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지 “좋은 생각”에서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시를 보았습니다. 소개하면, “손을 잡으면 마음까지 따뜻해집니다 / 누군가와 함께라면 / 갈 길이 아무리 멀어도 갈 수 있습니다. / 눈이 오고 바람 불고 / 날이 어두워도 갈 수 있습니다. / 바람 부는 들판도 / 지날 수 있고 위험한 강도 건널 수 있으며, / 높은 산도 넘을 수 있습니다. / 누군가와 함께라면 갈 수 있습니다. / 나 혼자가 아니고 / 누군가와 함께라면 손 내밀어 건져 주고, / 몸으로 막아 주고, 마음으로 사랑하면 / 나의 갈 길 끝까지 잘 갈수 있습니다. / 이 세상은 혼자 살기에는 / 너무나 힘든 곳입니다. / 단 한 사람이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 단 한 사람의 손이라도 잡아야 합니다. / 단 한 사람이라도 믿어야 하며 / 단 한사람에게라도 / 나의 모든 것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 동행의 기쁨이 있습니다. / 동행의 위로가 있습니다. / 그리고 결국 우리는 / 누군가의 동행에 감사하면서 / 눈을 감게 될 것입니다. / 우리의 험난한 인생길 / 누군가와 손잡고 걸어갑시다. / 우리의 위험한 날들도 / 서로 손잡고 건너갑시다. / 손을 잡으면 마음까지 따뜻해집니다.”입니다. 여러분, 동행은 함께 한곳을 보고 한곳으로 함께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문의 사람 “인”자를 보면, 한 획이 아니라 두 획이며,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담으로, 하와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아닌 같은 사람으로 하나가 되어 살며, 세상은 양과 음으로 조화를 이룹니다. 철학자 “헤겔”은 이러한 이치를, 정반합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동행”이라는 말에 행복이 있고, 미래가 있고, 비젼이 있습니다.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세례를 주라는 명령만 하지 않고, 우리에게 귀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본문의 끝을 보시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입니다. 요 14: 18에서도,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 약속은, 우리로 하여금 혼자 있게 하지 않고, 항상 함께 동행하시겠다는 겁니다. 우리가 힘들고, 지쳐있을 때도, 혼자서 눈물을 흘리며 괴로움 속에서, 몸부림을 칠 때에도, 어떤 상황에서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와 함께 희노애락을 나누십니다. 어떤 청년이 꿈에 하나님을 만나 하늘나라를 구경했답니다. 하늘나라를 구경하던 중, 각 사람이 살아온 발자취를 그려 놓은 모래밭을 발견하고는 호기심이 생겨서 살펴보았는데, 그 곳에는 자신의 이름이 적혀있는 모래밭도 있더랍니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니, 발자국이 두개가 나란히 있어서 흐뭇했답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라고 생각되는 곳에서는 발자국이 하나밖에 없더랍니다. 청년은 분한마음에 하나님께 따지듯 말했습니다. “하나님, 왜 제가 힘들고 어려울 때는 혼자 내버려두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들아, 난 언제나 너와 함께 있었단다. 너와 동행하다가 너에게 고난이 닥쳤을 때는, 내가 널 업고 다녔단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어디서든,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행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하나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과 언제나 둘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에 풍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6 - 17절을 보시면,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약속하신 곳으로 가야 합니다.
본문 16절을 보시면, 제자들은 예수님과 약속한 장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경배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들처럼, 우리도 오늘날 예수님과 만나는 장소가 있습니다. 어딥니까? 예배당입니다. 왜? 예배당입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예배당에 와서 기도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그래서, 예배당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만남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이 장소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할 수 있습니다. 홀로 있을 때는 독백처럼 소리내어 찬양하고, 기도하는 그 시간, 그 자세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과 동행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성도들의 삶에 대해 빌 3: 13 - 14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계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을 의지하여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언제나 힘차고, 기쁨에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때로는 먹구름이 가득한 근심 걱정의 터널 속에서, “슬럼프”에 잔뜩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예수님이 없이, 오직 나 혼자만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가 슬럼프에서 벗어나는 것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처음 만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했던 그 순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슬럼프에 빠져서 침체되는 것은,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슬럼프에 빠질 때마다 예수님과 처음 만났을 때의 경험을 기억함으로 슬럼프를 극복하고 승리를 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과의 약속 장소에서 살아계신 예수님을 뵌 제자들이 무엇을 했습니다. 본문 17절을 보시면, “경배하였다”고 합니다. 경배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을 취한다는 겁니다. 폴란드 출신의 피아니스트 “파데르브스키”는, 첫 레슨을 받고, “네 손은 조막손이니 아예 그만두는 게 좋다”며, 피아노를 포기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또, 불후의 테너 가수 “카루소”가 노래를 처음 불렀을 때, “구멍 뚫린 문풍지에서 나오는 목소리”란 혹평을 들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월트 디즈니”는 만화 원고를 들고 신문사를 찾아갔을 때 “수준 이하”라는 말을 들으며 거절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명사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방해하는 것은, 나의 부족함이 아니라, 교만입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을 뵙고 경배하는 무리 가운데는, 의심하는 자들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에 대해 의심하며, 경배하였던 겁니다. 예수님께 대해 두 마음을 품은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 마음을 품는 것은 교만입니다. 오직, 한 마음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동행하시는 하나님만을 경배함으로, 살아계셔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8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 승리를 선포합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았다는 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세력을 지배하는 우주적인 권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위임받았다는 대선언입니다. 여러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합니다. 곧,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는, 제한적인 권세만 지니고 계심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고 죄인을 용서하고 자연을 다스리고 죽은 자를 살리는 권세만 지니셨지만, 이제는, 하늘의 권세까지 위임받으심으로, “왕 중의 왕”이 되셨다는 겁니다. 이것은, 이미 다니엘서에서 예언되었습니다. 단 7: 14을 보시면,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고 합니다. 성부께서는 성부께 온전히 순종한 예수님에게, 구약에서 예언하신 것을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의 권세는 합법적인 권세이며, 무제한의 권세로, 천국과 지옥의 결정권을 가지신 겁니다. 성도된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에 대해, 일반적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우리와 동행하는 것보다 세상의 권세자가 동행하는 것을 더 선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는 생각입니다. 또, 세상의 교회가 일반적인 종교시설 가운데 하나로만 생각하는 것 또한 예수님을 모르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우리와 동행하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자가 없습니다. 이렇게 전능하신 예수님께서 성도된 우리와 함께 동행하심을 기억함으로, 삶의 어느 순간에서든 기쁨으로 힘있게 승리하는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9 - 20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예수님이 항상 나와 동행하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 20절 하반절을 보면, 예수님의 귀하고 큰 약속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의 성취에 대해 요 14: 16 - 18을 보시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인, 성령을 우리 각 사람에게 부어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약속의 성취는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약속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하여 유효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이후로 지금까지 줄곧 성도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어떤 일을 당해도 낙심치 않고 본분을 행할 수 있는 겁니다. 또, 우리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에, 우리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절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힘있게 전진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주님의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약속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약속을 아는 것으로만 끝내기에, 두려움을 갖게 되고, 슬럼프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두려움은 불신앙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 불에 던져지는 순간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의 믿음으로 행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은, 어떤 순간에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성도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약속을 우리만 소유할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도 전함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만드는 전도에 더욱 힘쓰시길 바랍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이 우리 곁에 안 보임으로, 우리가 혼자 있는 것 같기에, 나만 힘든 것 같을 때에도 또, 세상이 끝날 것 같은 절망의 순간에도, 예수님은 우리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왕중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으며, 예수님과 늘 함께 동행 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