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rles H. Spurgeon 著 "Great Verses from the Psalms"에서
"주는 나의 목자시니"(시 23:1)
무한하신 주께서 자기 백성에 대하여 "목자"의 직무와 신분을 취하셨다는 것은
어떠한 겸손인지요!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위대한 사랑과 보살핌을 보여줄 목자로 비유하셨다는 사실은
깊이 감사드려야 할 찬양의 주제임에 틀림없습니다.
다윗은 이전에 양을 지키는 자였으며,
양들의 필요와 목자의 많은 보살핌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연약하며 스스로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어리석은 양으로 비유하고,
하나님을 공급자요, 보호자요, 인도자요,
실로 자신의 모든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본성이 새롭게 되지 않으면 누구도 자신을 주님의 양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을
양이 아닌 늑대와 염소로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양은 야생동물이 아니라 재산입니다.
양을 소유한 사람은 양을 중히 여기며, 종종 매우 비싼 값으로 매매하곤 합니다.
다윗이 그러했듯이,
우리도 자신들이 주님께 속한 양임을 분명히 아는 것이 좋습니다.
이 구절에는 고상한 확신의 어조(語調)가 있습니다.
다윗은 '만약'이나 '그러나' 또는 '소망하건대'라고 말하지 않고,
"주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를 확신을 가지고
신뢰하는 영을 일깨워야 합니다.
이 구절 전체에서 가장 달콤한 단음절어는 "나의(MY)"입니다.
다윗은
"주는 온 세상의 목자시니, 대중(大衆)을 자기 양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라고 말하지 않고, "주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말합니다.
그분께서 다른 어떤 이에게는 목자가 아닐지라도 내게는 목자이십니다.
그분은 나를 돌보시며, 나를 감독하시며, 나를 보호하십니다.
이 문장은 현재형입니다.
믿는 자는 그 신분이 어떠하든지, 지금 목자되신 여호와의 돌보심 아래 있습니다.
"그분께서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고"(시 23:2)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묵상적인 면과 활동적인 면의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를 풍성히 공급해 주고 계십니다.
먼저 묵상적인 면을 보겠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이 푸른 풀밭은 무엇인가요?
바로 항상 신선하고, 항상 부요하며,
결코 고갈되지 않는 진리의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양떼가 누울 정도로 풀이 충분히 자란 풀밭에는
맨 땅을 물어뜯는 일 따위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부드러운 풀이 양들에게 천연의 양식이듯이,
복음의 교리들은 달콤하고 충만하며, 영혼에 적합한 양식입니다.
믿음으로 약속들 안에 있는 쉼을 찾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마치 풀밭 한가운데 누운 양떼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꼴과 평화, 안식과 회복, 평온과 만족을 동시에 찾게 됩니다.
"그분께서 나를 누이시며"라는 말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은혜롭게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진리의 보배로움을 깨닫게 하고, 먹이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약속들을 소유하는 권능을 주신 하나님께
어떠한 감사를 드려야만 할지요!
활기찬 그리스도인의 삶의 두 번째 부분은 은혜로운 활동에 있습니다.
우리는 묵상할 뿐 아니라 활동도 합니다.
우리는 항상 누워서 먹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함을 향하여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분께서 나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잔잔한 물가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복되신 영의 감화와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성령께서는 깨끗케 하시고, 소생시키시며, 비옥하게 하며,
소중히 기르는 물(복수형)처럼, 다양한 역사로 우리를 돌보십니다.
'잔잔한' 물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평화를 사랑하시며,
그분의 역사에는 요란한 허식(虛飾)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독수리가 아닌 비둘기이며, 태풍이 아닌 이슬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러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우리 스스로는 "잔잔한 물가"로 갈 수 없으며, 그분의 인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도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참으로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위로하시나이다."(시 23:4)
"믿는 이가 죽음이 가까울 때, 빨리 걷지 못하지만
여전히 차분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처럼
비록 내가 사망의 그림자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그러합니다.
"다닐지라도"라는 말은
그 길을 알고, 그 목적지를 알며, 그 행로를 따르기를 작정하고,
안전함을 느끼는 영혼이 꾸준하게 나아가는 것을 가리키며,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하며 침착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골짜기 '안을' 헤매는 것이 아니라
골짜기를 '통과하여' 가는 것임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죽음은 집이 아니라 현관이며, 목적지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죽음은 '골짜기'로도 불립니다.
산 위로는 폭풍우가 몰아치지만 골짜기는 고요합니다.
그것은 '사망의 골짜기가 아니라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입니다.
그림자가 있으면 반드시 어딘가에 빛이 있다고 누군가 말했듯이,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에는 반드시 빛이 있습니다.
누구도 그림자를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림자는 단 한 순간도 사람의 행로를 멈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개의 그림자는 물 수 없습니다.
칼의 그림자는 죽일 수 없습니다.
사망의 그림자는 우리를 멸망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맙시다.
나는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해를 입히는 자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마지막 원수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그를 정복당한 적으로, 멸망 받을 원수로 간주할 것입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기쁨입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으로,
나는 주님을 소유한 가운데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께서 양떼를 다스리고 지배하는 도구인,
통치권과 은혜로운 돌봄을 상징하는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위로합니다.
나는 완전한 위로와 영원한 안전을 갖습니다.
나는 주께서 변함없이 다스리고 계심을 믿습니다.
변함없이 이새의 뿌리가 내 혼의 절대적인 구조자로 나를 다스리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