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둥지의 작은 어미 새
김 영 애
싸한 바람이 어깨를 스치면 작은 잎새들이 바람결에 하나 둘 떨어져 흩어진다. 태어난 생명체는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애잔한 숙명을 굳이 헤아리지 않아도 맵짠 바람과 함께 왠지 알 수 없는 슬픔이 스며든다. 이번 가을 나는 하나뿐인 아들을 대학으로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했다. 12학년의 바쁘고 숨 가쁜 대학 입학 준비가 끝나면 화려한 연극 끝에 사라지는 관객같이 아들은 허전하게 떠나가리라.
어느 날 나는 아들에게 제의했다. 입학할 대학을 가장 효과적으로 결정하는 방법은 남편과 나와 아들이 원하는 대학을 둘씩 정해 신청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미국식대로라면 법적으로 성인인 아들의 자유의사가 대부분을 결정하고 부모는 아들의 선택을 존중하며 그가 필요하거나 원하는 것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날 발견한 것은 아들이 원하는 대학은 거의 추운 동부나 먼 중부이고 내가 원하는 대학은 집 근처인 LA나 아주 가까운 캘리포니아 인근이었다. 아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동부의 두 학교, 따뜻한 날씨를 이유로 캘리포니아에 두 학교, 아들과 나의 중간 지점이라 하여 중부의 두 학교에 입학원서 넣는 것을 제안했다. 아들은 그날따라 어미의 말을 잘 들어 입학원서를 그렇게 제출했다. 서서히 입학 결과를 발표할 날이 다가오자 편지함을 열 때마다 나는 아들이 서부의 학교에 불합격됐을까 봐 걱정, 아들은 동부의 학교가 떨어졌을까 긴장하여 둘은 우체부 차가 지날 시간이면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런데 학교 성적을 그런대로 꾸려왔던 아들 덕인지 원서를 넣은 웬만한 곳에서는 합격 통지를 보내왔다.
마지막 통지서를 받은 날, 아들은 컴퓨터 전쟁게임에 몰입한 채 대학 문제는 남편이 저녁에 오면 결정하겠다고 했다. 아들의 컴퓨터 게임 소리는 전쟁을 방불케 해 정원의 야생 다람쥐까지 왔던 길을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게 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남편이 돌아왔다. 나는 남편 힘을 배경으로 아들에게 제법 논리적으로 캘리포니아의 기후부터 시작해 장학금을 받는 경제적인 이점까지 또박또박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LA의 집 근처가 최고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아들의 반응은 시큰둥했고 시간이 갈수록 아들 옆의 나는 점점 작고 초라해졌다.
드디어 나의 목멘 소리는 집에서 멀어지면 엄마 아빠가 자주 찾아가 볼 수 없어 아들을 주변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싶다는 간절한 부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러자 아들은 나의 존재와 사랑이 무척이나 거추장스러운 듯 단호히 잘라 말했다. 바로 자신의 옆에 내가 언제나 머무르기를 원하기에 멀리 가고 싶은 것이라는 것이다. 어느덧 나의 슬픈 영혼은 목이 메는 섭섭함에서 강한 배신감으로 파르르 떨며 한 동안 말을 잃었다. 순간, 스물여덟 해 전 한국을 떠나올 때의 나를 기억해 냈다.
중요한 것을 칠칠맞게 잘 흘려 자주 잃어버리는 나를 위해 어머니는 영사관의 복잡한 서류며 여러 가지를 꼼꼼히 챙겨주었다. 그러나 막상 떠날 즈음이 되자 어머니는 헤어짐의 아픔 때문인지 끼니도 거르고 잠도 못 이루는 듯했다. 마지막 떠나는 날, 슬픔같이 커진 비행기의 요란한 소리 속에 어머니는 목이 메어 잘 가라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별의 슬픔에 눈물 흘리는 지금의 나 같았던 어머니. 철부지였던 나는 탄력을 잃고 주름진 마음이기에 그렇게 눈물이 쉽게 흐른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세계를 향하던 푸른 환상과 무지갯빛 미래가,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보이지 않게 했던 것이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아들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고국을 떠나 내게는 상당한 출혈을 일으킬 만큼 비쌌던 그때의 전화비로 집에 전화라도 할 양이면, 어머니는 무엇을 먹고사느냐고 묻곤 하셨다. 그때마다 철없는 나는 이곳에는 크고 탐스러운 빵도 많고 윤기 도는 흰 쌀도 한국 타운에 많은데 어머니는 매번 쓸데없이 똑같은 질문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 후 정식 간호원 시험 준비를 한답시고 일을 전혀 안 해 돈이 바닥나고 밥을 지을 한 톨의 쌀알조차 포대에서 찾을 수 없을 때 나는 왜 어머니가 무얼 먹고 사느냐며 묻던 화두를 깨달을 수 있었다. 쉬지 않고 흔드는 허밍버드 새의 날개같이, 부산하지만 대책이 없는 내가 밥이라도 굶을까 봐 걱정을 한 것이다.
아, 28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의 아들. 세월은 정처 없이 도는 바람 속의 수레바퀴던가. 두 딸 뒤에 낳은 아들이 케빈 코스너를 닮았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큰소리로 자랑하던 일이며, 탐스러운 고깔모자의 아들이 앙증맞은 손으로 돌상에서 책을 집자 모두가 행복했던 순간들이 아른거린다. 유치원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빨간 옷의 선생님이 북극에서 온 산타인 줄 알고 들었던 컵을 놓치던 여린 아들. 선물로 받은 고스트 버스트 장난감을 등에 멘 채 심한 독감에 탈진되어 쓰러졌던 아들, 작년 가을 멋진 양복을 사 입히며 장가들 나이가 되었다고 남편과 행복해 했던 순간들이 영화 필름들처럼 빠르게 스쳐갔다. 그 시간들이 어제 같았는데 어느새 세월이 흘러서 혁명을 일으켜 독립선언을 할 나이가 되었단 말인가.
아들이 떠나는 날, 하얀 종이 위에 쓴 작은 편지를 그의 옷에 넣어 주리라.
세월의 연륜 속에서 어미를 성장시켜 주고 삶에 축복을 준 아들아,
멀리 아주 높은 하늘까지 나의 사랑만큼이나 크게 올라라.
독수리 같은 강인함과 대지를 흔드는 지구력으로 세상이라는 하늘을 힘차게 비상하여라.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해 지는 어느 저녁 문득 옛 둥지가 그리워질 때면 낡고 빛바랜 어미 둥지가 언제나 기다리고 있으니 언제든지 찾아 주렴. 지친 깃을 살포시 접고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는, 낡았지만 따뜻한 어미 둥지는 항상 열려 있단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나의 아들에게
아들이 떠나는 날 아마도 나는 자랑스러운 눈물로 그를 배웅할 것이다.
* 위의 수필은 이 세상에 자식을 둔 부모라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공감대가 큰 작품이라는 판단에서 추천작으로 올립니다.(곽흥렬)
첫댓글 몇해전 아들을 미국에 보내면서 비슷한 갈등을 겪었기에 읽는동안 가슴 한켠으로 싸아하니 지나가던 그때의 바람소리를 들었습니다. 아직도 겨울 잔설처럼 남아있는 감성과 바람소리를 이제는 눈으로 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로 가슴이 뛰게 합니다.
눈으로 읽는 것은 이리도 쉬운데 마음은 어찌 이리도 어려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