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2장 제물론(齊物論) 12절
[본문]
이루어짐과 무너짐이 있는 보기란 옛날 소문(昭文)이 금(琴)을 타던 경우이다. 이루어짐과 무너짐이 없는 보기란 옛날 소문(昭文)이 금을 타지 않고 있던 경우이다. 소문은 금을 탔었고, 사광(師曠)은 지팡이를 짚고 음악을 들었으며, 혜자(惠子)는 오동나무 안석에 기대어 앉아 담론을 하였다. 이들 세 사람의 지혜는 거의 모두가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 그런 행동이 만년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이어졌던 것이다.
다만 그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이 남들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을 남들에게 밝히려 들었기 때문에 결국은 견백론(堅白論)의 어리석음과 같은 결말이 지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소문의 아들도 또 소문이 남긴 것을 계승하는 데 그치고 평생 이루어 놓은 것이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을 이루어 놓은 것이 있다고 말할 수가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라도 무엇이든 이루어 놓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이루어 놓은 것이 있다고 말할 수가 없는가? 그렇다면 사물이나 우리에게는 이루어 놓은 것이 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어지럽히는 빛을 성인들은 없애려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자기 본위의 방법을 쓰지 않고 영원하고 평범한 것에 자기를 맡겼던 것이다. 이것을 두고서 ‘밝음’이라 말하는 것이다.
[해설]
거문고의 대가인 소문이 거문고를 타고, 음율의 대가인 사광이 그 음을 듣고, 언설의 대가인 혜자가 담론을 하였다. 이들이 모두 지혜가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자신들의 실력이 남들과 다르다는(차별) 점을 굳이 드러내려고 했기 때문에, 아낌(愛)이 이루어지고 도(道)가 무너진 단계를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소문의 자식도 아버지의 단계를 넘지 못했고, 혜자도 견백론의 어리석음을 깨치지 못했다. 성인(聖人)은 이러한 차별을 밝히는 불을 꺼려고 하고, 늘 같음을 유지하는 용(庸)에 자신을 맡기는 밝음을 유지하고 있다.
노자 『도덕경』 16장
[본문]
텅빔의 극에 이르러 고요함의 돈독함이 지켜지는 곳에서 만물이 아울러 생겨난다. 나는 이렇게 생겨난 만물이 다시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감을 본다. 무릇 만물은 아무리 무성하여도 제각기 자신이 태어난 근원으로 되돌아가는데, 그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곳을 고요함이라고 한다. 이것을 일러 되돌아갈 운명(復命)이라 한다.
되돌아갈 운명을 일러 늘 그러함(常)이라 하고,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을 일러 현명(明)하다고 한다. 늘 그러함을 모르면 미망에 빠져 흉하게 된다. 늘 그러함을 알면 음과 양 모두를 받아들이게 되고, 음과 양 모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공공의 입장에 서는 것과 같고, 공공의 입장에 선다는 것은 왕의 마음과 같고, 왕의 마음은 하늘의 기운과 같고, 하늘의 기운은 도와 같고, 도와 같으면 오래간다. 그래서 죽음이 닥쳐도 위태하게 여기지 않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는다.
[해설]
텅빈 무(無)에서 만물이 아울러 생겨나고, 이들은 다시 무로 돌아간다. 만물이 이렇게 되돌아갈 운명인 복명(復命)을 늘 그러함인 상(常)이라 하고, 이러한 상(常)을 일러 밝음의 상태인 명(明)이라고 한다. 밝음의 상태에서는 이분법으로 갈라진 전체를 하나의 같음으로 보게 된다. 그러면 삶과 죽음도 같은 것으로 보기 때문에 편안한 죽음을 맞게 된다.
노자 『도덕경』 22장
[본문]
굽은 못생긴 나무는 쓸모가 없어 잘 베어지지 않기 때문에 온전히 살아간다. 그런데 굽어야 펼 수 있고, 우묵해야 채워지고, 낡아야 새로워지고, 적어야 얻어지고, 많아야 헷갈려 잃게 된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상반되는 것까지 껴안아서 하나로 보고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스스로 임할 수 있는 관점을 세상살이의 표준으로 삼는다. 그래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 밝게 드러나고, 자신을 옳다고 여기지 않아 자신의 옳음이 빛나게 되며, 자신의 공적이라 여기지 않아 공이 있게 되고, 자신을 자랑하지 않아 조직의 장이 된다.
성인은 오직 다투지 않는 까닭에 세상이 그와 다투지 않는 것이다. 굽은 못생긴 나무는 쓸모가 없어 잘 베어지지 않기 때문에 온전히 살아간다는 옛말이 어찌 헛된 빈말이겠는가? 상반된 개념을 둘로 보지 않고 진실로 그 전체를 보아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임할 수 있으면 온전한 자연으로 돌아간다.
[해설]
‘못생긴 나무가 오래 산다’는 엣말을 빌어, 상반되는 것들을 하나의 같은 것으로 보는 관점의 중요성이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을 생활철학에 적용하면,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을수록 오히려 성공하게 된다는 점이 성립된다. 핵심은 상반된 개념을 둘로 보지 않고 전체롤 하나로 보면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임할 수 있어서 차별없는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노자 『도덕경』 24장
발돋움하기 위해 발꿈치를 들고 있는 자는 오래 서 있을 수 없고, 넓은 폭으로 가랑이를 벌려서 걷는 자는 오래 길을 갈 수 없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스스로를 현명하다고 하는(自見) 자는 밝지 못하고,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自是) 자는 인정받지 못하고, 자신이 공을 세웠다고 말하는(自伐) 자는 공로가 없고, 스스로를 자랑하는(自矜) 자는 조직의 장으로서 오래가지 못한다.
이것들(自見, 自是, 自伐, 自矜)은 도의 입장에서 보면 먹다 남은 밥이나 쓸데없는 군더더기 행동과 같다. 만물은 늘 그것들을 싫어한다. 그러므로 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해설]
이 장에서 노자는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모든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발꿈치를 들고는 오래 있을 수 없고, 넓은 폭으로 걷는 자는 오래 걸을 수 없음을 예로 들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돋보이고자 하는 행동을 먹다 남은 밥이나 쓸데없는 군더더기 행동과 같다고 결론짓는다.
⋇. 『도덕경』 의 16장, 22장, 24장 이외에도 ‘밝음(明)’과 관련된 여러 장(章)이 있음
『도덕경』 27장 : 밝음을 이음(襲明)
『도덕경』 33장 : 자기를 아는 자는 밝음(自知者明)
『도덕경』 36장 : 숨겨진 밝음(微明)
『도덕경』 41장 :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음(明道若昧)
『도덕경』 52장 : 작은 기미를 보면 밝음(見小曰明)
『도덕경』 55장 : 지속을 알면 밝음(知常曰明)
〈이어지는 강의 예고〉
▪575회(2024.04.16) : 장자 해설(20회), 이태호(통청원장/철학박사/『노자가 묻는다』 저자 ▪576회(2024.04.23) :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21회), 이태호(통청원장/철학박사) ▪577회(2024.04.30) :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22회), 이태호(통청원장/철학박사) ▪578회(2024.05.07) : 장자 해설(21회), 이태호(통청원장/철학박사/『노자가 묻는다』 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