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무덤 왕릉
문 병 달
지난 10월 24일 박물관회 답사에 참여하였다. 경남 산청군에 있는 가락국 마지막왕 구형왕릉(仇衡王陵)에 갔다. 신라시대 왕릉이나 조선의 왕릉과는 전혀 다른 특이한 릉이다. 가파른 산비탈에 주변의 막돌과 깬돌을 계단식으로 층층이 쌓아올린 피라미드형 적석총(積石塚)이다.
왕릉의 제1단의 너비가 약 20m정도 되며 1미터 남짓한 높이로 제7단을 쌓았고 전체 높이가 7m, 둘레가 100여 미터 된다.
중앙에 있는 제4단은 가로 40cm, 세로 40cm, 깊이 68cm의 감실(龕室)과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다. 아마도 감실은 신주나 등잔을 두기위한 것인데 여기서는 용도를 알 수 없다.
왕릉 앞면 중앙에는 가락국 양왕릉(讓王陵)이라는 비석이 서있고 1미터 정도 높이의 돌로 쌓은 담이 석총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구형왕은 양왕이라 부르는 것은 신라 법흥왕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상대적으로 열세인 왕이 항복하였다. 전쟁을 치르지도 않고 왕위를 양보했다고 하여 양왕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또한 문무인석과 석수(石獸), 상석,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이 석물들은 근래에 김해 김씨 문중에서 만들어 세운 것들이다.
구형왕릉이 왕릉이 아니고 석탑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왕릉의 서쪽에 있는 왕산사라는 절에서 나무로 된 궤짝이 발견되었다. 그 궤짝속에서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과 옷, 활과 칼 등의 유물이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명승 탄영(坦瑛)의 왕산사기가 함께 나와서 이를 고증하여 왕릉을 다시 찾은 계기가 되었다.
구형왕은 금관가야 10대왕으로 신라 제23대 법흥왕 19년(532년) 왕비와 아들과 함께 신라에 투항하였다. 상등의 벼슬과 그 본국을 식읍으로 받았으며 그 왕족을 진골로 편입되어 신라에서 준 왕족 대우를 받았다.
구형왕이 나라를 선양한 뒤 지리산 수정궁에서 칩거생활을 한후 최후를 맞이하였고 왕산 기슭의 돌무덤의 주인이 된 것 같다.
구형왕의 셋째 아들 무력(武力)은 신라 장수로서 많은 공을 세우고 각간의 벼슬에 까지 올랐는데 김유신 장군은 그의 손자이다.
무력의 아들은 서현으로 부인이 진흥왕의 조카인 만명부인이다. 즉 서현과 만명 부인의 아들이 신라삼국 통일의 주역인 김유신 장군이다.
김유신 장군은 청년시절 화랑도를 이끌고 증조부 왕릉을 지키면서 지리산 일원에서 호연지기를 키웠다. 지금도 구형왕릉 옆에는 “흥덕왕 시릉사우지 유지(興德王 侍陵柌宇地遺地)”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흥덕왕은 김유신이 신라 제42대왕 흥덕왕으로부터 흥덕대왕으로 추봉된 것이고 왕릉주변에서 무술을 연마한 표지석인 것 같다.
구형왕이 신라가 쳐들어 왔을 때 백성이 화를 당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나라를 스스로 신라에 넘겨주었다. 그래서 백성들로부터 추앙도 받고 훗날 그의 증손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구형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드는 덕양전이 있고 매년 춘추로 향례를 올린다. 현재 구형왕릉은 사적으로 덕양전은 경남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구형왕도 11년간 왕으로 있었으나 돌무덤 같은 특이한 왕릉이다. 왜 일반왕릉과 다른지 연구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구형왕릉 입구에서 왼쪽으로 1.8km 올라가면 허준의 스승 류인태 생가와 약수터가 있다. 한번 가볼만한 지역인 것 같다.
옛말에 큰 인물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3대 적선을 해야 한다”하지 않았는가. 구형왕의 3대 후손이 김유신이다. 왕릉답사는 오묘한 무엇이 있다. 다시한번 가봐야겠다.
2014. 12. 22
첫댓글 잘 배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격려 고맙습니다.매월 한번은 고적 답사를 다니고 있습니다 .
나도 구형왕릉을 답사한 일이 있습니다마는 내용을 세세하게 알지못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역사공부를 잘 했습니다.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격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