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올곧음" 대쪽같은 선비정신 면면히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퇴계학맥 전승 大문장가…후학양성에도 큰 공헌
벼슬에 연연 않고 초야서 한평생 학문·덕성수양
임하댐 수몰로 안동 무실서 옮겨져 정자 복원
조선조 500년을 지탱할 수 있었던 원동력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초야에 묻힌 선비들의 대쪽같은 올곧음의 지조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의 학문은 자신의 심성을 갈고 닦아 덕성을 완성함에 전력함으로써 남을 교화시키는 길과 오직 자신의 출세만을 위하여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공부하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논어'에는 전자를 '위기지학(爲己之學)', 후자를 '위인지학(爲人之學)'이라고 하였다. 고인들은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과거공부에 자신의 인생을 걸기도 했지만, 학문의 본질이 과거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면 즉시 초야로 돌아와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면서 자신의 완성과 후진양성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위기지학에 몰두한 선비들은 시대의 정신을 이끄는 사표였다. 상소를 올려 임금을 나무라거나 국정에 대한 타개책을 제시하기도 하였고, 관리들을 질책하면서 사회를 정화하는 큰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호와정은 爲己之學의 본거지
조선중기를 살았던 호와(壺窩) 류현시(柳顯時·1667~1752)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생원시에 일등으로 합격했지만 벼슬의 뜻을 접고 안동 박실 호곡(壺谷)으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치며 일생동안 경학을 실천했다. 호와정(壺窩亭)은 바로 그가 일생동안 학문과 수양을 하면서, 한 지역사회의 사표역할을 한 본거지였다.
호와정은 현재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 전주류씨 수남위파의 호와종택과 나란히 앉아있다. 수남위파는 안동 무실 수남에서 박실로 옮겨 400여년을 세거하다가 1987년 임하댐이 수몰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호와의 12세손인 류해종씨(77)가 호와의 유덕을 기려 다시금 호와정을 복원하고 현판을 걸었다. 호와정에는 이용구가 지은 호와정기문이 있다. 건물 정면의 '호와정(壺窩亭)'이라는 현판글씨는 근세인물인 김진동이 썼고, 마루 위에 붙어있는 '호와(壺窩)'라는 현판은 죽초(竹肖) 김택진의 글씨다.
호곡에 둥지를 튼 류현시는 자호를 호와라고 지었다. 그의 집 부근에는 푸른 비취색의 자단향(紫檀香) 한 그루가 그늘을 이루고 있었다. 호와는 이 그늘을 향기로운 처마, 즉 향첨(香)이라 명명하고 날마다 그 아래서 시를 읊조렸다. 꽃피는 아침, 달뜨는 저녁(花朝月夕)이 되면 당대의 큰 선비였던 상사공(上舍公) 류헌시, 족질(族姪) 되는 박재(樸齋) 류석두, 재종질 되는 용와(窩) 류승현 등과 함께 학문을 토론하니 당시 선비들은 "하늘의 덕성(德星)이 이들의 일문(一門)에 다모였다"고 칭송했다.
#당대의 文行
호와는 특히 한부의 논어를 애독하였다. 그는 "나는 많은 서적을 탐독하기보다는 논어 한부에서 득력(得力)하였다"고 논어를 통해 힘을 얻고 있음을 스스로 강조하였다.
그는 당시 안동군지 편찬에도 크게 공헌했다. 저술과정에 관청과 서로 거슬리는 문제가 있어도 이에 개의치 않고 공정한 저술에 전력을 다했다. 도훈장(都訓長: 학교의 교관)으로 추대되어서는 학생들을 계도한 공이 컸다. 이에 후임으로 온 고재(顧齋) 이만, 눌은(訥隱) 이광정도 이어가며 호와의 교육방침을 그대로 전승해 따랐다. 조정에서는 호와의 이러한 공로를 인정해 수직(壽職: 80∼90세의 학덕 있는 자에게 내리는 벼슬)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은전을 내려주었고 또한 아버지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까지 삼세(三世)를 추증하여 은전을 내렸다.
호와가 교유한 인물은 당대의 명현이었던 하당(荷塘) 권두인, 창설(蒼雪) 권두경, 밀암(密庵) 이재 등이다. 이들 가운데 하당과 창설은 "호와의 문행(文行)이 우리고을에서 제1인자"라고 칭송하였다.
|
|
류해종씨가 대청마루에 앉아 당대의 대선비였던 호와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 | | 논어와 심경, 근사록을 깊이 연구한 호와는 만년에 체득한 경지가 매우 높았다. 그는 일찍이 밀암과 태극(太極)에 대한 요지(要旨)에 대해 논쟁이 붙으면 늘 서로간의 의론이 합치되지 않았다. 그러나 밀암은 훗날 사람들에게 "호와의 설이 맞다"고 하였고, 당대의 학자 김성탁, 조덕린 등도 감탄하였으니 그의 학문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다. 호와는 또한 일생을 초야에 묻혀 살면서 종일토록 꼿꼿이 앉아 수양에 전념했다.
당시 세인들은 퇴계학맥을 잇는 명현 가운데 상사공과 박재, 용와, 호와 네 명을 지역의 대원로인 호곡사로(壺谷四老)라고 불렀고, 그들의 풍류와 운치는 '세상 밖에서 노닌 분들'이라고 말하였다. 대산(大山) 이광정은 "문장은 후생들의 표본이 되었고 세상의 도를 붙들어 세운 분"이라고 호와를 극찬했다.
#삶은 올곧음이다
그는 마지막 운명을 할 때도 평소의 편안한 안색으로 논어의 '사람의 삶은 곧음이다(人之生也直)'라는 구절을 큰 소리로 암송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임종을 지켜본 노애(蘆厓) 류도원이 쓴 그의 행장에 기록되어 있다.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사람의 도리와 덕성을 수행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 이런 큰 선비가 있었기에 당시 사회는 법보다 예의가 더 중시되고, 예의와 염치를 잃으면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회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인간의 도리는 내팽개치고 끝없이 자리와 권세를 탐하며 어른이 어른답지 못한 혼란한 세태와는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호와의 학맥은 퇴계학맥 중 학봉 김성일을 연원으로, 당시 영남소수(嶺南疏首)인 백졸암(百拙庵) 류직의 제자이다. 호와의 학문은 아들 박촌(博村) 류택현, 박촌의 고손인 가재(嘉齋) 류치교, 가재의 아들 박라(博羅) 류긍호로 계승되면서 집안의 문학재사(文學才士)가 끊이지 않았다.
박라 류긍호는 호와의 6세손으로 정재(定齋) 류치명의 제자이고 응와(凝窩) 이원조의 생질이며 갈천(葛川) 김희주의 손자사위이다. 그는 문집 4책과 경행일기, 병인란일기, 반중문견록 등을 전하고 있다. 이후에도 만하(萬下) 류연목, 동화(桐華) 류동근 등 문행이 끊이지 않았다. 호와의 저서는 호와집 두 권만 세상에 전한다. 나머지 저서들은 1700년경과 정조연간 등 두 번의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어쩔 수 없이 고향 떠나왔지만 先代의 정신 변함없이 지킬 것"
◇호와 12세손 류해종씨
호와의 12세손인 류해종(柳海鍾)씨는 임하댐 수몰지역인 안동무실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선대의 정신을 변함없이 지키고 있는 류씨의 산증인이다.
지금으로부터 19년 전 일가친척들과 함께 이곳에 정착하게 된 연유와 그동안의 삶을 찬찬히 얘기하는 그의 말속에는 간절한 수구초심(首丘初心)이 켜켜이 묻어 있었다.
그는 경북의 여러 곳을 마다하고 굳이 이곳에 정착하게 된 이유에 대해 "퇴계이전에는 선산이 인물의 중심지였다는 점과 70여 호가 함께 살 수 있는 경작지가 있고 배산임수의 지형을 갖고 있는 데다, 안동 임하댐에서 흘러내려오는 낙동강 물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고향과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 정착한 이후 일가친척 자손 가운데 행정고시 합격자와 박사 몇 명을 배출하는 등 자손들이 번창하고 있다"고 만족해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정착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흉금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어 늘 죽마고우가 그립다"며 고향을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숨기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