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인생을 바꿉니다
고전1:27-28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축복의 새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아멘
문화, culture를 정의하는 멋진 말들이 많지만 저는 “너무 익숙하고 편해져서, 나도 모르게 표현되는 삶의 모습이다.”라고 표현합니다. 음식도 문화입니다. 아무리 비싼 스테이크를 줘도 한두끼뿐이고, 흰쌀밥에 김치, 찌개가 최고입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신앙이 신앙으로만 머물 것이 아니라, 문화가 되어 저절로 신앙적 삶이 되기를 바라는데, 아직 한국사회는 기독교 문화가 자리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팔자타령입니다. 팔자란 말을 하지 않지만 팔자타령적 모습이 있습니다.
1. 희망을 상실했다면 팔자타령에 빠진 것
2. 자신의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면
3. 말에 “그러나”가 많은 사람은 팔자타령에 빠진 것입니다. 희망도 없고 자신의 가치를 모르면, 늘 그러나, 그러나 타령입니다.
4 누구나 실패할 수 있지만, 팔자타령에 빠진 사람은 재도전하지 못합니다.
5. 미래를 궁금해 합니다. 점치는데 관심
6. 기도하지 않습니다. 희망이 없기에
팔자타령은 “그냥 살아라.”라는 말입니다. 그럼 그냥 살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새로운 인생을 소망하실 것입니까?
바울의 편지를 받았던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에 대한 설명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이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이 아니하도다(1:26)
즉 학벌 좋은 사람도 없고, 능력있는있는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약자들이요, 마이너리티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약함때문에 선택받았고, 약함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다 합니다. 선포하며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믿음 안에서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순간,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를 위하여
첫째.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10)
팔자타령에 빠지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야베스야는 팔자타령에 빠질만한 조건은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성장했습니다. 출생 때에 난산으로 인해 장애가 있었습니다.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결코 팔자타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만을 믿고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그는 자신이 소유한 삶의 악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한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복 받기를 원했고, 그냥 복이 아니라 복에 복을 더하여 달라고 했습니다.
이같은 믿음과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지경을 넓혀 주셨고, 당대의 부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율법학자가 되어 뛰어난 명성을 떨치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본문에 대하여 사람들이 축복의 결과에만 관심 같은 경향이 있는데, 보다 중요한 것은믿음으로 기도하는 야베스의 태도입니다.
남유다는 581년에 바벨론의 공격으로 처절한 멸망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힌 채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성전과 성벽이 철저하게 무너졌습니다. 희망없는 포로생활을 하다가, 겨우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왔지만 너덜너덜해지고 낙망에 빠져있던 유다 백성들에게 야베스의 기도는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상처나고, 고달프고, 힘들고, 보잘 것 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같은 메시지가 벤츄라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마음속에 새겨지기를 원합니다. 믿음은 희망 있는 자로 변화시킵니다. 희망은 기도가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새로운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3:14)
초대교회에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끔찍한 로마의 박해가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을 상징하는 표식 중에 물고기가 있습니다. 희랍어로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구주이십니다”의 첫글자를 모으면 익투스가 됩니다. 익투스가 물고기라는 뜻입니다. 땅에 물고기를 그리면 기독교인이라는 암호를 주고받는 것입니다. 요즘은 차에 붙이는 장식품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고난의 상징입니다.
그때에 바울은 디모데가 배우고, 지켜온 신앙의 가르침을 지식이 아닌 확신에 거하라는 당부였습니다.
신앙생활은 지식이 아닙니다. 많이 않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안다고 인생이 바뀌지 않습니다. 확신에 거함으로 결정의 순간마다 신앙이 그리고 말씀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말씀의 확신 속에 거하기를 원합니다
룻이라는 여인이 지닌 삶의 자리는 극도의 고통스러운 자리였습니다. 남편을 잃었습니다. 과부가 된 가난한 시어머니가 있습니다. 친정이 있는 고향을 떠나 남의 나라로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를 하나님 안에서 사랑했습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자리에 충성했더니,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인생을 귀하게 쓰셔서, 이방여인으로 다윗의 조상, 더 나아가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오늘은 아무것도 없을 수 있습니다. 내일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치고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배운 말씀과 체험 속에서 확신 속에 거해야 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인생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셋째, 인내입니다.
인내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냥 참는 것은 포기입니다. 그러나 성서적 인내는 희망을 소유한 인내입니다. 희망이 있기 때문에 참고 견디는 것이며 가만있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불출되는 용암의 뜨거운 에너지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에디오피아의 내시 간다게와 빌립 집사님이 만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때 간다게가 이사야 성경을 읽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지금 먼 길을 여행 중입니다. 피곤하고 지친 여정 길에 그는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우연히 성경을 펼쳤는데 빌립을 만난 것이 아니라, 날마다 성경을 가까이 했고, 말씀의 깨달음을 사모하며 살던 가운데, 빌립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을 만나 구원의 축복을 누린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인간은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한국 문화의 특징 중의 하나가 대박문화 아닙니까? 그래서 한방에 부자되고, 인생역전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 결과가 교회와 신앙에도 침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흥회 한번에, 성령체험 한번에, 변화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사용하시는 방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과정도 중요시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약속하셨지만,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무려 25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히6:15에 이르기를 “그가 오래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하였던 것입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인내를 요구하고, 인내는 믿음을 완성케 하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믿음으로 인생을 바꾸는 벤츄라교회의 모든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