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막에서의 성性 (사막교부 뤄시앵 레뇨 p64-67)
흔히 여자에 대한 혐오감이나 강박 관념을 초세기 그리스도교, 특히 수도승생활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는데, 적어도 사막교부들에게 이러한 견해는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는 여자에 관한 비유로 자신의 금언을 단순하고 진솔하게 설명하고 있다. 마카리우스처럼 아르세니우스도 독방의 독수도승을 결혼 전에 자기 방으로 내쳐진 동정녀에 비유하고 있다. 요한 콜로부스는 벌거벗은 두 여인이나 많은 애인을 거느린 매춘부를 자신의 가르침에 비유로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또 다른 원로는 젖을 떼기 위해 쓴맛이 나는 풀로 자기 가슴을 문지르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쓴 풀은 죽음을 상기시키며 수도승은 그것으로 불순한 환상들을 몰아낸다. 론기누스는 욕정에서 정화되어 성령을 잉태한 영혼을, 임신 중 월경이 멎는 여자에 비유하기 까지 한다. 사막을 떠나 결혼하라고 유혹하는 음욕의 악령한테 괴롭힘 당한 올림피우스는 “자, 이제 너는 아내와 딸 하나를 거느린다. 그들을 부양하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 라고 말하면서 진흙으로 여자와 계집아이 하나씩을 빚는다.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그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유혹에서 벗어나게 된다.
어디나 처럼 사막에도 성욕에 사로잡힌 수도승은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알려진 3천 개의 금언에서 우리는 단 두 경우만을 접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누군가 추수하는 들판에서 여자와 함께 드러누운 형제를 보았다고 믿는 내용이다. 그가 파렴치한 행위를 중단시키려고 다가가 보니, 실상인즉 짚단 두 개가 겹쳐져 있는 것이었다. 또 다른 수도승은 함께 머무르며 악을 범하는 두 형제를 고발하기 위해 원로를 찾아갔다. 원로는 저녁에 그 두 형제를 불러 한 이불 밑에서 자게 한 후 제자들에게 말했다. “고발한 이놈을 독방에 가두어라. 유혹을 느낀 자는 바로 이놈이다.”
사막교부들의 문헌에는 육체·성·여자를 혐오하는 마니교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육체의 조건에 관한 한, 그들은 확고한 현실주의자였다. 독수도승은 본능과 욕구를 지닌 정상인이다. 오리게네스처럼 더 잘 금욕하기 위해 거세까지 단행한 사람은 그들 중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늘나라를 위해 고자가 된 사람들'에 관한 예수의 말씀에 함축된 포기의 뜻을 이해했다. 그들은 자신 안에서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강한 욕정에 대해 놀라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여자 12명으로도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단언하지 않았던가? 한 원로는 이렇게 말했다. “솔로몬은 여자를 사랑했다. 분명코 모든 남자는 여자를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내 생각에 격렬히 대항하며, 본성을 순수하게 하고 육체의 쾌락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본성을 억제한다.” 아마 에바그리우스와 그의 제자들은 벌거벗은 여자를 껴안고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무욕無欲의 경지를 꿈꾸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교부일수록 현실적이었다. 압바 아브라함은 스스로 육체의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한 원로에게 이런 교훈을 주었다. “독방에 들어가서 당신 요 위에 한 여자가 누워 있다고 상상해 보시오. 당신은 그것이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소?” 원로가 대답했다. “아니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손대라고 부추기는 생각은 물리치겠소.”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을 맺었다. “그렇듯 욕정은 여전히 살아 있소, 욕정은 오직 성인 앞에서만 꼼짝 못하는 법이지요.”
수도승이 육체의 유혹에 굴복한 일화들을 다 모은다면, 우리는 그 수에 놀랄 것이다. 그러나 유혹에 저항했던 수도승의 일화가 훨씬 더 많다. 한편,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은 거의 모두 다시 일어나 더 큰 열정과 겸손으로 수도승생활을 새롭게 시작했다. 성과 성욕이 매우 중요하게 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온갖 육적 욕망을 삼가면서 순결하게 사는 수도승들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순결에 관한 한 고대 수도승들을 지나치게 엄격히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 동아일보|오피니언 입력 2019-10-21 03:00
토끼와 늑대, 누가 더 평화적일까[서광원의 자연과 삶]〈10〉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지금 막 두 ‘선수’가 맞붙었다.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탐색을 하느라 빙글빙글 돌았다. 틈이 있다 싶으면 사정없이 ‘펀치’를 주고받았고, 여의치 않으면 다시 빙글빙글 돌곤 했다. 격렬한 대결이었다. 요즘 인기 있는 격투기 경기인가 싶은데 사실 둘은 사람이 아니라 토끼들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생물학자로 나중에 노벨상을 받은 콘라트 로렌츠가 딸과 함께 숲을 산책하다 목격한 장면이다. 그는 나중에 ‘동물이 인간으로 보인다’라는 책에 이 광경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읊조린다. “토끼는 정말로 온화한 동물일까.”
그도 그럴 것이 녀석들은 큼직한 털 뭉치가 빠질 정도로 난타전을 벌였다. 나도 어렸을 적 토끼를 키우면서 몇 번 본 적 있는데 녀석들은 한번 붙으면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려 한다. 상대를 거의 죽이다시피 한다. 아니, 그 귀엽고 착하게 생긴 토끼들이 진짜 그렇다고? 그렇다. 정말이지 보이는 것과는 천양지차다.
우리가 평화의 상징으로 알고 있는 비둘기는 더하다. 이 녀석들도 보기와는 달리 상대를 있는 대로 괴롭히는데, 상대가 도망가면 쫓아가서까지 인정사정없이 대한다. 끝장을 내려 한다. 귀엽고 평화롭게 보이는 녀석들이 이럴 정도니 무서울 정도로 거칠어 보이는 늑대는 말할 것도 없을 것 같다. 그렇다. 녀석들의 싸움은 무시무시하다. 녀석들도 빙글빙글 도는 것으로 싸움을 시작한다.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 그러다 틈을 보았다 싶으면 전광석화처럼 달려들어 한판 붙는다. 여기까지는 토끼나 비둘기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인상적인 건 이후다. 한 녀석이 ‘내가 졌다’며 항복 신호를 보내는 순간 상황이 완전히 바뀐다. 패자가 공손하게 내미는 목덜미나 배 같은 급소를 승자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문다. 단, 무는 시늉만 하지 실제로 물지는 않는다. 공손함이 사라진다 싶으면 다시 확실하게 승자와 패자를 확인시키지만 치명상을 입히거나 죽이는 일은 거의 없다.
왜 순한 토끼와 비둘기들이 상대를 죽이기까지 하는데 늑대는 그렇지 않을까.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체로 먹이사슬의 위쪽에 있는 덩치 큰 녀석들일수록 같은 종을 죽이지 않는 편이다. 그렇지 않아도 숫자가 적은데 이런 식으로 동족을 없애면 멸종에 가까워지기에 그러지 않을까 추측할 뿐이다. 고등생명체들이 주로 그렇다는 말도 있다. 살다 보면 싸울 수도 있다. 싸움 없는 세상은 없다. 문제는 싸울 때 토끼나 비둘기처럼 싸울 것인가, 아니면 늑대처럼 싸울 것인가 하는 것이다. 로렌츠 역시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인류가 두 진영으로 갈라져서 싸우게 될 때 “그때 우리는 토끼처럼 행동할 것인가, 아니면 늑대처럼 행동할 것인가. 인류의 운명은 이 질문의 향방으로 결정될 것이다”라고. 요즘 우리 역시 이 질문 앞에 서 있다. 서로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게 좋을까, 아니면 승부를 가린 후 ‘쿨 하게’ 상생의 길을 가는 게 나을까. 로렌츠는 “정말 궁금하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