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부-종교 암흑시대에 일어난 순교자들
프랑스 왈도파 사람들이 당한 초기의 박해
교황은 왈도파(왈덴스인)들의 신앙이 계속 퍼져나가는 것을 보자, 로마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증오스러운 종파를 영원히 지상에서 종식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는 왈도파를 그들의 골짜기에서 끌어내려고 크레모나의 대집사 알베르트 카피타나이스를 프랑스로 보냈고 대규모의 군대를 일으키는데 성공하였다. 군인들이 왈도파 사람들을 잡으려고 알프스의 어느 골짜기에 도착했을 때 집들은 비어 있었고 사람들을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 그곳 사람들이 벌써 군인들이 오는 것을 알고 동굴이나 바위에 숨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온갖 수단을 다하여 그들을 찾아내고 추적하여 많은 사람들을 잡아 낭떠러지에서 거꾸로 떨어뜨려 죽게 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비밀 통로를 이용하여 동굴에 피해 있었다. 군인들이 그들을 붙잡을 수가 없게 되자, 동굴을 찾아내어 어귀에 나무를 쌓아 놓고 큰 불을 질렀다. 동굴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연기와 열로 질식되어 죽었다. 불이 다 탄 후 동굴을 뒤지자 1,000여명이나 되는 시체가 발견되었고 그 가운데 대부분은 여자들과 어린이들이었다. 이 공격에서 죽은 사람들은 3,000명에 달했다.
그 외에도 알프스 산의 북쪽인 이태리 북방으로 가서 산 사람들, 알프스의 또 다른 산맥에 사는 사람들도 이와 유사한 핍박들과 죽음을 당하였다. 긴 세월 동안 많은 어린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 아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주 골짜기를 습격하는 십자군 (무서운 죄를 지은 죄수들로 구성된 군대로서, 만일 그들이 이단을 믿는 크리스챤들을 많이 죽이면 용서해 준다는 조건으로 만들어진 군대) 에 의해 무섭고도 매우 잔인한 죽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불타는 신앙은 칼로도 화형으로도 창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알비젠스파 사람들
알비젠스파 사람들은 남프랑스 알비라고 불리는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역사상에 언급된 것은 주후 약 1100년부터이다. 100년 후에는 그 수가 대단히 많아졌는데, 그들도 왈도파와 같이 예배형태를 로마교회와 달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로마의 성직자들이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서 있다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으므로 그들의 신앙은 후대의 프로테스탄트의 의견과 같은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천주교 교황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는 면죄부를 돈을 받고 팔고 있는 실정이었다. 교황 이노쎈트 3세는 알비젠스파 사람들을 완전히 격파시키기에 충분한 대규모의 병력을 일으키기 위하여 전 유럽에 통신문을 내었다. 왜냐하면 몇 세력있는 귀족들도 알비젠스를 지원하였는데, 그 중에는 세력있는 백작들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알비젠스 사람들의 순교
알비젠스파 사람들 중에 특별히 툴루스의 백작 레이몽 같은 사람은 브지에르 시와 신실한 알비젠스파들을 보호하려고 교황의 그 많은 군대와 끝까지 저지하고 싸우다가 힘의 부족으로 지게 되어 브지에르 시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일이 역사에 나온다. 교황의 군대들은 그들에게 로마 교회의 예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자비가 섞이지 않은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말했으나 사람들이 이에 굴하지 않자 군인들은 그 성과 마을들을 맹공격 하였고, 그 마을은 피를 물처럼 쏟고 누워 있는 사람들의 신음소리와 자기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자기들의 눈 앞에서 칼로 난도질 받는 것을 보고 있던 어머니들의 울부짖는 소리와 큰 시가지를 휩쓸고 있는 불타는 소리로 가득 찼다. 로마의 군인들이 놓은 불길은 불쌍한 주민들을 거리로 몰아냈고 자기 집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불을 피해 밖으로 나오다 모두 칼에 맞아죽임을 당하여 거리는 피로 물들여졌다. 잔인한 교황의 대사는 이 무서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그 대량학살의 작업을 즐기었고 그 일을 하고 있는 군대를 격려하기까지 하였다. 군인들이 살해를 다했을 때, 30,000명 이상이나 되는 송장들이 아름다웠던 브지에르 시의 폐허에 누워 있었다. 그렇게 많은 수의 참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들의 신앙을 위해 장렬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왈도파가 당한 마지막 박해
왈도파 사람들 중 일부는 이태리 북부로 갔다. 거기서도 그들은 로마 교황이 보낸 군대에 의해 많이 죽었으나, 산으로 도망하여 가서 산 사람들 중, 후에 그들의 후예들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그들은 땅을 갈고 파는 근면한 사람들이어서 번창하였고 얼마간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예의 주시를 하던 로마 투린의 대감독은 결국 그들의 피난처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군대들을 보내어 많은 난폭한 짓을 했고 수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그러나 그들의 수가 많아 때때로 파견된 군대가 그들의 저항을 받아 포기하고 돌아가는 일도 있었다. 수백 년을 그칠 줄 모르는 박해가 계속되었지만 그들의 신앙과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1650년 로마 의회는 희년을 맞아 “신앙을 전파하고 이단들을 파괴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법을 통과시키는 중, 왈도파 사람들을 상하고 괴롭게 하려는 법과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유난히 심하게 추운 겨울에 왈도파 모든 주민과 이미 공개된 지역사람들은 삼일 안에 그들이 로마교회로 개종하지 않으려면 그들의 집을 떠나 산으로 은퇴하라는 것이었다. 놀라운 이야기지만,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주저하지 않고 그 조건들을 수락하였다. 그들은 “우리는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 한분 만을 믿는다. 그리고 성경을 따라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법대로 구원을 얻는다. 우리는 인간이 만든 어떤 교리와도 타협할 수 없으며, 어떠한 세력도 우리를 우리의 신앙에서 떠나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며 그들의 거처와 집들을 포기하였고, 눈속에서 강을 건너며 어렵게 급류를 통과하여 동굴이나 불쑥불쑥 내민 바위 아래 안식처를 마련하였다. 15,000명의 군대가 즉시 그 골짜기로 파견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거기를 떠나려는 것을 허락받지 못하고 야만스럽게 살해되었다. 남은 사람들은 그들의 고향 땅을 강제로 빼앗기게 되었고 피드몬트의 다른 도성에 있는 감옥에 감금되었다.
12,000이나 넘는 남녀 성인이 어두컴컴한 토굴에 갇혀서 가장 잔인한 취급과 고문을 받았다. 그들은 아주 형편없는 빵을 먹었으며 썩은 물을 마셨다. 그들의 유일한 침대는 맨 돌이나 썩은 짚이었다. 그들은 일부러 사람들을 매우 빽빽하게 차게 했기 대문에 열병과 다른 질병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을 죽게 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교회로 개종하려는 의사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신앙을 계속해서 고수하였다. 그러한 취급을 받는 가운데 몇 개월 안에 그들의 수가 12,000명에서 3,000명으로 감소되었다. 그러나 동굴 안을 늘 채웠던 찬송소리는 그들의 기도와 함께 하늘로 올라갔다.
핍박하는 일에도 막대한 경비와 인원이 요구되자 싫증이 난 박해자들은 왈도파의 나머지 남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정배를 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에 강제로 행군하여 가게 되었고 또 매우 빨리 재촉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길에서 죽었다. 그리고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스위스에 가서 정착하게 되었다.
비록 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때문에 목숨을 잃고 죽었지만, 그러나 결국 그들의 이러한 고난과 시련, 또 죽음을 불사한 신앙열, 수없이 흘려진 귀한 순교의 피 때문에 후대에 저 위대한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귀중한 성경을 우리가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또한 그 성경에서 비쳐 나오는 진리를 믿고 깨달아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정말 고맙고 놀라운 순교자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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