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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하지 않는 금식(1)(마 6:16-18)
존 맥아더 목사
먼저 마태복음 6장 16-18절을 보도록 하자.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것은 분명히 외식적인 금식에 대한 시정책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유대인들은 그들의 종교적 제도 중에서도 아주 일반적인 금식을 대단히 많이 행하였다. 그러나 그 금식은 바로 잡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잡는 것을 이해하기에 앞서 우리는 금식에 대해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는 금식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함께 그 이유에 대하여 잘 알고 또한 금식에 아주 익숙한 사람들 가운데 살고 계셨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들에서는 이 금식에대하여 종교적이나 아니면 영적인 경험의 한 요소로서는 거의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단식은 아주 대중적인 것이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단식을 성경이 가르치는 금식과 혼돈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을 보기 전에 먼저 금식과 관계된 사실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음식의 취함
1) 즐거움을 위하여
나는 우리 모두가 음식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식생활의 즐거움을 허락하신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많은 맛들을 만드시고 우리의 혀를 그 무한한 맛들을 맛볼 수 있도록 만드셨다. 나는 하나님께서 음식을 먹음으로 누릴 수 있는 그 충만한 기쁨을 우리가 누릴 수 있기를 원하신다는 것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나는 하나님께서 음식에 여러 가지 맛이 있도록 의도하셨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동차처럼 모두 휘발유를 마시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항상 같은 것만 먹고도 살 수 있는 짐승과는 다르다. 유감스럽게도, 어떤 나라들에서는 오늘날 우리(미국)의 식탁에 오르는 여러 음식들을 먹어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2) 생명의 유지
창세기 1장 30절은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고 기록하고 있고 홍수 후에 하나님은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창 9:3)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채소로부터 시작해서 과일, 열매들, 고기들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즐겁게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음식으로 허락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아셨다. 그리고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서는 음식을 먹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음식에 맛의 경이를 더하셔서 인간의 삶이 더 부하고 복되게 하셨다.
음식은 하나님께서 생명 유지를 위하며 주신 좋은 선물이다. 음식물은 자양이 되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로 가득차 있다. 이것은 또한 즐거움을 위한 가치로 볼 때도 좋은 선물이다. 그리고 이것은 교제의 수단이 되기 때문에 훌륭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3) 교제
식사 시간이야말로 모든 독자적인 행동을 중단하고 함께 모여 서로 즐거워하는 때이다. 하나님께서 두 천사와 함께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을 때에 그들은 함께 식사하였다(창 18:1-8). 구약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들도 함께 모여 식사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가정은 아직도 식구들이 모여서 함께 먹을 때에 사랑과 교제와 토론과 서로 이해를 나눌 수 있는 곳이다.
오순절날에 교회가 시작된 후부터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떼었는데 우리는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그 교제를 즐거워하고 있다. 요한복음 21장 9-12절에서 예수께서는 아침 식사를 준비하시고 제자들에게 ”와서 먹으라”고 말씀하셨다(12절).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그분이 우리 마음 속에 들어와 함께 먹으며 거하시기 위하여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음식은 생명을 유지하게 하며, 즐거움을 갖게 하고, 서로 교제하게 한다. 또한 음식은 예배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4) 예배
우리 집에서는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인식하려고 노력한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 보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들의 생명을 위한 자원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기억하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4장 3-4절에 보면 ”식물은 하나님의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식물을 생명 유지와 즐거움, 교제 그리고 예배를 위한 자원으로 준비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이 놀라운 준비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즐거움을 위하여 먹는 것은 괜찮은 것이다. 당신을 신령한 사람이라고 인식시키기 위하여 평생 동안 옥수수죽만 먹을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즐거움을 위하여 식물을 준비하셨다. 물론 우리들의 건강을 해치는 음식은 피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음식으로 베풀어주신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권리가 있다.
★ 음식에 대한 양 극단
어떤 랍비들은 금식하는 것을 적대하여, 금식한 이는 하늘 나라의 심판대에서 모든 좋은 것을 먹지 않은 데 대하여 하나님께 해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너무 극단으로 흐른 랍비들이다. 또한 다른 랍비들은 아무것도 먹지 말아야 한다는 극단으로 흘렀다. 금식은 그들에게 있어 경건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두 극단을 수용하는 신학을 발전시켰다. 당신이 무엇이든지 좋은 것을 먹으면 당신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서 ”주님, 여기 제가 왔습니다. 제가 여기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서 있습니다. 저는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맛보았습니다”라고 담대하게 설 수 있다는 것이며, 반대로 모든 사람에게 금식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경건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그의 금욕으로 인하여 거룩하고 의로우며 신령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바로 예수께서 마태복음 6장 16-18절에서 말씀하신 바, 시정의 대상이 되는 극단주의자들이다.
금식에 대한 견해
식물은 선한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생활 중에는 금식을 요하는 때가 있다.
1) 세상의 일반적 견해
현대의 유행
오늘날에 단식은 아주 인기가 높다. 많은 사람들이 단식을 한다. 단식을 위한 규정도 있는데, 당신은 하루나 또는 일주일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지낼 수 있다. 단식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약도 있다. 당신은 몸의 위해를 방지하기 위해 많은 양의 물을 마셔야 할지도 모른다. 단식을 하는 사람들이 증가 일로에 있다.
★ 단식에 대한 보증서들
언젠가 금식에 대한 세상의 개념을 알아보기 위해 서점에 들렀는데, 거기에는 표지에 천사가 앉아 있는 그림이 그려진 단식에 관한 책들이 많이 있었다. 그중에 가장 잘 팔리는 책들은 「이상적인 단식법」, 「삶의 한 방법으로서의 단식」, 「단식에 관한 근본적인 방법」등이었다(The Super D-iet br Shirley Ross/Fasting As A Way of Life and Fasting /The Ultimate Diet by Alien Cott).
다음은 두번째 책에서 단식하는 자들에게 ”단식은 당신에게 이 같은 일들을 해줄 수 있다”고 보증하고 있는 내용들이다.
- 몸무게를 줄어들게 한다.
-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상쾌함을 느낄 수 있다.
- 젊어보이게 하며 젊음을 느끼게 한다.
- 돈을 절약할 수 있다.
- 육체의 기능을 쉬게 할 수 있다.
- 몸을 깨끗케 할 수 있다.
- 혈압과 콜레스테롤을 낮출 수 있다.
- 술과 담배와 마약을 줄일 수 있다.
- 긴장을 해소시킬 수 있다.
- 잠을 더 잘잘 수 있다.
- 소화가 잘 된다.
- 마약과 같은 도취감을 느낄 수 있다.
- 감각을 예민하게 한다.
- 정신적인 발전을 일깨운다.
-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얻을 수 있다.
- 배고픈 자들을 이해할 수 있다.
- 영적인 계시를 구할 수 있다.
만일 단식이 위의 모든 것을 당신에게 해줄 수 있다면 이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책은 계속해서 사람들이 단식함으로 위의 모든 것을 어떻게 얻었는가에 대한 체험담들을 싣고 있었다.
잘못되어진 미덕
- 자만심을 부추김
성경은 금식을 어떤 육신적인 이유로 권하고 있지 않다. 몸을 날씬하게 해서 아름답게 보이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날 사람들이 단식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들 때문인데, 사람들로부터의 존경과 칭찬 그리고 자신의 자만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모델들은 계속해서 영양 실조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기사를 읽어 본 적이 있다. 어떤 의학 잡지들은 몸무게를 옛날보다 7-10파운드(약 3-5kg) 더해서 이상적인 건장체로 재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될 때 더 건강해지려고 노력한다. 아름다운 육체를 갖고 싶어하는 만족을 모르는 욕망으로 인하여 식욕 감퇴라는 질병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사람들은 음식에 대한 정신적인 싫증을 가지고 있어서 음식을 입에 넣기만 해도 토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갈수록 몸이 말라 가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질병이다.
금식에 대한 성경적인 접근은 당신에게 아름다운 몸을 갖게 해주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또한 당신이 비대하다는 사실을 잊게 해주는, 자아와 연관된 문제가 아니다. 금식은 당신의 자만심을 채워 주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는 죄악된 단식인 것이다.
- 양심을 달램
성경적인 정의는 아니지만, 금식에는 대식을 줄이는 면으로 사용할 수 있는 미덕도 있다. 만일 당신이 죄악될 정도의 악한 탐식에 빠졌다면 음식을 잠시 중단하고 금식을 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 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대식하게 되기를 바래서 금식하는 자들도 있다. 그것은 영적인 금식이 아니다. 대식하게 되기를 바래서 하는 단식은 대식과 다를 바가 없다.
2) 성경적인 견해
영적인 관련성
나는 세상이 말하는 단식과 우리가 말하는 금식에 대해 구분을 지으려 하고 있다. 만일 당신이 어떤 육신적인 이유로 인하여 금식을 한다면 스스로 신령하다고 생각지 말라. 거기에는 어떤 영적인 가치가 없다. 성경에서는 금식 그 자체가 목적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성경에서의 금식에 대한 모든 유익들은 간접적인 것이다. 금식은 금식 그 자체만으로 어떤 덕이 있거나 덕을 만들지 못한다. 당신이 음식을 먹든지 안 먹든지 그것과 당신의 신령함과는 상관이 없다. 로마서 14장 17 상반절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라고 말하고 있다.
음식을 먹고 안 먹는 것이 영성 그 자체는 아니다.
죤 칼빈은 ”많은 사람들이 이것의 유용성을 과소 평가하고 그 필요성을 잘 알지 못하며, 어떤 이들은 이것을 전적으로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 거부하고 또 어떤 이들은 반대로 이것을 잘 알지 못하고 잘못 사용하여 미신적으로 쉽게 흐르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그래서 한 편은 미신적으로 사용하는 것이요 다른 한 편은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다. 금식에 대해 미신적으로 흐르는 사람들은 그것으로 인하여 신령한 열매를 거두지 못한다. 금식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영적인 덕이 있는 것이 아니다. 금식은 항상 다른 어떤 것과 연관되어 있다.
영적인 경우
우리는 육신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사람들에게 더 낫게 보이려는 신비주의적인 금식 또는 많이 먹기 위한 준비 같은 금식에는 관심이 없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저 금식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하는 금식 같은 것에는 흥미가 없다. 이 금식이 성경적이기 위해서는 마땅히 영적인 것과 연관이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아주 필수적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영적인 것과 연관된 금식만이 성경에서 명하고 있는 금식이다.
레위기 16장에 나와 있는 속죄일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총체적이고 공적이며 국가적인 금식일이었다. 그 날은 일년에 한번씩 이스라엘 전 민족의 지난 해의 죄를 위한 속죄제를 드리는 날이었다. 그들은 그 속죄일에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금식했다.
여기에서, 금식이 그들의 죄를 고백하는 깊은 애통과 연관되어 있음에 주의하라. 금식은 절대로 금식 그 자체로만 독립되어 있지 않고 꼭 큰 영적인 걱정이나 염원과 연결되어 있다. 속죄일의 경우, 금식은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로부터의용서를 구하는 금식이었다.
유대인들은 그것에 너무 지나쳐서, 그들의 탈무드에 보면 속죄일에는 사람들에게 먹는 것, 마시는 것, 목욕하는 것, 기름바르는 것, 샌들을 신는 것, 부부간의 성생활을 금하고 있다.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도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굶는 것이 어린 아이들에게는 힘든 일이지만, 그들은 그것은 규정되어 있는 것이어서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할 수 있도록 어릴 때부터 배워야만 했었다.
이 속죄일 외에 성경은 어디에서도 금식에 대하여 명하고 있지 않다. 성경은 우리에게 구제하고 기도하라고는 명하고 있으나 금식은 명하고 있지 않다. 금식은 개인적이고 비 강제적이며 자발적인 행위이다. 성경에는 금식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언급(구조)이 없고 오직 여러 가지 모습만이 있을 뿐이다.
3) 외식적인 견해
예수께서 세상에 계시던 당시에 금식은 유대 사회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한 부분이 되어 있었다. 구약은 민족적으로, 작은 그룹으로 그리고 때로는 개인적으로 행할 금식에 대한 것들로 가득차 있다. 금식은 그들 삶의 한 부분이었다.
금식에 대한 연극
예수께서 세살에 오셨을 때 금식의 무대는 벌써 그 한계를 벗어나 있었다. 진실되고 순전히 자발적이며 진심에서 우러나와서 시작했던 금식이 외식적이며 독선적이고 사람들 앞에 나타내 보이려고 하는 것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들은 금식하는 동안 자신들을 될 수 있는 대로 아주 비참하고 가련해 보이며 우울하고 슬퍼보이게 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금식하기 때문에 얼마나 신령한가를 보도록 과시했다. 그들의 근본적인 마음의 동기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것을 시정하신 것이다.
금식에 대한 전통
- 주기적인 금식
누가복음 18장 12절에서 바리새인이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라고 말한 것을 보면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어떤 규정은 아니다. 탈무드는 그들이 둘째 날과 다섯째날에 금식했다고 말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에 의하면 그들이 둘째날과 다섯째날에 금식한 것은 모세가 그 날들에 시내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은 모세가 다섯째 되는 날에 율법을 가지러 올라갔다가 둘째날에 내려왔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사건을 기억하기 위하여 그 날들에 금식한다고 했다.
듣기에는 신령한 것 같으나 만일 당신이 유대인들의 역사를 조금더 자세히 살펴보면 예루살렘에 장이 서는 날이 둘째날과 다섯째날이었던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성(城) 바깥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날에 시장을 보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안으로 모여 들었다. 그래서 이 장날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경건을 과시하기 위해 금식하는 이들에게는 아주 좋은 장소와 적합한 때였다.
- 금식의 모습
그들은 영적인 자만을 위하여 금식하였다. 그들은 머리를 온통 흐트러뜨리고 거리를 걸어다니며 다 낡아빠진 헌옷을 둘러 입고 흙먼지를 온 몸에 쓰고 다니기도 하고 창백하게 보이려고 얼굴에 하얀 칠을 하고 다니기도 하며 머리 위에 먼지를 둘러쓰고 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모습으로 장날에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신령한가를 보이기 위하여 과시하고 다녔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외식을 책망하셨다.
Ⅰ. 금식의 원리
금식에 대한 세부적 정의
금식은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않는 것이다. 금식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네스테이아」(nesteia)로서(부정 접두사) 라는 말과 ”먹다”라는 의미를 가진 esthio가 이루고 있는 합성어이다. 그래서 금식이라는 말은 ”먹지 않다, 단식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금식에는 음식을 제한하거나 부분적인 금식, 즉 음식을 완전히 안 먹는 것이 아니라 큰 잔치나 진수성찬의 음식을 피하거나 너무 기름진 음식을 먹지 않고 일반적으로 식생활에 필요한 음식만을 먹는 금식을 의미하는 면도 있다.
달리 말해서, 완전히 단식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어떤 이유로 인해서 제한된 음식 섭취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보기 드문 경우이고 기본적으로 금식은 짧은 기간 또는 장기간 완전히 단식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함
성경 말씀에 보면 이처럼 완전히 음식을 금하는 것은 아주 많이 상한 심령 또는 갈급한 마음과 관련되어 있다. 금식은 ”주님 앞에 자신을 낮추다”라는 말과(시 35:13) 거의 같다. 레위기 16장 29절은 금식을 자신의 영혼을 괴롭게 하는 것(고통)과 같은의미로 말하고 있다. 달리 말해서, 금식은 자신을 부인하는 하나의 행동인 것이다.
그러나 금식은 아무것도 없는 공백 가운데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당신은 자신에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제 나는 나 자신을 부인하겠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어떤 합당한 이유없이 먹기를 중단한다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첫째로, 당신은 단순히 음식을 먹지 않는 것에만 열중하여 금식 그 자체의 중요성을 잃어 버릴 것이며, 둘째로 당신은 스스로를 추켜 세우면서 ”나는 특별하지 않은가. 나는 점점 더 신령해져 간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성경적인 금식은 절대로 어떤 이유없이 행해지지 않았다. 당신 자신을 낮추어야 하고 부인하고 그와 같은 방법(금식)으로 자신을 괴롭게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마음에 사무치는 어떤 것으로서, 당신이 하고 싶어서가 아니고 당신이 피할 수 없어서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약에서 흔히 행하여졌던 금식이다. 적어도 30번 이상 「네스테이아」라는 말이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곡해하고 변질시켰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금식은 완전히 단식한다고 하는 뜻이며, 그것에 또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금식은 심지어 원래 사본에는 없었던 내용을 첨가해 써넣을 정도로 초기 교회 시대에도 크게 부각되었었다(마 17:21/ 막 9:29/ 행 10:30/ 고전 7:5). 나는 당신이 이것에 대하여 너무 과장하거나 과소 평가하거나 미신적인 것으로 흐르거나 또는 무관심에 빠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단식하는 금식은 분명히 성경적인 것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의미와 용도를 알아 그에 맞게사용해야 하며, 그리고 금식은 할 때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Ⅱ. 금식의 기간
사람들은 금식의 기간에 대하여 토론하며 논쟁해 왔다. 어떤 사람들은 진실로 신령한 사람은 40주야를 금식한다고 말한다. 하루 금식하는 사람은 그만큼 신령하지 못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금식의 기간에 대해서는 정하지 않고 있다. 기간은 그 사람과 당시의 형편, 상황, 필요에 달려 있다. 고린도후서 11장 27절에서 바울은 ”여러 번 굶고”라고 금식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고후 6:5 참조). 바울은 그의 삶에 있어 기간도 동일하지 않고 이유들도 다른 여러 가지 금식을 했다. 금식의 기간에 대해서는 어떤 일정한 표준이 없다.
금식의 자발적인 성격
만일 사도 바울이 진실로 가끔 금식했다고 한다면 사도 바울이 이에 대해 무언가 말했을 것이고 그것이 또한 우리들에게도 사실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당신은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금식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바울이 우리에게 쓴 그 모든 명령들과 교훈의 말씀 가운데 금식에 대한 것은 하나도 없다.
오직 공적이고 의무적인 금식은 속죄일 뿐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그 속죄일도 끝났다. 남은 금식은 오직 개인적이고, 사적이고, 자발적인 금식 뿐이었다. 금식은 어떤 원인으로 인하여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해야 할 때에는 금식하게 되는 것이다.
금식의 여러 기간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일반적으로 행해졌던 금식은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의 금식이다. 또 여러 경우에 사무엘상 31장 13절에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일 주일 금식한 경우가 있고, 다니엘 10장 3절은 3주일 금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 누가복음 18장 12절에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는 것을 보았다.
따라서, 금식의 기간은 그때의 상황에 따라 각기 달랐다. 지금까지 우리는 금식에 대한 원리, 기간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제 세번째로 우선 순위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Ⅲ. 금식에 있어서의 우선 순위
인정된 행동
마태복음 6장 16, 17절에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금식할 때에”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사신이 기도하고 구제하시는 것처럼 금식 또한 인정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금식은 하늘나라에 소망을 둔 사람들의 삶의 한 부분인 것을 인정하셨다. 성경은 금식한 많은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모세, 삼손, 사무엘, 한나, 사울, 요나단, 다윗, 엘리야, 여호사밧,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다니엘, 세례(침례) 요한, 안나, 안디옥 교회에 있었던 선지자들과 교사들, 사도 바울... 그 중에 특별히 우리 주님은 40일 밤과 낮을 금식하셨다(마 4:1-2). 이들은 금식을 한 신령한 사람들이었다. 웨슬레, 휫필드, 그리고 칼빈과 루터도 금식했으며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금식한다.
합당한 자세
공적으로 금식하는 속죄일은 끝났지만 개인적인 삶에서의 금식은 끝나지 않았음을 주님께서 알고 계셨다고 나는 생각한다. 심지어 주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후에도 사람들이 금식할 것에 대해 알고 계셨다.
1) 금식하지 않아야 할 때
마태복음 9장 14-15절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지적하셨다.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14-15절). 예수께서는 슬퍼할 수 없기 때문에 금식할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금식은 슬픔과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깊은 영적인 걱정, 또는 염원으로 인한 결과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는 금식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에 금식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슬픔으로 인한 것이 아닐 때 금식은 무의미한 것이다. 금식은 하나의 반응이지 어떤 것에로의 유인(誘引)이 아니다.
2) 금식해야 할 때
15절에서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지금 신랑을 빼앗긴 때에 살고 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시작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다시 합하게 될 것이다(계 19:7-9). 그러나, 그 때까지 우리 주님은 자신이 안 계시는 동안의 영적인 애통과 투쟁으로 인하여 금식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께서는 금식할 때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교회사를 통하여 보면 금식이 합당한 반응이었던 때가 있다는 것이다.
금식을 하는 데에는 우선 순위가 있다. 오늘날에도 금식은 우선적으로 해야 할 때와 경우가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는 그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때가 바로 금식해야 할 때와 시기이다.
Ⅳ. 금식에 대한 촉구
만일 금해야 할 경우가 있다면, 우리가 금식을 해야 할 경우는 언제인가?
애통할 때
슬픔이 금식하게 만든다. 몇 가지 예(例)를 살펴보자.
1) 성경상의 사례
요엘 1장 14절
역병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쳤을 때 그들은 금식했다.
느헤미야 1장 4절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느헤미야의 마음은 산산이 부서져내렸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시편 35편 13절
다윗은 그의 원수가 병들었을 때에 금식하였다.
사무엘하 3장 35절
아브넬이 죽었을 때 다윗은 금식했다. ”석양에 뭇 백성이 나와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니 다윗이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해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그는 ”아브넬이 죽었다. 그 잘못되고 허비된 죽음에 대하여 만일 내가 애통과 슬픔 가운데서 하루를 금식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실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재난에 대한 애통으로 인하여 금식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재난에 대하여 금식하는 것을 볼 때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다윗은 그의 친구가 죽었을 때 금식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원수가 병들었을 때도 금식하였다.
사무엘하 12장 16절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주 심한 병에 걸렸을 때에 성경은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라고 말하고 있다. 같은 부모된 한 사람으로서 나는 다윗의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만일 내 아이가 심한 질병에 걸렸다면, 그 아이의 목숨이 몹시 위태롭다면, 그리고 그 아이의 숨이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내가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아이에 대한 나의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릴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식사를 할 만한 정신이 없을 것이며 음식을 원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자기가 당한 심한 마음의 애통과 고난이 자신의 몸에까지영향을 미친다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마음이 가끔 위장에까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마음이 부서지고 심령이 상하며 오락가락하는 자녀의 생명을 위해 울며 기도하는 부모는 음식에 별로 관심이 없다. 그의 마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그의 기도에 쏟아 놓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그러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음식을 먹게 하는 때가 있다. 그들이 꼭 먹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몰두해 있고 그들이 당한 애통으로 인하여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기도로 하나님께 매어 달려 있을 때 그들은 음식에 별로 관심이 없어야 마땅하다.
사무엘상 31장 13절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하여 금식하였다.
때로 이 애통은 친구의 죽음으로 인함 같은 극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때로 그들은 원수로 인하여 애통하기도 했다(삿 20:26). 이와 같은 애통에서 그들은 그들의 마음이 너무 슬픔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인하여 완전히 식욕을 잃기까지 하였다. 금식은 애통과 슬픔 가운데 있는 영혼의 염려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2) 일반적인 경우
우리 자신이나 가족에게 그러한 슬픈 일들이 일어나면 우리들은 그에 대해 금식하며 애통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비통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금식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성경 시대의 사회는 대단히 폐쇄적이었고 세상은 아주 좁았으며 모든 것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은 너무 개방되어 있어서 다른 많은 비극들은 고사하고 하나의 비극에 대해서도 생각할 여유가 없다. 우리는 수많은 비극들을 듣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것이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만들고 무감각하게 만들어 우리의 손발을 묶어 놓고 말았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멀어져 있느냐 하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된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고난을 이해하며 자신의 전지하심으로 세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고난을 아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누구든지 다 무감각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고 두 눈에 눈물을 흘리셨으며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 눈물을 흘리며 서 계셨다(눅 19:41 / 요 11:35).
우리는 이와 같은 마음을 세상에서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너무 무감각하며 너무 둔하다. 우리는 아주 냉정하고도 계산적으로 DC-10기가 이륙하다 추락해 2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는 뉴스를 지켜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뉴스를 깊히 생각해 보기도 전에 인도에서 굶어 죽어가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이 화면에 나온다. 우리는 그와 같은 소식으로 수없이 공격을 받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 무디어지고 말았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비극에 대하여 느끼시는 그 느낌과는 동떨어진 차원에서 살고 있다.
만일 당신의 아이가 병들었다면 나는 당신이 금식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당신은 당신의 친구가 병들었을 때에 금식하는가? 당신의 원수가 병들었을 때 당신은 금식하는가? 당신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없이 지옥으로 멸망해 가는 것을 봄으로 애통하게 되어 금식하는가? 사람들은 ”나는 내 삶에 별로 비극이 없기 때문에 금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변명에 지나지 않으며 합당한 답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고려해야 할 것들에 대하여 고려해야 할 만큼 고려하고좀더 민감했다면 우리도 금식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금식은 애통으로 인한 결과이다. 어떤 면에서, 마음과 심령의 슬픔에 대하여 식욕을 잃게되어 자연스럽게 금식하게 되는 것이다.
보호를 호소할 때
성경에 보면 사람들이 큰 두려움과 위험으로 인하여 금식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었다. 그들은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보호와 구출이 하나님뿐이시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 위험과 고난 가운데서 금식하며 문자 그대로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다.
1) 역대하 20장 3-4절
모압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이 동맹하고 여호사밧과 이스라엘을 공격하였다.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이스라엘이 그들을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극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그들은 금식한채 하나님께 그들의 구원을 부르짖었다.
2) 에스더 4장 16절
사랑스런 유대인 에스더는 전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려는 하만의 계략 때문에 아하수에로 왕에게 은혜를 구하기 위하여 나아가야 했었다. 그래서 그녀는 ”수산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내가 왕의 명을 어기고 왕 앞에 나아가겠다고 말해 주시오. 나의 목숨이 위태롭지만 내가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염려하였기 때문에 금식하였다.
3) 에스라 8장 21-23절
여기에 금식에 대한 아주 아름다운 지시가 있다. 마침내 에스라가 사람들을 바벨론 포로 생활로부터 인도하여 낼 때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여행을 위하여 아주 흥미로운 시도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때에 내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21절).
왜 그들은 금식을 선포하고 스스로 겸비하였는가?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었는데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 어떻게 가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 게다가 그들의 가는 길목에는 산적과 노상 강도와 도둑들과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유목민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그들의 모든 재산을 가지고 광야를 지나가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22절에서 에스라는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고하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베푸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하였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달리 말해서, 그는 ”나는 나의 신학에 맞게 행하여야 한다. 왕에게 나는 하나님께서 의인을 보호하신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왕에게 가서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실 줄 알지만 당신이 조금 도와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신을 깎아 내리는 것이다. 왕이 나에게 동정적이지만 나는 왕을 의지할 수 없다. 나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23절에서 그는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두려움과 애통으로 인한 반응으로서 금식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죄를 자복할 때
1) 자복의 본질
레위기 23장 29-32절에 보면 대속죄일에 금식을 한 이유는 죄를 자복함 때문이었다. 자복에는 자기 비하가 따른다. 나는 우리의 삶에 있어 주님께 죄를 짓고 그것으로 인하여 마음속 깊이 괴로워하고 심히 애통해 하며 죄가 우리 마음에 끼친 영향으로 인하여 심히 불안해 함으로 먹지 못하며, 하나님에게 우리의 마음을 쏟아 놓을 때가 한두 번 쯤은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다윗은 큰 죄를 범했었다(삼하 11장). 그가 자기 죄를 자복하지 않고 있었을 때 그의 삶은 말라들어 갔다. 그는 그의 머리 끝에서부터 발가락까지 진통을 느꼈으며 병들었다. 그는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그의 죄를 자복했을 때 모든 것은 떠나고 그는 다시 온전하여졌다(시 32:1-5).
우리의 삶에도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마음이 심히 불안해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와 자복하며 깨끗케 해 주실 것을 간구하던 때가 있다. 우리들의 잘못에 대한 속죄는 이미 받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악한 것들을 버린 다음에 우리 마음에 생긴 상처를 치료해야 할 필요가 있다.
2) 자복의 사례(事例)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들의 죄에 대한 자복의 한 부분으로서 금식을 한 때가 여러 번 있었다. 하나님과의 단절된 교제를 다시 회복하기를 갈망했던 그들에겐 음식이 관심 밖의 것이었다.
다윗
그는 ”...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라고 말했다(시 35:13).
니느웨 성 사람들
그들은 요나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회개하였고, 금식하며 죄를 고백했다(욘 3:5).
다니엘
다니엘은 자기 백성들의 죄를 고백하며 금식하였다(단 9:3-19). 그는 다른 사람들의 죄로 인하여 금식할 정도로 놀라운 동정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다소 사람 사울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엎드러지고 말았다. 그는 길에서 일어나면서 주님께 돌아왔으며 그의 죄를 자복하고 삼 일 동안을 금식하였다(행 9:3-9).
이스라엘 백성들
사무엘상 7장 6절에서, 사무엘은 그의 백성에게로 가서 그들이 바알을 섬기는 어그러진 길로 간 것을 지적하며 그들에게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때에 그들은 금식하였다.
아합
이 악한 왕이 우상을 따름으로써 행한 가증스러운 일로 인하여 종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게 되었었다.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한지라”(왕상 21:27). 그는 가증한 태도를 버리고 권력 휘두르기를 멈추었다. 그의 통회함으로 인해 육신의 음식의 필요를 모두 상실할 정도로 산산이 깨어진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가 악하고 비열한 삶을 산 사람이었지만 진실한 회개로 인하여 은혜로써 그를 대접하셨다(왕상 21:29).
에스라
에스라 10장 6절은 ”이에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서 일어나 엘리아십의 아들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가니라 저가 들어가서 사로잡혔던 자의 죄를 근심하여 떡도 먹지 아니하며 물도 마시지 아니하더니”라고 말한다. 범죄는 금식하게 되는 요인이다.
근심이 깊고 사람의 심령에 깊은 염원이 있을 때, 금식은 억지로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교제를 회복할 필요성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이다. 내 삶에 있어서도, 너무 어떤 것에 몰두함으로써 내게 음식이 전혀 의미없게 느껴질 때가 있다.
금식은 할 때가 있다. 나는 너무 지나쳐서 더 신령해지라고 금식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께 마음 속에 있는 슬픔과 생활상의 죄와 다른 사람들의 죄,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하나님의 근원의 필요성을 느끼는 인정많은 마음을 주실 것에 대해 당신이 간구하기를 원한다.
애통함과 보호의 필요성, 그리고 자복함이 당신을 이 세상 것들로부터 떠나게 해야 한다. 심지어 먹는 것과 같은 규칙적인 것도 멀리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좋은 것들을 우리로 즐기게 하기 위하여 주셨다. 그러므로 그것을 즐기라.
하지만 당신이 영적인 씨름 상태에 있고 하나님에 대한 것에 몰두해 있을 때, 그 영적인 것과 하나님에 대한 것에 계속 집중하기 위하여 음식을 금하는 것은 합당한 것이다. 금식이 진정한 면에서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이것에 대하여 더 깨우쳐 주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