 피어 날 것이다. 그리고 그 신록의 푸짐한 경영 밑에 젊은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먼 꿈을 싣고 사라져갈 것이다. 그 사라져가는 언덕 너머 내 소년 시절의 인생의 꿈은 사리고 있었다. 언젠가 부우연 호밀이 팰 부렵 나는 사범학교 교복 교모로 금강 줄기 거슬러 올라가는 조그만 발동선 갑판 위에 서 있은 적이 있었다. 그대 배 옆을 지나가는 넓은 벌판과 먼 산들을 바라보며 “시”와 “사랑”과 “혁명”을 생각했다. 내 일생을 시로 장식해봤으면. 내 일생을 사랑으로 장식해봤으며. 내 일생을 혁명으로 불질러봤으면. 세월은 흐른다, 그렇다고 서둘고 싶진 않다". 신동엽 산문 “서둘고 싶지 않다” 중에서
유작으로 통일을 기원하며 쓴 “술을 마시고 잔 어젯밤은” 이 있으며, 사후1975년에 신동엽 전집이 나왔다. 1989년에는 시 “산에 언덕에”가 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한편 1969년 4월 9일 경기도 파주군 금촌읍 월롱산 기슭에 안장되었다가 1993년 11월에 부여로 옮겨와 능산리 고분 건너편 산에 이장되었다.
신동엽이 세상을 떠난 뒤 ‘신동엽 시비 건립위원회’(위원장 구상)가 구성되어 문인, 동료, 제자 등 1백여 명이 참여하였으며, 시비의 글씨는 박병규, 설계는 정건모, 조각은 최석구가 했다. 마침내 1970년 4월 18일 시인의 고향인 부여읍 동남리 백제교 옆 백마강 기슭에 시비(산에 언덕에)가 세워졌다.
이후 신동엽 24주기를 맞이하여, 1990년 4월, 시인을 흠모하는 단국대학교 교수, 재학생, 동문 그리고 문단의 뜻을 모아, 그가 문학의 꿈을 키우던 단국대학(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교정에 시비가 세워졌다가, 2007년 단국대학이 죽전캠퍼스로 이전해감에 따라 현재는 단국대학교 죽전캠퍼스 상경대학 1층 입구 앞에 세워져 있다. 부여초등학교(충남 부여군)에는 1999년 신동엽 30주기를 맞이하여 교정에 신동엽 시비가 세워졌으며, 높이 2미터 정도의 단아한 신동엽 시비에는 ‘금강’의 한 구절이 적혀 있고. 전주사범대학에는 2001년 5월 15일에 제막식을 가졌으며 시비에는 시인의 대표작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껍데기는 가라” 일부가 새겨져 있다.
1985년 5월 유족과 문인들이 부여읍 동남리 294번지에 시인의 생가를 복원해서 영구보존을 위해 부여군에 기부했다.
한편 부여군에서는 생가 바로 뒤편에 신동엽문학관을 2013년 5월 3일에 개관하였다. 신동엽 길을 걸으며 시인을 추억할 열한 개의 상징물도 세웠다. 구본주 조각가를 비롯한 뛰어난 예술가 다섯 사람의 감수성과 조형적 재능이 모여서 시인의 길을 수놓는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특히, “여행자의 출구”, “쉿, 저기 신동엽이 있다”, “궁궁을을(弓弓乙乙)”, ‘바람의 경전“, ”금강에 앉다“ 는 저마다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길이 호평을 받을만한 명작의 출현이라고 여러 예술가들이 짚어주었다.
신동엽문학관은 생가와 마을, 작품이 구상된 실제 장소들 속에 자리해 있다. 시인의 생애를 구성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의 성적표, 생활기록부, 반장 임명장, 신분증 등 성장기의 이력을 증언할 수 있는 각종 유품과 자료들도 완비되어 있다. 시인의 아내로서 ‘짚풀생활사박물관’을 일궈낸 인병선 여사가 지켜온 신동엽의 유물들은 이미 하나의 박물관을 구성할 만큼 풍부하다. 시인의 유품들과 자료들을 보면서 나와 많은 공통점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중요한 점은 이 모든 내용이 실제 장소에 하나의 작품처럼 공간미학화 돼 있다는 것이다. 건축가 승효상의 설계로 완성된 신동엽문학관은 오늘날 부여가 자랑하는 3대 건축물의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신동엽의 시 정신에 부합하는 조형물이 어떤 것이며, 문학관이 갖추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를 건축예술로 펼쳐 보이는 작품 ‘신동엽문학관“은 건축전공 학도들의 답사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와 함께 부여 출신 화가 임옥상의 설치미술 “시의 깃발”은 신동엽의 시가 바람에 나부끼는 형상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지금도 신동엽정신을 계승하려는 후배들이 관리하고 있는 신동엽문학관은 요즘도 백제의 수도 부여에서 현대적 의미의 대안적 상상력을 제공하는 문학기행의 메카가 되기를 꿈꾸고 있다.
신기하게도 이번에 부여를 찾은 것도 여름이 시작되는 6월 초였으며, 산문집 “바람처럼 재즈처럼” 중에서 백제의 눈물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면서 이번 문학기행 시인 신동엽 편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 여름이긴 했지만 어느덧 긴 해가 뉘였뉘였 꼬리를 길게 드리우며 석탑의 색깔도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널따란 정림사지 터에 키 큰 석탑만이 그 오랜 풍상을 견디고 서 있어 이곳 부여로 천도를 한 후에 백제의 부흥을 염원했던 성왕의 바램도 정림사와 함께 불길로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쉬웠다.
꽃이 진다고 역사를 탓하랴. 이제 더 이상 백제는 잃어버린 역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부여, 너무나 초라했다. 정부에서는 백제문화의 가치를 찾고 재조명하는 일에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백제의 눈물은 여기에서 멈춰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